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4] 협객, 그 이름 >
“엘퍼러. 게임도 하십니까?”
“네. 조금씩….”
직접 키운 건 아니지만.
가상이 최고니 현실도 최고!
현실이 최고니 가상도 최고!
...이런 인간은 꿈에서나 존재한다.
어째서 안 되느냐?
그 이유를 요목조목 설명하자면 정말 한도 끝도 없으니 생략하자.
게임 캐릭터가 현실에 적용되는 놀라운 기술이라도 없는 한, 그 반대라면 게임의 존재의의를 모르는 바보라서 망한다는 것만 알면 된다.
무일은 대충 얼버무리려고 했지만, 위진 창의 눈빛이 달라졌다.
‘가상현실게임을 한단 말이지?’
안 그래도 이번에 제작한 교육프로그램을 시험해보고 싶었다.
과연, 진짜 용사…. 협객에게는 얼마나 먹히는지를.
그들의 목적은 용사가 아닌 협객이다.
무슨 차이냐?
에쏘드를 쓰기에는 ‘영웅’ 속성이 매우 진하다. 더욱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사리사욕을 챙기는 위선자란 뜻이다.
중원 최고의 절세미녀를 쟁취해놓고서 ‘나는 욕심이 없소!’라고 뻔뻔하게 나오는 녀석은 진짜 개새끼다.
하지만 중국은 그런 자들을 원한다.
대단한 미녀?
능력이 된다면 얼마든지 주겠다!
대신, 사냥개가 되라.
“나중에 저희가 만든 게임 테스트 좀 부탁합니다, 엘퍼러.”
“베타테스터?
“예.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본인은 ‘누구도 내 의지에 간섭할 수 없소!’라고 생각한다.
그게 핵심이다.
사방에서 박수 쳐주는 걸 자신이 잘했기 때문이라고 믿어주면 된다. 환호해주는 권력자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라는 것도 모른 채.
중요한 건 믿음이다.
뱀페스트의 지배를 초월할 수 있는 강력한 정신력만 깃들면 된다.
덤으로 [예감]과 [예지]의 극대화!
‘비평만 안 받으면 좋겠는데….’
그렇기에 위진 창은 엘퍼러의 호평을 기대 안 한다.
교육프로그램은 ‘영웅’이란 협객을 만드는 것이지 ‘용사’를 만드는 게 아닌 까닭이다.
영웅과 용사는 똑같이 강하다.
강압적으로 조종할 수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차이가 있다. 용사는 주위의 시선과 평판에 흔들리지 않아서 영웅처럼 제어할 수 없다.
그건 어느 나라에서나 달갑지 않은 존재다.
대한민국 정부에서 ‘엘퍼러’를 손 놓은 것처럼.
“정보과장님. 지금 해볼 수 있을까요?”
“지금…. 말씀입니까.”
“내일부터는 바쁘게 움직여야 할 것 같아서요. 선지혜에게 할당해야 하는 시간, 유일 녀석의 자유시간까지 고려하면 굉장히 팍팍할 겁니다.”
“아! 5분만 기다려주십시오.”
나쁘지 않은 제안이다. 아니, 기꺼이 바라는 바다!
빨리 시험해볼수록 시간을 아낄 수 있으니까.
회의가 마침내 끝났다.
이번 원정대의 총국을 맡은 중국 대책반은 일정표를 수정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시간표만 고친다고 되는 게 아니다.
미계약자들이 제시간에 맞출 수 있도록 일일이 ‘통보’해야 한다. 엘퍼러를 보조할 프로사냥꾼과 도우미들에게도 알릴 필요가 있다.
어디 그뿐이랴?
야생괴수의 위치도 재조사해야 한다.
철새처럼 이동하는 괴수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마주치면 대단히 성가신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그 대표적인 괴수가 자이엔트.
5종 초대형 개미 외에도 정말 많다.
[시스템: 이름을 말씀해주세요.]
일반적인 게임이랑 다른 점은 능력치 같은 수치화된 게 없었다.
친절한 인터페이스도 없고 경고음은 물론 없었다.
접속 시간은 대략 10시간.
성장하는 단계를 건너뛰고 본격적인 ‘협행(俠行)’을 하는 시점부터다.
수면은 물론이고 대소변까지 현실적!
위진 창의 게임설명으로는 그렇다고 하더라.
“살려주세요사악한마인이쫓아와요구해주시면충분히사례를할게요!”
“...뭐지?”
“잘생긴공자님저를도와주세요!”
“......”
대사는 물론이고 세상이 빠르게 휙휙 지나갔다.
적응 못 할 정도는 아니지만, 시작부터 현실감이 떨어졌다.
