소설리스트

괴수처럼-178화 (178/287)

< [43화-2] 옆집에서 재난이…. >

(영상을 보내게! 당장!!)

(네? 네! 즉시 전송하겠습니다!)

모니터에 칼을 든 석상이 움직이고 있었다.

석상의 외모는 전라의 인간 여성 형태를 하고 있을 뿐, 계란형 얼굴과 굴곡진 몸매만 봐서는 어디 출신을 본뜬 건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당연히 일본인 석상….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총리는 양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딱 봐도 국적 불명이다.

“흉흉하군.”

천왕이 한마디로 일축했다.

대리석처럼 밝은 회색에 이목구비도 생명체하고 전혀 달랐지만, 움직임은 나긋나긋한 여인의 몸짓처럼 유연하고 날렵했다.

그 검술 실력은?

유적탐사의 위험을 무릅쓰고 참가한 프로사냥꾼을 일격에 베어버릴 수준! 일체의 저항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건 괴수의 [예지]를 쓰고 있다는 증거.

게다가 공격을 막아내려 해도 뭐든지 연두부처럼 베어지니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사냥꾼을 뒤로 물리고 수호자를 투입해라!)

(석상은….)

(무기의 파수꾼 같은 녀석이겠지. 전설에 많이 나오는 패턴 아닌가? 파수꾼 제거를 목적으로 무차별 공격을 가한다!)

(알겠습니다.)

주변 경계를 맡고 있던 일본의 수호자가 총공격에 들어갔다.

그때였다.

평범한 ‘요도’가 길게 늘어나는 것 아닌가!

팔을 쭉 뻗은 석상은 팽이처럼 빙글빙글 돌면서 사방으로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영상을 찍고 있던 감시자는 물론이고, 고위수호자까지 간단히 절단됐다.

그 직후, 석상은 마치 봉인에서 풀려난 것처럼 신사를 벗어났다.

“7종 수호자가 순식간에….”

총리는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지시를 내리는 걸 잊지 않았다.

수호자는 단독으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근처에 반드시 계약자의 안전이 확보된 걸 확인한 후에 움직인다.

현재, 수호자가 전멸한 이상, 계약자들을 태운 수송선은 무방비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녀들만은 어떻게든 구출해야 했다.

(응답하라! 수송선은 어떻게 됐는가!)

코죠 카즈마는 상황보고를 재촉했다.

미확인 괴수의 전투력은 그의 상상력을 아득히 넘어섰다. 저런 절삭력은 에쏘드로도 쉽지 않다. 아니, 변신까지 한다는 점에서 더 괴상망측했다.

이건 마치….

‘아담의 검하고 비슷하다?’

목포에서 연구 중인 검.

매우 흡사했다.

일본 괴수대응본부 지휘통제실에서 한참 늦게 답신이 왔다.

그 목소리는 암울하게 가라앉아있었다.

(...총리 각하. 전멸입니다.)

(아….)

(위성으로 놈을 확대하겠습니다. 어? 이 무슨…. 석상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요도만 수송선 옆에 떨어져 있습니다.)

(확실한가?)

(예. 놀란 괴수들의 소란으로 당장은 회수가 어렵지만, 30분 뒤에는 어찌어찌 가능할 것 같습니다.)

이상했다.

파괴된 것도 아닌 석상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하지만 총리의 상념은 천왕의 중얼거림에 깨어지고 말았다.

“빠르게 회수해서 연구하도록 하세, 비밀리에…. 그 파괴력! 천신(天神)에 어울리는 힘이란 생각 안 드는가?”

“...더 지켜봐야 알 것 같습니다.”

“기다릴 시간이 없네! 이 순간에도 숨통이 바짝 조여지고 있다는 걸 잊지 말게! 그 광녀(狂女)의 변덕으로 도쿄가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겠습니다.”

천왕은 과거부터 ‘선지혜’를 무척 싫어했다.

딱히 원한을 산 건 아니지만, 자신을 내려다보는 오만방자한 그녀의 태도에 짙은 편견을 갖고 있다.

중국의 주석 ‘첸지 죠’처럼 유들유들 넘어가질 못한다.

이것이 선거로 뽑힌 정치인과 유서 깊은 왕족의 가치관 차이일까.

코죠 카즈마는 거기까지만 생각하고 빠르게 지시를 하달했다.

(회수작전을 계시한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요도’는 힘겹게 회수됐다.

애초에 100년이나 방치(放置)해둔 유적이었던 만큼 희생은 예정된 피해였다.

덤으로….

(총리 각하! 생존자를 발견했습니다! 이건 기적입니다!)

(누군가?)

(7종 계약자, 아이나미 산토 양입니다!)

(아아…. 감사합니다! 살아있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코죠 카즈마는 안도했다.

이번 유적탐사에서 가장 강력한 전력인 ‘아이나미 산토’는 ‘교토의 무녀’라고 불릴 정도로 지지율이 매우 높은 7종 계약자다.

