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153화 (153/287)

< [37화-2] 새해가 왔습니다. >

말과 달리 표정은 담담했다.

넓기만 하고 심각하게 낙후되어 실속 없는 부산항에 도착하자마자 플로라와 함께 느릿느릿 도심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중심가.

이 낡은 항구와 어울리지 않는 아름다운 세이랑 무리에 홀려버린 선원들이 조금 걱정됐지만, 그들이 만용만 안 부리면 별다른 문제는 없으리라.

‘무일. 고향이 참 변변찮네.’

‘잘 봐둬. 네가 다스릴 땅이다.’

‘하아?’

숙주의 폭탄선언에 한유일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곳이 내 영지?

한무일의 생각이 공유됨에 따라 ‘신임 흡혈귀 왕’은 점점 암담해졌다.

대한민국을 비롯한 대부분 국가에는 ‘무기징역’과 ‘유기징역’이란 형벌 자체가 없다. 오직 처형과 추방만 있을 뿐.

어차피 죽일 자들이라면.

그자들을 ‘뱀페스트’로 만들어서 부산의 파수병으로 쓴다는 것이 무일의 계획이다.

일종에 ‘노블레스’다.

하지만 그 효율이 압도적으로 뛰어나다.

보통의 흡혈귀처럼 ‘무고한 여성’들을 괴롭히지 않고, 인류를 위해 수렵과 사냥을 병행하는…. 강력한 프로사냥꾼이다.

장점은?

특수체질이 아니기에 흡혈을 매일 할 필요 없다.

완전무장하면 ‘6종’까지 단신으로 쓰러트릴 수 있다고 기대해본다. 그리고 협공한다면 그 이상도 가능하리라.

‘어때?’

‘미소녀도 아닌데….’

‘영지를 잘 다스리는 훌륭한 왕이 되어야 미소녀도 꼬이는 거야.’

‘...좋다.’

협조의사를 받아낸 무일은 씩 웃었다.

현재, 서울에는 수많은 범죄자가 공사현장에 동원되는 중이다. 그들에게 ‘시민권’이란 당근을 제시하고 밤낮으로 부려 먹는 것이다.

혼란을 틈타서 폭동에 가담한 자들이 정말 많았다. 여기에는 남자와 여자, 현대인, 고대인 등을 가리지 않았다.

그들 대다수가 순순히 강제노역을 받아들였지만, 일부는 여전히 반항 중이다. 그리고 폭동에 가담하지 않은 척하며 시민행세 하는 자도 있다.

이들은 잡히는 즉시 사형!

무일은 바로 이 불순분자들을 활용할 생각이다.

남자는 숙주, 여자는 노예.

덤으로 부산의 범죄자들을 색출하여 빠르게 세를 확장할 계획이다. 그렇기 위해 직접 부산에 온 것이고.

‘괜찮지?’

‘...나쁘진 않다만. 무일, 동정을 깰 마음의 준비는 됐나?’

‘음…?’

전혀 생각지 않은 지적에 무일은 곰곰이 생각했다.

그리고 발걸음이 뚝 멈췄다.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던 8종 추종자 ‘플로티날 아브롤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쉬임프는 주위를 둘러보며 적을 탐색했다.

적의(敵意)?

찾아볼 수 없다.

다 쓰러져가는 건물의 창문 너머로 고개만 살짝 내밀며 힐끔거리는 시민만 있을 뿐.

그 눈빛들은 두려움이나 공포가 아닌 선망이었다.

최근에 급격히 성장한 ‘엘퍼러’를 곧바로 알아보진 못했지만, 평양에서 그가 영국 왕실로부터 받은 망토를 모르는 사람은 부산에 없다.

『부산이 낳은 영웅』

부산에서 한무일을 부르는 칭호다.

출세했음에도 고향을 저버렸다는 비난을 퍼붓는 사람도 더러 있지만, 평양 일이 있고부터 아직 1년도 안 됐다.

그래서 대다수 시민은 영웅이 언젠가 와주리란 희망을 품고 기다리는 추세다.

그리고 마침내!

새해가 밝자마자 영웅이 왔다!

만약, 여기서 한무일이 손을 흔들며 아는 척이라도 하면 환호성이 터지리라. 아니면 누군가 행동으로 옮기는 순간, 군중심리가 폭발할 것이다.

옆의 8종 괴수 쉬임프?

반투명한 ‘루비 갑옷’을 입은 플로라는 무섭다기보다는 황홀하다.

특히나 적나라하게 비치는 알몸은 사내들이 넋을 빼놓고도 남았다.

“헤에…. 레알 쩐다….”

“오빠! 결혼한 지 이틀 만에 한눈팔기에요!”

“아아아악?!”

새신부에게 귀를 붙잡힌 누군가 비명을 내질렀다.

사람들은 그걸 환호로 착각했다.

