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155화 (155/287)

< [37화-4] 새해가 왔습니다. >

부산 사람들이 느끼는 심정도 시장이랑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영웅이 돌아왔구나!

...싶더니 갑자기 9종 수호자가 부산을 밀어버리러 온다는 것이다.

당연히 불만이 쏟아졌지만, 시청사에서 내놓은 공식발표로 인해 쏙 들어갔다.

(부산이 사라질 경우, 의식주를 무상으로 해결해줍니다.)

요약하면 이랬다.

재산과 토지, 화폐, 주식 등의 무수히 많은 문제가 발생했지만, 그건 선지혜가 이끄는 자문단에서 해결할 일이었다.

한무일과 선지혜는 저지르고 보는 것이다.

왜?

부산의 터줏대감들이 마음에 안 드니까!

다른 이유는 없다.

“문팽이가 정말로 올까요, 여보.”

“오겠지. 오니까 이 난리겠지.”

“아빠. 다리 아파….”

곧바로 시작된 피난은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몸만 이동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모두가 움직인 건 아니었다.

기만책이라고 확신한 기득권층은 꼼짝 않고 집에서 대기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미친 짓을 할 것 같지 않았던 까닭이다.

하지만 닷새 후.

부산에 등장한 거대한 ‘달’은 비현실적이었다.

태양마저 가리는 문팽이의 위용 앞에서 그 어떤 만용과 객기도 무의미했다.

(지혜. 그쪽은 어때?)

(응. 부산이 사라지는 중.)

(...아니. 그거 말고.)

(그럭저럭. 서울이 망해버렸을 때를 대비한 안보대책이 있거든. 그걸 조금 수정해서 부산에 적용했어.)

선지혜는 무척 쉬운 것처럼 말했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아쿠버스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자문단은 지금쯤 과로사로 괴멸했을 것이다.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많다.

부산 시민 중에서 자기 땅을 가진 사람이 거의 없었다. 부산의 거의 모든 땅은 극소수 부자들의 소유였다.

그것들을 전부 합법적으로 사들여야 하는데….

(정치는 어렵네.)

(응.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 와이츠의 협조를 얻어냈거든.)

(싸이어가?)

(응. 부산은 고립됐어. 재산과 식량, 이주 등등….)

가장 먼저 화폐의 가치가 뚝 떨어졌다.

대한민국은 ‘원’을 쓰지만, 서울에서 교류를 끊자마자 돈이 다 망한 부산에서만 빙글빙글 돌게 됐다.

얼마나 심한가?

빵 한 조각이 ‘5천만 원’에 달했다. 그리고 그 가치는 더 떨어질 전망이었다.

하지만 상대도 만만치 않았다.

이 고비만 넘기면 다시 부활할 거라고 믿는 걸까.

땅문서를 꽉 쥐고 절대 놓지 않았다.

(...계엄령을 선포하자.)

(좋아!)

문팽이가 부산을 밀어버리기 시작했다.

비상시국에 선포한 계엄령에 따라, 부산 시민의 모든 재산은 국가에 귀속됐다. 대신, 기부한 재산만큼 훗날 보상해준다는 식이었다.

하지만 빵 한 조각이 ‘5천만 원’이다.

재산이 아무리 많더라도 그 보상의 수준이 변변찮을 수밖에 없으리라.

‘무일! 진짜 난리법석인데?’

‘그래서 진짜 바쁘니까 말 시키지 마.’

피난민들은 서울과 목포에서 보내는 식량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있다.

치안을 사냥꾼들에게 맡겼지만, 정작 그 사냥꾼들부터 불량하니 쉽지 않았다.

평소의 엘퍼러 같으면 군기확립을 위해 단칼에 그들의 목을 쳤겠지만, 목포의 수용소로 압송했다.

뱀페스트 숙주로 쓰기 위해서.

그들의 처분에 대해 공개적으로 알려지자마자 사냥꾼들은 순한 양이 됐다.

