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4] 중원을 찾은 용사 >
‘무일! 북해 가자! 북해!’
‘......’
‘일어나라! 동정! 아니면 그냥 가겠다!’
‘...뭐래?’
한창 꿀잠 중이던 한무일은 알람처럼 시끄럽게 떠드는 한유일 탓에 짙은 고요 속에서 서서히 정신을 일깨웠다.
잠든 사이에 뭘 하는지는 사후보고 형식으로 느낀다.
첸지 죠가 뭐라고 했는지도 막 이해했다.
‘일석이조(一石二鳥)다! 백성도 늘리고 범죄도 막고!’
‘흐음…. 아이밍 리, 라….’
나쁜 의견이긴커녕 좋은 생각이다.
다만, 지금은 원정 중이다.
끝난 다음이면 몰라도,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테러리스트를 잡겠다고 북해까지 가기는 여러모로 문제가 많았다.
하지만 한유일도 막무가내는 아니었다.
나름대로 생각해둔 계획이란 게 있었다.
‘유인하면 된다!’
아이밍 리는 미녀우월주의자.
그녀가 ‘명분’으로 삼은 대의란 것도 ‘미녀를 위해서’다.
현재, 미소녀들이랑 시시덕거리는 ‘하렘의 왕’을 대단히 못마땅해 하리라고 생각된다. 그녀가 단순한 살인범, 파괴범이 아니라면.
내세우는 목표가 있다.
북해빙궁이란 반정부단체를 움직이는 뚜렷한 정의!
‘어떻게 유인하려고?’
‘당연한 것 아닌가. 도발한다!’
매일 수백에 달하는 미소녀와 노니는 엘퍼러란 존재를 묵인하는 ‘북해빙궁 궁주는 말로만 미녀를 위하는 파괴자다!’라고 소문낸다면?
뻔한 도발.
함정이란 것도 쉬이 눈치챌 수 있다.
하지만 북해빙궁이란 반정부조직이 와해하는 꼴을 원치 않는다면 모습을 드러내는 수밖에 없다.
엘퍼러가 찔끔찔끔 건드리는 거였으면 무시해도 괜찮다.
그러나 매일 수백의 미녀가 자지러진다.
중국의 계약자는 사실상 괴멸, 엘퍼러를 사랑하는 마음의 노예나 다름없다.
이 심각한 사태를 위험하다는 이유로 피한다면?
‘아이밍 리는 신뢰를 잃겠군.’
‘도발에 안 넘어와도 좋다. 실망한 배신자가 분명 나온다!’
꼭꼭 숨은 테러리스트의 위치만 알아내면 그 뒤는 일사천리다.
한 번 파악한 ‘적’은 프로사냥꾼의 [예감]을 통해, 지구 반대편까지 정확히 추적할 수 있으니까.
그녀의 수호자 ‘프린스트’가 제법 잘 싸우는 모양이지만….
엘퍼러의 상대는 아니다.
‘...너답다고 할까.’
무일은 생각할 수 없는 계획이었다.
난봉꾼이란 평판이 두려워서가 아닌 순수한 거부감. 계약자 혹은 미계약자에게 민폐 끼칠 행동을 배제하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하지만 한유일은 그런 게 없었다.
애초에 ‘하렘의 왕’에게 ‘한 여자로 만족 못 한다.’는 이미지는 자연스럽게 딸려오는 옵션 같은 거였으니까.
일반적인 뱀페스트하고는 마음가짐에서 차이가 나지만, 다수의 미녀를 확보하고 싶어하는 마음은 ‘뱀페스트 왕’의 본능이었다.
흠이 아니라 삶.
많은 암컷을 거느린 수컷 사자와 고래처럼.
‘무일. 지켜보기나 해라.’
‘흠. 대신, 실패하면 남은 기간 내내 숨죽이고 있어.’
한유일이 중국에서 뭘 하는지는 전부 알고 있다.
그럼에도 가만 놔두는 이유는 ‘흡혈’을 일절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냥 인기가 많은 걸 어쩌란 말인가.
