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2] 세계의 비밀? >
일직선으로 뻗은 광선은 모든 걸 관통했다. 미로처럼 얽힌 웨일풍의 몸에 ‘빛의 속도’로 작은 구멍이 뻥 뚫렸다.
하지만 저항감이란 게 있었다.
대략 0.1초쯤 될까.
방패가 소멸하기까지 그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야만인은 그 틈에 몸을 옆으로 틀어 ‘즉사’를 면했다.
왼팔이 완전히 사라지는 선에서 그쳤네?
진짜 문제는 그걸로 일단락된 게 아니었다.
“으힉?!”
왕의 패기는 1%도 안 느껴지는 말투로 식겁한 ‘한유일’은 퐁퐁과 함께 뒤도 안 돌아보고 줄행랑쳤다.
이건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
만약 마기나로크를 부채꼴 ‘방사형’으로 쏘았으면 100% 죽였으리라.
하지만 웨일풍이 다칠 것을 우려하여 최대한 자제한다는 게 이 사달 난 것이다.
‘무일! 무일! 놈이 안 죽었다!’
‘...졸려.’
‘그런 한가한 소리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못 쫓아올걸.’
방패라는 절대적인 방어수단을 잃은 녀석은 다가올 수 없다.
발키지어의 능력은 여전히 유효하니까.
놈은 ‘괴수’가 아니었다!
어깨에서 ‘붉은색 피’가 콸콸 쏟아졌다. 괴수처럼 재생할 수 없다면 별 위협이 안 된다. 변신까지 했을 정도니 장담은 힘들지만.
‘그건 네 생각이고!’
‘......’
‘야! 야! 무일! 벌써 잠들었나?!’
한유일은 희망을 담아 발키지어 펠-쉐어퐁을 돌아봤다.
하지만 옆에서 같이 뛰는 소녀의 입에서는 고운 소리가 안 나왔다.
“어쩌라고?”
“날개로 파닥파닥해봐.”
“엄마 젖도 빨아본 적 없는 벌레가 바라는 건 많네.”
“큭!”
반박은커녕 대꾸도 못 하고 충격받은 하렘의 왕.
그래도 살기 위해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 정도는 잘 알고 있다.
쉬임프.
이 상황을 타파해줄 최고의 우군이다.
일격에 ‘세계에서 가장 날카로운 절단기’ 엔타리얼 치프트가 절단 났지만, 세계에서 가장 단단한 괴수라면 믿을 수 있다.
“도착! 살았다-!”
“헉!”
가만히 서서 이쪽을 돌아본 플로라의 등 뒤로 숨는 퐁퐁.
한유일은 그러는 대신 신기한 광경을 목격했다.
‘초절정 미소녀…!’
자신을 벌레 사촌처럼 보는 플로라 때문이 아니다. 그 뒤편에 자리한 호박색 수정 안쪽에 잠들어있는 아찔한 매력의 여인!
나이는 18세 전후쯤 될까.
낮은 신분이 아니란 걸 증명하듯 화려한 귀걸이, 목걸이, 반지, 팔찌 등의 장신구를 알차게 하고 있다.
딱 봐도 값비싼 장신구랑 달리 옷차림은 수수한 원피스 한 장. 환자복처럼 밋밋했지만, 그게 더욱 청순함을 강조했다.
허공에 살짝 떤 채로 선 자세.
양손을 배꼽 언저리에 모으고, 두 다리도 얌전히 오므린 자태는 ‘숙녀의 몸가짐’ 모범답안 그 자체였다.
“어? 코믹프로그램에서 본 처녀 귀신 닮았네.”
공포영화가 언제부터 개그가 된 걸까.
사랑스러운 미소녀도 무서워질 수 있다는 걸 깨닫게 해준 영상매체를 떠올린 한유일은, 퐁퐁의 감상에 전혀 공감할 수 없었다.
귀신은 무슨….
특별한 피가 아니더라도 깨물어주고 싶은 궁극의 아름다움이다.
예쁘기는 선지혜가 최고라고 생각하지만, 거기에 버금가는…. 전혀 다른 매력을 발산하는 여인이었다.
일본의 ‘유키 짱의 귀여움’처럼 양념이 첨가됐다고 할까.
‘성스러움인가.’
그렇다. 저 얼굴로 ‘깔깔!’ 웃는 모습이 전혀 상상 안 된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성녀(聖女).
늘 청순가련한 미소를 지으며, 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가도록 할 것 같은 신비로움을 품고 있다.
누굴까?
그건 생각해볼 필요도 없다.
마기나로크를 맞고도 살아있는 저 야만인이 지키는 대상이다. 혹은 저 호박색 수정에 감금해둔 인질이거나.
