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170화 (170/287)

< [41화-2] 지구는 돌고 돈다. >

그 장소가 어떻길래…?

바로 어제는 ‘구(舊) 멕시코’에서 에쏘드가 발견됐다.

주인 없는 땅.

강력한 괴수가 다수 서식하는 탓에 미국과 브라헨티나의 국경선처럼 이용되는 광대한 미개척 지역이다.

하지만 에쏘드를 하나라도 더 보유하겠다는 각오로 피해를 감수한 두 나라는, 멕시코 내의 유적탐사를 강행했다.

다행히 전쟁으로 확대되진 않았다.

미국과 브라헨티나가 탐사한 유적이 서로 달랐고 거리도 멀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브라헨티나는 수월하게 에쏘드를 획득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니었다.

(독일과 프랑스 경계입니다!)

(맙소사…!)

딱히 신기한 일도 아니다. 에쏘드가 국경 인근에서 발견됐던 사례는 제법 흔한 일이기 때문이다.

영웅, 용사의 검이 고대의 전쟁터였던 국경선에 묻힌 건 다반사다.

하지만 조금씩 양보하던 시절은 다 끝났다.

과거처럼 주렁주렁 용사파티를 끌고 다닐 필요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능은 ‘최강’이란 수식어가 아깝지 않다!

세계가 보물찾기 열풍에 빠진 건 너무나 당연했다. 정확히 말하면 ‘유서 깊은 검’을 찾기 바빴다.

이건 확실히 부작용이었다.

【에쏘드 / 8종 특수】

바뀐 건 등급뿐이지만, 사람 마음이란 게 참 간사하잖은가?

에쏘드 필살기가 ‘대박!’이란 게 밝혀진 이후로, 모든 나라가 귀신들린 것처럼 땅을 파헤치고 유적을 뒤졌다.

그 필살기를 쓸 수 있는가는 둘째 문제!

일단 남보다 하나라도 더 구해놓고 보자는 식이다.

“맹주도 바쁜 것 같으니 저희는 이만.”

“목포 추가 분양은 언제일지….”

“꿈도 꾸지 말게. 내가 바로 대기번호 29번이다!”

“오오-!”

...괴수대응연맹은 그렇게 바쁘고 산만했다.

하지만 세상의 중추인 연맹이 어떻게 굴러가든, 지구는 오늘도 24시간 주기로 돌고 또 돌았다.

정신없는 사람이 있으면 느긋한 사람도 있는 법.

중국 일정을 거의 끝마친 한무일은 새로운 부탁을 받고 있었다.

“웨일풍?”

하늘 고래 위에 사는 야생괴수 토벌 의뢰.

갑작스럽긴 하지만 전혀 이해 못 할 건 아니었다.

미국처럼 공중요새를 꿈꾸는 것이리라.

“안 되겠습니까?”

위진 창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엘퍼러는 긍정적으로 검토해보겠다고 답했다.

마음이야 그냥 도와주고 싶은데, 가상현실게임 침대 위에서 선지혜가 ‘막 퍼주면 당연한 줄 알 걸.’이라고 충고한 탓이다.

국가 경영인이 그 정도로 멍청할까.

뭐, 국민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지긋지긋하게 봐왔으니….’

선의를 당연시하는 순간 파국으로 치닫는다.

부산에서 보낸 어린 시절, 사냥꾼으로 막 활동하던 초창기. 불우하게 보냈다고 단정할 순 없지만, 썩 좋았다고도 하기 어려웠다.

강간, 폭행, 살인, 배신, 흉계, 낙태….

도시는 그나마 낫지만, 서울 밖의 추방자들 사이에서는 이런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며, 심지어 ‘식인(食人)’마저 성행하고 있었다.

지금도 그렇다.

정보를 완전공개하다가 중단하면 ‘뭔가 대단한 걸 숨기고 있나!’라고 의심하며 항의와 비난이 잇따를 것이다.

(아저씨. 언제 돌아와요?)

(은비는 안 본 사이에 좀 큰 것 같네.)

(가슴이요?)

(...너에게 그런 편견을 주입할 것 같은 용의자가 너무 많아서 묻진 않으마. 이젠 애라고 말하기 힘들겠어.)

아이들은 대단히 빨리 큰다.

무척 아쉬운 일이다.

최은비는 이제 어엿한 계약자도 될 수 있을 만큼 성장해있었다. 하지만 좀 더, 좀 더 높은 곳을 바라보며 묵혀두는 중이다.

꽃봉오리가 만개할 나이는 아직 멀었으니까.

‘무일.’

‘왜?’

‘저 아이는 9종, 왕이 좋아할 모든 요소를 갖고 있다.’

‘기적적인 생명이긴 하다만….’

평양에서 거둔 아이다.

친모(親母)가 모든 걸 바쳐서 지켜낸 생명.