원정대 첫날은 넘어가고 둘째 날부터 ‘소녀의 순결과 피를 당신께….’ 어쩌고 쓰인 고백편지가 줄줄이 쌓이기 시작했다.
그마저도 막으면 ‘자유시간’이 아니다.
성가시게도….
이건 한무일의 ‘양심’에 위배 돼서 막을 수 없다.
‘좋다! 위험부담이 역으로 나를 더욱 흥분시킨다!’
‘...잘해보라고.’
남은 시간을 확인한 무일은 다시 수면에 빠졌다.
이제 2시간 남짓.
한유일도 시간을 확인했다.
원래는 미소녀들이랑 좀 더 친해진 후에 혼욕(!)까지 해볼 의도였지만, 아무것도 모른 채 멀찍이서 쫓아오는 첸지 죠에게 되돌아갔다.
“죠 씨.”
“...네. 그런데…. 어째선지 불안하군요.”
“해줬으면 하는 일이 있다.”
“제가 도울 수 있는 부분이라면 최대한 협조하겠습니다.”
“뭐냐면….”
한유일은 빠르게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심지어 작전명도 붙였다.
『천음절맥 포획작전!』
작명감각은 숙주처럼 별로였지만, 국가주석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아이밍 리를 생포한다고?
괜히 얘기를 꺼냈다고 살짝 후회했다.
6종 계약자가 무려 40명이다. 이 정도 물량이면 7종하고도 건곤일척의 승부를 봐서 이길 수 있는 전력이다.
그래서 첸지 죠에게도 계획이 있었다.
‘중국의 용을 전 세계에 알릴 희생물이었는데….’
분명, 대단한 장관일 것이다.
용들이 테러리스트 수호자와 그 일당들을 순식간에 일망타진하고, 홀몸이 된 북해빙궁 계약자들을 체포하는 광경!
이 얼마나 대단한 광고효과겠는가.
게다가 범죄자들의 ‘자궁’은 국가소유다.
계약자를 출산할 확률이 높은 북해빙궁 여인들은 끊임없이 출산해줄 것이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처럼.
사실은 이게 가장 중요하다.
“크흠! 범죄자는 왕의 품격에 떨어지지 않겠습니까.”
“아니지. 범죄자마저 감복시키는 뛰어난 왕이다.”
첸지 죠는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한유일은 포기할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괜히 가르쳐줬어!
그런 후회가 뒤늦게 찾아왔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다. 그리고 ‘중국 계약자들이 모두 엘퍼러에게 해롱해롱 중!’이란 소문도 곤란하다.
어떻게 할까?
사실은, 답이라면 진즉 나왔다.
그저 아쉬움에 질질 끌어봤을 뿐이다.
“아이밍 리는 저희가 잡아드리겠습니다.”
“그럼 모양새가 안 나는데….”
“엘퍼러에게 안 좋은 소문이 나면 껄끄럽지 않겠습니까. 많은 여성을 독점하는 남성에게 인간사회는 대단히 부정적입니다.”
“이해가 안 돼.”
암컷은 강한 수컷의 유전자를 받아서 후대에 전할 의무가 있다. 본능에 따라 능력 있는 수컷에게 끌리기도 하고.
패배한 수컷의 열성인자는 사라지는 게 맞다.
그런데 이 ‘백성 낳는 원숭이’들은 ‘일부일처(一夫一妻)’란 괴상한 법까지 제정하며 열성인자를 계속 남겨둔다.
한유일이 처음 그 얘기를 들었을 때는 감탄했다. 적국(敵國)에 몰래 바이러스, 생화학무기처럼 열성인자를 파견해서 서서히 약화(弱化)시킨다고 생각했었으니까.
그런데 웬걸?
자국(自國)에 나쁜 종자를 뿌린다.
한유일 눈에는 종족의 미래를 포기한 ‘자멸(自滅)’로 밖에 안 보였다.
“...제 위치가 위치인지라 답변을 드릴 수 없군요.”