흡혈귀에게 몸을 빼앗긴다고?

영원히 자기 몸에 갇혀서 멋대로 움직이는 걸 지켜봐야 한다.

그건 깔끔한 죽음보다 더한 공포다.

“저…. 실례합니다.”

“아! 고은별 양. 무슨 일이십니까?”

“다름이 아니고…. 얼마나 더 이동해야 하는지 여쭙고 싶어서요. 어른들은 괜찮지만, 아이들은 한계에요.”

무일이 가장 먼저 느낀 생각은 이거였다.

이 소녀, 계약자 맞아?

심성이 착하다고 생각했지만, 상상 이상이다.

그 분위기를 발키지어의 무례한 두 손이 와장창 깨버리는 바람에 아무도 몰라주지만, 무척이나 훌륭한 마음씨였다.

다른 계약자를 욕하겠다는 게 아니다.

괴수의 영향을 받고도 타인(他人)의 안위를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심하면 선지혜와 박선영처럼 안중에 없다.

“거의 다 왔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길.”

아직은 겨울이다.

까놓고 말해서 거의 이동하지 않았다.

한무일은 여태, 괴수가 인류에게 손가락 하나 못 건드리게 하면 끝이라고 여겼었다. 하지만 그건 보호가 아닌 방치였다.

가장 많은 불만은 이미 무일도 안다.

『우리가 왜 피난 가야 해? 문팽이를 그전에 쓰러트려!』

남에게 떠넘기려는 경향이 강하다.

문팽이가 한국에 얼마나 큰 도움을 주는지는 둘째치고 ‘나는 피난 가기 싫으니 처치해!’라는 것이다.

부산의 가난은 스스로 만든 것이다.

가상현실게임에 파묻히지 않고 현실을 살아가는 만큼 힘든 일을 안 하려고 기피 한 결과.

힘든 일은 ‘사냥꾼’이 떠맡았다.

그들은 목숨 걸고 싸우고 훈련한 끝에 지배층이 됐다.

‘무일. 그래서 넌 누구 편인데?’

‘...부산 편이지.’

‘결론은 부산의 거지와 부자. 둘 다 괴롭히겠다는 소리네.’

‘나는 신이 아니야.’

가만히 누워있는 사람에게 행복을 줄 능력 같은 건 없다.

황진천이 날뛴 틈을 이용해서 쿠데타를 일으킨 훈련병들이 그 대표적인 예다. 그들은 자신들이 누린 평화를 당연시 여겼다.

그들에게 쿠데타를 일으킨 이유를 물으면 대답이 한결같다.

『나를 힘들게 했어!』

대한민국이 가상현실게임 최강국이 될 수 있었던 건 다른 게 아니다.

똑똑해서? 젓가락을 써서? 예뻐서? 착해서?

다 틀렸다!

세계에서 한국인들이 가장 많은 시간을 가상현실게임에 투자한다. 많이 하면 실력이 느는 건 당연하다.

하물며 가상현실게임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RPG 게임은 오래 할수록 유리하다.

서울 시민들은 노는데 익숙하다.

그들의 유희와 행복을 지키기 위해 희생한 자들에게 고마워할 줄 모른다.

‘부산도 똑같아.’

가상현실게임만 안 했을 뿐이지 다를 게 없었다.

차이가 있다면 와이츠의 정책에 따라 서울은 재물을 균등하게 나눴고, 부산은 노력한 자들이 재물을 독점하고 악용하면서 문제가 됐다.

무일의 목적은 둘이다.

시민들에게 고생하는 법을 억지로 가르치고, 기득권층에게 다시 부산을 위해 일할 것을 종용하는 것이다.

이걸 위안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억세게 살아온 덕분인지 피난 중에 갓난아기 하나 죽지 않았다.

하지만 고은별의 걱정처럼 그것도 슬슬 한계다.

(지혜. 부산 상황은?)