동물과 다를 게 없는 인간의 본성에 실망할 때가 없다면 거짓말이다. 왜 지켜야 하는지 의문을 전혀 느끼지 않았다면 또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최은비를 볼 때마다 다잡을 수 있다.

인간의 99%가 인정머리 없는 짐승일지라도, 나머지 1%를 위해 싸울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은가.

(그래서 언제 돌아오세요?)

(흠. 이틀 뒤가 아닐까.)

(네에….)

최은비가 토끼였다면 귀가 축 늘어지지 않았을까.

한참을 달랜 후에 영상통화를 종료했다.

한무일과 한유일을 신통방통하게 구별하는 것도 재주다.

참고로, 한유일 호칭은 ‘오빠’다.

‘너라는 양부를 둔 저 아이는 진짜 공주다. 단 하나뿐인. 인공임신으로 태어난 너의 여식들이 성장한 20년 뒤에는 가치가 확 떨어지겠지만.’

‘그래서?’

‘끼리끼리 논다는 말이 있다. 왕은 왕이랑 노는 법. 전쟁이든 협력이든. 문팽이가 선지혜를 선택한 것도 다 너라는 연결점이 있었기 때문이지.’

최은비는 공주이기에 왕에게 ‘시집’ 갈 운명이라고 ‘예언’하는 한유일.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울까?

9종 계약자가 그리 간단히 또 성사될 거라고는 보지 않지만, 미소녀 문제에서만큼은 척척박사인 ‘하렘의 왕’의 호언장담이었다.

더 큰 문제는….

문팽이처럼 간단할 거냐는 문제다.

‘네가 보기에는 어떤데?’

‘모르지. 왕이라고 다 똑같은 건 아니잖아. 계약자에게 잘해주는 왕일 수도 있고, 보물 감추듯 가둬두는 녀석일지도 있지.’

거기까지 대화를 마친 무일은 부산 상황을 살폈다.

그야말로 하루하루가 다른 변화!

도시 구실을 하기까지 앞으로 보름이면 준비가 끝날 거라고 한다. 건물이 땅에 묻히지 않도록 지지기반을 다지고 도로를 깔며 전봇대를 세운다.

여기에 상하수도와 전기배선 설치.

사람이 살려면 꼭 필요한 가구와 의복 등은 여전히 부족했지만, 해외 혹은 서울에서 대량으로 생산한 것들을 무한정 사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전부 무상으로 배포!

퍼주기란 논란이 일었지만, 앞으로 부산을 ‘왕권통치’ 한다는 선지혜의 공식성명이 나온 이후로 쏙 들어갔다.

특히, 그 장대한 계획에 경악했다.

『뱀페스트 사병화!』

개인주의가 강한 노블레스하고는 다르다.

왕에게 충성하는 ‘순수 괴수’로 이루어진 사냥꾼 조직.

일명, 근위대.

일반적인 수호자가 하는 역할부터 사냥꾼의 수렵과 채집까지 도맡아서 처리한다. 그 대가로 부산 ‘여인의 피’를 받는 시스템.

너무나 간단명료해서 흠잡을 곳이 없다.

근위대의 실력은 노블레스보다 한참 위, 에쏘스트보다 약간 아래로 짐작된다. 숙주는 전원 사형수로 하기에 인권 논란도 죽었다.

아니, 공포다.

부산에서 범죄를 저지르면 사형이나 추방보다 더한 처벌을 받는다는 뜻이니까. 영원히 자기 몸에 갇혀 살아야 한다.

제대로 미치지 않는 한, 착하게 살 수밖에 없다.

“안녕하세요.”

“흠. 샤려 핑 양은 좀 적응이 됐습니까?”

“네. 쿵쿵이 많이 도와줬어요.”

쑨우쿵의 애칭은 ‘쿵쿵’이다.

3만 마리에서 1마리로 줄어든 돌원숭이가 계약자 뒤편에서 헤벌쭉 웃고 있다.

미호 첸이랑 함께할 때하고는 확실히 달라진 모습. 계약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사실을 시사해준다.

최후의 승리자라서 그런 걸까?

쑨우쿵이 이전보다 강해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벌써 실전에 투입되는 겁니까?”

“네. 저는 미계약자로서 교육을 진즉 수료했었고, 쿵쿵은 이전에 수호자였던 경험이 있으니까요. 함께 잘해낼 수 있을 거예요! 그렇죠, 쿵쿵?”

“우끼끼!”

괴수가 저렇게 팔불출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살짝 감탄해보는 엘퍼러.

어쩐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서유기.

그 이야기 속의 쑨우쿵도 분명 옥황상제 등에게 ‘복수’하려다가 삼장법사를 만나며 교화됐다. 그때와 완전히 판박인 상황.

쑨우쿵에게 샤려 핑은 삼장법사일 것이다.

무려 ‘1,700년’의 세월을 그리워하며 기다려온 계약자.

