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화-4] 지구는 돌고 돈다. >
괴수의 빠른 학습능력.
한무일은 최근에 그 경이로움을 몸소 체험하고 있었다. 한유일과 기억을 공유하면서 생긴 또 다른 부수적인 효과.
쉬임프가 그걸로 엘퍼러를 몰아붙였던 것처럼, 이젠 그도 가능하게 됐다. 하지만 딱히 학습해야 할 정도로 강한 적을 못 만난 것도 사실이다.
‘수컷 이름은 빨리 잊는 편이 좋다!’
‘다다익선이야, 유일.’
‘틀렸다! 수컷은 많을수록 민폐다!’
도움을 주는 그 당사자는 별로 내키지 않는 모양이지만.
그렇게 파티는 끝나고 다시 ‘작전’으로 돌아갔다.
목적은 말할 것도 없이 웨일풍 청소.
몸길이 18.5km, 너비 11.1km, 높이 3.3km에 달하는 초대형 유선형 동체는, 그 자체만으로도 흉기였다.
이건 도대체 얼마나 큰 걸까?
서울을 혼자서 1/5쯤 가릴 수 있다고 보면 된다.
물론…. 이조차도 목포 앞바다에 자리한 문팽이에 비하면 겸손한 덩치다.
중국 괴수대응본부 사령실에서, 정보과장 첸지 죠가 차분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수준 높은 보고서가 자리했다.
“웨일풍의 몸속은 미로처럼 얽힌 수많은 터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최소 58만 마리의 괴수가 서식할 거라고 저희는 보고 있습니다.”
“58만….”
“대부분이 소형이고, 중형 이상은 외피, 등에 붙어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먹이는 웨일풍에서 가장 많이 사는 ‘해바라돈’입니다.”
에쏘드, 용사의 정령만큼이나 약하기로 유명한 괴수.
등에 해바라기 씨처럼 빼곡하게 박힌 ‘알’이 매일 수천 개씩 부화한다. 주식은 ‘햇빛’이고 부식은 ‘일산화탄소’와 ‘이산화탄소’로….
하는 행동이나 외모는 공룡이지만, 엄연한 식물이다.
【해바라돈 / 1종 중형】
새끼는 부엌칼로도 잡을 수 있을 만큼 약하고, 성체도 별 볼 일 없다.
번식력이 뛰어나지만, 햇빛을 며칠만 못 받아도 빌빌거리다가 죽어버릴 만큼 허약하다. 그래서 날씨 변화가 적은 사막이나 구름 위에 사는 웨일풍에 빌붙어 산다.
이게 무슨 괴수?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만, 다른 괴수들이 수시로 해바라돈의 숫자를 안 줄였으면 지상은 꽤 끔찍한 모습이 됐을 것이다.
아무리 약해도 붉은 피가 흐르는 동물보다는 압도적으로 강하니까.
“...계속 실패할 만하군요.”
추측이지만, 58만이면 도대체 얼마나 꾸역꾸역 사는지 감도 안 잡혔다.
무일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저런 터무니없는 대군을 토벌할 마음을 과거에 품었던 중국의 무모함과 만용이 존경스러울 뿐이다.
위진 창이 변명하듯 말했다.
“하지만 저희는 쑨우쿵이 있었습니다.”
“흠….”
“4종 괴수 3,000마리. 분명, 58만이란 숫자는 어마어마하지만, 쑨우쿵의 물량이라면 시간문제였습니다.”
저 막대한 숫자 대부분은 1종 아니면 2종이다.
많아 보여도 상대가 5종쯤 되면 학살하며 종횡무진 했어야 맞다. 쑨우쿵이 1초에 3,000마리씩 토벌한다면 이론상으로 3분이면 정리가 끝난다.
그러나 실패했다.
웨일풍의 몸 위에는 바위가 없어서 재생할 수 없다는 건 아주 사소한 이유다. 근본적으로 힘에서 밀렸다.
8종 돌원숭이가!
“약한 괴수만 있지 않다는 뜻이군요.”
“그렇습니다. 저희는 그들, 7종을 ‘사천왕(四天王)’이라고 부릅니다. 놈들은 웨일풍의 머리와 등, 몸통, 꼬리 부분을 각자 지배하고 있습니다.”
“호오~. 그 좁을 땅에서 말입니까?”
인간의 관점에서는 대단히 넓지만, 괴수에게는 아니다.
서울의 1/3 영토면 6종 괴수 하나가 영역으로 선포할 법한 면적이다. 그런데 무려 7종이 4마리씩이나 꾸역꾸역?
무언가 있다.
진즉, 사생결단을 냈을 고위괴수들이 얌전히 있는 이유가.
서식지 ‘웨일풍’이 파괴되지 않도록 하려고 공존할 리 없다. 중국의 웨일풍 정도면 웬만한 피해에는 꿈쩍도 안 할뿐더러 회복도 빠르다.
그렇다면 뭘까.
답은 뻔했다.
