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175화 (175/287)

< [42화-3] 세계의 비밀? >

“흐음. 정말로 내 눈치를 보는지 시험해볼까. 퐁퐁. 웨일풍의 머리에 가서 목포 쪽으로 유인시켜봐.

“분부대로 할게, 전하.”

통할지 의문이었지만, 그게 됐다!

자신의 몸속에서 이루어진 대화나 행동을 모두 웨일풍이 이해하고 있는 모양이다. 하기야 분리되기 전에 하나의 ‘수호자’였으니까.

인간의 말쯤은 알아들을 수 있는 모양이다.

청각이 어떻게 되먹은 구조인지 알 길이 없지만, 사람의 말귀를 알아들은 ‘미니 고래’는 목포로 빠르게 날아갔다.

의문의 수정은 잠시 제쳐놓고...

‘진짜 편한데…?!’

어째서 사람들이 ‘미국의 웨일풍 최고!’라고 하는 줄 알 것 같았다.

그 커다란 덩치가 순식간에 목포까지 날아갔다!

적재량부터 속도, 승차감, 안전성까지 두루 갖춘 최고의 교통수단! 과거의 비행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몰라도 이 정도는 절대 아니리라!

다만, 이걸 놓아줘야 하는가, 라는 문제가 있었다.

“어떻게 계약자로 못 묶나. 가령…. 저 수정에 갇힌 여자라던가.”

통통 두드려봐도 깨어날 기미가 안 보인다.

에쏘드로 정교하게 베어낸다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잘못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에 넋 놓고 있었다.

생채기 하나 없이 정교하게…. 옷도 살려서 정확하게 벨 수 있지만, 혹시라도 잘못되면 ‘세계의 비밀’이 증발할 거란 부담감 때문에 자제했다.

중국은 조용했다.

아무래도 미국 측에서 뭔가 말이 있었던 게 아닐까.

(선배. 그게 여행선물?)

선지혜의 통신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하기야 곧 목포 상공이니 눈치챌 만도 했다. 위협으로 간주하고 격추하지 않은 것만 해도 대견하다고 해야 할까.

목포 근처에 착륙한 웨일풍은 수많은 시선을 모았다.

(어떻게 된 거냐면….)

무일은 빠르게 상황을 설명했다.

중국의 웨일풍에 진입한 일부터 의문의 야만인과 접전, 그리고 그자가 지키고 있던 수정과 여인에 이르기까지.

하지만 선지혜는 마지막만 기억했다.

(해외에서 여자를 주워왔다는 거네?)

(잠깐! 지혜! 얘기가 어떻게 그렇게 흘러가는 거야.)

(맞는걸. 난 똑바로 이해했어.)

(그냥 놔둘 순 없잖아. 세계의 비밀이 어쩌면….)

단순히 예쁜 여자이기만 한다면 중국에 넘길 수 있다. 계약자 하나 늘어난 셈으로 치면 된다. 하지만 그 여자의 가치가 전혀 다른 곳에 있다면?

수정에서 어떻게든 꺼낸 후에 모진 고문이나 강요를 할 수 있다.

하물며 외계인.

지인 하나 없고 인권을 보장해줄 나라 하나 없는 여자는 실험당하기 딱 좋다. 어쩌면 ‘외계인의 생식기’에 대한 집중탐구가 진행될지도 모른다.

그건,

『옳지 않다.』

무일은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때로는 대의(大義)를 위해 소수를 희생할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그 ‘희생’은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

강제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원치 않는 희생으로 이루어진 세계의 평화라면 그냥 불행한 채로 있는 편이 낫다.

“바툼 베이트만!”

“...플로라. 다시 재워.”

“크루보 바잉-, 커어어억!”

질식으로 기절해있던 야만인이 발악했다가 도로 조용해졌다.

녀석의 반응만으로도, 얼마나 중요한 여자인지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었다. 설마하니 아내를 수정에 감금해둔 건 아니겠지.'라고 믿고 싶다.

야만인이 쓰던 무기는 원래 형태로 돌아가 있었다.

변신하는 칼이라니?

이것도 연구과제다. 7종 괴수의 특수공격을 무력화시켰던 ‘무쌍의 방패’를 날려 먹은 건 조금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있는 걸로 만족해야지, 별수 없다.

“우선은….”

성인(成人)이 들어가는 관 크기의 수정을 밖으로 옮겼다.

쪼그매진 퐁퐁은 도움이 안 됐기에 무일이 어깨에 짊어졌다. 생각보다 무거웠지만, 엘퍼러의 근력을 생각하면 거기서 거기다.

가녀린 여자를 드나, 관과 여자를 함께 드나….

플로라는 야만인의 하나 남은 팔을 쥐고 수레처럼 질질 끌었다. 울퉁불퉁한 바닥에 이리저리 치이고 긁혔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참 용하다.

