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158화 (158/287)

< [38화-2] 협객, 그 이름 >

심술을 부리는 게 아니라 정말인 모양이다.

통신이 끊기고 다시 둘만 남았다.

여전히 도청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런 걸 일일이 따지면서 했다가는 진전이 없을 것이다. 물론, 정말 중요한 사안은 보안에 더 신경 쓰리라.

방공호에 들어간다든가….

“현실적으로 가능한가의 문제가 아니군.”

“그렇습니다, 주석. 엘퍼러가 하겠다고 했으니 하겠지요.”

도시라는 게 밀어버리고자 하면 순식간이다.

문팽이가 1시간 걸린다면, 다른 괴수를 동원하면 며칠. 그저 시간이 얼마나 걸리고 얼마나 또 깔끔하게 밀리느냐의 차이다.

문제는 그 반대.

다시 건설한다는 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아무튼, 온다고 하니 준비를 서둘렀다.

닷새가 흘렀다.

문팽이가 움직였고, 도시가 사라졌다.

너무나 단순한 공식에, 막상 위성영상으로 생중계를 보면서도 ‘재난영화인가?’라는 생각을 하고 말았다.

“주석! 보십시오!”

“허...”

그저 마법이라고 밖에 할 말이 없는 광경이 펼쳐진다.

파괴밖에 모르는 괴수들이 거대한 집을 운반해서 질서정연하게 배치한다. 우주에서 찍은 위성사진을 보면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은 분노하지 않을까?

이 광경을 보고도 화를 낼 수 있다면 엄청난 정신력의 소유자일 것이다. 전능한 신(神)의 행사에 거역하는 셈이니.

하루도 안 지나서 도시가 사라지고 새로운 도시가 생겼다.

정비해야 할 게 한둘이 아니겠지만, 도시 형태는 이미 완성됐다.

‘이것이 9종….’

첸지 죠는 순수하게 전율했다.

연맹에서 지정한 ‘3대 재앙’이 있다.

『7종 특수, 갤럭쉽 - 솜사탕: 천국이란?』

『9종 소형, 워페레스 - 여왕벌: 무한 생산』

『9종 대형, 문팽이 - 불도저: 도시 치워!』

그중 ‘문팽이’는 토벌 비슷하게 되면서 곧 ‘3대 재앙’에서 제외될 전망이지만, 그렇다고 왕이란 칭호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도시를 재건한다니?

물론, 이런 경이로움은 문팽이가 처음이 아니었다.

문팽이는 그저 공장에서 대량으로 찍어낸 집을 옮긴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아예 집부터 터, 도로에 이르기까지 도시의 모든 걸 손수 만든 괴수도 있다.

【이즈헬 / 9종 특수】

사원(砂原)과 사원(祠院)의 정령은 모래로 도시를 뚝딱 만든다.

막장 정치의 선두주자인 이집트가 망하긴커녕 아프리카 최강국, 더 나아가 조금씩 발전하는 원동력이다.

식량만 충분히 확보할 수 있었으면 인구가 폭발했으리라.

국민의 98%가 노예처럼 살긴 하지만.

“과장. 그가 언제쯤 올 것 같은가?”

“포세이돈으로 출발했습니다.”

“벌써?”

“저희로서는 나쁠 게 없습니다. 원정대 준비도 마쳤습니다. 날씨예보가 썩 좋지 않지만, 웨일풍으로 막아버리면 별문제 없을 겁니다.”

거대한 하늘 고래.

계륵(鷄肋)처럼 쓸모가 적은 7종 수호자는 이처럼 날씨조절로도 쓰인다.

페이 링이 대단히 유감스러워하는 부분이다.

그래도 이 덕분에 중국은 폭설과 폭우로부터 상당히 안전해질 수 있었다. 영토가 너무 방대해서 그 효과가 미미할 뿐.

고개를 끄덕인 첸지 죠는 집무실을 나섰다.

그 뒤를 위진 창이 자연스럽게 따랐다.

귀빈을 맞이하는데 직접 안 가고 버틴다면 없던 불이익도 생길 거란 계산이다. 이건 계약서로 명시한 것도 아닌 구두약속(口頭約束)이니까.

도와주고 싶은 만큼 도와주는 양심적인 문제다.

물론, 엘퍼러를 직접 만나보고 싶다는 마음도 큰 몫 했다.

“영상으로는 참 지겹도록 봤는데….”

“연예인 같습니다.”

진짜 연예인은 고대의 유물로 전락한 지 오래. 가상현실게임의 꽃미남, 미소녀에게 완전히 밀려버렸다.

상하이에서 활약하고 ‘중국인’ 계약자를 둔 아쿠버스 ‘산드라미아 레미’가 안 온 것이 조금 애석하지만, 그래도 화려했다.

누구 말마따나 정말로 ‘하렘의 왕’이었다.

정작 당사자가 원하는 하렘은 이게 아니지만.

아리따운 미소녀이긴 한데, 전원이 무시무시한 괴수다.

(주석! 엘퍼러와 포쉐이크 접전! 어…. 끝났습니다.)

