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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수처럼-157화 (157/287)

< [38화-1] 협객, 그 이름 >

[38화] 협객, 그 이름

학명: 포쉐이크(회오리 문어)

서식지: 바다

특징: 돌고 돌고 또 돌고….

위험도: 6종 대형

비고: 바다의 믹서기

***

23세기까지 수많은 도시가 건설되고 경제 대국으로 불렸던 중국은 괴수의 등장으로 학살의 악몽을 맛보았다.

그렇게 살아남은 도시의 숫자는 딸랑 넷.

베이징, 텐진, 상하이, 홍콩.

전부 바다를 끼고 있는 도시다.

배수진(背水陣)이 방어에 유리하기도 하지만, 밀리고 밀린 인류가 바닷가까지 몰려서 더는 도망칠 곳이 없었다고 보는 편이 더 정답에 가깝다.

그중 홍콩은 ‘폭풍의 마녀’의 보복으로 소멸.

텐진은 베이징에 흡수, 통합.

그런 우여곡절 끝에 남은 도시가 ‘베이징’과 ‘상하이’였다.

겨우 둘?

그렇다. 겨우 둘뿐이었다.

하지만 중국은 야인(野人)의 부흥으로 인구밀집이 해소됐다.

『무림인』

도시가 아닌 소규모 마을 규모의 주거지가 중국 전역에 흩어져 지어졌다.

땅값이 비싼 도시에서 살 수 없는 국민들은, 이 무법자들이 지키는 마을에 몸을 의탁하고 위태위태한 삶을 살게 됐다.

그래서 사망률이 정말 끔찍한 수준!

대신에 출생률도 높다.

도시에서 수용하지 못한 인구가 ‘추방’이란 형태로 꾸준히 배출된 까닭이다.

다른 나라 같으면 이 추방자들은 야생에서 죽었겠지만, 중국에서만큼은 무림인이란 ‘무면허 사냥꾼’의 보호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건 현재도 마찬가지.

공식적으로 무림은 해체됐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무림인에게 ‘사냥꾼 면허증’을 줬다는 정도?

“도무지 도움이 안 되는군. 이 야인들은.”

“주석. 제가 이런 말을 하면 이상하지만…. 힘내십시오.”

늘 그렇듯….

국가주석 첸지 죠와 정보과장 위진 창이 한 자리에 있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두 거인.

여기에, 중국의 유일한 8종 계약자이자 강습반장인 ‘비비 황’까지 합친 셋이 이 거대한 땅덩이를 총괄하고 있다.

권력 싸움?

책임져야 하는 국민이 ‘억’ 단위면 자연히 겸손해지게 된다.

까딱 실수하면 곱게 죽지 못하니까!

고대에는 정치인이 잘못해도 ‘사과’하거나 ‘은퇴’로 수습됐지만, 괴수와 이웃하는 현상인류는 그게 불가능하다.

실수는 죽음.

그것도 지옥 같은 고문 후의 비참한 죽음이다.

인구가 ‘억’ 단위인 중화인민공화국은 그런 풍조와 문화가 더욱 강하다.

“충성스러운 사냥꾼은 상하이 대전(大戰)에서 전사하고, 자기 목숨 챙기기 급급한 야인들만 살아남다니….”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위진 창 정보과장도 정말 할 말이 없었다.

쓸만한 사냥꾼이 없어도 너무 없다!

원정대를 꾸릴 엄두조차 안 나는 실정이다.

“나는 진화론과 관계없이 인류가 퇴보하는 중이라고 생각하네.”

“그렇습니까.”

“우수한 유전자는 용감하게 싸우다가 죽고, 하찮은 종자만 도망쳐서 살아남는 악순환. 이러다가 100년 뒤에 침팬지만 남는 게 아닐지….”

첸지 죠의 넋두리는 한동안 계속됐다.

그걸 짜증 한 번 안 내고 묵묵히 들어주는 것도 위진 창의 업무 겸 일과였다.

때로는 공감하며 같이 넋두리하기도 한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석. 어떻게든 잘 될 겁니다.”

“...과장. 자네답지 않게 막연한 희망론이군.”

“백혈구울 게놈프로젝트에 참가하지 않은 건 훌륭한 판단이셨습니다. 주석께서는 국가발전을 위해 옳은 선택을 하신 겁니다.”

황진천의 유전자로 뭘 어쩌겠다고?

이미 특수체질 외의 정신력이 크게 좌우한다는 게 밝혀진 이 마당에, 또 무슨 편법으로 테러리스트와 사이코패스를 양산하려는 걸까.

이건 빠지길 잘했다.

서울을 복원해주기 싫다는 문제가 아니다.

그건 차라리 ‘무상지원’으로 ‘빚’이나 ‘은혜’를 쌓는 편이 낫다.

