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3] 협객, 그 이름 >
그건 더 싫었던 걸까?
퐁퐁은 그 뒤로 새색시처럼 얌전해졌다.
두 에쏘드는….
관광객처럼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한유나는 길을 잃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그 옆에서 뻐기듯 이것저것 가르쳐주는 한세리는 그냥 얄미웠다.
“환영합니다.”
“어서 오십시오.”
호텔로 들어선 무일은 대통령 혹은 왕이 된 기분이었다.
장식해서 돈을 쓴 건 아니지만, 그냥 넘쳐나는 사람을 쭉 나열해놓는 것만으로도 그 이상의 효과를 냈다.
그 정점은 ‘손바닥’이었다.
왔다는 증거로 찰흙 위에 손바닥을 탁!
도금 후에 사인도 부탁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어리벙벙할 정도였다.
“신경 많이 쓴 방이네.”
씻지 않고 곧바로 침대 위로 뛰어들려는 두 소녀, 한세리와 한유나를 먼저 샤워장에 밀어 넣었다.
샤워장이 또 있군?
이렇게 큰 방에 하나뿐이라면 그것도 낭비다.
그 안에 퐁퐁을 들여보냈다.
“전하. 소녀는 바닷물에 안 젖었어.”
“밖에 나갔다가 왔으면 무조건 씻는 거야. 잠깐이라도.”
“쟤는…!”
최후의 반항으로 플로라를 가리킨다.
방을 쓱 둘러보자마자 망설임 없이 정원 풀장에 몸을 담근 채 두둥실 떠 있는 쉬임프.
호수에 살았던 라미아처럼 물을 참 좋아했다.
“저건 민물이니까, 소금기가 자연히 씻기겠지.”
“차별이야!”
“그러면 너도 가서 수영하던가.”
“그, 그건 싫어. 날개가 물에 젖는 건 정말 싫어.”
이것도 싫다, 저것도 싫다.
어쩔 수 없이 같이 목욕하는 걸로 타협했다.
곧바로 표정이 헤벌쭉 풀린 퐁퐁은, 날개가 젖든 말든 좁은 샤워장에서 난리법석을 떨며 이래저래 난감하게 했다.
말리는 건 수건도 필요 없이 즉시 건조.
상당히 오랜 시간을 걸려 씻고 나오니 한세리와 한유나가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청소?
청소도구를 용케 찾은 게 더 신기했다.
“아, 용사님. 방이 너무 더럽지 뭐에요!”
“저는 잘 모르겠지만…. 세리가 그렇다고 해서 같이….”
둘의 전문분야는 성격과 환경으로 확 갈렸다.
모르는 언어가 없고 아는 지식과 상식이 많은 한세리. 중국의 고대소설 ‘삼국지’를 읽고 그 안에 나오는 ‘책사’처럼 되고 싶었다나?
앞에 ‘미모의’라는 수식어를 붙여서.
한유나는 쭉 ‘길가에 버려진 고양이’ 같은 모습이다. 평소에는 에쏘드 특유의 몸치에 멍한 구석마저 있지만, 무려! 무려 검술을 익혔다!
허리에 찬 장검은 실전용.
무일이 평가해본 한유나의 전투력은 ‘3종’이다.
한세리는?
매우 유감스럽게도 ‘1종’ 이하다.
똑똑!
호텔 지배인이란 사람이 찾아왔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 호텔은 정말 특별한 귀빈이 올 때만 이렇게 쓰이고, 평소에는 계약자가 단체생활하는 기숙사라고 한다.
이 방은?
모든 방은 주인이 없지만, 자주 쓰는 사람은 있다고 한다.
이 호텔에서 가장 좋은 방.
그것만으로도 대충 누가 쓰는지 알 것 같았다.
그 증거로….
“세리. 남의 팬티로 장난치는 건 대단한 실례야.”
“침대 밑에서 주웠는데….”
“버린 게 아니라 떨어트린 거겠지. 아마도.”
제대로 국부나 가려주는지 의심스러운 천 쪼가리.
거기에 ‘비비 황’이란 이름이, 안 그래도 부족한 면적을 독차지했다.
최고의 계약자가 기숙사 생활.
본인이 직접 빨래하고 요리할 순 없으니 누군가의 보살핌이 필요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렇게 기숙사에 묶여있는 건 좀 놀라웠다.
‘어…. 잠만.’
여자기숙사에 남자가 끼어든 건가?
대단히 불경한 그림이 그려졌다.
‘하렘이다! 무일! 내가 그리던 하렘이 여기에 있다!’
‘아, 좀…! 외국에서는 좀 얌전히 있어.’
‘많이 참았다! 부산에서부터 쭉! 은설의 피가 그립다! 도대체 언제까지 왕의 인내심을 시험할 생각이냐! 이 동정아!’
‘자자, 진정해. 진정.’
폭주하지 않은 점에서는 대단히 감사하게 생각한다.
왜 감사까지 해야 하는지는 의문이지만.
주객전도(主客顚倒)가 따로 없군….