미안한 얘기지만….

단지 그녀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천왕과 총리의 표정은 활짝 펴졌다. 이왕 7종 수호자를 잃은 거, 이번에는 8종과 계약하는 걸 목표로 하면 된다.

나머지 계약자는?

죽음이 애석하긴 해도 충분히 감수할 수 있는 피해다.

에쏘드에 버금가는 강력한 ‘장비형 괴수’를 얻은 대가로는 대단히 싸게 먹혔다는 계산까지 끝난 상태였다.

(산토 양을 이리로 데려오게!)

(네? 네! 폐하!)

쭉 통신에서 한 발자국 물러나 있던 천왕이 끼어들었다.

수호자를 잃은 고위계약자.

남자로서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다.

보통은 쳐다보기만 해도 남자를 죽이는 수호자 때문에 실물로 보는 건, 천왕이라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고위수호자가 사망?

미녀와 나누는 대화는 언제나 즐거운 법이다. 몸으로 나누는 대화는 더욱 좋고!

하지만 한국과 중국을 떠올리니 절로 인내하게 됐다.

그렇다고 이 기회를 그냥 날려버릴 순 없었다.

“찾으셨나요.”

도도함이 물씬 풍기는 암고양이 같은 10대 후반 소녀였다.

당연히 겉모습만 그럴 뿐, 실제로는 주석과 비슷한 나이로, 그녀의 경력과 지위, 평판을 고려하면 이 자리에서 가장 높다고 할 수 있다.

천왕보다도.

그것이 일본의 고위계약자.

아니, 교토의 무녀 혹은 수호신이라고 불리는 여인, ‘아이나미 산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핵심인 수호자를 잃으면서 ‘이빨 빠진 호랑이’ 신세가 된 것도 사실. 그래서 대등한 대화가 성립됐다.

“무사해 줘서 정말 고맙소, 산토 양! 그리고 미안합니다.”

“괜찮습니다, 총리.”

그런 상하관계는 전부 대쳐놓고 코죠 카즈마는 정중히 허리까지 숙이며 감사와 사죄를 표했다.

교토에 있던 그녀에게 간절히 부탁한 게 그였으니까.

당연히 직간접적인 책임이 있다. 만약, 그녀마저 잃었다면 교토 시민의 분노를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석고대죄로도 갚을 수 없다.

물론, 교토 방어의 핵심인 수호자를 잃은 현재도 썩 좋은 상황은 아니지만.

“크흠!”

자신보다 총리를 먼저 보았다는 점에서 기분이 매우 언짢은 천왕이 의도적인 헛기침으로 시선을 모았다.

사실, 일본 천왕의 신성불가침은 오래전에 끝났다.

육체는 영원한 젊음과 생명을 얻었을지 몰라도, 정신은 이미 망령(亡靈)이나 다름없는 까닭이다.

천왕은 ‘최고권력을 누리는 고대인’에게서 두드러지게 나오는 정신병 대부분을 앓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호색, 방탕, 독선, 오만….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그저 세월이란 ‘독’에 야금야금 망가졌을 뿐.

천왕이 막 됐을 때는 ‘일본 남성의 귀감’이라고 불렸을 만큼 뛰어난 인물이었다. 심지어 3급 사냥꾼으로 용맹하게 활동하던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전부 옛말.

지금은….

“왕께서도 계셨군요. 여전히…. 많이 정정해 보이시네요.”

“천왕인 내가 아프다는 건 말도 안 되지!”

“...지친 저를 무슨 일로 부르셨나요?”

“응? 하하! 무사해서 다행이란 말을 해주고 싶었네.”

아쿠버스가 6종에서 8종으로 격상되면서, 일본도 어엿한 ‘고위수호자 보유국’에 당당히 그 이름을 올릴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여전히 일본의 국력 대부분은 7종 계약자에게서 나온다.

점점 그 능력과 가치가 올라가는 노블레스도 7종부터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영역! 그건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8종 계약자, 아유라 카즈모 - 오사카의 딸』

『7종 계약자, 유키나 미나미 - 도쿄의 요정』

『7종 계약자, 아이나미 산토 - 교토의 무녀』

『7종 계약자, 샤토라메 호나코 - 삿포로의 별』

일본도 분명 초강대국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모든 역사가 그러하듯 흥망성쇠를 되풀이했고 그건 일본도 마찬가지.

원래는 8종 네코스트 계약자였던 ‘샤토라메 호나코’가 수호자를 잃고 우여곡절 끝에 다시 7종 계약자가 된 것도 그렇다.

이 중에 최고의 인기와 세력(?)을 꼽자면?

당연하게도 수도 도쿄에서 활동하는 ‘유키나 미나미’다.

가장 강하다.

“용무가 끝났으니 이젠 가봐도 될까요?”

“그, 그러도록 하게.”

천왕은 알 수 없는 기세에 압도되어 그렇게 답했다.