아무리 생각해도 게놈프로젝트는 정말 헛짓이다.

그 대신,

“교육프로그램의 진척 상황은?”

“판판 소의 도움으로 드디어….”

“그 중요한 사실이 여태 내게 보고되지 않은 건가?”

“죄송합니다. 어제까지 최종점검을 마쳤고, 새해를 시작하는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시험해볼 생각이었습니다.”

“그런가. 새해라…. 벌써 그렇게 됐군.”

잊고 있었다.

상하이로 정신없었다.

중국에 단 2개뿐인 도시 중 하나다.

문팽이의 공격으로 사라졌다면 중국은 재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홍콩이 그 증거다.

거의 100년이 다 돼가는데도 복구할 엄두를 못 내고 있다.

“한국은 여전히 터무니없군.”

인류는 도시의 규모를 조금씩 확장하는 방식으로, 삶의 터전을 넓히고 있다.

모든 나라에서 채택 중인 유일한 방법이다.

시도?

멀리 신도시를 건설하려고 하면, 괴수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장비를 부수고 기술자를 죽이니 도저히 손쓸 방도가 없다.

그런데 한국이 그 상식을 깼다.

서울과 맞닿은 파주와 이어진 개성은 그러려니 할 수 있다.

하지만 목포는?

근처에 위성도시 없이 홀로 오롯이 지어지고 있다.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9종 괴수의 힘이지요.”

“괜히 심술 나는군. 유치하다는 건 알지만.”

너무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와이츠와 엘로엘.

두 8종 수호자로 버틸 때까지만 해도 그러려니 했다.

파주와 인천은 유령도시고 부산은 거지소굴. 서울로만 간신히 ‘대한민국’이란 간판을 유지하던 나라가 어느새….

초강대국이란 말조차 부족한 나라로 탈바꿈했다.

더욱 기가 막힌 건 1년도 안 됐다는 사실이다.

한 남자가 세계를 바꿔버렸다.

“엘퍼러. 그가 빠진 서울은 팥소 없는 찐빵입니다.”

“그 하나의 차이가 대단히 크지.”

중국은 엘퍼러와 충돌해서 에쏘드와 쑨우쿵을 잃었다.

또 잃을 게 없을 만큼 탈탈 털렸다.

『정신력』

모두 여기에서 오는 차이였다.

평양의 패배는 [예감]의 압도적인 차이였고, 그 결과로 8종 수호자 쑨우쿵을 잃었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용사의 정신력에 감복한 에쏘드 메이의 가출!

한무일이 딱히 특별한 혈통을 타고난 게 아니었다.

유전자도 아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가짐의 차이였다.

‘절대 선(善)이라….’

이건 사냥꾼마다 개인차와 기복이 매우 심하다.

엘퍼러처럼 인류를 향한 무한정 희생이 있는가 하면?

그린포스 수장, 다윙 밀리언처럼 인류를 ‘절대 악’으로 규정한 테러리스트도 있다.

속성은 정반대지만, 둘 다 강력한 에쏘드 계약자다.

누가 옳다고 할 수 없다.

자신이 ‘정의’라고 맹신하는 신념과 철학이 다를 뿐이다.

(조조! 오랜만~!)

(...선지혜 회장. 잘도 여기까지 도청하고 해킹마저 하셨군요.)

중국 내에서 가장 보안이 두꺼운 장소가 허망하게 뚫렸다.

하지만 이건 어쩔 도리가 없다.

한국에는 ‘용신’이 있고 중국에는 없다.

단지 그뿐이다.

모든 시설을 아날로그로 바꾸지 않는 한, MID 기술의 원천이자 선구자인 용신의 해킹을 막을 수 없다.

일본이라면 막았겠지만….

분하게도 중국은 눈 뜨고 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이젠 회장 아닌걸! 잘렸어.)

(...그럼, 앞으로 뭐라고 불러주길 원하십니까.)

괴수대응연맹에서도 이 사안으로 말이 많다.

겨우 이름 가지고 무슨!

...라고 할지 모르지만, 연맹에 소속된 학자들이 비싼 월급과 연구비 받아가며 하는 일들이 원래 이런 거다.

현재, 세계에는 3명의 9종 계약자(수호자)가 있다.

이집트 파라오, 한국 엘퍼러, 한국 선지혜.

하지만 9종 문팽이 계약자, 선지혜만이 여전히 본명으로 불리고 있었다.

왜?

『마땅한 별명이 안 떠올라!』

물론, 학자들도 바보가 아니다.

떠오르는 거야 무궁무진하게 많다!

하지만 자신들의 아이디어를 그대로 썼을 때, 제대로 열 받은 선지혜의 보복을 감내할 자신이 좁쌀만큼도 없었다.