한유일 모르게 속으로 중얼거린 무일은 중국의 고위인사들과 식사를 했다.
당연하다는 듯이 따라온 4명의 절세미녀
한세리, 한유나, 플로라, 퐁퐁.
어딜 가나 시선을 확 끄는 매력이 있었다.
하지만 이 호텔에는 ‘인간미’ 넘치는 아름다운 계약자가 많다. 그래서 비현실적인 미모가 역으로 거리감이 생기며 관심을 못 끌었다.
그럼 왜?
괴수이기 때문이다.
“시원한 우유 더 줘.”
혼자서 2L는 마시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잘록한 허리에 전혀 변화가 없는 발키지어는 화장실 한 번 안 가고, 우유를 붓고 마시고 또 마셨다!
마시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설사할 것 같다.
그런 기행을 제외하면 너무나 평범했다.
날개가 없었으면 ‘몸매 죽이는 미녀’로 착각했을 것이다.
“......”
“저…. 더 필요하십니까?”
말없이 끄덕이며 원하는 해산물을 포크로 가리키는 소녀.
반투명한 붉은색 갑주를 이중으로 겹쳐서 몸통만 속이 안 비치도록 가린 쉬임프는, 해산물을 찍어 먹는 ‘간장’에 진한 흥미를 보이고 있었다.
붉은색 수영복 소녀.
이쪽은 말을 못 한다는 걸 제외하면 ‘인간미’마저 느껴졌다.
부푼 젖가슴이 참 현실적인 까닭이다.
“유나. 편식은 나빠.”
“...세리. 당신도 용사였던 고깃덩어리를 300번쯤 보면 저처럼 채식주의자가 될 거예요. 별로 권하진 않지만….”
“300번?”
“중간에 세다가 포기했어요.”
일본에서 에쏘드의 식성을 개선해줬다.
잘한 일인지는 글쎄….
한유나는 채소 위에 달콤한 드레싱을 붓다시피 해서 먹는다. 자극적인 맛을 즐기는 괴수다운 판단이다.
한세리는 신맛을 좋아하고, 한유나는 단맛, 플로라는 짠 거면 해산물이 아니어도 뭐든 잘 먹는다.
퐁퐁만이 ‘순수한 우유’를 지향한다.
귀한 바나나우유를 마시고 격한 분노를 했던 적이 있었다.
『평화로운 광경』
인간과 괴수가 한 자리에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중국인사들이 그녀들에게서 계속 눈을 못 떼는 이유였다.
미래과학을 체험하면 이런 기분일까?
이 기적을 일군 청년이 말했다.
“세부적인 일정을 알 수 있습니까?”
에쏘드 덕분에 지치지 않는다.
때로는 지쳐서 숨을 돌리고 휴식을 취하고 싶을 때가 있을 정도다. 그래서 한유일에게 몸을 내줄 때는 모든 걸 잊고 숙면에 들지만.
괴수에게 쏠렸던 시선들이 한무일에게 몰렸다.
그들을 대표해서 첸지 죠가 답했다.
“내일부터 있지만, 미리 보여드리겠습니다.”
중국의 정보력은 대단히 우수하다.
어느 정도냐?
부산에서 있었던 브리핑 내용을 어둠의 경로로 수집하고, 한무일이 어느 부분을 못마땅하게 여기는지 파악했다.
물론, 단번에 찍은 주관적인 정보는 아니었다.
오랫동안 누적된 데이터와 대조해서 도출한 결론이다.
“바로 보도록 하지요.”
식사를 마치고 거대한 회의실에서 브리핑이 시작됐다.
겨우 닷새 만에 만들었다고 믿기 힘든 정도로 세밀하게 제작됐다.
어떻게?
중국에서는 별거 아니었다.
역할을 쪼개고 쪼개서 여럿이 분담하면 정말 순식간이다. 이것이 중국의 무서운 점. 고대부터 무시할 수 없었던 ‘인구의 힘’이었다.
‘이건…. 흠잡을 곳이 없네.’
‘무일. 잘은 모르겠지만, 대단히 바빠 보인다.’
브리핑은 누가 봐도 훌륭하다고 할 만큼 깔끔했다.
엘퍼러가 ‘이렇게 해주면 이렇게 된다.’라는 식으로 결과까지 내놓았다.
요약하면?
『엘퍼러가 이걸 도와주면 시민들이 행복해진다.』
전부 이런 식이었다.
객관적인 근거자료까지 첨부하니 이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과장이 조금 섞였다고 해도.
“엘퍼러. 어떻습니까?”
“흠…. 크게 보면, 고위괴수가 많이 필요하다는 뜻이지요? 이왕이면 용으로.”
“너무 노골적이었나요. 이거 무안하군요.”
첸지 죠는 순순히 인정했다.
중국의 원정대는 인류에 보탬이 되는 괴수 위주로 포획하도록 일정이 짜여있지만, 그러한 합리성을 무시할 때가 종종 있었다.
용의 서식지.