전염병처럼 순식간에 사방에서 함성을 내질렀다. 그리고 여기에 깜짝 놀란 사람들이 몰려들며 그 함성은 더욱 커졌다.

영웅의 귀환.

어떤 사람은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부산을 부흥시켜달라고.

갑작스러운 소란에 상념을 깬 무일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무관심한 서울 시민과 너무나 다른 반응.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환대에 ‘이러면 안 되는데….’라고 생각하면서도 눈시울이 붉혀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 마음은 한유일에게도 전해졌다.

‘원숭이들의 환대가 어째선지 기분 나쁘지 않다.’

‘그 원숭이란 생각부터 고쳐.’

‘어째서?’

‘바로 저들이 네가 노래를 부르는 미소녀를 낳는다. 현명한 왕이라면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겠지?’

‘...존중해주고 보살펴주란 뜻인가.’

‘맞아.’

첫술부터 배부를 순 없다. 하나하나 바꿔가면 된다.

하지만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그건, 범죄자를 뱀페스트에 감염시키는 수단 때문이다.

‘세상에 흩어져있는 귀족들은 구세력이다. 그래서 내 지시가 안 먹혀. 부산으로 불러들일 수 없다는 뜻이지.’

‘새롭게 세력을 꾸려야 한다는 거군?’

‘정답이다.’

‘그 방법이란, 여성 자궁에 씨를 뿌리는 것뿐이고.’

‘현재로써는.’

무일이 당했던 공기감염 같은 방식은 힘들다. 피의 소모가 매우 크기에 현재로써는 버거운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하다.

남은 방법은 동정을 깨는 것뿐.

하지만 선지혜가 순순히 허락할 리 없다. 그리고 그 방식은 무일도 내키지 않았다.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와 한다는 것은.

정말로 다른 방법이 없는 걸까?

여전히 환호하는 사람들의 분위기에 휩쓸린 한유일이 ‘동정 탈출!’을 반복적으로 외치기 시작했다.

에쏘드로 쑤셔주고 싶다.

‘다른 방법을 내놔.’

‘순 억지군!’

‘내놔.’

‘...좋다. 사실은, 흡혈감염이 남았지!’

‘역시! 이럴 줄 알았어!’

생각해보니 무일도 이미 아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여성을 ‘흡혈’해야 한다는 선제조건이 있어서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길 꺼린 게 분명했다.

한유일은 설명하기 시작했다.

유죄판결이 떨어진 여자를 흡혈하고, 각인을 긁어모아서 자궁에 알을 생성한다. 그리고 알은 월경 때마다 피를 흡수하며 성충으로 성장한다.

그 뒤는?

자궁에 침범한 남자의 심장으로 침투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여기서 남자는 사형선고가 떨어진 범죄자다.

‘하지만 이건 알아둬라.’

‘뭔데?’

‘흡혈감염은 일반감염이랑 달리 일회성이다.’

‘일회성이라….’

‘흡혈 한 번에 알 하나란 뜻이지.’

여성이 빈혈로 쓰러질 때까지 흡혈해야 간신히 ‘알’ 하나를 자궁에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알이 만들어지기까지 시일도 오래 걸린다.

그에 반해 일반감염은 엄청나다.

자궁에 알이 한 번에 수십 개가 들어간다!

흡혈귀에게 몸을 판 창녀가 매일 다른 남자를 만난다면, 그 남자들은 모두 뱀페스트 숙주로 전락한다는 뜻이다.

정말 무시무시한 전염속도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여태까지 한 건도 없었다.

여러 ‘원숭이’에게 대준 창녀는 뱀페스트가 극도로 꺼리는 까닭이다. 자식이나 다름없는 알을 키울 모체는 대단히 신중하게 선택한다.

그런 결벽(潔癖)이라도 없었다면 뱀페스트가 인류를 진즉 삼켰을 것이다.

‘괜찮아. 많이는 필요 없으니.’

‘뭐…. 그렇군.’

번거롭긴 하지만, 셋 정도 선별해서 흡혈감염으로 알을 3개 만들면 된다. 그리고 그 여인들이 사내와 정을 나누면 끝.

여기까지 성공하면 ‘신시대’ 뱀페스트 셋이 탄생한다.

일반번식은 무일을 대신해서 그들이 많은 여성을 품으며 해줄 것이다. 그 뒤로는 빠른 확장이 가능하다.

시작의 차이다.

동정을 지키기 위한 과정 하나만 추가될 뿐이다.

“다 왔군.”

무일과 플로라가 시민의 환대를 받으며 도착한 곳은, 부산의 행정과 군사 등의 모든 대소사를 총괄하는 시청사였다.