(다 밀었어.)

(멀리서 봐도 그런 것 같네.)

피난민들이 군소리 않고 따라오는 것도 저것 때문이다.

피난행렬 어디에서나 보이는 문팽이 등껍질. 그 크기에 비하면 너무나 보잘것없는 부산의 건물들이 허망하게 바스러졌다.

부산을 밀어버리고 화가 풀린 문팽이는 돌아간다는 시나리오다.

그 진실은?

이 달팽이 왕은 화난 적이 없다. 그래도 기분이 좋아졌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못해도 반백 년은 얌전히 있을 거라나?

9종 수호자 문팽이는 다시 목포를 향해 정말 빠른 속도로 회군했다.

(다음으로 넘어갈게.)

(서둘러줘.)

오늘을 넘기면 견디지 못하고 얼어 죽는 노약자가 분명 나올 것이다.

누군가 죽기 시작하면 통제가 매우 힘들어진다.

목포에 쓸 예정이었던 ‘조립식 주택’을 수천 마리의 추종자가 바둑판식 배열로 허허벌판이 된 부산을 빠르게 채워갔다.

목포에서 하던 작업의 연장선이다.

더구나 상하수도와 전기배선을 신경 쓰지 않고 무작정 옮겨놓는 일이기에 시간은 그리 걸리지 않았다.

이집트 피라미드나 중국의 만리장성을 1시간 만에 세우는 작업속도!

통짜 철로 된 조립식은 섬세하지 못한 괴수의 힘에도 끄떡없었다. 물론, 작정하고 힘을 주면 찌그러지겠지만.

이것이야말로 9종 괴수의 진정한 힘.

수많은 야생괴수가 수호자보다도 통제가 잘 되고 있었다.

‘...예상하긴 했지만, 완전 마법이로군.’

‘헹! 언젠가 나도 할 수 있다!’

한유일이 기획 중인 ‘하렘근위대’가 완성된다면 말이다.

총원: 최소 3천!

능력: 최소 5종!

미소녀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정예군단!

인류가 아닌 ‘미소녀’로 한정 짓는 편협한 왕이지만, 계약자를 지키기 위해 도시도 보호하는 수호자랑 별 차이 없을 것 같다.

녀석의 꿈이 이루어지려면?

부산에 예쁜 아가씨가 많이 살아야 한다.

뱀페스트는 노블레스랑 달리 시간이 흘러도 능력이 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능력을 쓸 때마다 ‘괴수의 피’가 묽어진다.

괴력, 재생력, 지배력….

그 밖에도 소소한 능력들이 많다.

즉, 평범한 인간처럼 살아갈 게 아니면 유지비가 들어간다.

“엘퍼러! 자이엔트 무리가 나타났습니다!”

“...문팽이가 지나가는 길에 자이엔트 서식지를 건드린 모양이군요.”

거대한 개미, 자이엔트.

하지만 평균적으로 덩치가 큰 해양괴수 중에서도 3번째로 큰 문팽이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하물며 ‘대형’도 아닌 ‘보통’에 속하는 5종 괴수.

슈퍼달팽이의 안중에 있을 턱이 없다.

자이엔트 서식지?

낙엽처럼 짓밟아버렸으리라!

“발키지어를 필두로 수호자들이 막고 있지만, 역부족입니다. 숫자가 너무 많아요! 이대로라면 대학살이 벌어질 겁니다!”

“사냥꾼들은 뭘 하고 있습니까?”

“자이엔트는 5종입니다!”

“프로사냥꾼인 제가 몰라서 묻는다고 생각하나요, 시장님.”

“죄, 죄송합니다.”

시장의 사죄를 끝까지 듣지 않고 훌쩍 후방으로 뛰었다. 말마따나 가만 놔두면 피난민들이 우수수 죽어날 것이다.

절로 한숨이 나온다.

이래서 부산의 사냥꾼들이 문제다.