한유일은 후자라고 단정했다.
눈앞에 여자는….
영원히 나만 볼 수 있도록 독점하고 싶은 욕구를 부른다.
설사, 인형처럼 움직이지 않더라도.
“바움 파투발!”
피투성이인 야만인이 마침내 도착했다.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 없지만, 대충 ‘손대지 마!’ 정도가 아닐까.
한유일은 침을 꼴깍 삼켰다.
상대가 심한 상처를 입었다지만, 도저히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이젠 믿을 수 있는 건 플로라뿐.
일대일에 강한 쉬임프가 말없이 도약했다.
이에 맞춰서 야만인이 톱처럼 생긴 칼을 휘둘렀다. 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단단한 괴수는 그 흉흉한 공격을 무시했다.
드드드득.
정확히 목을 노린 공격이 쉬임프의 팔뚝에 대충 막혔다!
전혀 효과가 없진 않았던 듯이 긁는 소리가 섬뜩하게 들렸지만, 단지 그뿐, 파고드는 데 실패하며 제대로 된 피해라고 할 건 없었다.
그리고,
펑!
북 치는 소리와 함께, 야만인의 복부에 플로라의 돌려차기가 박혔다!
하지만 놈은 버텼다!
무려 ‘붉은색 피’를 가진 인간이 8종 괴수의 힘을!
정말 인간이긴 할까?
믿기지 않는다는 한유일의 태도에 아랑곳하지 않고, 곡예사처럼 벽을 밟으며 뛰어오른 플로라.
그대로 야만인의 목을 두 다리 사이에 끼우고 조여버리는 것 아닌가!
흉흉한 검으로 내리쳐봐야 시간 낭비라는 걸 깨달은 야만인은 검을 버렸다. 그리고 하나 남은 팔로 그녀의 다리를 벌려보려 애쓴다.
하지만 팔 하나로 그게 될 리 없었다.
“크으….”
아무리 강해도 생물인 이상 호흡은 반드시 필요한 법.
끝내 거품을 물고 눈이 뒤집힌 야만인이 쓰러졌다.
쉬임프 플로라는 잠시 한유일은 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는 것처럼 고개를 좌우를 젓고는, 야만인을 죽이지 않고 일어났다.
최종결정권자가 자고 있으니 어쩔 수 없다.
...라고 말하는 표정이다.
“죽여도 괜찮지 않을까?”
“......”
“네. 죄송합니다, 마음대로 하세요.”
빤히 노려보는 플로라의 기세에 눌린 한유일은 찔끔하며 물러섰다.
송곳니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새우 괴수!
한무일의 기억에서도 봤었지만, 정말 무지막지할 정도로 강하다. 자유시간에 저 야만인에게 했던 것처럼 자신의 목을 조르면 답이 없다.
숙주 때문에 죽이진 않겠지만, 자유시간마다 악몽!
한유일이 생각할 수 있는 그 어떤 수단을 다 마련해도, 쉬임프의 갑주와 체술(體術)은 당해낼 수 없다.
그냥 한 주먹거리.
왕의 체면도 일단 살고 볼 문제다.
오래오래 살아야 미소녀를 많이 볼 수 있지 않은가!
음?
“수고했어. 플로라.”
“......”
쉬임프는 두 손을 가지런히 아랫배 위에 모으며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한유일에게 하는 게 아니다.
탈진에서 깨어난 한무일에게 충성과 공경을 표시했다.
물론, 표현의 방식이 다른 경우도 있었다.
“전하! 소녀는 몸이 가냘파져서 무서웠어!”
“...방패에 그런 효과가 있을 줄은 몰랐네. 조금 있다가 우유 실컷 먹게 해줄게.”
“응, 전하.”
폴짝 안긴 펠-쉐어퐁은 까치발까지 세워가며 무일의 가슴에 얼굴을 맞대고는, 뽀얀 뺨으로 열심히 비벼댔다.
못마땅하다는 듯이 쪼그만 소녀를 노려보는 쉬임프. 플로티날 아브롤라의 시선에도 계집애 천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보다….
무일의 시선은 한곳에 고정됐다.
‘이 수정은 뭐지?’
그리고 그 안에 든 여인은?
웨일풍의 본체 혹은 심장이라는 웃기지도 않는 상상도 잠깐. 이 문제는, 웨일풍을 수호자로 둔 중국에 위임하기로 했다.
한무일의 관심사는 이미 여자보다는 야만인의 검으로 넘어간 상태였다. 엔타리얼 치프트를 한 번에 두 동강 낸 절단기로.
그때였다.
아메리칸 드림워치에서,
(오랜만이에요, 캡틴나인. 잘 지내셨지요?)
