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162화 (162/287)

< [39화-2] 중원을 찾은 용사 >

(오! 아몬 헤이젤 맹주. 무슨 일로 이 시간에 연락을 다 하셨습니까? 지금 노르웨이는 꼭두새벽일 텐데요.)

(...주석의 목소리만 들어도 상황을 알 수 있겠습니다.)

용이 승천할 기세다!

중국의 ‘국력’이란 숫자데이터가 얼마나 올라가는지 굳이 실시간 상황판을 안 보더라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중국은 지난 상하이 전투로 우수한 사냥꾼과 수호자 다수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평양 사건’으로 급격히 약해진 국가였다.

쑨우쿵이 죽고 에쏘드가 가출했으니까.

8종 계약자 ‘비비 황’ 한 명에게 의지한 채 간신히 버틴다고 해도 빈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웬걸?

(계약이란 게 이처럼 쉬운 건 줄 몰랐습니다.)

(어떻길래…?)

(잡히면 끝입니다.)

한국의 대책반장 최이슬이 못난 건 아니다.

하지만 ‘엘퍼러’에 대한 사전조사가 미흡해서 과소평가한 부분이 대단히 많았다. 그리고 엘퍼러는 그 뒤에도 터무니없이 강해졌다.

뱀페스트 왕.

그 타이틀도 달고 있다.

왕이란 개체는 종족이 달라도 나름 ‘대우’해주는 것 같았다. 인간이 약소국의 왕이라도 홀대하지 않는 것처럼.

그 정도가 괴수는 더 심했다.

하물며 ‘엘퍼러’는 약소국도 아니었다.

괴수만이 볼 수 있는 그의 [업보]는 혼자서 초강대국이란 표현으로도 부족했다.

『내가 곧 제국이다!』

중국 국가주석 첸지 죠가 느낀 엘퍼러는 그랬다.

계속 똑같은 패턴이다.

엘퍼러를 본 야생괴수가 줄행랑을 친다. 이건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범주다. 그런데 여기에 7종도 포함된다.

8종은 숨을 죽인 채 말똥말똥 쳐다본다.

그러면 변변한 싸움 없이 원정대는 지나간다.

(잡으면 끝나다니요?)

(말 그대로입니다. 맹주.)

엘퍼러가 도망치는 야생괴수를 쫓아가서 한 방 때려주면 얌전해진다!

그 뒤에 ‘적당한 처자’를 소개해주면 계약 완료.

전 세계를 경악게 했던 2324년도 대한민국 원정대하고 같은 패턴이었다. 하지만 그때와 차이가 있다면 6종의 장벽이 허물어졌다는 점이다.

『인연이 있어야만 계약할 수 있다.』

그 대전제가 무너진 것이다.

여전히 7종 위로는 깨지지 않았지만, 6종 야생괴수는 ‘왕이랑 싸우고 패했다.’는 사실도 내력(來歷)으로 취급하는 것 같았다.

『나를 쓰러트린 왕이 추천한 미녀? 오! 괜찮은데? 좋다! 계약해주지!』

...대충 이런 구도다.

중국은 여기에 맞춰서 발 빠르게 대응했다.

지난 한국의 전적으로 이미 많은 정보가 모인 상태다.

계약자는 처녀막만 살아있다고 되는 게 아니다!

그건 정말 ‘최소한의 자격 조건’이고, 남자에게 젖가슴을 내주거나 입술을 맞춰도 점수가 깎인다.

즉, 일상생활이 문란하면 안 된다.

여성부와 여성지도자들이 들고일어나서 ‘여성의 연애 자유와 권리….’ 어쩌고 했지만 묻혀버린 건 당연지사.

중국도 거기에 맞춰 계약자를 준비했다.

(현재까지 6종 계약자를 12명 확보했습니다.)

(맙소사…!)

아몬 헤이젤은 경악했다.

분명, 6종보다 7종의 가치가 높고, 7종보다 8종이 우월하다. 그리고 그건 무력적인 측면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하지만 야생괴수가 사방에서 도시로 쳐들어왔을 때는 7종 괴수 하나보다 6종 괴수 둘이 더 낫다.

그런 식으로 보았을 때….

중국은 맨땅에 도시를 하나 새로 지어도 될 만큼의 수호자를 확보한 셈이다.

문제는 이게 시작이란 점.

엘퍼러는 중국에서 짠 일정의 30%밖에 진행하지 않았다.

(5종부터는 수시로 갱신 중이니 생략하겠습니다.)

(그 정도입니까.)

(보고도 믿기지 않습니다. 뷔페에 온 것 같다고 할까요. 저희는 괴수를 고르고 엘퍼러는 미계약자를 고릅니다.)

모든 계약이 막무가내로 되는 건 아니다.

중국 대책반에서 원하는 야생괴수를 선택하면, 한무일은 그 괴수가 좋아할 법한 여성을 [예지]와 [예감]을 참고해서 뽑는다.

이걸 무시하고 진행하면 계약이 안 된다.

