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171화 (171/287)

< [41화-3] 지구는 돌고 돈다. >

덥석 손이 잡힌 아이밍 리는 수치심으로 얼굴이 빨개졌을 때보다 더욱 붉게 상기돼서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내가 이 나이에 무슨 추태….

분명 방금까지는 그런 마음으로 자기비하 중이었다.

그런데 혐오해왔던 ‘남자란 생물’의 강인한 손이 자신의 손을 꽉 잡아오는 순간, 다리 힘이 풀리며 주저앉을 뻔했다.

이걸 ‘음양(陰陽)의 조화’라고 했던가?

아이밍 리는 헤어나올 수 없는 ‘연애의 늪’에 눈을 뜨고 말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생각과 달리 그녀의 몸은 본능에 충실했다.

여자인 자신과 다른 단단한 팔뚝을 조심스럽게 껴안아본다. 자신의 젖가슴을 짓누르는 그 묘한 감각에 심장이 녹아내릴 것 같다.

아아! 이젠 모르겠어!

아이밍 리는 자포자기했다.

미녀가 최고란 확고부동했던 사상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여자는 수호자가 아닌 남자 곁에 있어야 행복이란 걸 깨달아 버렸다.

아니, 이건 마약이었다.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

이 속담은 아이밍 리에게 딱 맞아 떨어졌다.

애초에 그녀는 선택권이 없었다.

한무일이 필살기를 쓴 직후에 탈진하자,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연스럽게 한유일이 튀어나왔다.

잠시 어리둥절하던 ‘하렘의 왕’은 그 자리에서 전리품이라고 할 수 있는 아이밍 리의 목에 송곳니를 박았다. 침 발라두듯.

그때부터 이미 ‘연애의 밀당’은 저 멀리!

수호자 프린스트 계약은 파기됐고, 그녀는 왕의 백성(노예)이 됐다.

“...왕이십니까?”

“오! 죠 씨. 나를 단번에 알아보는군!”

“하…. 하…. 함께한 시간이 제법 많지 않습니까.”

한 시간이 하루 같던 고난이었다고 첸지 죠는 회상했다.

파티를 싫어하는 한무일이 승낙했을 때부터 짐작하긴 했지만, 눈앞의 현실로 벌어지니 각오를 했어도 절로 긴장됐다.

이 자리에는 참한 처자가 대단히 많이 참석했으니까.

하지만 걱정하지 않았다.

‘확실히 효과가 있군!’

하렘의 왕이 퍼트리는 전염병은 벌써 1분이 지났음에도 잠잠했다.

아이밍 리가 훌륭한 방역(防疫) 역할을 해준다는 뜻이리라.

그녀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국방장관을 제외한 사내들은 눈요기하다가 여인들에게 옆구리를 가격당하며 끌려가는 광경이 곳곳에서 보인다.

흉악한 전적이야 어떻든….

천음절맥인 아이밍 리의 외모는 단연 발군이었다.

아무리 천박한 옷을 입혀놔도 몸이 이미 뛰어난 걸작 예술품. 게다가 최은설의 예처럼 흡혈 당한 이후에 더욱 아름다워졌다.

“한 공자님! 어라? 에이….”

웨일풍 계약자, 시링 팽이 쪼르르 달려왔다가 급히 실망했다.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가 이러할까.

넓은 소매가 나풀거리는 게 특징인 순백의 전통의상 한푸를 입은 시링 팽은, 잔뜩 기대했던 파티가 갑자기 재미없어졌다.

첸지 죠에게서 시선을 거둔 한유일이 대꾸했다.

“너무 실망하는 것 아닌가. 예쁜이.”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소중한 첫 입맞춤을 도둑맞은 기분이에요.”

시링 팽은 새침한 얼굴로 대답하며 힐끔 아이밍 리를 봤다.

같은 여자가 봐도 질려버릴 몸매.

얼굴이야 남자의 취향이란 게 있어서 꿀린다고 생각 안 하지만, 저 목부터 가슴, 허리, 엉덩이, 허벅지, 종아리까지 이르는 곡선은 진짜 반칙이었다.

여성스럽지 않은 부위가 없다.

남자의 보호본능과 성적충동을 자극하는 모든 요소를 내포하고 있지 않은가.

그게 바로 천음절맥.

음기가 극에 달한 여인의 자태였다.

“예쁜이가 착각하는 게 있는데.”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한무일과 나의 심미안은 똑같아.”

“예?”

“당연하잖아. 예쁜이는 뱀페스트에 대해 전혀 공부를 안 했군. 성격만 다를 뿐, 나머지는 늘 일치해. 우리는 둘이면서 하나니까.”

시링 팽은 확인하듯 국가주석을 돌아봤다.

고급 양주를 음미하던 첸지 죠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지.

