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156화 (156/287)

< [37화-5] 새해가 왔습니다. >

대단히 나쁜 놈으로 몰렸다.

특히나 ‘하렘의 왕’에게 들으니 그 타격이 더욱 컸다. 나쁜 놈에게 더 나쁜 놈이라고 매도당한 심정이 이럴까!

무시하고 전황을 살폈다.

당연하게도 압도적!

쉬임프가 찔끔찔끔 척살한다면 고은별의 발키지어는 그야말로 휩쓸었다. 깃털이 휘날리며 초대형 개미의 피를 빨아들인다.

그리고 수압폭파!

문제라면 적군과 아군을 가리지 않는 광범위 공격이란 점이었다.

‘학살용 천사군.’

무일은 자이엔트보다 깃털 제거로 더욱 열심히 뛰어다녔다.

에쏘드의 가호를 받는 그는 아무런 영향을 안 받지만, 피난 중인 사람들은 근처만 가도 바짝 말라버리리라!

미라처럼.

그래도 발키지어 덕분에 자이엔트 무리를 단시간에 처치할 수 있었다.

득 본 점도 있다.

더는 힘들어서 한 걸음도 못 걷겠다고 어깃장 부리던 일부 시민들이 가장 열심히 도망쳐준 덕에 행렬이 순조로워졌다.

“세상에!”

“이럴 수가!”

“부산…?”

짧은 피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시민들은 경악했다.

부산이 사라졌다.

평평한 땅만 남기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강줄기도 막히면서 바다로 흘러가지 못한 강물이 범람하며 새로운 길을 트고 있었다.

아니, 그뿐이라면 놀라고 말았으리라.

체스판 혹은 바둑판을 연상케 하는 쇳덩이의 배치는 외계인이 지나간 것처럼 질서정연했고 이질적이었다.

전부 1층 전원주택이다.

겨울이라 땅이 꽁꽁 얼어서 지금은 괜찮지만, 땅이 녹는 여름만 돼도 집이 땅속으로 조금씩 파묻힐 것이다.

기껏 놓은 집을 옮기고 지지기반을 다지려면 목포보다 작업이 더 번거로우리라.

수도와 전기도 안 들어온다는 것도 흠이다.

‘겨울에 춥고 여름에 더운 집이라….’

전기라도 들어오지 않으면 얼어 죽기 딱 좋다.

하지만 그런 잡다한 문제는 선지혜의 자문단에서 해결할 문제. 한무일이 할 일은 큰 그림을 그리고 큰 줄기를 뻗는 것이다.

대충 부산도 정리가 끝났으니 중국으로.

쌍수를 들고 환영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베이징으로 가야 한다.

“금무일! 네가 꾸민 짓이냐!”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버린 이름’이다.

고개를 돌리니 씩씩거리며 달려오는 남자가 있었다. 하지만 무일이 기억하는 깡마른 남자가 아닌 푸짐한 아저씨였다.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온 모양이다.

“하극상은 중죄입니다만.”

“오냐! 말 한번 잘했다! 아비가 상전이니 당장 무릎 꿇고 사죄하지 못하겠느냐!”

“3초를 세는 동안 땅에 머리 박지 않으면 사형에 처한다.”

“뭐라! 적반하장도 유분수-!”

“하나, 둘-.”

사색이 된 남자는 생각해볼 것도 없다는 듯이 머리를 박았다.

썩고 타락했어도 사냥꾼이다.

수십 년 동안 쌓아온 부와 권력이 한순간에 잿더미가 되며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죽음쯤은 [예감]할 수 있다.

이제야 깨달았다.

눈앞에 괴물은 친부모 따위는 안중에 없다.

똑같은 짓을 본인이 먼저 친아들에게 했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특공대장이다.)

(말씀하십시오.)

(인공위성 자료를 토대로, 자이엔트에게서 등을 돌린 사냥꾼은 예외 없이 외곽에 배치하고 귀가 및 이탈을 금한다.)

(그…. 알겠습니다, 대장님.)

언제 그런 짓을?!

전혀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낙후된 부산에서는 단 한 번도 도입되지 않은 시스템인 까닭이다. 그리고 엘퍼러만이 즉흥적으로 실행 가능한 방법이다.

수많은 인공위성이 그를 쫓아다니고 있다.

자연히 그 주변에서 알짱거리던 사람들이 뭘 하고 있었는지도 다 나온다.

‘인간의 유전자는 믿을 수가 없군!’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원숭이 뱃속에서 미소녀가 태어난다는 네 말이 정말이란 생각이 들었다. 저 돼지가 네 부모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대꾸해줄 필요성을 못 느껴서 넘어갔다.

인간의 역사는 늘 그랬다.

