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화-2] 고대의 전설을 보면…. >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울까.
첸지 죠는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멈칫했다.
눈앞에 남자가 누구인지 잊으면 여러모로 곤란하고 피곤해진다는 사실을 몇 번이나 되새겼던가!
기존 상식의 잣대로 판단하면 계속 어긋날 뿐이다.
늘 문제를 떠맡는 입장이었던 국가주석은 ‘그냥 맡기자.’는 결론에 도달했다.
대단히 매혹적인 한마디.
남에게 맡긴다.
여기에 중독되는 순간, 헤어나오지 못하리라!
“새 계약자를 구해주면 됩니다.”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엘퍼러.”
이 또한 사실이다.
위진 창은 20시간 뒤라고 했지만, 그건 쑨우쿵 마음이다.
지나가는 길에 고위괴수를, 쑨우쿵이 어쩌지 못하는 비행형 괴수를 자극하지 않고 이동하려면 녀석들도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그걸 무시하고 베이징까지 진격한다면?
빠르면 10시간.
무엇보다도 무한재생, 무한복제는 대단히 성가신 능력이다.
“이미 눈여겨 봐둔 계약자가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길.”
“정말입니까? 아! 실언이었습니다.”
이미 몇 차례나 경험했던가.
하지만 그게 8종 괴수에게 통할까?
한무일은 차분히 답했다.
“괴수의 등급은 인간이 정한 겁니다. 쑨우쿵. 분명 대단히 위협적인 괴수인 건 사실이지만, 그건 인간을 상대했을 때입니다.”
“흠!”
“괴수 대 괴수. 4종 3천 마리. 결판이 안 날 것 같지만, 7종 괴수 레드군도 쑨우쿵의 분신을 쓸어버릴 수 있습니다.”
물량 앞에서는 장사 없다지만, 괴수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
지친다는 개념이 없으니까.
부상이 심하면 재생하는 과정에서 약해질 뿐이다.
“그렇다면…?”
“약간의 인연만 주어진다면 계약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쑨우쿵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지만.”
한무일은 ‘행운의 시계’를 조작했다.
현재, 계약 대기 중인 중국의 미계약자 목록이 쭉 뜬다. 그 숫자는 무려 300명에 달했고 전부 5종 이상이 기대주들.
따로 자기소개하는 시간은 없었지만, 일면식 정도는 있다.
직접 본 건 아니고….
한유일에게 자석처럼 이끌린 여인들이다.
‘얘가 적격이다! 이름은 깜찍이!’
‘...그래?’
‘그 아메바 원숭이들이 환장할 것이다!’
하렘의 왕이 보증한 여인. ‘깜찍이’라고 불린 그녀의 이름을 본 순간, 무일은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샤려 핑.
이 이름은 중국에서 ‘전설’로 통한다.
무림의 시작을 연 여걸(女傑)!
현재, 무일의 허리에 들러붙어 있는 가더발트의 옛 계약자이기도 하다. 동명이인으로 치부하기에는 여러모로 신경 쓰였다.
“주석. 샤려 핑이란 이 미계약자. 어떻게 된 겁니까?”
“...클론입니다.”
첸지 죠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미호 첸이 지배하는 ‘무림’을 되찾을 목적으로 ‘부활’ 시킨 여협(女俠).
하지만 성격이 ‘오리지널’이랑 너무나 상반됐다고 한다. 싸움을 싫어하고 소녀들이 좋아할 법한 사랑 이야기에 훌쩍훌쩍 우는….
가더발트는, 수호자와 함께 ‘계약자’가 직접 싸운다. 그런데 이렇게 심약해선 훈련도 불가능했다.
어쩔 수 없이 클론 계획은 포기!
평범한 ‘미계약자’로 성장하도록 무기한 방관했다.
“쑨우쿵이랑 뭔가 통하는 구석이 있군요.”
“아…!”
주석보다 앞서 정보과장이 탄성을 터트렸다.
분신과 클론.
그럴싸하게 앞뒤가 맞아떨어지지 않는가!
곧바로 ‘샤려 핑’을 호출했다.
또 검술수련을 권유하는 게 아닌지 불안해하며 사령실로 찾아온 샤려 핑은, 기대에 찬 시선들에 어깨를 움츠렸다.
“무슨 일로 부르셨나요?”
“그대가 계약해줬으면 하는 괴수가 있네.”
첸지 죠는 현재 상황을 요목조목 설명해줬다.
쑨우쿵이 ‘복수’를 위해 베이징으로 진격하고 있으며, 그 숫자가 ‘3만’에 달한다고.
교묘하게 중요한 내용을 뺐다.
저 안에 사령탑이 10마리 있다는 건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 10마리가 서로 싸우도록 해야 하니까.
작전이 들통 나면 안 된다. 쑨우쿵이 계약자를 선택하기 전에 샤려 핑의 [업보]를 훑어볼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다.