응급처치한 것도 아닌데 잘린 어깨의 피가 멎다니.

‘이쪽도 보통 인간은 아니군.’

이런 외계인이 ‘민간인’이라면 대단히 위협적일 것이다.

인간답게 도구가 없어지니 무력해졌지만, 이 자리에는 하나같이 강자들뿐이다. 비교할 대상으로 너무 안 좋았다.

이젠, 여기까지 승차감 좋은 안전운행을 해준 웨일풍이랑 작별 대신 붙잡을 방법을 고안할 차례!

일에는 순서라는 게 있는 법이다.

그리고 현재로써는 웨일풍보다 중요한 건 없다.

“괜찮은 처자를 소개해줄게.”

“......”

돌덩이나 다름없는 웨일풍은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녀석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만 충족해주면 굳이 계약할 필요가 없다는 것도 충분히 [예측] 범위였다.

거주민.

웨일풍은 자신의 몸에서 살 생물을 원하고 있었다.

꼭 ‘노아의 방주’ 같지 않은가?

‘...노아의 방주라고?’

신의 노여움을 산 세계가 물에 잠기며 멸망하고, 신에게 감동을 준 남녀 한 쌍이 인류와 동식물을 새롭게 써내려갔다는 얘기.

그런 상념은 잠시 제쳐놓고 빠르게 행동으로 넘어갔다.

(지혜. 웨일풍을 꾸며줘. 살 사람도 물색하고.)

(응. 그런데 뭐가 좋을까?)

(좋으냐니?)

(용도를 정해야지. 요새, 마을, 공항, 관광, 창고 등등.)

마지막 제안은 하늘 고래를 위해서라도 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확실히 하나의 방침을 갖는 편이 좋았다.

어떻게 할까?

이미 정해져 있던 걸지도 모른다.

(마을. 그것도, 웨일풍에서 평생 자생할 수 있도록.)

(...선배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은걸. 노아의 방주지? 개인적으로는 폭격기처럼 쓰고 싶었는데….)

태평양에서 주워온 전함과 잠수함에서 핵미사일을 다수 발견했다는 선지혜.

그런 흉흉한 대량살상무기를 웨일풍에 싣고, 생각날 때마다 하나씩 툭툭 밖으로 던지고 싶다는 의견을 은근슬쩍 피력한다.

미국조차 시도하지 못할 대단한 발상이군!

세계를 말아먹기 딱 좋다.

(당연히 안 된다는 것도 알지?)

(응. 나의 착한 용사님.)

새색시처럼 고분고분 대답하는 선지혜는 일단 안심.

퐁퐁은 웨일풍이 떠나지 못하도록 당분간 고래 안에서 생활하기로 했다. 본인은 대단히 싫다는 반응이었지만 말이다.

그 이유가 별거 아니라서 무시하기로 했다.

“전하! 전하의 가슴 없이는 하루도 못 살아!”

“...좀 살아봐.”

이미 벌여놓은 일들이 많았지만,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며 빠르게 진행됐다.

세계의 관심은 다시 대한민국으로 몰렸다.

정확히 말하면 엘퍼러.

그가 발견한 ‘미지의 무언가’에 짙은 관심을 보였다.

모든 나라가 공동연구를 강력히 주장하며 악착같이 연구원을 하나라도 더 보내려고 자금을 쏟아부었다.

『아담과 이브』

외계인 둘에게는 딱 봐도 오래된 냄새가 풀풀 나는 가명이 붙었다.

외팔 야만인이 아담, 수정 속 여인이 이브.

어째서 일이 이리도 귀찮게 됐을까?

그건 ‘아담’이 비협조적으로 나온 탓이다.

용언을 사용하는 아담은 아쿠버스 라미아의 질문에도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래서 ‘여신의 추종자’들이 광분했다.

“저 씹어먹은 야만인 새끼가!”

“여신님이 질문하면 팬티까지 고백해야지!”

“저 건방진 자에게 천벌을! 고문을!”

당연하게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순수한(?) 연구목적을 가진 연구자들의 바람으로 신체검사 정도는 허용됐다. 그리고 놀라운 정보를 구해왔다.

우리와 다를 게 전혀 없는 인간이라네?

그렇다면….

죽순(竹筍)처럼 자라기 시작한 ‘새 팔’은 뭐란 말인가.

“옳은 지적이십니다, 엘퍼러.”

“하지만 아담의 유전정보는 우리와 다를 게 없습니다. 좀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우성인자 숫자는 엘퍼러가 더 많습니다.”

평범한 인간이라고 한다.

무언가 반박하려던 무일은 일단 끝까지 들어보기로 했다.

그런 걸 알려주려고 사람을 부르진 않았을 테니까.

“대신, 아담에게는 하나의 특징이 있습니다.”

“바로 외계인이란 점이오!”

