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154화 (154/287)

< [37화-3] 새해가 왔습니다. >

여동생의 애교(!)를 받아주면서 시청사 최상층까지 올라갔다.

계약자 합숙소라고 해도 좋은 곳이었다.

부산에서 활동하는 모든 계약자가 이곳에서 외모관리를 하고, 남는 시간에는 출동하기 전까지 아래층에서 가상현실게임을 주로 즐겼다.

서울하고 크게 다를 게 없군?

계약자의 편의 면에서는 서울보다 더 신경 쓴 것 같다.

‘오오! 사방에 미소녀다!’

‘좀 조용히 해봐.’

‘우와! 저기! 저기! 목이 아니라 가슴을 깨물어주고 싶은 미소녀가 있다!’

이 ‘하렘의 왕’은 도무지 진정될 기미가 안 보였다.

한유일이 난리 치는 곳을 보고,

‘에쏘드?’

...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미소녀가 있었다.

하나같이 비현실적인 ‘출렁출렁’ 물방울 젖가슴에 집착하는 ‘용사의 정령’에도 뒤지지 않는 몸매의 소유자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겸손’이란 단어가 이렇게 잘 어울리는 계약자가 또 있을까.

윤소영과 함께 대한민국에 단 둘뿐인 7종 계약자다.

『고은별』

한국만큼은 고위수호자 숫자가 점점 역피라미드가 돼가고 있지만, 여전히 7종 계약자는 귀중한 재원이다.

이쪽을 보고 눈을 귀엽게 뜬 고은별.

그녀 뒤편에서 계약자의 가슴을 무례하게 거머쥔 수호자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아리따운 천사. 하지만 표정이 망했다.

은팔찌 찬 동네 아저씨 같다.

계약자 고은별을 지키는…. 성희롱하는 발키지어 ‘벨-쏘세팅’이었다.

“어…. 엘퍼러 씨?”

“한무일이면 충분합니다.”

“네에…. 우웃?! 벨! 대화 중이잖아요.”

무일은 목포에 놓고 온 발키지어 ‘퐁퐁’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눈앞에 천사에 비하면 지극히 건전한 것 같다.

고은별은 윤소영에게 뒤지지 않는 미인이었다.

다만, 너무나 특출난 가슴 탓에 나머지 요소가 묻히고 말았다.

“고은별 양. 부산은 지낼만합니까?”

“네! 모두가 친절해요.”

“다행이군요.”

대화는 그걸로 중단됐다.

금서희가 이곳 시설들을 구경시켜준다면서 팔을 잡아끈 탓이다.

여동생이 질투해서 어쩌자는 건지….

그 속셈이 빤히 보였지만, 안 그래도 시청사를 둘러볼 참이었다.

창밖에서 금서희의 5종 수호자, 까까오가 ‘까아! 까아!’ 구슬프게 우는 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렸다.

‘미안. 나 때문에 네가 찬밥신세구나!’

여동생이 오빠를 오랜만에 봐서 반가워하는 것뿐이다.

며칠 지나면 잠잠해지지 않을까.

그 ‘며칠’이 조금 길어질지도 모르겠지만.

선지혜에게서 연락이 왔다. 안 그래도 올 때가 됐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선배. 부산에서 뭐해?)

(뜯어고치려고.)

(내가 깔끔히 밀어-, 개편할 테니 돌아와.)

방금, 무시할 수 없는 발언이 나오다가 말았다.

슈퍼달팽이가 고향을 허허벌판으로 만드는 환각을 본 무일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하지만 그게 꼭 나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목포처럼 아예 새로 시작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 만큼 부산은 엉망이었다.

(지혜. 목포의 1차 공사가 완공되기까지 얼마나 남았지?)

(서울 때문에 주춤하긴 했지만, 여름부터 입주가 조금씩 가능할걸.)

(빠르네.)

(하지만 모든 입주가 완료되는 1차 공사가 끝나려면 내후년까지는 기다려야 해. 층수가 낮긴 해도 면적이 워낙 넓으니까.)

문팽이의 요구를 충족시키기란 쉬운 게 아니다.

서울에 뒤지지 않는 도시를 갯벌 위에 짓는다는 위업이 그리 간단히 될 리 없다. 서울은 누가 뭐라 해도 고대부터 한국의 수도였던 도시니까.

역사와 전통은 쉽게 따라잡을 수 없다.

(흠….)

(선배. 목포를 빨리 끝내고 부산을 뜯어고치고 싶은 거지?)

(뭐…. 그렇지.)

(그러면 중국을 끌어들이면 돼.)

(중국을?)

솔깃했다.

강대국 중에서 서울에 원조 중이지 않은 국가는 중국이 거의 유일했다.