반반한 남궁세가 여식이 사정사정해서 6종 괴수와 맞선을 보도록 주선해줬다. 당연히 엘퍼러는 책임 안 진다고 못을 박았다.

그리고 응급실에 실려갔다.

괴수는 ‘문란한 계집’에게 조금도 관심 없었다.

(그런….)

(기분 상한 괴수를 달랜다고 아껴뒀던 7종 후보를 사용했습니다. 남궁세가에는 국가반역죄를 적용해서 재산 90%를 몰수. 엘퍼러에게 위자료 형식으로 보냈습니다.)

심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강력한 처벌이었다.

하지만 중국은 단호하게 추진했다.

물론, 나중에 따로 남궁세가에 선심 쓰듯 원조해주겠지만, 당장은 아니었다. 지금은 엘퍼러의 비위를 맞추는 게 우선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명문가 여식이 그렇게 싹수없을 줄은 주석도 몰랐다.

알았다면 미리 걸러냈을 것이다.

하지만 이놈의 명문가는, 자식들의 평판과 소문을 뒤에서 관리하기에 정보과에서도 알아내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주석. 어디까지 예상하고 있습니까.)

(흠. 결과는 나와봐야 알겠지만, 이대로라면 6종 계약자만 40명쯤 확보하지 않을까, 정보과에서는 그렇게 예측하고 있습니다.)

(40명…!)

아몬 헤이젤은 수화기 너머로 신음을 삼켰다.

중국의 인구가 많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5종 계약자도 아니고 6종 계약자가 40명?

지금이라도 농담이라고 해주면 좋겠지만, 첸지 죠는 중요한 사안으로 농담할 만큼 재치 넘치는 정치인이 아니었다.

유럽의 모든 국가가 보유한 6종 계약자를 다 합쳐도 20명이 안 될 것이다.

그런데 40명?

도시를 서너 개쯤 너끈히 세울 수 있는 전력이다.

(이쯤 되고 보니 노블레스는 무의미하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엘퍼러가 주선한 계약은 예외 없이 수호자가 온순한 편입니다.)

(괴수가 온순하다고요?)

(저도 믿기지 않아서 물어봤습니다.)

(뭐랍니까?)

맹주는 자신의 신분도 망각하고 주석에게 재촉했다.

그만큼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괴수가 온순하다니?

플라돈이 다이어트 한다는 유언비어만큼이나 믿기지 않았다.

(천생연분이라고 하더군요.)

(예…?)

(괴수의 취향에 부합하는 여인을 이어주면, 정신을 교감하는 과정에서 수호자가 좀 더 인간적으로 변한다고 합니다.)

(아….)

예전에 이미 나왔던 학설이고 제법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그 ‘천생연분’을 알 방도가 없었다.

같은 인간끼리도 부부싸움이 빈번한 판국인데, 괴수와 미녀의 조합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엘퍼러는 그게 보이는 모양이다.

(이게 참 놀랍더군요. 그는 [예지]를 씁니다.)

한국 원정대 당시에도 엘퍼러는 눈대중으로 계약 가능성을 파악했었다.

뱀페스트 숙주에게도 미녀의 순결, 행실, 성형 여부 등을 판별하는 식견이 조금씩 생기고 여기에 [예측]을 가미한 것이었다.

하지만 한계가 명확했다.

참한 여자를 알아볼 순 있지만, 어떤 괴수와 ‘천생연분’인지는 맞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한계를 깼다!

미래를 알기에 ‘결과’도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괴수의 [예지] 말입니까?)

(예. 정확히는 한유일이 [예지]해서 숙주에게 전하는 식이지요. 하지만 둘은 항상 교감하기에 따로 구분할 필요는 없습니다.)

(뱀페스트 왕….)

잊고 있었다.

미소녀(!)를 사랑하고 숙주에게 협조적인 괴짜 흡혈귀.

현재까지 에쏘스트 중에서 [예지]를 썼다는 얘기는 단 한 건도 없었다.

그야 당연했다.

에쏘드와 [혼돈]으로 뱀페스트를 억누르고 있는 것뿐이니까.

자신의 힘만 착취하는 숙주를 좋게 볼 리 없다. 한무일만 하더라도 자신의 ‘시간’을 한유일에게 일부 양보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얻은 [예지]는 막강했다.

(더 궁금하신 점이라도?)

첸지 죠는 자랑하고 싶어서 안달 날 소년 같았다.

하기야 그럴 것이다.

고대하던 원정대 시작 3일째.

아직 공개하진 않았지만, 중국 정보과에서 예측한 자국의 ‘국력’은 ‘국력 불변(不變)의 이집트’를 뛰어넘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가파르게 상승 중이었다.

러시아와 인도의 항의문과 맹비난이 이처럼 달콤하게 들릴 줄 몰랐다.

(5종의 숫자를 알 수 있습니까?)

모든 국가에서 전력으로 판단한 등급은 5종부터다.

그 밑은 첨단무기로 대처할 수 있고, 고위괴수로 싹쓸이하면 그만인 까닭이다.