‘간단하다! 그 사천왕이란 조무래기보다 강한 녀석이 산다!’
한유일이 다 안다는 듯이 으스대며 말했다.
역시나, 위진 창이 그 얘기를 꺼냈다.
“통제하고 있는 괴수가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아니, 분명 있습니다. 전투에 한 번도 가담하지 않았기에 그 실체를 확인하진 못했지만.”
“즉, 미확인 8종이 있다는 겁니까?”
“정보과에서는 그렇게 판단하고 있습니다, 엘퍼러.”
이렇게 길게 설명하는 이유가 뭘까.
웨일풍 안에 8종이 서식하더라도 이쪽은 하이블과 쑨우쿵이 있다. 그리고 중국에 7종 계약자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들이 힘을 합치면 그 사천왕부터 58만 마리까지 전부 쓸어버리는 게 가능하리라!
하지만 제약이 있었다.
“제 수호자를 아프게 하면 안 돼요!”
잠자코 듣고 있던 시링 팽이 끼어들었다.
온몸이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것 같은 하늘 고래. 하지만 엄연한 생명체였다. 다치면 고통을 느끼고 심하면 계약을 파기할 수 있다.
위진 창이 한숨을 내쉬며 긍정했다.
“그녀의 말이 맞습니다.”
지난 과거에, 중국은 이미 셋 차례나 토벌을 시도했다. 그때마다 막대한 손해만 입고 실패한 건 물론이고, 웨일풍의 신뢰마저 많이 잃었다.
솔직히 무려 셋 차례나 자신의 몸을 난도질한 자들(중국)과 한패인 계약자 곁에 계속 남은 고래의 의리에 감탄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것도 이젠 한계.
앞으로는 조심스럽게 토벌을 진행해야 했다.
그리고 그렇기 위해 엘퍼러에게 마지막으로 도움을 청한 것이리라.
“...질문이 있습니다.”
“예. 엘퍼러.”
“웨일풍을 땅에 착륙시킨 적이 있습니까?”
“예? 그야….”
위진 창은 시링 팽을 돌아봤다.
당연하게도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부탁’을 할 이유가 없었던 까닭이다.
“답답한 전법을 썼군요. 배수진(背水陣)을 친 괴수 무리에 싸움을 걸다니. 도망칠 구석이 없으니 악착같이 싸웠을 겁니다.”
“흠!”
정보과장은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굳이 변명하자면 할 수 있다.
괴수에게 ‘도망’이란 단어는 여태 없었다고 말이다.
싸우던가 무시하던가.
둘 중 하나뿐이다. 괴수에게 후퇴한다는 굴욕적인 선택지는 없다. 그런데 그 말을 엘퍼러가 하니 전혀 의미가 달라졌다.
58만?
그 전부와 싸울 필요가 없다.
혼잡할 줄 알았던 토벌이 얼마나 싱겁게 끝날지가 벌써 그의 두 눈에 선했다.
“가보지요.”
상황을 파악한 무일은 중국 측에 빠른 행동을 재촉했다.
급할 건 하나도 없지만, 오랫동안 ‘집’을 비우는 것도 영 아니었다. 최은비가 앞으로 다니게 될 ‘문팽이 초등학교’도 가봐야 하고….
돈 주고 남에게 맡기는 건 역시 성미에 안 맞다.
그렇다고 페이 링이 남이란 얘기는 아니지만, 그래도 직접 돌보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믿음 이전에 양심이 걸린다.
모친이 믿고 딸을 맡긴 상대는 ‘한무일’이란 사냥꾼이었으니까.
“...과장. 나는 또 한 번 상식이 파괴됐네.”
첸지 죠는 엘퍼러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의 옆에 ‘미운 오리 새끼’처럼 따라다니는 아이밍 리가 상당히 거슬렸지만, 그렇다고 황제의 위광(威光)이 약해진 건 아니었다.
오롯하다.
엘퍼러는 중국이 바라는 ‘협객’의 풍모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같은 남자로서 끌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주석은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그저…. 저 남자가 상식을 무시할 뿐입니다.”
아이밍 리도 그렇다.
남자 알기를 바퀴벌레쯤으로 알던 여자가….
엘퍼러에게 잘 보이려고 엉덩이와 젖가슴을 열심히 흔들며 재롱부리고 있었다.
위진 창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앞으로 아이밍 리는 ‘평생’ 중국에서 지정해준 ‘수치스러운 의상’만 입어야 한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사냥꾼들을 위한 위로공연’을 열거나 참석해야 한다.
그것이 중국에서 그녀에게 내린 처벌.
목적이야 당연히 ‘수치심’을 느끼라는 거였는데, 꼴을 보아하니 이미 수치심이고 뭐고 없는 것처럼 보였다.
“제주도에서 테러리스트들이 야합을 가졌다고 했었지?”
“예, 주석.”
“다윙 밀리언과 레이디 가브리엘이라…. 거물들이군. 지나가던 문팽이에게 깔려 죽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세계적으로 악명을 떨치는 테러리스트다.