다만, 한무일이 아이밍 리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처럼. 심미안의 최종심사는 외적인 아름다움 아닌 내적인 성품이다.

숙주가 하는 일마다 간섭하려는 선지혜를, 한유일이 별로라고 느끼는 것도 마찬가지다.

예쁘다, 아름답다, 귀엽다.

이런 비주얼로 느끼는 감상은 똑같다.

하지만 매력적인 여인으로 보이느냐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아…. 그러면 지금의 저는 어때요?”

한유일에게 전혀 관심 없던 시링 팽이 물었다.

그가 예쁘다고 느낀다면 한무일도 같은 생각이란 뜻이니까.

뺨을 긁적인 미청년이 되물었다.

“솔직하게?”

“네.”

“흐음. 나이를 속이는 어른스러운 복장보다 귀여운 쪽이 더 낫다고 본다. 한무일처럼 나도 애들을…. 소년은 모르겠고 소녀는 좋아하거든.”

하렘의 왕이 굳이 ‘미녀’가 아니라 ‘미소녀’를 고집하는 이유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전부, 숙주의 영향!

...용사의 순수한 ‘어린이 사랑’을 변질시킨 흡혈귀의 감상평을 경청한 시링 팽은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첸지 죠는 끼어드는 게 좋을지 갈등했다.

7종 웨일풍 계약자인 그녀는 중국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존재가 될 테니까.

‘아직은 천덕꾸러기 신세지만.’

여태까지 웨일풍은 비바람이나 막아주는 병풍 역할이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다를 것이다.

그 크기는 미국의 웨일풍을 압도하고도 남기 때문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아이와 어른만큼이나 덩치가 달랐다.

웨일풍의 몸에 사는 거주자들을 내쫓을 수 있다면 ‘세계 최강의 공중요새’란 명성은 미국에서 중국으로 넘어오리라.

이전에는 알면서도 할 수 없었다.

웨일풍 덩치가 큰 만큼 거기에 사는 괴수도 어마어마하게 많았던 탓이다.

“유일 공.”

“왜?”

“엘퍼러에게 들은 것 없습니까?”

“웨일풍? 그거라면…. 음…. 선지혜를 설득하는 편이 빠를걸. 무일은 그냥 도와주고 싶어하는데…. 무슨 말인지 알지, 죠 씨?”

“네. 충분합니다.”

베갯머리송사란 거겠지.

정치 쪽에 관심 없는 한무일을 설득할 인물이라면 황후, 선지혜뿐이다.

그렇다고 그녀를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저 강력하기 짝이 없는 엘퍼러가 여기저기 무상(無償)으로 도와주고 다니는 것도 민폐라고 보기 때문이다.

첸지 죠는 이번에 깨달았다.

엘퍼러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면 대단히 편하지만, 계속된다면 중화인민공화국은 자립성과 자생능력을 상실하고 말리라.

그 끝은 망국(亡國).

나라를 경영하는 국가주석으로서 반드시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

공짜와 호의란 그런 것이다.

“딱딱한 얘기는 그만하고 즐기자! 파티장은 사교장이라고 들었다!”

파티장에 대해 이론으로만 아는 한유일은 아이밍 리를 이끌고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기 시작했다.

식겁한 첸지 죠가 그 뒤를 추적했지만, 별문제 없었다.

역으로….

파티를 주도하는 능숙한 여인네들과 풋풋한 규수들의 무한한 호의(好意) 아래에, 가는 곳마다 성사를 이뤘다!

인맥 쌓는 일에 무관심한 한무일과 대조적인 성향.

물론…. 한유일에게도 남자는 거들떠보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긴 했지만, 어차피 집안은 마누라가 지배하지 않던가!

“정말 다르네요.”

그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며 시링 팽은 중얼거렸다.

자유로운 영혼 같다고 할까.

본인에게 엄격하고 금욕적인 한무일이 하지 못하는 일들을 대신 해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잘 웃고 잘 논다.

공통점이라면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는다는 정도?

시간을 철저하게 활용하는 한무일처럼, 매일 6시간만 허락된 한유일도 계획적으로 물 흐르듯 팍팍하게 움직인다.

목적이 괘씸해서 그렇게 안 보일 뿐!

‘...아이, 진짜! 한 공자님 몸으로 무슨 짓이야!’

부글부글 끓던 시링 팽이 마침내 폭발했다.

호박(예쁘다.)처럼 생긴 계집애의 허리를 끌어안고 춤추는 것 아닌가!

나도 아직 못 해봤는데!

유일한 보호자에게서 잠시 떨어진 탓에 불안한 얼굴로 오도카니 선 아이밍 리. 그녀를 지나쳐서 쭉 돌진한 시링 팽은 외쳤다.

“금지! 불건전한 연애 금지!”

“예쁜이?”