훌륭한 왕 밑에는 곧잘 최악의 왕자가 태어났다. 훌륭한 왕이 여자 보는 눈이 없어서 그렇게 된 건 절대 아닐 것이다.

환경적인 요인이다.

너무 잘난 부모를 두면 삐뚤어지기 쉽고, 너무 힘든 가정에서 태어나면 악착같이 살아남기 위해 노력한다.

절대적인 공식은 아니지만, 자주 있는 일이다.

무일도 후자에 속할 뿐이다.

남보다 우월한 유전자나 운명을 타고난 게 아니다.

“오라버니! 벌써 가시는 거예요?!”

“내가 할 일은 끝났으니까. 나머지는 행정에 우수한 엘리트들이 해결할 거야. 흠. 일만 벌여놓고 도망치는 기분인데.”

기분만 그런 게 아니다.

무일이 없는 곳에서 욕설과 불만이 난무하고 있다.

무턱대고 부산을 ‘초기화’해서 어쩌라고!

그래도 막 뭐라고 할 수 없는 것이 계급이고, 암처럼 꽉 막혔던 문제가 어찌 됐든 뚫렸다는 공로가 있다.

이런 파격적인 추진력이 없었다면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특공대장은 저지르고 노는 게 아니다.

“중국에 가신다고요?”

“흠. 너도 만리장성이 갖고 싶다던가, 그런 거냐?”

“네?”

여기서 갑자기 왜 만리장성이 나오는 걸까?

그건 둘째치고, 금서희는 ‘만리장성’이 뭔지도 몰랐다.

초등학교 중퇴인 아이가 뭘 알겠는가? 하물며 다 쓰러진 문화유산, 완전히 방치된 타국의 유물을 알 턱이 없다.

금서희에게 세상은 부산이 전부다.

최근에 서울을 보면서 조금 더 시야가 넓어지긴 했지만.

“내 계획대로 된다면…. 3년 후에는 매일같이 보게 될지도.”

“매일같이요?!”

“무슨 문제라도?”

“매일이란 건 그러니까…! 같이 자고 일어나는 부부 말하는 거죠, 오라버니!”

“...꿈 깨렴.”

“매일이라고 하셨잖아요!”

“착각은 자유다만. 소설책은 좀 건전한 걸 읽으렴.”

오누이라서 취향도 닮는 모양이다.

한숨을 푹 내쉰 엘퍼러는 포세이돈을 타고 부산항을 떠났다.

목적지는 베이징.

물론, 그전에 목포항에 잠시 들렀다.

부산은 목포에서 가까운 편이라서 괜찮지만, 베이징은 멀어서 ‘에쏘드’의 힘이 극도로 미약해지는 까닭이다.

플로라는 한세리를, 퐁퐁은 한유나를 안았다.

귀찮은 짐짝처럼.

“용사님. 저에게도 날개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난 반대인데.”

“왜요?”

“비행소녀가 될 것 같거든.”

몸치인 에쏘드에게 날개가 생긴다면 하늘에서 방황하다가 길을 잃을 것이다.

지금처럼 누군가의 인도를 받는 게 상책이다.

계약자에게 ‘얌전히 있는 게 돕는 것!’ 비슷한 말을 들은 한세리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하지만 정말로 기분 나빠서가 아니다.

에쏘드는 ‘용사의 정령’이다.

싱크로율 100% 용사의 말은 진리고 이치며 신탁이다.

“저도 지금이 좋은 것 같아요.”

한세리는 곧바로 말을 바꿨다.

생각해보니, 괜히 나대는 것보다는 용사님에게 어리광이나 부리면서 업혀 다니는 편이 훨씬 나았다.

용사님에게 보살핌을 받는 연인(戀人).

동화책을 읽고 사회(!)에 찌들은(?) 에쏘드라면 누구나 꿈꾼다.

일명, 용사의 여인!

그건 한세리와 한유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촤아아악!

베이징까지 순항 중이던 포세이돈의 앞길을 막는 물줄기가 치솟았다.

아주 드문 일이다.

대부분의 야생괴수는 무일의 [업보]와 마주하면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친다. 굳이 왕 앞에서 자존심을 세우며 죽을 필요는 없는 까닭이다.

하지만 어디든 예외가 있다.

엘퍼러는 ‘요정의 황제’.

아름다운 여성형 괴수들이 따르는 9종 괴수, 괴수의 왕이다.

당연히 질투하는 무리도 있기 마련.

‘다리가 많은 수컷 원숭이다!’

‘6종 대형, 포쉐이크. 하반신이 문어인 남성형 괴수야.’

한유일은 지식이 얇다.