평범하게 ‘한무일’이라고 이름을 짓고 본격적으로 무림에 발을 내디뎠다.
현실에서는?
“과장님! 문제가 생겼습니다!”
“뭔가?”
“뇌를 가속하는 물약이 안 먹힙니다! 아무래도 숙주를 보호하는 에쏘드나 뱀페스트의 영향 같습니다.”
“...잘만 돌아다니고 있잖은가.”
“세상이 10배 빠르게 흘러간다고 느끼는 중일 겁니다!”
“......”
얼마나 기가 막힌 세상일까?
그럼에도 무일은 빠르게, 정말 빠르게 익숙해졌다.
싸울 때마다 괴수를 상대하는 심정이란 걸 제외하면 어떻게든 됐다.
‘더 쉬운가…?’
괴수 사냥은 육체적 약세를 갖고 싸운다. 그에 비하면 비슷하거나 아예 우위를 점한 육신을 갖고 있으니 정말 양반이었다.
현실 시간으로 2개월.
게임에서는 2년 남짓한 시간 동안 무림을 돌아다니며 악당을 무찌르고, 음모의 흔적을 뒤쫓으며 단서를 수집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한무일은 현실 시간으로 9시간 만에 클리어.
그러니까….
나흘 만에 무림을 구했다!
“...저게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함께하던 동료가 사실은 모든 악의 세력 배후였다는 걸 눈치챈다면 이론상으로는 가능합니다만….”
부하가 말끝을 흐렸다.
목숨을 건 진검승부여야 할 최종결전은 허망하게 끝났다.
동료가 된 지 이틀 만에 기습으로 일격필살!
게임시스템에 내장된 ‘최종 보스 대사’와 ‘사기적인 무공 기술’ 등은 나와보지도…. 앤딩 동영상하고는 완전 딴판인 결말에 도달했다.
아무튼, 게임은 클리어 됐다.
“흐음. 졸개인 줄 알았는데 두목이었군요. 무림을 체험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접속을 종료한 청년은 그렇게 감상평을 내놓았다.
위진 창은 입안에 파리가 들어가기 전에 다물고는 질문했다.
“...한무일 씨. 어떻게 알았습니까?”
“처음부터 수상했습니다.”
“어느 부분이….”
“갑자기 전투에 난입해서 한 번 같이 싸운 후에 대뜸 친한 척. 그리고 억지로 동행, 신분도 불투명, 비정상적인 강함. 전부 이상했습니다.”
그렇다고 뚜렷한 명분이나 신념이 있는 것도 아니다.
태도도 글렀다.
신비주의로 일관하지만, 밤새 술잔을 나누며 살짝 대화했다. 그리고 동료의 사상이 대단히 위험하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
그런 자가 어떻게 고된 수련을 견뎠을까?
답은 간단하다.
『처음부터 강하게 설정됐다.』
착한 척하는 건달이 에쏘드를 휘두르는 이질감.
동료로 정말 함께하기 싫은데 끈덕지게 달라붙는다. 게다가 세상에 도움을 줄 것 같지도 않아서 벴다.
단지 그뿐이었는데….
아리따운 소저와 술래잡기 한 번 못해보고 게임이 끝나버렸다!
대단히 유감스러웠다.
“허어…. [예측]입니까?”
“흠. 그럴 지도요. 읽어본 무협소설들이랑 비슷하기도 했고.”
그럴 것이다.
큰 그림은 ‘판판 소’라는 유명한 작가가 짰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간단히 파악될 줄은 몰랐다.
‘대단히 유명한 작가인데?’
이게 소설이었다면 프롤로그만 읽고 에필로그를 추론한 셈이다.
그런 작품은 아무도 돈 주고 안 읽는다.
하지만 ‘판판 소’는 유명한 작가. 그리고 수입도 대단하다. 절대로 그런 삼류작품을 쓸 위인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게 무슨 일일까?
위진 창은 솔직하게 털어놓고 조언을 청했다.
“실수하셨네요. 현실적인 가상현실프로그램을 만든다면서 판타지 작가를 끌어들이다니.”
“어째서입니까?”
“동화처럼 다룬 현실이 현실처럼 보일 리 없지요.”
“아!”
예쁜 여자를 구해줬더니 당장 옷 벗고 신혼방 차릴 기세다.
현실은 이렇게 단순한 공식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조무래기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나쁜 짓을 저지르지만, 악당 두목쯤 되면 자신만의 확고한 철학이 있다.
그 철학이 다수를 불행하게 만들기 때문에 ‘악(惡)’인 것이다.
반대로 과반수의 공감을 얻고 행복을 주면 ‘선(善)’이다.