“안 돼요! 무조건! 동침한 저랑도 춤 한 번 안 췄는데! 부끄러운 속살까지 다 보여줬는데!”

계약자로서 상당히 위험한 발언을 던지는 시링 팽.

시끌시끌해진 파티장은 이제 시장바닥을 연상케 했다.

“하아…. 모르겠군.”

첸지 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젠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아무튼, 큰 고비는 다 넘겼고 앞으로는 ‘약속’을 이행하는 일만 남았다. 선지혜와 담판이 아직 있지만, 한유일에 비하면 쉽게 느껴졌다.

그랬다! 첸지 죠도 시련을 통해 성장했다!

설득은커녕 대화 자체가 성립 안 되는 역병보다는 그래도, 말이라도 통하는 폭군 쪽이 파고들 여지가 있으니까.

희망이 있는 것과 아예 없는 건 그만큼 차이가 컸다.

“그럼, 예쁜이. 나랑 춤출래?”

“됐어요!”

“킁. 이것도 싫다, 저것도 싫다.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그냥 숨만 쉬세요.”

첸지 죠를 쩔쩔매게 했던 한유일은 의외로 고전하고 있었다.

미소녀에게 강한 만큼 약하다는 걸까.

페로몬이 안 통하는 미소녀에게는 취약한 면모를 보였다. 아주 좋은 정보. 하지만 시링 팽 말고 그런 여인이 있던가.

...없다.

한무일을 연모하는 계약자는 시링 팽이 유일한 것 같다.

분명 호감을 품었던 여인은 있지만, 진즉 한유일에게 기울어서 함락된 지 오래. 일편단심으로 버틴 생존자는 시링 팽이 유일했다.

‘그래도 좋은 정보로군.’

시선이 마주친 위진 창도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다.

이번 파티가 전혀 성과가 없진 않았다는 위안 아닌 위안을 얻었다.

게다가 파티는 총 8시간.

즉, 한유일이 끝까지 있을 수 없다!

당연히 의도된 전략이다.

“흠. 중국말이 많아서 뭔가 동떨어진 기분이군요.”

겨우 한마디뿐.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전혀 딴사람이란 걸 모두가 알 수 있었다. 동작 하나에서부터 말 한마디까지 신중하고 절제되어 있다.

한유일처럼 여자가 좋아할 인물상은 아니다.

하지만 또 좋아하기 시작하면 한없이 빠져드는 인간이 한무일이었다. 이유라면 믿음직스럽고 신뢰할 수 있다는 등등.

시링 팽은 망설이지 않고 뛰어들어 푹 안겼다.

“한 공자님!”

“...어제도 잠깐이지만 보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너무 반기시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계속 보고 싶었어요.”

난감한 쓴웃음을 짓는 무일에게 어리광부리는 시링 팽.

아이밍 리는 그 모습을 멍하니 쳐다봤다.

요즘 애들은 부끄러움을 모르고 참 적극적이란 생각을 하면서, 기도(氣度)가 완전히 달라진 그에게서 위압감을 느꼈다.

이것이 황제.

수많은 여자를 품었던 고대의 지배자가 이렇지 않았을까.

경국지색(傾國之色)이 역으로 빠져드는 남자….

“흠흠!”

“말씀하십시오, 주석.”

“선지혜 시장하고 대화를 나눠봤습니다.”

호칭 논란이 많았던 선지혜는 ‘목포시 시장’으로 일단락됐다. 그녀 앞에서는 ‘황후’라고 불러서 방심을 유도하는 전략을 쓰지만.

여전히 가슴에 얼굴을 비비며 어리광부리는 시링 팽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엘퍼러는 짧게 답했다.

“파티도 끝난 것 같으니 웨일풍에게 가보지요.”

“...예.”

첸지 죠는 그렇게밖에 답할 수 없었다.

선지혜가 거래를 통해 무엇을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 없다는 태도. 그것이 신뢰일 수도 있고 무관심일 수도 있다.

분명 전자(前者)이리라.

파티가 1시간쯤 남았으니 즐겨보는 게 어떠냐는 제안도 해봤지만….

엘퍼러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저는 6시간 동안 푹 쉬었습니다. 그리고…. 인사라면 괜찮습니다. 한유일의 기억을 통해 이곳 사람들의 이름쯤은 전부 암기했습니다.”

“전부…?”

한둘도 아니고 4백 명쯤 된다.

아니, 애초에 미소녀들이랑 시시덕거리던 하렘의 왕이 언제 그런 생각을…!

첸지 죠는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갑자기 기억났다는 듯이 한무일이 덧붙였다.

“아! 제가 이 말을 안 했던가요.”

“무슨 말씀을….”

“괴수는 기억력이 대단히 좋습니다. 그리고 다른 에쏘스트는 어떨지 모르지만,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 [41화-3] 지구는 돌고 돈다.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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