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화-3] 고대의 전설을 보면…. >
고대의 전쟁이 이러했을까.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똑같은 복장의 인형(人形)들이 무기를 들고 서로를 죽이고 죽이는 광경은 처절했다.
같은 시각.
엘퍼러에게 ‘비룡 편대’라고 싸잡아 불린 6종 수호자들이 일제히 날아갔다. 목적지는 인공위성으로 포착한 북해빙궁 테러리스트들이 밀집된 곳.
하지만 무차별 학살이 아니다.
수호자는 제거하고 계약자는 생포하는 게 목적이다.
“이런…!”
“저! 저! 저!”
아직 상황파악이 덜 된 여인들의 경악과 비명이 뒤늦게 터졌다.
믿었던 3만 대군의 붕괴.
그 허망한 사태에 깜짝 놀랄 틈도 없이 6종 괴수들이 밀어닥쳤다. 전투보다는 진압에 가까운 무력차이였다.
끝까지 남은 건 궁주 ‘아이밍 리’와 수호자 ‘프린스트’ 단 둘뿐이었다.
그 둘이 강해서 못 잡은 게 아니었다.
“접근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겁니다.”
조금도 겁먹지 않은 의연한 얼굴로 아이밍 리가 말했다. 하지만 눈빛은 살짝 긴장하고 있었다.
동양인 얼굴에 은발이란 이국적인 조합의 미녀.
미녀우월주의자란 소문답게 그 미모는 나무랄 곳 없이 발군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수호자 프린스트.
늘씬한 체형의 미남이 자리했다.
인간이 아니란 증거는 뾰족한 귀와 녹색 머리카락이 전부였다.
“...당신이 아이밍 리?”
“그러는 당신은 엘퍼러겠군요.”
대치된 상황은 ‘싸움 전의 보스전 대화’ 같은 게 아니다. 아이밍 리 옆에 두둥실 떠 있는 또 다른 괴수 때문에 중단된 것이다.
그 생김새는 ‘동물’ 중 그 어느 것하고도 비슷하지 않았다.
완전히 새로운 모습.
외계 생명체라고 불려도 전혀 틀리지 않으리라.
어떻게 생겼는가?
저 생김새를 표현하면 거의 창조의 영역. 인간의 상상력이 만든 해파리, 오징어, 왕눈이 우주인하고 전혀 달랐다.
덩치는 대략 갓난아기 수준.
설명할 수 있는 건 크기가 전부였다.
【안드로다 / 7종 소형】
일명 ‘도시파괴자’라고 불리는 ‘별똥별’이다.
안드로다의 실체는 지구 주위를 소행성처럼 두둥실 떠다니고, 이렇게 환영만 유령처럼 지상에 내려와서 두리번거린다.
우주에는 다수 서식하고 있으며, 이렇게 유령을 보기는 극히 드물다.
괴수가 겁 많고 소심하다고 하면 이상할까?
하지만 안드로다는 그런 괴수다. 그리고 누군가 겁을 주거나 깜짝 놀라게 하면 본체가 환영이 있는 위치로 낙하한다!
그 일대는?
거대한 크레이터만 남는다.
도시 한복판을 겨냥하면 막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흔한 얘기겠지만, 어째서 이런 짓을 한 거지?”
“너무나 뻔한 질문이군요, 엘퍼러. 이 세상은 미녀가 지배해야 합니다. 그녀들이 세상을 구했다는 건 아무도 부정할 수 없어요. 그건 당신의 모국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박선영과 선유나.
그 둘이 있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었다.
아니면 중국에 합병됐으리라.
무일은 ‘고작 그런 이유로….’ 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100년 전의 참상을 경험해보진 않았지만, 얼마나 끔찍하고 힘들었을지는 누가 말 안 해줘도 안다.
그 시기를 빛낸 건 ‘미녀’였다.
정치인과 군인, 재벌이 아니라 아름다운 그녀들이었다.
“아이밍 리. 당신은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뭐가 말인가요?”
“인류를 지배하기 위해 구했다는 당신을 지지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당신도 결국은 9종 계약자 아래. 그녀들의 노력으로 살아있다는 걸 명심하시길.”
“...엘퍼러. 당신은 아니란 건가요?”
화살이 이번에는 무일에게 돌아갔다.
내가 지배하려고 인류를 구해?
그에게 그럴 마음이 있었다면 진즉 그리됐을 것이다. 그건 세계의 모든 정치인이 아는 사실이다. 그저 쉬쉬하며 언급을 피할 뿐.
괜한 걱정은 간에 안 좋으니까.
“아닙니다. 당신이 어떤 근거로 들이미는지 모르지만.”
“당신 때문에….”
세계는 급변을 맞이했다.
늘 수렵꾼, 소모품 취급이던 사내들의 위치가 급부상했다. 그리고 역으로 소위 ‘그럭저럭 예쁜 여자’라고 불리는 계층이 불필요해졌다.
하위계약자.