“놈은 괴수처럼 물리법칙에서 살짝 벗어나 있어요. 정확히 말하면, 저희 세계의 규칙을 어기고 있는 것이지요.”

아주 잘 이해했다.

알 수 없는 신비를 ‘외계인이라서 그래.’로 퉁 치겠다는 거구먼?

참으로 편리하게 생각하는 인간들을 모아놨다.

“그래서 결론은. 몸으로는 얻을 게 없으니 뇌를 파헤쳐봐야 한다는 건가.”

“뭐…. 그렇습니다.”

시선을 피하면서 대답하는 학자들.

연맹에서 파견 나온 자들의 생각은 썩 도움이 안 됐다.

명예욕(名譽慾).

저들을 움직이는 원동력이다.

지식인으로서 순수한 호기심이 아니다. 그저 학계를 뒤집을 업적을 세우고 자신의 이름을 거기에 박기를 희망할 뿐이다.

‘더는 도움이 안 되는군.’

은근슬쩍 ‘자백제’ 얘기까지 하는 학자들을 정중히 돌려보냈다.

아니, 그건 그나마 낫다.

아담과 ‘지구의 여자’ 사이에 아이가 태어나면 ‘물리법칙’에서 자유로워지는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당연히 이브의 난자와 자궁에도 관심이 많았다.

이쪽은 수정 연구가 우선시되며 손가락 하나 못 만지고 있지만 말이다. 이 수정 쪽은 아예 난향이었다.

전혀 감을 못 잡는다고 할까.

“흐음. 내 방식대로 하는 게 낫겠군.”

하지만 저 ‘용언’부터 어떻게 해야 대화가 가능할 것 같았다.

여전히 ‘용의 언어’는 번역이 쉽지 않다. 용마다 언어체계가 조금씩 다른 탓이다. 습관과 방언, 사투리 등이 심하게 섞였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아담이 한국어를 배우면 된다.

딱 봐도 삐딱하고 비협조적인 녀석을 설득할 생각은 없다.

(주석. 제안이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엘퍼러.)

미국이 끼어든 탓일까, 첸지 죠의 목소리에는 다소 섭섭함이 묻어나 있었다. 하지만 그걸 대놓고 말하는 우를 범하진 않았다.

엘퍼러의 대국적인 시야는 늘 예상해왔던 일.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전에 그 협객 만드는 프로그램 말입니다.)

(네. 훌륭한 점수를 못 받았었지요.)

(한국어로 만들어서 외계인에게 써볼 생각 없습니까? 그 가상현실세계가 어떻든 전혀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한국어만 많이 나온다면.)

미쳤다고 용언을 배울까!

암기력이 이미 사기적인 수준인 엘퍼러였지만, 그래도 사절이다.

수억도 아니고 겨우 한 명과 대화하기 위해 익힌다는 건 수지타산에 안 맞다. 그리고 지구에 왔으면 지구의 법을 따르는 게 맞다.

한국어는 세계공용어.

엘퍼러의 등장 이후로 그렇게 굳어지는 추세다.

(...엘퍼러.)

(궁금하신 점이 있다면 질문하십시오.)

(이거 혹시, 독점연구입니까?)

(이것도 독점이라면 독점이라고 할 수 있죠. 저는 아담이 한국어를 강제로 배울 수 있으면 그걸로 만족합니다.)

첸지 죠는 고민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하겠다는 의사를 보냈다.

거절하거나 질질 끌면 또 미국이 끼어들 거란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엘퍼러의 손목에서 늘 함께하는 ‘아메리칸 드림워치’를 신경 안 쓸 수 없었다.

일명, 행운의 시계.

늘 조용해서 방관만 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중국 국가주석은 긴장의 끈을 조였다.

(엘퍼러. 현실을 속여도 됩니까? 자신이 가상현실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도록.)

(마음대로 하십시오.)

첸지 죠의 부탁으로 주어진 기간은 2년으로 정해졌다. 대신, 접속기기는 목포에 설치하는 걸로 결론지어졌다.

그 당사자의 체감시간은 무려 10년!

이번에는 ‘엔딩’도 없다.

뛰어난 무예를 갈고닦은 외계인의 대서사시(大敍事詩)가, 당사자도 모르게 팝콘 튀기듯 기획됐다.

실수는 엘퍼러 때의 한 번이면 차고 넘치지 않는가?

이번에는 무협 ‘실사판’으로 간다!

(엘퍼러의 호의에 보답하고자 한 가지를 미리 약속드리겠습니다.)

(약속이요…?)

(한국어 하나는 토박이처럼 가르쳐놓겠습니다.)

주입식교육.

천자문(千字文)을 시작으로….

중국은 고대부터 이쪽 방면의 대가들이었다.

< [42화-3] 세계의 비밀? > 끝

ⓒ 파르나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