중국은 상하이 문제로 여전히 빌빌거리고 있지만, 그건 부족한 자원 탓이다. 인력은 넘쳐나는데 항구를 고칠 건축자재가 부족한 것이다.

목포에 넘쳐나는 고철(?)을 대가로 원조를 받는다?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선배. 자원은 무기야. 그렇게 함부로 주면 안 돼. 부족해지면 태평양에서 또 쓸어담으면 된다지만, 이것도 유한해.)

(그러면?)

(노동력을 맞교환해야지.)

조만간 중국에서 원정대를 꾸린다는 모양이다.

지난 상하이 전투에서 수호자를 잃은 계약자가 많은 까닭이다. 그 공백을 서둘러 메꾸지 않으면 도시방어에 큰 차질이 생기리라.

원정대를 돕는다?

중국에서 받아들일지 의문이다.

엘퍼러는 5종 이하의 괴수를 자빠트리고 ‘신사적인 대화’를 나누면 그만이다. 그렇게 쉬운 일을 해준 대가로 도시건설을 도와줄지….

(대가가 약하지 않을까?)

(그건 선배 생각이고. 외국들은 전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을걸.)

쉽고 어렵고의 문제가 아니다.

엘퍼러와 협조관계를 맺는다는 것부터가 국제사회에서 큰 이점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그가 원정대를 도와주면 불가능한 계약도 가능해진다.

한국이 그 대표적인 예다.

그가 원정대에 참여한 덕분에 한국의 계약자 평균 수준은 대폭 향상됐다.

그뿐이랴?

계약이 쉽지 않은 해양괴수인 세이랑을 다수 확보함으로써 인천 앞바다가 안전해졌고, 화물선이 침몰할 위험성이 낮아졌다.

대한민국의 해양전력이 20배쯤 올라갔다고 하면 이해가 쉬울까.

여기에 아쿠버스와 문팽이가 가세하면 아예 측정불가다.

(과연….)

(중국에는 용이 많이 살아. 그런데도 용의 계약자는 한 명도 없지. 그 가려운 부분을 살살 긁어주면 감격해서 적극적으로 지원해줄걸.)

괜찮은 방법 같다.

이왕 말 나온 김에 무일은 이것저것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한유일이 지적한 흡혈방법까지 보완해서.

묵묵히 끝까지 경청한 선지혜.

(응. 잘 이해했어.)

(그래?)

(나랑 따로 살고 싶다는 거네.)

(결론이 그거냐?!)

(최은설, 그 백여우랑 밤마다 시시덕거리고, 에쏘드는 엄마 꼬맹이. 이런 불경스러운 광경을 매일 보는 중인걸!)

(그…. 음….)

반론의 여지가 없었다.

뱀페스트와 인류의 공존이란 장대한 도시계획은, 질려버린 아내에게서 도망치려는 피난계획으로 전락했다.

어째서 이렇게 된 걸까.

평소 행실이 바르지 못해서 그렇다고 나불대기 시작한 한유일을 에쏘드로 쑤셔주고 싶다.

선유나는 변명의 여지가 없지만, 최은설은 무일이 한 게 아니다.

‘절반은 네 녀석 잘못이잖아!’

‘헹! 계약자와 이 정도도 못하냐. 한심한 동정 같으니.’

‘너도 동정이잖아!’

‘무슨 헛소리냐. 나는 날마다 흡혈한다.’

티격태격은 잠시 접어두고 선지혜와 하던 통신에 다시 집중했다.

이 달팽이 여왕님에게 ‘마음대로 생각해!’라고 통보하며 휙 돌아설 수 없다.

어떻게든 설득해야 한다.

부산을 살려보겠다는 이유만이 아니다.

정치와 경제 부분은 용신 아쿠버스의 도움으로도 충분하지만, 사람을 상대하는 수완은 선지혜를 따라올 수 없다.

라미아의 외교는 단순하다.

첫마디를 ‘빠끔, 외국산 하등생물. 덜떨어졌으면 말이라도 잘 들어라.’로 시작해서 폭언으로 끝난다.

평화와 협상이란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도 도와줄게, 선배.)

(정말?!)

(생각해보니 맞는 말인걸. 매일 얼굴을 맞대고 있으면, 함께하는 시간의 소중함을 잊게 될 것 같거든.)

선지혜답지 않은 감성적인 얘기였다.

와이츠와 계약이 풀린 이후부터 조금씩 변화하는 것 같다.

좋은 징조다.

문팽이의 영향을 받으면서 ‘씀씀이’가 커진 감이 없잖아 있지만, 고삐를 꽉 잡고 있으면 거슬린다는 이유로 도쿄를 밀어버리진 않을 것이다.

슈퍼달팽이는 심심하지 않을까?