그렇다고 선량한 별명을 지을 순 없었다.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청렴결백하게 살았노라고 할 순 없지만, 선지혜의 별명으로 ‘성녀(聖女)’ 같은 걸 선정할 바에 깔끔히 사퇴하고 만다.

그 정도 지조(志操)는 있었다.

(내 별명?)

(...그렇습니다.)

(황후.)

(콜록콜록!)

이 한국의 재녀(災女)가 새해 첫날부터 대단히 세게 나온다!

사레들린 첸지 죠는, 농담만으로 1,000km 밖에서 사람을 암살할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몸소 체험할 뻔했다.

숨이 막혀 질식사라니!

자신이 아는 한국어가 틀리지 않았다면?

황후(皇后).

황제의 본처를 뜻하는 단어가 맞을 것이다.

그야 ‘요정의 황제’하고 동거 중이니 딱히 틀린 말도 아니지만, 혼인신고서라도 보여주기 전까지는 용납할 수 없었다.

이걸 수긍하면 세상이 멸망할 것 같다.

노련한 정치인의 직감이었다.

‘저 여자가 베갯머리송사를 한다고?’

예쁘다는 건 인정하지만, 쉬이 그림이 안 그려졌다.

엘퍼러가 해롱해롱?

세계는 위기에 빠진 게 아닐까.

어쩌면 이미 파멸의 주사위가 던져진 후일지도….

(무슨 일로 연락하신 겁니까. 새해 인사는 아닐 테고.)

(응. 거래하고 싶어서.)

(더는 뱉을 것도 없습니다만.)

가져갈 게 없어서 침공해온 9종 야생괴수마저 가로챈 인간들이?

뭘 요구할지 상상이 안 갔다.

만리장성? 자금성?

첸지 죠의 머릿속으로 당장 생각나는 후보는 이 정도였다.

설마하니 하나 남은 8종 계약자 ‘비비 황’을 내놓으라고 하진 않겠지. 양심이 있다면.

‘시링 팽. 그, 팽 가(家) 상속녀도 좀 걱정되는군.’

이쪽은 엘퍼러가 부르면 냉큼 달려갈 기세다.

목숨 빚을 갚아야 한다는 무림인의 사고방식이 껄끄럽고, 페이 링하고 심심찮게 연락하는 모습도 영 불안하다.

지나친 상상은 건강에 해롭다는 걸 알지만….

첸지 죠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부산을 싹 밀고 신축하려는데 일손이 부족해서.)

(...당신과 대화하면 가끔, 제 한국어 실력을 의심하곤 합니다. 한국의 위성도시 부산을 철거한다고요?)

(응.)

(그 위에 새롭게 도시를 만들고.)

(응. 한국어 잘하는걸! 내 자문단 애들은 한국인이면서도 말귀를 못 알아듣던데.)

(하, 하, 하….)

못 알아들은 게 아니라 현실도피 한 게 분명하다.

이쪽은 도시(홍콩)를 하나라도 소생시켜보려고 바동거리는 중인데 바로 옆에서는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갈아엎고 새로 만든단다.

첸지 죠는 기가 막혔다.

국가주석으로서 자신은 대담한 편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역시, 이 여자의 스케일은 여전히 파격적이군.’

도시와 마을을 똑같이 취급한다.

불가능하다고 딱 잘라서 말하기에는 ‘거래’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렸다.

일손이라면?

노동력을 제공해달라는 뜻이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는 중국에 무엇을 제공할 것인가?

이것이 가장 중요한 논점이었다.

(원정대가 벅차다지?)

(설마…?)

(응. 그 설마가 맞을걸. 될 수 있으면 용도 어떻게든 해주고 싶다는 게, 선배의 뜻이야.)

(고민이 필요없는 조건이군요.)

용의 계약자는 중국의 숙원(宿願)이며, 또 숙원(宿怨)이었다.

오랜 세월, 간절히 소망한 끝에 원한마저 생겼다.

뭘 잘못했다고 ‘용’ 한 마리를 안 주는지, 역린(逆鱗)을 건드려서라도 따지고 싶다.

(며칠 동안 머물지는 그쪽의 성의에 달렸겠지?)

(모호하군요.)

(내게는 선배를 좌지우지할 권리가 없는걸. 반대라면 모를까.)

책임을 교묘하게 피하는 선지혜.

그럼에도 첸지 죠는 낚여줄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달콤한 제안이다.

(선지혜 황후. 엘퍼러가 오는 날짜도 알 수 없습니까?)

(그 정도는 알지~! 우후후! 황후. 듣기 좋다아….)

(...언제입니까?)

(응? 아! 그래, 날짜. 언제냐면, 부산이 깨끗해지는 날이야.)

< [38화-1] 협객, 그 이름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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