아이밍 리처럼 역사(!)와 전통(?)은 없지만, 파급력은 더욱 막강하다.
“그래도 동맹 건은 흐지부지 지나갔다고 합니다.”
“테러리스트들이 힘을 합치면 골치 아픈데. 뭐, 본국하고는 이제 상관없나.”
아이밍 리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걸 실토했다.
북해빙궁 본거지 같은 중요한 정보는 물론이고, 현재 입고 있는 속옷 색깔까지 전부!
테러리스트 우두머리 자존심도 ‘뱀페스트 각인’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꼭 한유일이 아니더라도, 한무일의 ‘협조해라.’라는 한마디에 아이밍 리는 군말 없이 순종적으로 따랐다.
프린스트가 계약을 파기한 것도 당연했다.
녀석은 무려 ‘왕자님’이었으니까!
다른 남자에게 홀딱 넘어간 공주님을 끝까지 사랑한다는 건 백번 양보해도 무리였다.
“프린스트는?”
“여전합니다.”
“계속 명예 운운하는 건가.”
괴수가 무슨 명예하고 하겠지만, 오랫동안 인간사회에 물든 프린스트 카론은 그걸 대단히 중요시했다.
어쩌면 프린스트라는 괴수의 성향 자체가 그런 걸지도 모른다.
아무튼, 명예로운 죽음을 원하고 있었다.
죽은 괴수도 살려내기로 유명한 치유능력을 보유한 6종 괴수. 꼭 설득하는 기술이 아니더라도 대단히 유용했다.
게다가 인간형.
숙소를 포함해서 유지비를 별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
“주석. 그 문제는 시간이 해결해줄 겁니다. 당장은….”
“그렇군. 지금은 테러리스트의 명예를 신경 쓸 때가 아니지.”
국가주석과 정보과장은 서둘러 엘퍼러 뒤를 쫓았다.
이걸로 중국은 확고부동한 ‘이인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으리라!
웨일풍의 기동력이 마침표를 찍어줄 것이다.
쿠우우우….
사람이 살지 않는 초원.
한때, 몽골이라는 국가가 있었던 땅에 웨일풍이 모습을 드러냈다. 세계 멸망의 날처럼 하늘이 새까맣게 덮였다.
하지만 그 웅장한 광경을 볼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사람이 일절 살지 않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걸 목적으로 선택한 착륙지점이었다.
그건 훌륭한 판단이었다.
왜냐?
“가볼까.”
단순히 크다는 말로 부족한 웨일풍이란 거대한 산맥 꼭대기까지.
엘퍼러는 한 번의 도약으로 단숨에 꼭대기까지 뛰어올랐다.
그 높이는 무려 5.3km!
세계에서 가장 높은 에베레스트 산(8.8km)에는 못 미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작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하지만 엘퍼러를 뒤따라 뛰어오른 쉬임프나, 훨훨 나는 발키지어에게는 그리 부담스러운 높이가 아니었다.
반대로,
“크에엑?!”
“커엉!!”
괴수들이 썰물 빠지듯 웨일풍에서 뛰쳐나왔다.
그 대부분은 해바라돈이었지만, 그 밖에도 많은 괴수가 기존의 서식지를 포기하고 몽골 초원으로 퍼져나갔다.
이래서 이곳은 택한 것이다.
저 58만 마리에게 휩쓸리면 프로사냥꾼이 아니라 에쏘스트라도 살아남을 수 없다. 있다면 괴수조차도 두려워하는 인간뿐.
인류에는 현재 ‘한무일’이 유일했다.
“...오랜만인데.”
엘퍼러는 심장이 두근두근 뛰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비어버린 집.
하지만 아직 떠나지 않고 웨일풍에 남은 괴수들이 있었다.
느낌으로는 정확히 다섯.
중국이 말했던 ‘사천왕’이란 녀석과 그들을 통솔하는 존재이리라. 그리고 그중 8종으로 짐작되는 하나가 그의 [예감]을 흔들고 있었다.
분명한 위협!
이 정도 위기감은, 평양에서 페이 링과 가더발트 콤비를 상대할 때하고 비슷했다. 까딱 잘못하면 죽을 만한 상황이란 뜻이다.
‘어떤 놈이길래….’
깡으로 버티던 사천왕은 플로라가 순식간에 처리했다.
기술이라고 할 것도 없다. 여성스럽지 못한 몸통박치기 후에 두 다리의 갑주를 해제해서 만든 쌍칼로 단숨에 양단!
일대일 최강의 괴수 중 하나인 쉬임프다웠다.
물론, 무일도 그녀를 상대로 고전했었다.
하지만….
그런 플로라도 이 정도까지 그를 긴장시키진 못했다.
“...지금부터 만나보면 알겠지.”
웨일풍이란 미궁으로 향하는 터널.
엘퍼러는 그 시커먼 심처(深處)를 향해 망설이지 않고 나아갔다.
< [41화-4] 지구는 돌고 돈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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