『베이징으로 공격해오는 고위괴수를 수호자로 만들어라.』
첸지 죠는 딱 이것만을 강조했다.
계약자의 독단으로 잃었던 8종 괴수를 회수할 수 있다!
생각만 해도 흥분되지 않은가.
미호 첸처럼 국가에 반기를 들지 않은 성실한…. 착하고 성실하긴 한데….
“한 공자님. 제가 잘할 수 있을까요?”
“흐음. 유일 왈. 깜찍이는 내가 보증한 미소녀니 잘해낼 수 있을 거다, 라고 하네.”
“아! 네! 저, 열심히 설득할게요!”
“...그래.”
첸지 죠는 한무일과 샤려 핑의 대화를 들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분명, 좋은 일이긴 한데 바람직하진 않았다.
사랑을 탓할 생각은 없다.
이건 샤려 핑만 해당하는 잘못이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새롭게 계약자가 된 ‘미소녀’ 전체가 이 같은 증상을 보이고 있다. 그 숫자는 한둘이 아니며, 샤려 핑 같은 미계약자도 해당한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계약 후에는 상사병처럼 심각하지 않다.
열렬하게 짝사랑하는 남자에서, 잘 따르는 친오빠 수준으로 떨어진다. 이건 수호자의 영향이리라.
‘나아지겠지.’
첸지 죠는 그렇게 위안 삼는 수밖에 없었다.
당장은 이 순간을 즐기기로 했다.
사랑에 국운이 좌지우지되는 경국지색(傾國之色)도 아닌 경국지남(傾國之男)에 흔들리는 현실이 기가 막히지만, 어쩌겠는가?
애초에 ‘괴수 대 인간’이란 현실부터 막장인데.
“엘퍼러. 호위만 준비하면 되겠습니까?”
“흠. 빠른 이동수단. 그리고 쑨우쿵을 제외한 잔당들을 부탁합니다. 이 기회에 테러리스트를 정리하도록 하지요.”
“너무 위험하지 않을지….”
“쑨우쿵이라면 계약에 실패하더라도 샤려 핑을 해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아이밍 리는 그렇지 않기에 막아야만 합니다.”
“아!”
준비는 대단히 빠르게 이루어졌다.
북해빙궁을 쓰러트리기 위해 6종 계약자 10명이 선발됐다. 나머지는 베이징을 나와서 인근 마을에 대기하기로 했다.
분명, 가장 중요한 곳은 베이징이지만, 중국은 도시만으로 성립된 국가가 아니다. 위험을 감수하고 사는 수많은 마을이 인구를 늘리고 국력을 끌어올렸다.
절체절명의 위기라면 포기하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든 보호해줘야 한다. 노블레스도 아닌 사냥꾼은 믿음직스럽지 않다.
“퐁퐁.”
“네. 전하! 모실게.”
발키지어 ‘펠-쉐어퐁’이 무일을 안고 날아올랐다.
샤려 핑의 호위를 맡긴 쉬임프 ‘플로티날 아브롤라’와 에쏘드 한세리, 한유나는 수송헬기로 뒤쫓아왔다.
하늘을 나는 6종 용이 그 주위를 에워쌌다.
며칠 안 된 따끈따끈한(?) 계약자를 품에 안거나 등에 태우고 있다
그야말로 장관!
이 전력이면 세계대전도 해볼 만하리라.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첸지 죠는 입안이 바짝 말랐다.
절대로 거품이 아니란 걸 보여줘야 했다. 수호자가 제멋대로 행동해서 빛 좋은 개살구인 국가가 대단히 많다.
도쿄의 터줏대감 ‘오니오프’도 여기에 해당할까.
중화인민공화국은 그렇지 않다는 걸 보여줘야 할 때였다.
(원정대는 4시간 뒤에 시작하겠습니다.)
(예. 그렇게 준비하겠습니다.)
이 순간에도 다음 일을 생각하는 엘퍼러의 담담한 말투에, 국가주석은 황당 반 감탄 반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철두철미하게 사는 걸까.
중국은 8종 수호자를 회수했다며 크게 홍보하며 축제라도 벌일 계획까지 짜고 있었다. 그런데 일등공신이 될 남자는 곧바로 본연의 일로 돌아가겠단다.
이쯤 되면 솔직히 질린다.
본인은 ‘남들만큼은 논다.’라고 하지만, 중국을 방문한 이후로 그가 취미활동인 애니메이션을 보는 광경을 본 적이 없다.
중국의 만화가 재미없어서?
절대 그렇지 않다고 첸지 죠는 단언할 수 있다!
“보이는군.”
통신을 종료한 무일은 바글바글한 쑨우쿵 무리를 볼 수 있었다.
금색 털로 온몸이 덮인 원숭이.