인민 대다수가 안 좋은 유전자를 품은 해충이다!
이딴 소리를 할 순 없다.
용맹할수록 요절하는 사냥꾼은 ‘종자개량’이 시급하다고 진지하게 생각하지만, 이 또한 정답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
하렘의 왕이 국가주석에게 혀를 차며 핀잔줬다.
“백성 눈치 보는 왕이라니. 실격이다.”
“하, 하, 하….”
현재, 한유일이 똑바로 상대해주는 중국 남성은 ‘첸지 죠’가 유일했다.
나름 왕(王)이니까.
약소국(?)이라도 대우해주는 것이다.
그의 오른팔 격인 정보과장 ‘위진 창’이 이 자리에 안 보이는 것도 같은 이유다. 첸지 죠가 악몽의 ‘한유일 타임’만 되면 잽싸게 달려오는 것도 그렇고.
하렘의 왕은 ‘미소녀’만 상대해준다.
수컷이란 생물은 돌부처만도 못한 취급이다.
“대답을 회피한다는 건 동의한다는 뜻인가.”
“그건 또 아닙니다.”
첸지 죠는 쓰게 웃으며 설명했다.
인간은 약육강식, 적자생존으로 굴러가는 일반적인 동식물하고 다르다.
사회구조가 복잡하니까.
당장 ‘첸지 죠’만 하더라도 사냥꾼 쪽으로는 재능이 전혀 없다. 대신에 실타래처럼 엉킨 정치를 슬기롭게 풀어가는 입담과 결단력을 타고났다.
분명, 인간 중에는 한심한 인간이 대단히 많다.
하지만 그 자식들까지 한심하다고 단정할 수 없는 게 또 인간이다.
그 증거가 눈앞에 또 있잖은가?
『한무일』
사냥꾼 재능은 뛰어나지만, 인간성이 밑바닥인 부친(父親)하고 완전히 상반됐다.
그 결과가 유일무이한 9종 괴수 엘퍼러.
남들보다 신체적인 능력이 월등히 뛰어난 건 아니다.
만약, 한무일이 [예감]이란 MID 기술의 혜택을 못 받았다면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정의감 넘치는 사내’로 끝났으리라.
아무도 미래는 모른다.
평범 이하의 부부 밑에서 세계를 구할 위인이 태어날 수도 있다.
개천에서 용 났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뭐, 그건 너희 사정이니 그렇다고 해두자고.”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그래서, 너희가 천음절맥을 잡아준다는 거야?”
“예. 대신에 역병-, 흠흠!”
“역병?”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이밍 리를 확보하면 둘만의 조용한 시간을 보내주십시오. 한 공의 매력에 빠진 소저들이 업무를 내팽개치고 있습니다.”
내팽개치는 정도가 아니다.
사직서를 내고 한국으로, 목포로 떠날 조짐마저 보인다.
‘최은설이란 전직 6종 계약자가 그 역할을 한다지?’
하지만 중국은 여태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역병에 제대로 당했다!
상사병의 전염성은 대단히 뛰어났다.
그걸 목포에서는 ‘최은설’이란 ‘타고난 무당의 피’가 자제시켜온 것이다. 다른 여자에게 그가 한눈팔지 않도록 꽉!
페이 링이 함께 찍은 사진을 보고 ‘헉!’ 소리를 냈던 적도 있다.
최은설의 그 단아한 자태는 6종이 아니라 9종 계약자라고 해도 믿어질 아름다움이었다. 과거 사진과 비교되어 더욱 놀랐다.
이쯤 되면 전신성형이 아닌가!
아무튼, 첸지 죠는 한유일이 조용히 지내줬으면 했다.
분명 조용하긴 한데….
페로몬의 한계를 넘어선 감염력은 조용한 걸로도 부족하다. 마음 같아서는 무인도나 지하벙커에 놔두고 싶다.
하렘의 왕은 잠시 고민하다가 흔쾌히 수락했다.
“좋다.”
“오! 감사합니다.”