헬기를 타고 항구로 이동 중이던 첸지 죠는 비서의 보고를 듣고도 그러려니 했다.

그 포쉐이크가 마침내 죽었군.

대략 30년 전부터 베이징 앞바다에 자리 잡고, 수많은 화물선을 침몰시킨 6종 해양괴수.

그렇게 쌓이고 쌓인 피해액은 말로 다 형용할 수 없는 수준이다.

끝내, 야생괴수에게 이름마저 붙었다.

『해적왕』

토벌을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모두 허탕!

바다로 잠수한 녀석을 쓰러트릴 수호자가 중국에 없었던 까닭이다.

어쩔 수 없이 자존심을 접고 괴수대응연맹에 지원요청도 보내봤지만, 바다와 우주는 인류에게 여전히 미개척 지역이었다.

연맹이라고 해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런데 웬걸?

왔노라, 보았노라, 죽였노라!

그 악명 높은 ‘해적왕’이 순식간에 처리됐다.

엘퍼러의 앞길을 3초쯤 가로막은 ‘진로방해죄’로 허망하게.

“옵니다.”

“대단히…. 빠르군.”

같은 베이징 내에 있는 본부에서 항구까지 헬기로 이동했다.

소요시간으로 따지면 10분?

그런데 엘퍼러는 조금 먼저 출발하긴 했어도, 부산에서 베이징까지 별 차이 없는 시간을 소모해서 도착했다.

항로(航路)를 따지면 1,300km쯤 된다.

초음속전투기에 버금가는 말도 안 되는 속도다.

아니, 초음속전투기는 최고속도를 짧은 시간밖에 유지할 수 없다는 걸 고려하면, 비교하는 것 자체가 포세이돈에게 모욕이리라.

지구의 둘레는 약 4만km.

지구 반대편까지 거리는 약 2만km.

엘퍼러가 마음만 먹으면 3시간 안에 세계의 어느 나라든 갈 수 있다는 뜻이다.

촤아아아!

파도가 항구와 구경꾼을 휩쓸진 않았다.

물리법칙을 무시하는 괴수답게 세이랑은 물살이 피해 주는 것처럼 저항감 없이 나아갔고, 그건 그녀들의 목줄을 쥔 엘퍼러도 마찬가지였다.

속도를 단숨에 늦춘 포세이돈이 뚝 멈췄다.

“허어!”

“와아아!”

관성에 의해 하늘 높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오른 엘퍼러.

마치 쇼를 보는 것 같은 그 광경에 베이징 시민들이 무의식적으로 손을 흔들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리고 가볍게 착지.

두 에쏘드를 짐짝처럼 옆구리에 끼고 따라온 쉬임프와 발키지어가 군주의 뒤편에 섰다.

표정들이 썩 밝진 않았다.

구경거리가 됐다는 걸 자각한 탓이리라.

물론, 예외도 있다.

“와! 사람 많다~!”

“어…. 너무 쳐다보면 닳는데….”

방방 뛰는 한세리 옆에서 한유나가 괜한 걱정을 했다.

무일은 누군가 건네준 수건으로 얼굴과 머리만 닦았다.

몸에서 뚝뚝 떨어지던 물기는 특수소재로 만든 옷이라서 금방 말랐다. 하지만 소금기만은 세탁이 필요할 것 같았다.

늘 영상과 사진으로만 봐온 엘퍼러.

첸지 죠는 이 청년을 보자마자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었다.

‘파도(波濤)…. 마치 노도(怒濤) 같군.’

닿지 않는 해변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강한 물결.

주위 환경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막힘 없이 나아간다. 자신이 믿는 ‘정의’를 향하여 의심 한 점 없이.

파도는 뒤를 돌아보거나 멈추지 않는다.

앞에 무엇이 있든 계속 전진할 뿐.

“반갑습니다. 엘퍼러, 한무일입니다.”

“보잘것없지만, 국가주석을 맡은 첸지 죠입니다. 엘퍼러, 그대의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하는 바입니다.”

첸지 죠가 내미는 손을 본 무일은 ‘앙그류 그랑모리’를 벗었다.

저 투박한 장갑이 ‘세상에서 가장 비싼 장갑’이란 사실을 이 자리에 모인 인민(人民) 중에서 몇이나 알까.

행운의 장갑.

누가 붙였는지 모르지만, 언제부턴가 ‘엘퍼러’가 쓰는 장비는 본래 이름 대신 ‘행운의 어쩌고’로 통하기 시작했다.

행운의 시계, 행운의 망토, 행운의 단검….

그렇게 ‘행운 세트’를 다 모으면 ‘하렘의 왕’이 된다는 ‘전설의 아이템’이 세계적으로 떠돌고 있다.

실제로 경매된 전적이 있다. 그리 오래된 일도 아니다.

작년 크리스마스에 있었던 일이니까.

『작아서 입기 힘들어진 옷』

선지혜는 팬티 빼고 전부 팔아치웠다.