바위 계열의 회색 갑주를 입고 인간처럼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다. 신장은 대략 2m가 좀 넘었고, 오른손에는 긴 봉이 들려있다.
‘여기서 착륙해야겠어.’
공중공격에 취약하다고 알려진 쑨우쿵이지만, 그건 거짓이다.
손에 들린 봉을 투척해서 상대를 떨어트린다. 그게 한두 개면 피하겠지만, 하늘을 꽉 매운 3천은 피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현재 위치에서 착륙합니다.)
뒤쫓아오는 헬기 조종사에게 연락했다.
더 가까이 오면 헬기는 고슴도치가 될 테고 공중분해 될 소지가 다분하다. 그전에 착륙해야 안전을 확보할 수 있다.
(네. 엘퍼러.)
(그리고 샤려 핑 양을 놔두고 후방으로 후퇴하십시오.)
(예?!)
(괜찮습니다. 저를 믿으십시오.)
(그런…. 네, 알겠습니다.)
조종사가 마지못해 답했다. 저렇게 예쁜 아가씨를 죽음의 위기 속에 던져놓는다는 건 양심적으로 못할 짓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말단.
까라면 깔 수밖에 없는 위치였다. 더구나 상대는 불가능도 가능케 한 인류 최강의 프로사냥꾼 겸 고위괴수였다.
그런 한무일의 지시는 끝난 게 아니었다.
(비룡 편대에 알립니다. 쑨우쿵이 진격을 멈추는 즉시, 테러리스트를 강습합니다. 제가 신호를 보내겠지만, 늦으면 샤려 핑 양의 목숨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한유일의 [예지]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이걸 못하면, 계약자를 ‘또’ 잃은 쑨우쿵은 완전히 폭주할 것이다. 그리고 사령탑이 20마리 이상으로 순식간에 불어나리라.
그때는 엘퍼러도 막을 수 없다.
‘물론, 그전에 대비하겠지만.’
괴수의 [예지]는 그야말로 놀라운 신세계다.
위기상황에서만 발동되는 [예감]보다 좀 더 고차원적이다. 흠이라면 ‘믿음’에 관계없이 능력이 일정하다는 정도.
발전이 없다.
현재, 엘퍼러가 쓰는 [예지]는 3종 수준이다. 여기에 [예감]과 [예측]을 곁들여서 먼 미래까지 내다보는 것이다.
굳이 발전시켜본다면?
열심히 ‘흡혈’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면 5종쯤은 되리라. 그렇더라도 쉬임프처럼 사기적인 수준은 무리지만.
두드드드….
황금빛 원숭이 무리가 대지를 뒤흔들며 샤려 핑의 지척에 도달했다.
눈을 질끈 감은 소녀의 모습을 애처로웠다.
그때,
마법 같은 일이 발생했다.
“우끼끼?!”
“우키?!”
진격을 멈춘 쑨우쿵은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샤려 핑의 ‘삶’을 읽고, 누군가의 복제품이란 낙인을 달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복제원숭이는 진한 동질감을 느꼈다.
그런데….
생판 남인데?
눈앞에 여인하고는 아무런 인연이 없다.
하지만….
포기하자니, 복수를 끝낼 때까지만 일시적으로 동맹 맺기로 한 녀석들이 ‘똑같은 생각’ 중이란 확신이 없었다.
저 탐나는 여인을 데리고 가버린다면?
절대로 그런 꼴을 두고 볼 수 없다!
“보, 복수는 옳지 않아요!”
조심스럽게 눈을 뜬 샤려 핑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외쳤다.
그게 결정타였다.
쑨우쿵은 1,000년도 더 이전에 계약했던 ‘비구니’를 떠올리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너무 빨리 늙어버려서 17년 만에 곁을 떠나야 했던 보물.
미호 첸은 똑같이 ‘비구니’라서 선택했을 뿐이다. 눈앞에 여인처럼 심성(心性)까지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았다.
지금이 훨씬 낫다.
예쁜 옷차림에 긴 머릿결….
기나긴 젊음.
“우키!”
“우끼끼!”
곧바로 동맹은 파기됐다.
복수? 저 여인이 옳지 않다고 하잖은가!
다른 이유는 필요 없다.
3만이란 어마어마한 대군이 서로에게 봉을 겨눴다. 그리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싸움이 시작됐다.
그 머릿수가 3천으로 줄어들 때까지.
사령탑이 하나 남을 때까지.
그러면서도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샤려 핑을 호위하듯 원숭이들이 철통같이 감쌌다. 이건 한무일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쑨우쿵의 표정은?
신선주(神仙酎)를 마신 것처럼 헤벌쭉.
한유일이 으스대듯 말했다.
‘봐봐. 깜찍이가 잘할 거라고 했지?’
‘...깜찍은 모르겠고, 깜짝 놀랐다.’
< [40화-2] 고대의 전설을 보면….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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