맹주의 질문에 주석은 ‘잠시….’라고 말한 직후에, 비서에게 ‘5종은 몇이나 되는가?’라고 묻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렸다.

기가 막혔다.

‘5종은 안중에도 없다는 건가…!’

그 어떤 나라도 5종을 무시할 수 없다.

5종 야생괴수가 도시로 침투하면 대형사고, 비상사태로 취급한다. 그만큼 5종은 강력한 생명력과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다.

프로사냥꾼 다수가 목숨 걸고 고위수호자가 올 때까지 시간을 버는 괴수가 5종이다. 차라리 7종부터가 더 알기 쉽다.

영역에서 잘 움직이지 않는 놈들은 늘 인공위성으로 위치를 마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5종과 6종은 자유로운 영혼!

시시각각 변하는 위치는 종잡을 수 없다.

(170마리쯤 된다는군요.)

(허….)

미쳤다.

저 정도 숫자라면 누구라도 안중에 없을 만하다.

뭔 5종이 1종처럼 바글바글했다.

그런데 첸지 죠가 덧붙이듯 이상한 소리를 했다. 정말 이상했다.

(당연히 현재까지입니다.)

(현재…?)

(최소 6백은 확보할 수 있을 거라고 정보과에서는 파악하고 있습니다.)

(......)

(물론, 어디까지나 파악일 뿐입니다. 수호자 주거지를 확보 못 해서 현실적으로는 5백이 한계일 것 같습니다.)

(......)

(맹주?)

(듣고 있습니다….)

솔직하게 국가기밀정보를 알려준 첸지 죠에게 감사해야 할까.

이건 명백한 자신감의 발로였다.

그보다 더 무서운 건?

이렇게 자선사업 하듯 퍼줘도 압도할 수 있다는 엘퍼러의 자신감. 어쩌면 그런 자신감도 그에게는 없으리라.

『인류가 좀 살만해지려나?』

그런 뿌듯함이나 느끼고 있지 않을까.

하지만 압도할 수 있다는 점만은 확실할 것이다.

왜냐?

중국의 성장이 위험하다면 엘퍼러의 [예감]이 경종을 울렸을 테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이미 명확하다.

물량공세는 문팽이의 ‘중력장’ 앞에 무의미하다. 그리고 8종 이하의 모든 괴수는 엘퍼러의 [업보]를 보는 순간 전의를 상실한다.

야생괴수가 아닌 수호자라도 다를 게 없으리라.

하물며 엘퍼러가 계약을 주선해주는 과정에서 좀 팼다!

계약자가 엉덩이를 씰룩이며 부탁해도 엘퍼러에게 덤빌 마음이 생길 리 없다.

(러시아와 인도 좀 달래주십시오. 좀 시끄럽군요.)

(그러지요.)

이건 뭐, 경쟁국이란 표현이 무색하다.

바로 3일 전까지, 러시아와 인도는 중국의 경쟁국을 넘어 위협국가였는데….

이쪽은 5종 숫자보다도 안중에 없는 것 같았다.

엘퍼러가 방문하자마자 상식과 균형, 질서가 파괴됐다.

(헉! 한유일이 나올 시간인 모양입니다. 벌써 그렇게 됐나! 이 흡혈귀는 미소녀 꾀는 귀신입니다. 상사병을 뿌리고 다니는 재앙이지요!)

(......?)

그러니까, 상사병(相思病)…?

사랑의 열병 말인가?

이해하기까지 시간이 좀 필요했다.

(마지막으로 하실 질문 있으십니까? 시간이 촉박하군요! 저 폭탄을 6시간 동안 막지 못하면 우수한 계약자 다수를 잃고 말 겁니다.)

재앙이라고 할 정도의 비상사태?

쭉 느긋했던 첸지 죠의 목소리에서 처음으로 피로와 공포를 느낄 수 있었다. 하기야 9종이 만만할 리 있나.

자칭 ‘하렘의 왕’인 줄 알았는데 진짜였던 모양이다.

아몬 헤이젤은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용은 좀 확보하셨습니까?)

(아, 네. 5종은 대충 눈에 띄는 대로 모았습니다.)

(......)

정말 건성으로 답하는 주석.

하지만 뒷말은 조금 소름 돋았다.

(6종은 전부 용으로 하는 중입니다.)

(현재까지 12명 전원?)

(네. 용신(龍神)은 6종도 인연이 필요해서 포기했지만, 비룡(飛龍)과 수룡(水龍)으로 꽉꽉 채우는 중입니다.)

그걸로 통신은 종료됐다.

할 말을 잃은 아몬 헤이젤을 놔두고, 첸지 죠는 집무실을 박차고 복도를 질주했다. 기분에 휩쓸리는 바람에 시간을 너무 지체했다.

한유일은 ‘역병’이었다.

미소녀를 상사병에 빠트리는 신개념 테러리스트!

귀중한 인민을 구하기 위해 국가주석은 체면도 잊고 뛰었다.

‘제발 늦지 않았기를…!’

< [39화-2] 중원을 찾은 용사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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