심성까지 포함해서 겹쳐져 보였으리라.

‘아니, 더 마음에 들겠지.’

백번 양보하더라도 천축으로 힘겨운 여정을 떠난 미녀의 피부가 멀쩡할 리 없다. 설상가상으로 여성스럽게 꾸미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금방 늙어버렸으리라.

고대부터 세월은 여자에게 ‘독’이었다.

노화가 멈춘 현재도 ‘나이’는 여전히 민감한 사항이니까.

‘부처를 믿으라고 설교하지도 않지.’

한유일이 슬쩍 끼어들며 덧붙였다.

이것도 큰 장점일 것이다.

아무튼, 수많은 5종과 6종 수호자는 물론이고, 8종 쑨우쿵까지 되찾은 중국은 명실상부 세계 국력 2위로 단숨에 도약했다.

이 전력이면 9종 오니오프가 버티고 있는 도쿄도 점령할 수 있다.

이건 추측이 아니라 확신.

하이블과 쑨우쿵이 ‘도깨비 왕’을 상대하고, 추종자는 수많은 고위수호자로 쓸어버리면 전쟁이라고 할 것도 없이 결판나리라.

다만, 그 사이에 한국이 버티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엘퍼러’가 자리해서 그럴 수 없다.

“힘내십시오.”

“네! 유일 공자님께도 안부 전해주세요.”

“다 듣고 있습니다.”

“어머!”

샤려 핑은 씩씩한 발걸음으로 수호자 쑨우쿵과 함께 떠난다.

한유일 말대로 뭔가…. 깜찍한 아가씨였다.

누군가의 클론이고 대신(代身)이란 걸 알게 되면 세상에 좀 더 냉소적이고 비관적일 줄 알았는데, 참 밝지 않은가.

아마도 저런 내적인 강함에 쑨우쿵이 매료된 게 아닐까.

(엘퍼러. 축하연에 참석해주실 수 있습니까?)

(장소가 어디인지요.)

(원정대가 공식적으로 끝나자마자 본부 대광장에서 개최합니다.)

실질적인 원정은 다 끝났다.

미계약자는 여전히 많이 남았지만, 중국이 감당할 수 있는 허용치가 이미 포화상태에 도달한 까닭이다.

더 늘렸다가는 탈 난다는 정보과의 판단에 원정은 그렇게 중단됐다.

그 탓에 한무일도 베이징 본부에 있는 것이다.

(흠. 알겠습니다.)

이전 같으면 질색하며 사양했을 것이다.

하지만 동거하는 녀석이 ‘자유시간을 지금 쓰겠다!’라며 난리법석이라 허락했다.

그동안 낮잠이나 자둬야지.

이게 생각보다 정신적인 치료가 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피로라고 할까.

(감사합니다. 그러면 그쪽으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굳이 그러실 필요는….)

(파티의 꽃은 미녀 아니겠습니까.)

오래 기다릴 것도 없이 곧 은발의 미소녀가 걸어 나왔다.

북해빙궁 궁주, 아이밍 리.

중국 측에서 강제로 입힌 게 분명한 선정적인 옷차림을 한 그녀는 새빨개진 얼굴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뗐다.

보폭을 조금만 넓게 잡아도, 짧은 붉은색 치마 아래로 국부와 항문만 간신히 가린 흰색 팬티와 엉덩이가 다 보였던 까닭이다.

가녀린 목에는 굴욕적인 개목걸이.

이음새 하나 없는 일체형으로 풀 수 없도록 해놓은 검은색 바탕에는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친애하는 엘퍼러에게 보내는 노예 2호.’라고, 한글로 음각되어 있었다.

뚜렷하게 보이도록 반짝반짝 황금색!

한무일은 쓰게 웃었다.

‘...아주 소소한 처벌이네.’

수호자 프린스트와 함께 수많은 양민을 학살한 테러리스트에게 중국이 가한 조치로는 대단히 관대하다고 할 수 있었다.

물리적인 고통 대신 정신적으로 괴롭히겠다는 심보?

짧은 치마와 얇은 팬티 한 장뿐인 하의만큼이나 상의도 대단히 파격적이었다. 이건 그냥 젖꼭지만 가려놓은 브래지어….

그런 반라(半裸)를 반투명한 검은색 비단으로 감쌌다.

나머지는 다 장난 반 진심 반 같지만, 그 비단만은 진짜였다. 정성스럽게 수놓은 은색 봉황이 세밀하게 수놓아져 있다.

그 하나가 아이밍 리의 천박한 의상을 단숨에 격상시켰다.

파티장에서 지나치게 망신을 주면 그녀의 ‘주인’에게 누가 된다는 판단이 아닐까.

아무래도 상관없는데….

어차피 파티는 한유일이 참석할 것이다.

“자! 어서 안내해라. 밍밍!”

< [41화-2] 지구는 돌고 돈다.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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