“대신, 천음절맥이 소문처럼 특별해야 한다.”
한유일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타고난 백성’인지 알 수 없다.
...그렇게 해서, 아이밍 리, 당사자의 의견이나 인권 등이 전혀 반영되지 않은 배팅이 시작됐다.
“물론입니다.”
첸지 죠는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아쉬운 점이라면 오랫동안 자국에 해를 끼친 테러리스트, 아이밍 리에게 제대로 된 처벌 한 번 못 가하게 됐다는 정도.
아미파 주지이자 8종 쑨우쿵 계약자 ‘미호 첸’처럼, 국가에 반항한 그녀에게 산고(産苦)라도 느껴게 해주고 싶었다.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의 씨를 낳고, 또 낳고….
(주석! 사령실로 와주십시오!)
(...과장. 역병-, 이보다 중요한 사안은 없으니 이 시간대에는 연락하지 말라고 분명 일렀던 걸로 아네만.)
(죄송합니다. 하지만 꼭 아셔야 할 문제입니다!)
한유일만큼 위험한 사안이라고?
첸지 죠는 불안해졌다.
“가봐. 나는 신경 쓰지 말고.”
“...같이 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뭔가 흥미진진한 일이 벌어질 것 같은데.”
위진 창의 말투로 봐서는 고위괴수의 침공이다. 그것도 무시 못 할 놈으로. 그래서 첸지 죠는 조금도 흥미진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걸로 해뒀다.
바로 눈앞의 역병을 놔두고 어딜 간단 말인가!
아직도 1시간이나 남았다.
그 시간이면 계약자 100명쯤 순식간에 당하리라.
전염병의 무서운 점은 초기에 못 잡으면 순식간에 번진다는 점이다.
괴수대응연맹 맹주와 잠깐 얘기에 사이에 스무 명이나 ‘하렘의 왕’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는 보고를 막 받은 참이다.
이대로 갈 순 없다.
“흠. 좋아. 속는 셈 치고 가보자고.”
“이쪽으로.”
느려 터졌다고 한유일에게 구박 듣길 1분.
첸지 죠는 땀을 뻘뻘 흘려가며 사령실에 들어설 수 있었다.
별것도 아닌 일로 이 고생을 했다면 정말 화나겠지만, 국가주석으로서 정말 별거 아닌 일이길 빌었다.
“주석! 놈이 돌아왔습니다!”
“놈?”
“쑨우쿵! 그 원숭이가 복수를 위해 베이징으로 남하하는 중입니다.”
“과장! 영성을 띄워보게!”
보기만 해도 속이 울렁거리는 원숭이 무리가 해일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전부 쑨우쿵이었다.
분노로 이글거리는 수만 쌍의 눈동자가 섬뜩하다.
저 하나하나의 능력은 4종.
하지만 그 숫자가 ‘천(千)’ 단위를 넘어서면 8종에 꿀리긴커녕 인류에게는 악몽 같은 위력을 발휘한다.
그 공격을 완벽하게 막았던 수호자는 폭풍의 정령 ‘엘로엘’뿐.
대자연 앞에서는 물량도 부질없으니까.
“정말 흥미롭네. 언제쯤 도착해?”
여유로운 건 한유일뿐이었다.
첸지 죠를 대신해서 위진 창이 답했다.
“집결이 완료되고 베이징에 도착하기까지 20시간쯤 걸릴 것 같습니다!”
이 순간에도 그 숫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추세였다.
그 다혈질 쑨우쿵이 바로 달려들지 않고 있다!
절대로 방심하지 않겠다는 뜻이리라.
저런 대병력은 고위계약자 수백 명으로도 턱없이 부족하다. 패하진 않겠지만, 베이징을 지킬 순 없다.
20시간 뒤면 한무일이 잠든 시간.
노렸다면 공모자 혹은 배신자를 의심 안 할 수 없었다.
우연일 확률이 더 높지만….
첸지 죠는 말했다.
“더 모이기 전에 먼저 친다!”
< [39화-4] 중원을 찾은 용사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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