그렇다고 전부 들쑤시고 다니는 건 아니었다.
가끔 둥지를 나와서 사람을 해치는 광룡(狂龍)을 해치우거나 포섭하는 쪽으로 세부적인 계획이 잡혀있었다.
당연히 ‘광룡’이라고 불릴 정도인 만큼 약하지 않았다.
최소가 6종.
무일에게는 손쉬운 적이지만, 하늘을 나는 비룡(飛龍)과 물살을 가르는 수룡(水龍) 계통은 중국에서도 토벌할 수 없는 난적이었다.
‘양심적인데?’
중국에 서식하는 야생 와이츠를 잡아달라고 떼썼으면 상당히 곤란했을 것이다.
와이츠는 비행형이고 대형이다.
하늘을 날 수 없는 엘퍼러에게는 문팽이보다 까다로운 상대가 분명했다.
생포는 아예 불가능하고.
그런고로….
중국에서 ‘레드군’을 끼워 넣은 건 눈감아주기로 했다.
발키지어의 기동성을 빌리고 에쏘드의 저항력과 절삭력, 한무일의 [예감]과 한유일의 [예지]까지 쓰면 농락도 가능하다.
브레스를 쏘려고 아가리를 벌리기도 전에 제압!
이게 포인트일 것이다.
“보름…. 너무 깁니다.”
“그렇습니까? 일정을 좀 빼겠습니다.”
첸지 죠는 다른 말 하지 않았다.
부산에 노동력을 제공해주고 받는 보답치고는 대단히 많은 걸 요구했던 게 사실이니까.
이걸 다 들어주면 ‘벨런스 파괴’다.
위진 창 정보과장은 국력이 5배 성장한다고 말했다.
구하기 힘든 해양괴수, 공중괴수를 다수 확보하면 그 활용가치는 무궁무진하다. 여기에 용까지 추가되면 금상첨화!
이것도 최소로 본 기대치다.
호시탐탐 물어뜯을 기회를 노리는 경쟁국, 러시아와 인도에서 다시는 도발할 수 없을 만큼 성장하리라!
세계적인 위상도 올라갈 것이다.
그래서 ‘꿈’이란 거다.
이런 성장이라면 엘퍼러와 문팽이 빠진 한국도 위협할 수 있는 수준이다.
‘이 정도는 예상했다.’
일단 가격을 높게 후려친 후에 조금씩 깎는 게 ‘상도의(商道義)’ 아니던가.
정치와 거래란 그런 것이다.
한국에 보낼 인력은 이미 최고로 구성했다. 인제 와서 줄일 수 없거니와 늘리려고 해도 포화상태다.
남은 건, 본전을 얼마나 뽑느냐.
“아니요. 줄이실 필요는 없습니다.”
“예?”
“다만, 선지혜가 보름 동안 가만히 있을지 미지수라서…. 쩝! 이런 제가 한심하게 보여도 이해해주십시오.”
“이해하고 말고요!”
그 여자가 남편(?)을 찾는답시고 중원(中原)을 횡단하면 큰일이다!
어째서 이 중요한 사안을 놓친 걸까!
첸지 죠 국가주석은, 완전히 사색이 된 위진 창에게 ‘자네에게 실망했네!’라는 눈빛을 조용히 보냈다.
그 신호를 받은 정보과장은 얼굴을 못 들었다.
변명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너무 ‘엘퍼러’에만 치중했어!’
주변을 살피지 못했다.
이게 꼭 위진 창, 개인의 잘못은 아니었다.
정보과 엘리트 중 그 누구도 ‘선지혜’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들은 보름씩 집을 비워도 아내가 나라를 멸망시키진 않는다! 역으로 귀찮은 남편이 안 들어온다고 좋아하는 편이다.
진짜 남편과 아내는 게임 속에!
대한민국 못지않게 중화인민공화국도 가상현실게임 강국이었다.
“일정을 꽉 압축하면 며칠입니까?”
“10분만 기다려주십시오.”
“네. 그럼, 저는 그동안 통신 좀…. 음? 먼저 연락이 왔네.”
역시나, 여기도 선지혜의 눈과 귀를 못 피해갔다.
불같이 난리 칠 줄 알았던 ‘황후’는 의외로 신선하게 나왔다.
이 또한 아무도 예상 못 했다.
(선배.)
(흠. 며칠?)
(너무 거두절미한걸! 닷새마다 게임 접속. 이게 외박 조건이야. 이거 어기면 버림받은 걸로 알고 자살.)
(죽겠다는 소리를 함부로 하는 거 아니다.)
(으, 응. 진지한 목소리, 완전 반칙….)
말까지 더듬으며 수줍어하는 선지혜였다.
어찌 저리 가증스러울 수가…!
국가주석을 포함한 중국인사들은 귀가 썩는 심정으로 두 ‘9종’의 대화를 들었다.
결과만 보자면,
시간적인 문제는 원만하게 해결됐다.
< [38화-3] 협객, 그 이름 > 끝
ⓒ 파르나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