과거에는 어땠을지 몰라도 현재는 나약과 나태를 두르고 있다.

상대가 7종이든 8종이든 시민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망설이지 않고 돌진하는 ‘무모한 사나이’가 사냥꾼이다.

수호자에게 모든 걸 맡길 수 없다.

녀석들은 일단 전투를 시작하면 계약자를 제외한 모든 생명체가 ‘적’이다.

괜히 강대국들이 노블레스와 에쏘스트에 집착하는 게 아니다.

‘갱생의 여지가 있을지….’

사냥꾼들이 몸을 사리면 시민들은 누가 지켜준단 말인가?

그런데 부산의 기득권층은 몸을 뺄 생각부터 한다.

안 그랬다면 한무일은 굳이 사냥꾼들에게 치중된 재력과 권력을 회수할 계획을 짜지 않았을 것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사람은 직위에 걸맞은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한다.

외면할 거면 직위도 포기해야 한다.

‘무일. 그래도 사냥꾼이면 몸이 좋겠지? 전부 내 병사로 만들자!’

‘서두르지 마.’

손목시계 ‘아메리카 드림워치’를 실행했다.

접속대상은 부산의 모든 사냥꾼.

자기 몸은 지키려고 무장을 확실히 했다면 듣지 못할 수 없으리라.

(특공대장이다. 지금부터 모든 사냥꾼은 자이엔트 무리가 피난행렬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도주 혹은 방관했을 시, 간접살인죄를 적용한다. 이상.)

무일 옆에서 달리던 플로라가 먼저 뛰어갔다.

덩치가 범고래처럼 큰 연갈색 개미가 달려들지만, 그보다 앞서 다리가 붙잡힌 녀석은 반응할 새도 없이 허공을 빙글빙글 돌면서 둔기로 활용됐다.

하기야 급이 너무 다르다.

쉬임프는 8종.

자이엔트는 아무리 많아 봐야 5종이다.

그건 알지만, 비현실적이다.

가녀린 소녀가 무시무시한 괴수를 집어 던지는 광경은.

곤충류가 덩치에 비해 가볍긴 하지만, 그래도 저 정도 크기면 대단히 무겁다.

그런데 자이엔트가 종이비행기처럼 휙휙 날아간다.

“그럼…. 나는 피난민 쪽을 볼까.”

개인전에 특화된 쉬임프라서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말 그대로 시간문제다.

자이엔트는 플로라에게 맡기고 행렬을 살폈다.

사냥꾼이 미덥지 않으니 시민들이 불안에 떨고 있었다. 그럼에도 침착하게 대열을 이탈하지 않고 이동하는 중이었다.

서울에서 파견된 계약자들 덕분이다.

금서희 같은 무소속이 아닌 정식교육을 받은 계약자들의 마음가짐.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런 일 없을 겁니다!”

“개미는 끽해야 5종입니다! 9종과 8종 수호자를 믿으세요!”

서울에서도 그렇지만, 일반시민에게는 헌병대보다 계약자의 말이 절대적이다.

모든 계약자가 동참하고 있었다.

시작은 미약했을지 몰라도 하나둘 바람잡이가 되어 나서자 못 이기는 척하며 모두가 합세한 것이리라.

그 중심에는 ‘고은별’이다.

부산에서 가장 영향력이 강한 7종 계약자.

‘...마음 같아서는 8종이랑 엮어주고 싶은 아가씨군.’

‘오! 무일! 선물 작전이냐?’

반색하는 ‘하렘의 왕’이었다.

저 가슴 빵빵 미소녀가 무척 마음에 드는 눈치다.

8종을 선물?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선지혜에게 9종을 선물했던 전적이 떠오르고 말았다.

‘유일. 좀 건설적인 방향으로 생각해봐.’

‘헹! 미소녀와 수호자를 동시에 접수하려는 네 속셈을 모를 줄 알고!’

< [37화-4] 새해가 왔습니다.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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