아예 노골적으로 계약을 파기시키고 ‘애나 낳으세요.’라는 정부의 압박을 받기까지 한다. 당연히 기존의 대우는 꿈도 못 꾼다.
그래서 그녀들은 엘퍼러를 곱게 보지 않는다.
그냥 혼자만 알고 누릴 것이지 어째서 퍼트렸느냐는 불만과 원망이 적지 않다. 가진 걸 뺏긴 자의 분노는 당연하리라.
“대단히 이기적인 발상이군요.”
“그녀들이 헌신짝처럼 버려진 건 당신 때문입니다.”
“그 나라의 정부 대처가 잘못된 거란 말이 통할 것 같지 않군요, 아이밍 리.”
어째서 이런 대화를 해야 할까.
그건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프린스트에게 호의를 품은 저 ‘안드로다’가 베이징 상공에 떠 있기 때문이다. 낙하하면 베이징은 그대로 소멸!
요격할 준비를 하고 있지만, 실패할 경우에 생길 피해가 너무 극심하다. 테러리스트 하나 잡겠다고 모험을 강행할 순 없다.
그래도 북해빙궁 전력은 사실상 괴멸.
계약자는 모두 연행됐고 남은 건 ‘두목’뿐이다.
‘오오! 천음절맥. 맞다! 이 미소녀는 진짜다!’
‘유일. 너는 이 상황에 그런 소리가 나와?’
‘잘 나온다! 이럴 때는 감탄해줘야 맞다!’
아이밍 리는 협상을 원하고 있었다.
노블레스와 에쏘스트 폐지.
시대를 역행하라는 현실성 없는 걸 요구일 뿐만 아니라, 그들이 없던 시절에도 그녀는 테러리스트로 활동했다.
마치 피해자인 것처럼 말하지만, 그야말로 피해망상일 뿐.
이 고착상황을 해결하려면?
아이밍 리를 제압하고 프린스트와 안드로다는 제거.
다만, 환영을 벤다고 안드로다가 죽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별똥별처럼 낙하하며 일생을 마무리하는 괴수.
엘로엘처럼 삶의 집착도 없다.
‘...유일.’
‘하하! 나를 찾을 줄 알았다!’
‘네가 잘하는 게 이것뿐이니.’
‘무슨 소리냐! 미소녀 위에 군림하는 것 말고 이 세상에 중요한 게 무어란 말이냐! 군주는 모든 면에서 뛰어날 필요 없다. 뛰어난 백성을 많이 거느리기만 하면 된다.’
오랜만에 왕 같은 달변(達辯)을 하는 한유일.
계약자를 지배하는 자.
그건,
인류를, 세계를 지배한다고 해도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중화인민공화국 괴수대응본부가 단 3일 만에 ‘하렘의 왕’ 아래에 통일(?), 재편됐다는 게 그 증거!
세상이 말세다.
카사노바, 바람둥이가 흥하는 시대라니.
과거에도 그런 얘기가 우스갯소리도 나돌긴 했었다. 이 시대에 최고의 남자는 ‘계약자의 기둥서방’이라고.
하지만 그 꿈을 이룬 남자는 100년째 단 한 명도 없었다.
왜?
수호자가 가만 안 두니까.
괴수가 질투하면 그 결과는 죽음뿐이다.
‘잘 설득해봐.’
‘맡겨만 다오! 참고로 이건 자유시간하고 무관하다!’
‘그래.’
기질이 변했다.
그건 여자의 육감으로만 알 수 있는 미세한 변화였다.
한무일에서 한유일로.
허리에 쌍수를 찬 일류검객 같은 분위기가 한순간에, 겉멋만 든 도련님으로 추락했다! 하지만 그건 남자의 관점.
여자는?
두근두근!
손만 잡아도 기분이 좋아질 것 같은 미청년으로 보였다.
여기에 ‘황제’라는 이미지마저 추가되며, 곁에 서는 것만으로도 ‘황후’가 될 거란 꿈이 저절로 부풀어 오른다.
그건 아이밍 리도 예외가 아니었다.
수호자 프린스트가 구시대의 ‘백마 탄 왕자’라면?
대치 중인 엘퍼러는 세련된 호화여객선을 몰고 온 황제였다!
‘이, 이 무슨….’
마음의 동요에 아이밍 리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달콤한 얘기가 오간 건 아니다.
역으로 서로의 사상을 비난하고 조롱했을 뿐이다. 그 어디에도 호감 가는 내용은 없었다. 그런데 몸의 어딘가 망가진 걸까?
심장이 쿵쾅쿵쾅 뛴다!
평생 느껴보지 못한 ‘사랑’이란 감정.
수호자 프린스트에게 가끔 느끼던 ‘호감’보다 명백히 강렬한 기분.
그 탓에 아이밍 리는 이런 생각마저 했다.
‘내가 마조히스트…?’
나름 상식인이라고 자부해왔던 그녀가 느낀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누가 내 딸이라고 찾아왔어도 이렇게까지 놀라진 않으리라.