칭찬받고 싶은 아내처럼 나름 가계부도 작성해서 무일에게 보여줬다.

그 액수란?

절대로 용돈 수준이 아니었다.

세계 주식시장이 흔들렸을 정도라면 이해가 쉬울까.

“환대에 감사합니다.”

행운의 장갑을 벗고 소금기 없는 손으로 악수했다.

조금도 지치진 않았지만, 역시 씻는 게 우선일 것 같다.

외투는 여전히 영국 왕실 법복.

투구를 제외하고는 RPG 게임 캐릭터처럼 착실하게 장비를 착용했다.

색깔은 야생괴수의 시선을 끌기 좋은 흰색 바탕 위에 금실과 은실로, 밤에도 반짝거리며 잘 보이도록 장식했다.

왼쪽 허리에는 카르세리안 레이소.

등허리에 가로로 짧은 단검.

각각 에쏘드 한세리와 한유나의 집(?)이다.

마지막으로 오른쪽 허리.

『엔타리얼 치프트(무자비한 별의 폭군)』

일본에 스콜레옹 포르소를 주고 교환 받은 장검.

그 흉흉함은 6종까지 썰어버린다.

검의 무게는, 흡혈한 노블레스가 아니면 감히 휘두를 엄두가 안 날 정도로 무겁다. 하지만 ‘뱀페스트 왕’인 무일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얘기.

미국에서 최근에 개발한 검과 함께 양대 산맥을 이루는 절단기다.

영국은?

이번에도 ‘카르세리안 레이소’처럼 성능과 가격이 ‘공명정대한 검’을 제작하려는 욕심 때문인지 아직 발표가 없었다.

각설하고,

엘퍼러의 외형은 누가 봐도 프로사냥꾼.

비싼 장비로 온몸을 떡칠했다는 게 그냥 보였다.

“이쪽은 정보과장, 위진 창입니다. 불편한 사항은 이 친구에게 말씀하시면 바로 해결해줄 겁니다.”

“초면이지만, 연락은 꽤 많이 나눴었죠.”

무일은 씩 웃었다.

이민 오라고 참 많이 달달 볶았던 남자다.

위진 창은 무안하다는 듯이 쓰게 웃으면서 마찬가지로 악수했다.

“한무일 씨. 이민은 언제라도 환영합니다.”

“국적이 중요합니까?”

“하하! 이거, 한 방 먹었군요.”

인류가 국적을 뛰어넘었다면 좀 더 나은 세상이 왔을 것이다.

하지만 저게 빈말이 아님을 위진 창은 잘 안다.

상하이로 문팽이가 돌격해오고 있을 때, 이것저것 계산하지 않고 곧바로 달려온 인간이 엘퍼러였다.

승리에 대한 확신? 명성?

그런 문제는 전부 제쳐놓고 최선을 다했다.

‘일손이 필요하다…?’

작업속도를 빠르게 올릴 순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부산은 목포처럼 사람이 아예 안 사는 동네가 아니다.

문팽이가 쓸어버리면서 실업자가 부산 시민 99.9%다. 노약자를 제외한 남녀를 건설에 동원하면 부족하진 않으리라.

서두르는 이유가 따로 있는 걸까?

아니면 국제관계 때문일까?

엘퍼러가 중국을 편애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심어주기 위한 변명거리, 명분일 수도 있다.

위진 창의 머리가 복잡하게 굴러갔다.

이유야 어떻든 나쁘지 않다. 아니, 매우 좋다.

“한 공자님!”

“...팽 아가씨네.”

몇 개월 만에 부쩍 성숙해진 것 같은 시링 팽이 달려왔다.

오는 내내 조용했던 한유일이 눈을 떴다.

‘오! 미소녀다! 눈이 성깔 있어 보이는 게 깨물어주고 싶다!’

‘외국에서 사고 치지 마.’

‘피를 빨아달라고 내게 사정사정하면?’

‘각서와 부모 허락.’

‘이게 무슨 결혼이냐? 그러니 여태 동정이지!’

표정관리에 힘쓰며 무일은 베이징 중심가로 향했다.

부둣가는 세이랑이랑 사진 찍으려는 사내, 그걸 막는 아내와 여친으로 북새통을 이뤘다.

끝내 헌병대까지 나서서 해산시켰다는 모양이다.

“전하. 심기 안 좋아?”

농염한 알몸을 순백의 날개로 투피스처럼 감싸서 가린 발키지어.

기분은 한무일이 아닌 펠-쉐어퐁이 안 좋아 보였다.

그래서 마치,

주위 인간들을 다 죽여도 되느냐고 묻는 것처럼 들렸다.

외모와 감성은 딱 소녀.

하지만 괴수였다.

아름다운 가면을 쓴 괴수.

왕의 고삐가 풀리면 언제든 학살자로 변할 사신(死神)이었다. 그건, 말을 할 수 없어서 잠자코 따라오기만 하는 쉬임프도 똑같았다.

엘퍼러는 말했다.

“싫으면 집이나 보던가.”

< [38화-2] 협객, 그 이름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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