허락을 받자마자 돌아서서 빠르게 멀어지는 ‘아이나미 산토’의 매력적인 엉덩이를 감상하며 눈썹을 찌푸린다.

방금 뭐였지?

딱히 위협적인 화법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바짝 손톱 세운 암고양이 앞에 선 쥐처럼 꼼짝달싹 못 했다.

의문을 느낄 때였다.

(큰일 났습니다!)

(또 뭔가?)

(여성 연구원 하나가 동료들을 학살하는 중입니다!)

(학살…?)

단어를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코죠 카즈마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정말로 ‘학살’이 벌어지고 있었다.

감시카메라에 찍힌 영상에는 ‘요도’를 거머쥔 여성이 깔깔 웃으며 사람이 보이는 족족 쫓아가서 죽이고 있었다.

서둘러 출동한 헌병대에서 총알을 퍼부었다.

잠시 후,

총알이 떨어지며 사격을 멈춘 그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 그걸 다 피했어?!)

(아니야! 봐봐! 피격됐는데도 움직이는 거야!)

(온다! 빨리 쏴! 쏘라고! 으악!)

석상이 그랬던 것처럼 빙글빙글 돌면서 헌병대 방어선을 쓸어버렸다.

그때와 비교하면 위력과 범위 모두 많이 약했지만, 그래도 평범한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절대 아니었다.

놀라운 현상은 그때부터였다.

사람을 죽이면 죽일수록 ‘여성 연구원’은 눈에 띄게 강해졌다!

옷은 이미 넝마가 되어 알몸이나 다름없었는데, 운동이랑 거리가 먼 연구원의 여체(女體)에서 늘씬한 건강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성형으로 꾸민 얼굴도 기존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변하고 있었다. 아름답게, 요염하게, 음란하게.

환골탈태(換骨奪胎)라고 해도 좋았다.

(막아! 시내로 못 가도록, 저 미친 여자를 막아!)

(내가, 천왕이 명하지 않는가! 어서 이 사태를 진정시켜라!)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총리와 천왕은 보지 못했다.

멀어지는 아이나미 산토의 ‘달라진 표정’을.

그건 절대로 ‘교토의 무녀’가 종종 짓던 꾸밈없는 미소가 아니었다.

‘원 없이 마음껏 날뛰렴.’

도쿄 한복판에서 벌어진 대학살!

특히, 고가도로(高架道路)가 많은 도쿄는 그 피해가 말 못할 수준이었다.

허리케인(가칭)이 빙글빙글 돌면서 단단한 기둥을 서걱서걱 베어낼 때마다 지지대를 잃은 도로가 무너져내렸다.

이쯤 되면 ‘비밀’로 할 수 없었다.

그 참혹한 현장은 여전히 진행형이었고, 30분도 안 지나서 수도 도쿄의 20%가 초토화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막으려던 수호자 다수가 사망.

유키 짱의 판타이탄이 공중요격을 시도해보지만, 별 소용없었다. 그렇다고 접근할 엄두는 안 날 정도로 ‘허리케인’의 공간장악력과 절삭력은 무시무시했다.

당연히 이웃집 한국에도 이 소식이 전해졌다.

“...많이 흡사하군.”

에쏘드를 허리에 찬 무일은 일본으로 출장 갈 준비를 서둘렀다.

물론, 무단입국은 꺼려져서 간단히 ‘통보’하기로 했다.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답변이 돌아왔다.

(도움은 필요 없다!)

(총리?)

(건방진! 천왕이다! 나는 대(大) 일본제국의 지배자! 엘퍼러, 네가 세상을 속일 순 있어도 나만은 속이지 못한다! 너의 그 독선과 위선을!)

(하아…?)

(그러니 내 땅에 발을 내디딜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마라! 허리케인의 힘은 온전히 일본의 것이다!)

그렇게 폭풍처럼 자기 할 말만 내뱉은 천왕은 통신을 종료했다.

...뭐였지?

청각이 발달한 엘퍼러는 윙윙거리는 귀를 달랬다.

그 용기보다 능력에 감탄했다.

‘목청 한 번 큰 양반이군.’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이랑 붙어도 절대로 밀리지 않을 것 같다.

빼놓은 물건이 있는지 마지막으로 확인.

노예 2호 ‘아이밍 리’와 계약한 웨일풍을 타고 싶지만, 선지혜가 ‘선배 모르게….’ 어쩌고 하면서 실내장식 삼매경이라서 쓸 수 없었다.

세이랑의 고삐를 쥔 엘퍼러가 말했다.

“부탁해! 목적지는 일본의 수도, 도쿄!”

부탁이란 이럴 때 하는 것이다.

이웃집 일본에 한 건 통보.

엘퍼러에게 명령할 수 있는 존재는 이 세상에 없다.

있다면 ‘정의(正義)’뿐.

< [43화-2] 옆집에서 재난이….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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