당연한 얘기지만, 시청사와 가까워질수록 복지수준이 올라갔다. 건물 수준도 서울 여의도의 부자동네에 크게 뒤떨어지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전반적인 생활 수준이 서울보다 크게 뒤처지는 부산인데, 상류층만은 비슷하다는 건 빈부격차가 상상 이상으로 극심하다는 뜻이다.

아직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었다.

무일의 요청으로 서울의 뛰어난 행정직 다수가 부산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보고서에 나온 그들의 실적은 썩 훌륭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대충 짐작되지만, 우선은 직접 듣는 쪽을 택했다.

“부산에 오신 엘퍼러를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환영이라고 하기에는 초라했다.

워낙 갑작스러운 방문이라 준비가 전혀 안 된 시장과 공무원들의 꼴은 한심하다는 말로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겉보기에는 반듯하다.

하지만 엘퍼러의 후각을 찌르는 냄새가 모든 상황을 대변해준다.

엘퍼러가 항구에서부터 천천히 걸어오긴 했지만, 몸을 제대로 씻을 만큼 시간이 넉넉하진 않았다.

그래도 자각은 있는지 샤워를 하고 향수를 살짝 뿌렸다.

‘인간의 타락은 순식간이군.’

‘무일. 전부 죄인?’

‘...실수는 바로잡으면 돼. 이들이 죽을죄를 저지른 건 아니야. 내가 기억하는 부산보다는 눈에 띄게 복지가 향상됐어. 그것도 단시간에.’

아직은 늦지 않았다.

실망이나 유감 같은 감정은 없다.

서울에서 공명정대한 와이츠의 감시 아래에 모범적인 공무원이었던 그들의 타락은 예정된 일이었다.

너무 깨끗하면 쉽게 물드는 법이니까.

게다가 부산의 기득권층은 사람을 타락시키는 방법에 도가 튼 고수들이다.

“시장님.”

“넷!”

“지금부터 5시간을 드리겠습니다. 서울에서 막 내려온 사람들처럼 몸을 청결하게 하고 부하들과 함께 브리핑을 준비하십시오.”

“알겠습니다!”

반론은 없었다.

찔리는 구석은 둘째치고 지위에서부터 밀리기 때문이다. 다 쓰러져가는 부산시 시장보다 괴수대응본부 최고위층 인사가 훨씬 더 위다.

특공대장.

세계는 한무일을 9급 프로사냥꾼, 9종 괴수 ‘엘퍼러’로 기억하지만, 대한민국에서만큼은 엘퍼러보다 ‘특공대장’이란 직함의 영향력이 더 셌다.

부산 사람들의 태도를 보면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지만.

“오라버니!”

“음?”

소리가 들린 하늘을 올려다본 무일은 식겁했다.

겁도 없이 추락 중인 소녀 탓이다.

금서희?!

부산에서 5종 계약자로 활동 중인 이복여동생이다. 저대로 떨어지면 골절상 정도로 끝나지 않으리라.

무일은 생각해볼 것도 없이 높게 도약했다.

금서희가 다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공주님 안기로 받았다.

“정말 보고 싶었어-, 아얏!”

“위험하잖아! 네가 무슨 일본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여주인공이냐! 게다가 머리부터 떨어지다니. 내가 아니었으면 진짜 죽었어!”

“너무하세요….”

“전혀 안 너무하다.”

꿀밤 맞은 머리를 부여잡는 금서희.

한유일은 머릿속에서 ‘미소녀가 여동생이라니! 깨물어주고 싶다! 빼앗고 싶다!’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이 빌어먹을 ‘하렘의 왕’은 미소녀만 보면 정신 못 차리네.

곧바로 경고를 먹였다.

‘내 동생을 물면 에쏘드로 쑤셔줄 테다.’

‘쳇! 쪼잔한 숙주 같으니.’

쪼잔한 게 아니라 친오빠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착지 후에도 ‘조금만 더요~, 오라버니~.’라며 어리광부리는 금서희를 어쩔 수 없이 쭉 안은 채 시청사 안으로 들어갔다.

외모가 소년에서 어엿한 성인이 된 한무일.

금서희는 콩닥콩닥 뛰는 심장 위에 양손을 모은 채 ‘멋지게 성장한 오라버니’를 몽롱한 눈으로 올려다봤다.

굳이 ‘하렘의 왕’이 은연중에 풍기는 ‘마성의 매력’까지도 필요 없다.

부산에서 엘퍼러는 최고라는 말로도 부족한 0순위 신랑감이다. 서울을 제외한 모든 나라의 여성이 비슷한 감상일 것이다.

그건 금서희도 예외가 아니었다.

부산 같은 위성도시 대부분이 근친혼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특수체질을 타고난 가문은 근친혼을 장려하기까지 한다.

“오라버니.”

“왜?”

“저 어때요?”

“...네가 9종 계약자쯤 되면 생각해보마.”

“고추 썩겠다….”

“야!”

< [37화-2] 새해가 왔습니다.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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