거의 모든 괴수를 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플로라와 라미아, 퐁퐁이랑 달리, 신생아처럼 세상에 대해 무지했다.

습득속도는 괴수답게 경이롭지만, 몰랐다는 게 중요하다.

태어날 때부터 모든 걸 알진 않는다는 뜻이니까.

『괴수가 원래 살던 세계는?』

인류가 가장 궁금해하는 신비 중 하나다.

하지만 기억상실증일 리 없는 용신들은 하나같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입을 다물었고, 무일을 따르는 여성형 괴수들도 묵비권을 행사했다.

이게 무엇을 뜻할까?

괴수들을 원래 살던 세계로 돌려보낼 해결책이 여기에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무일로서는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아니, 그전에….

눈앞에 당면한 문제부터 해결해야 할 것 같았다.

“코오오오!”

고동 비슷한 소리를 내는 거대한 남성형 괴수.

끽해야 6종 따위가 겁도 없이 왕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포쉐이크 / 6종 대형】

주요 능력은 길고 튼튼한 8개의 다리를 휘저어서 물보라를 일으키는 것이다. 그리고 또 물보라를 일으키는 것이다.

...할 줄 아는 게 정말 이뿐이다.

하체는 강력하지만, 상체는 ‘인간형’답게 ‘종이 몸’이라서 진짜 약점 덩어리인 까닭이다.

본인도 그걸 알기에 상체를 물속에 감추고 하체만 움직인다.

“폐하. 소신이 처리하겠사옵니다.”

만용으로 달려든 6종 포쉐이크에게 어뢰처럼 쏘아져 나간 8종 괴수 쉬임프.

플로라 아브롤라의 주먹이 손쉽게 파고든다.

포쉐이크의 다리들이 힘을 잃고 축 늘어지더니 뽀글뽀글 가라앉는다.

바다 위를 표류하듯 멈춰선 무일의 곁에는 전라의 인어공주들이 엉겨붙어 있었다. 서로 더 가까이 붙겠다고 밀치며 난리법석이다.

한무일은 행복한 남자?

한둘도 아니고 서른씩이나 되니 숨이 탁탁 막힌다.

“다들, 진정해.”

“주인님~주인님~진정해~♬”

“진정해~주인님~전정해~♪”

“주인님~진정해~전정해~♬”

쉬임프처럼 물속에서는 말을 전달할 수 있는 세이랑.

전설 속의 인어처럼 노래처럼 들린다.

하지만 지능적인 대화는 불가능! 그저 무일이 한 마지막 대사를 따라 하며 순수하게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그밖에 유일하게 익힌 단어는 ‘주인님’이다. 그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을 때는 이것만 온종일 반복한다.

참으로 행복한 공주님들….

백치미(白痴美)의 진수를 보여주는 것 같다.

“가자.”

시끌벅적하게 떠들던 세이랑 무리가 다시 헤엄치기 시작했다.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질서정연한 모습.

이것이 왕의 힘이다.

본능대로 행동하는 괴수를 통제하여 뜻대로 움직인다. 그렇지만 방금, 그녀들이 무일의 몸에 찰싹 달라붙는 돌발행동에서 알 수 있듯이 절대명령은 아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문팽이가 조언했다.

요약하자면,

『따르고 싶어서 따른다.』

왕에는 2가지 종류가 있다.

서민적인 왕, 타고난 왕.

한유일은 뱀페스트로서 ‘서민적인 왕’이다. 약한 대신 동족을 통솔하는 강력한 지배력과 결정권을 갖고 있다.

하지만 한무일은 문팽이처럼 ‘타고난 왕’이다.

왕이 될 운명을 타고난 왕족.

선지혜와 계약한 문팽이 ‘까루나 막찌몬쓰’를 제외한 모든 문팽이, 형제들은 심해에서 그가 약해지거나 죽길 기다린다고 한다.

일종에 유폐된 셈.

아무튼, 타고난 왕인 엘퍼러는 좀 더 특수한 상황이다.

존재하지 않는 왕! 유일무이한 왕!

‘나도 특별하다. 하렘의 왕이다!’

‘...그래. 특별해서 좋겠다.’

가는 길에 4종밖에 안 되는 ‘남성형 괴수’가 또 방해했지만….

세이랑 무리와 충돌하면서 분해됐다.

그래도 꾸준히 덤벼든다.

같은 남자로서 유감이 무척 많은 것 같다.

“다 왔군.”

중국의 수도 ‘베이징’이 보인다.

방문하겠다고 ‘통보’한 그 짧은 시간에, 한글로 플래카드와 현수막까지 설치한 환영인사에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중화인민공화국에 오신 엘퍼러를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 [37화-5] 새해가 왔습니다.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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