무일이 선지혜에게 넌지시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랬더니 인간이랑 시간 개념이 전혀 달라서 괜찮다고 했다. 인간이 느끼는 1년이 문팽이에게는 1시간쯤 한다고 한다.

몇십 년에 한 번씩 산책하면 만족할 거란다.

그 산책이 얼마나 위험할지….

(고마워.)

(응. 서울에 연락해서 사형수를 솎아내라고 할게.)

목포에 내일까지 수용소를 급조해보겠다는 선지혜.

어째선지 의욕이 충만하다.

그 이유가 있었다.

사형수들이 뱀페스트 숙주로 쓸모 있는 몸뚱이가 될 때까지 끊임없이 굴리겠다고 계획을 밝힌 선지혜는….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정말 즐거워 보였다.

사형수에게 연민을 느낄 줄이야….

살짝 불안해졌다.

‘그러다가 사형수들의 정신력이 티타늄처럼 단단해지는 거 아니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왜?’

‘무일. 너처럼 지배에서 벗어나기 쉬웠으면 뱀페스트는 멸종했다.’

선지혜와 의논을 마치고 부산항을 바라보며 잠시 기다리니, 어느새 5시간이란 유예기간이 훌쩍 지나갔다.

무일은 한적한 회의장 상석에 앉았다.

부산 시장은 손수건으로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연신 닦으며 젊은 부하의 브리핑을 긴장 어린 시선으로 관전했다.

과장과 허풍을 고려하더라도 단시간에 상당히 많은 성과를 냈다.

하지만 이후로 탁 막혔다.

부정부패를 전부 처단하고 나니 손쓸 게 없는 까닭이다.

“법적으로 전혀 하자가 없다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대장님.”

부산을 좀먹는 작자들은 지능범이었다.

법망을 교묘하게 피해가지 않고 떳떳하게 준수하며 정공법으로 시민들의 고혈을 쥐어짰다.

예를 들자면?

고리대금업 이자가 서울보다도 낮았다. 문제는 그 낮은 이자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원금조차 갚을 형편이 안 됐다.

모든 게 이런 식이다.

부산의 기득권층은 훌륭한 모범시민이었다.

겉보기에는.

세금도 꼬박꼬박 내고 법마저 준수하는 그들을 무슨 수로 척결한단 말인가!

팔짱을 끼고 끝까지 들은 무일은 결론을 내렸다.

그냥,

‘밀어버리자.’

무슨 게임이든 잘 안 풀릴 때는 처음부터 다시 하는 게 최선이다.

자본주의가 부산 시민을 괴롭힌다면?

사회주의로 가면 된다.

곧바로 선지혜에게 다시 연락을 취하는 무일이었다.

(지혜.)

(응. 부산 땅을 얼마나 사들일까?)

(...날마다 도청하니 설명할 필요가 없네. 부동산 하나 차릴 만큼만. 갑자기 문팽이가 동쪽으로, 부산으로 산책한다는 걸로 해둘까.)

(피난해야겠네?)

(안타깝게도.)

시장을 포함한 모두가 입을 쫙 벌렸다.

명백한 범죄 현장이었다.

하지만 9종 괴수에게 이러쿵저러쿵 따질 수 있는 인간이 있을 턱이 없다. 심심해서 산책 좀 하겠다는데 누가 말린단 말인가!

수호자가 계약자의 말을 항상 듣는 건 아니다.

그러니 문팽이가 멋대로 움직이는 건 선지혜의 잘못이라고 하기도 모호했다.

하물며 9종.

『왕은 자존심이 세서 말을 잘 안 듣는걸!』

이 한마디면 끝이다.

하지만 진실은?

선지혜가 원하면 슈퍼달팽이는 어디든지 간다!

빨리 간다고 한라산을 밀어버린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선배! 닷새 뒤에 부산에서 봐!)

(흠. 그래도 갑자기 동쪽으로 간다고 하면 수상하게 생각할 테니…. 일본에 살짝 신세 지도록 할까.)

(응. 본부에는 문팽이가 도쿄를 원한다고 해둘게.)

달팽이 왕은 부산에 터를 잡으려다가 일본의 요구로 자리를 옮겼다.

그래서 문팽이가 화났다면?

이 무시무시한 대이동도 수긍이 간다.

선지혜와 통화를 마친 무일은 기지개를 활짝 켰다. 원래는 오랜만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나볼 생각이었는데….

귀찮다.

성미에 안 맞다.

만나도 딱히 할 말이 없다.

“시장님.”

“넷!”

“긴급속보로 상황을 설명하고 피난경보를 내리십시오.”

“저, 정말입니까?!”

“정말로 올 테니 헛고생은 아닐 겁니다.”

“아아….”

< [37화-3] 새해가 왔습니다.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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