이 이상한 기분이 더 강해지기 전에 빠져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사방이 막혔다. 그녀가 이렇게 무사히 버틸 수 있는 건 ‘안드로다’라는 강수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는 강수.
하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최악최저의 수’였다.
수호자 프린스트의 눈빛도 진지했다.
“좋지 않은 왕에게 걸렸군.”
계약자를 제외한 인간하고는 말을 안 섞기로 유명한 쌍두마차 발키지어(가슴을 도발하면 말 잘한다!)와 프린스트.
그중 프린스트가 입술을 뗐다.
상극(相剋)이다. 극약(劇藥)이다.
이걸 뭐라고 표현하는 게 좋을까.
대단히 좋지 않은 상대에게 계약자가 물렸다. 성별과 종족, 둘 다 불분명한 왕에게 걸려서 헤어나오질 못하고 있었다.
이건 아이밍 리의 잘못이 아니다.
『순리(順理)』
왕을 향한 예찬(禮讚)은 정해진 도리다.
어째서 저런 ‘왕’이 존재하는지 알 수 없지만, 눈앞에 현실이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그건 계약자가 선택하기에 달렸다.
하지만 프린스트는 상황을 그리 낙관적으로 보지 않았다. 그렇다고 마냥 비관적인 것도 아니었다.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항복’뿐이었으니까.
아이밍 리의 고집이 워낙 완고해서 어쩔 수 없이 승낙할 것뿐.
“자아, 밍밍. 어깨에 힘 풀어.”
“밍밍?!”
초면에 애칭까지 붙이는 한유일.
하지만 아이밍 리는 깜짝 놀랄 뿐, 거부하지 못했다.
이 나이에 애칭….
불명예니 굴욕이니 같은 소리가 입에서 안 떨어졌다.
분명 아까와 똑같은 음성이지만, 무언가 달랐다. 콕 찍어서 말할 수 없지만, 프린스트와 처음 만났던 순간만큼이나 강렬했다.
그 상태는 수호자 프린스트도 느꼈다.
덤으로, 눈앞에 ‘흡혈귀 왕’이 무엇을 노리는지도 깨달았다.
『권속(眷屬)』
다른 말로는 ‘특별한 피’를 원한다.
특수체질처럼 뱀페스트가 좋아하는 피를 보유한 여성.
프린스트는 눈을 감고 생각했다. 흡혈귀에게 피를 빨린 그녀를 계속 따를 수 있을 것인가.
대답은, 아니요.
아이밍 리의 수호자가 된 이유는 많은 게 있지만, 바로 저 ‘도도함’에 있었다. 하지만 그 확고부동한 의지가 단숨에 흔들렸다.
왕의 한마디에 부질없이.
이런 와중에 ‘흡혈’까지 당한다면 함께할 수 없다.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도망치거나 전면전을 치르기란 아예 불가능. 안드로다도 슬금슬금 빠질 생각 중이다.
『에쏘드』
환영이 베인다고 죽진 않겠지만, 치명적이다.
간신히 붙잡은 구명줄이 이렇게 불안하다면 달리 도리가 없다.
해볼 수밖에.
‘절대로 못 이길 상대는 아니다.’
방금까지 승리 불가능을 점쳤던 [예지]에 희망이 보였다. 어떻게 싸우더라도 ‘일격’에 끝장나는 미래밖에 안 보였었는데.
해볼 만했다!
상대가 ‘괴수의 왕’이라도 ‘괴수’다. 그리고 프린스트는 ‘괴수를 설득하는 왕자’. 이 위기를 타개할 방법이 떠올랐다.
저쪽도 그걸 원하는 눈치다.
일명 ‘들어와’ 매치.
“왕이여. 일대일을 신청하오.”
“카론?!”
아이밍 리는 깜짝 놀라며 자신의 수호자를 돌아봤다.
하지만 이미 게임은 시작됐다.
프린스트는 허리에 찬 ‘스콜레옹 포르소’ 쌍수를 힐끔 확인했다. 사연을 말하자면…. 전리품이랄까. 쓸 일은 거의 없었지만 이럴 때를 위한 무기다.
머릿속으로 ‘엘퍼러’에 대한 지식을 탐색했다.
현재는 ‘하렘의 왕’이고 가더발트와 에쏘드는 봉인된 상태다. 전환한다면 순식간에 패하겠지만, 왕의 자존심이 있다면 그러진 않으리라.
한유일은 대답했다.
“흑기사? 공주에게 버림받았으면 곱게 물러날 것이지.”
“왕이 할 말은 아니오.”
프린스트 ‘카론’은 무표정으로 응수했다.
저 왕은 존재 자체가 반칙이다.
어떤 ‘계약자’든 매혹할 수 있는 괴수라니.
“까짓거 한 판 붙자. 죽고 나서 울지 마라.”
“불리하다고 바꾸지나 마시오.”
< [40화-3] 고대의 전설을 보면….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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