하지만 판타지소설은?
그런 거 없다.
테러리스트들도 사명과 목적이 있는데, 이것들은 졸개나 두목이나 할 것 없이 살인과 파괴만을 즐긴다.
골목대장도 아니고….
그 거대한 조직이 어떻게 형성됐고 굴러가는지 신기할 지경이다.
강자에게 절대복종?
가장 비현실적이다.
“교육프로그램이라고 하셨는데…. 순수한 게임 목적이 아니면 권하고 싶진 않군요. 현실과 괴리감이 너무 심합니다.”
“그렇습니까….”
“협객. 협객을 길러내고 싶은 거지요?”
“...맞습니다.”
주인공이 ‘협객’이란 설정이니 당연하겠지.
이건 질문이 아닌 확인이었다.
이 교육프로그램에서는 사람들이 노골적으로 칭찬 일색이었으니까.
가족의 생계가 달린 일터와 논밭을 부수면, 상대가 절정고수든 신선이든 보상해달라고 대들어야 정상이다.
목숨? 귀한 건 맞다.
하지만 사랑하는 가족들이 길거리로 나돌게 생겼다.
그런데 이게 웬걸?
살려주셔서 감사하다고 절을 하며 칭송한다!
누가 나쁜 놈이었든 앞으로 살길을 막아놓은 관련자에게.
“만약…. 이대로 교육을 모범적으로 마친 사람이 사회에 나온다면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어째서 칭송하지 않고 불만을 제기하느냐.”
“흐음!”
“그 불만이 폭발하면 더는 협객이 아니게 됩니다.”
“......”
“현실을 아는 협객을 키우십시오.”
아무래도 ‘판판 소’에게 맡긴 건 악수였던 것 같다.
현실과 환상의 간극(間隙).
그 틈을 메꾸지 않으면 이 교육프로그램은 100% 실패다.
대가와 명성을 바라는 건 좋다.
하지만 그 달콤한 과실에 눈과 귀가 막히는 순간, 테러리스트가 될 것이다. 자기와 맞지 않는 세계를 극단적으로 싫어하는 파괴범.
‘어쩔 수 없나.’
게임개발자와 소설작가들이 잘하는 착각이 이거다.
내가 만들었으니 완벽하다!
아무리 다그치고 설명해도 듣질 않는다.
이번 경우에도 교육프로그램의 ‘용도’와 ‘목적’을 벗어나서, 사용자가 아닌 개발자의 자기만족의 성향이 짙게 반영됐다.
중국에서 바라는 ‘협객’이란 그랬다.
명성과 미녀만 던져주면 말 잘 듣는 사냥개.
“...대단히 어렵군요. 교육시간도 훨씬 많이 걸릴 겁니다.”
용사 만들기보다야 쉽다.
애초에 용사를 키울 생각도 없었고.
하지만 한무일이 제시한 ‘협객’은 대단히 까다롭다. 현실을 직시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을 필요로 한다.
간단히 말해서,
듣기 싫은 소리도 포용하는 인물이 돼야 한다.
“10년이 걸린다면 11년째부터 매년 이수자(履修者)가 쏟아져나올 겁니다. 당장 효과를 보겠다고 무리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요.”
“흐음….”
“협객, 대협. 호칭이 뭐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무일이 진지하게 조언하는 이유는 하나다.
중국에서 ‘내 노력을 몰라주는 세상 미워!’를 외치는 범죄자와 살인마가 양산되면 인류가 고달파진다.
문팽이 때하고는 다르다.
그때는 자연재해였고 이건 자업자득(自業自得)이다.
“고쳐야 한다는 건 확실히 알았습니다.”
겨우 9시간 만에 클리어 됐다.
충고는 한무일의 주관이 섞였지만, 이것만은 객관적인 사실이다.
우선….
판판 소의 ‘뻔한 무협’은 아웃!
오락 요소에 치중한 결과, 현실성을 포기했다. 이대로 진행한다면, 한무일처럼 대뜸 동료를 죽이는 인간이 분명 또 나올 것이다!
그건 바람직하지 않다.
“슬슬 이동할까요. 이 녀석을 잘 부탁합니다.”
“예?”
“...앞장서라! 창 씨. 미소녀 만나러!”
언행에서 진지함이 수증기처럼 증발한 엘퍼러.
더는 한무일이 아니었다.
나태, 방탕 오로라를 온몸에 두른 한유일이 위진 창을 재촉했다.
정보과장은 ‘하렘의 왕’을 보며 이해했다.
‘현실성을 포기하면 이렇게 되는 건가…!’
< [38화-4] 협객, 그 이름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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