(미국입니까.)
시계를 통해 시각과 청각을 공유 중인 미국.
역시, 시기를 놓치지 않고 바로 반응을 보였다.
(네. 흥미로운 것을 발견하신 것 같아서 이렇게 연락드렸습니다. 저희가 시계를 원격 조종해서 알아본 결과, 저 여인은 살아있다고 판명됐습니다.)
(...그래서요?)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릴게요. 연구하고 싶습니다. 저 수정의 원리도 궁금하지만, 저렇게 봉인된 여인이 세계의 비밀을 알고 있지 않을까, 저희는 기대하고 있어요.)
(세계의 비밀?)
(그렇습니다. 캡틴나인.)
한무일은 전리품으로 검만 가져가고 야만인과 저 수정은 중국에 넘길 예정이었다.
하지만 세계의 비밀?
조금은 다시 생각하게 됐다.
요즘 시대에 저런 식으로 미녀를 진공포장(!) 한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시체라면 가능하겠지만, 살려서 보존시킨다는 건….
명확하다.
‘지구의 기술이 아니란 건가.’
무일은 중국을 신뢰하는 편이지만, 국익(國益)이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는 1%도 믿지 않는다.
그렇다면 미국은 어떨까?
마찬가지다. 하지만 약간의 차이는 있다.
『캡틴나인(Captain Nine)』
미국에서 엘퍼러를 부르는 호칭이다.
이것만으로도 알 수 있듯, 미국은 엘퍼러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국가다. 여자도 아닌 남자에게 열광한다는 점에서, 정작 당사자는 거부감을 느끼는 중이지만….
아무튼, 대단히 호의적이다.
슈퍼영웅의 요구를 수용하는 일련의 과정이 자연스럽다고 할까.
폐허로 변한 할리우드의 잔재일지도 모른다.
(중국이 과연 호락호락 나올지 모르겠군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캡틴나인! 당신이 바란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중국은 설득하려고 노력할 순 있어도 막진 못해요.)
(흐음….)
그럴 것이다.
하지만 자동차 청소 중에 보석을 발견한 상황이랄까?
이걸 가진다는 건 도둑놈 같아서 꺼림칙했다.
(타협조건으로 저 수호자로 짐작되는 외계인을 중국에 넘겨준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판단되는데, 캡틴나인은 어찌 생각하시나요?)
(...그 문제는 위임토록 하지요.)
(도울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캡틴나인!)
거기까지 얘기했을 때, 이변이 발생했다.
웨일풍이 크게 흔들리더니 터널 여기저기가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 아닌가!
그뿐만이 아니다.
지진 난 것처럼 웨일풍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마기나로크에 맞고 죽은 건가?!’
무일은 경악했다.
겨우 바늘구멍 하나 뚫었을 뿐인데!
하지만 그 진동도 곧 잠잠해졌다. 그러나 다행이라고 여길 순 없었다. 웨일풍이 두둥실 떠오른다고 느낀 까닭이다.
역시나 중국 측에서 반응이 있었다.
(엘퍼러!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웨일풍이 여러 개로 쪼개졌습니다! 그리고 각자 독립된 괴수가 되어 하늘로 떠나가는 중입니다.)
엘퍼러는 침착하라고 답하면서 뒤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죽은 게 아니었구나!
시링 팽과 계약한 ‘한 덩어리’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뿔뿔이 흩어지는 중이란 모양이다. 덩치는 미국의 공중요새보다 약간 큰 수준.
공중도시 겸 항공공항을 세우겠다던 중국의 광대한 야망이 흐지부지되는 순간이었다.
중국의 통신이 끝나고, 미국에서 연락이 다시 왔다.
(저희도 같은 경험을 했었습니다. 웨일풍은 살던 주거자들이 일정 이상 떠나면 새로운 주민을 찾기 위해 분리하거든요.)
(번식?)
(예. 그렇게 보셔도 무방합니다, 캡틴나인.)
그 사실을 알면서도 가르쳐주지 않은 건 미국의 견제일까.
미국과 중국.
두 나라의 알력은 고대부터 있었다고 하니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보다 엘퍼러는 좀 더 현실적인 질문을 했다.
(그래서 제가 탄 웨일풍은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
(상공에 가만히 떠 있습니다.)
(음?)
(마음대로 못 떠나고 당신 눈치를 보는 것 같은데요, 캡틴나인.)
화강암처럼 생겼지만, 웨일풍에게도 마음이 있다.
배때기에 또 구멍 나는 건 사절!
까칠한 승객의 눈치를 안 볼 수 없는 처지였다.
< [42화-2] 세계의 비밀?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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