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152화 (152/287)

< [37화-1] 새해가 왔습니다. >

파르나르 장편소설

괴수처럼 19

[37화] 새해가 왔습니다.

학명: 자이엔트(지나치게 큰 개미)

서식지: 지상

특징: 건드리면 재앙입니다.

위험도: 5종 보통

비고: 여왕개미는 어디에?

***

서기 2325년 1월 1일.

전쟁을 방불케 했던…. 아니, 실제로 전쟁이었던 2324년 크리스마스도 지나가고, 어김없이 새해가 찾아왔다.

그 바로 며칠 전을 회상한 청년은, 정신없는 한 해였다고 단정했다.

점수를 매기자면 70점 정도.

동해에서 서바이벌하고, 날치가 서울을 때려 박고, 쿠데타가 일어나고, 난자를 도난당하고, 평양에서 죽을 뻔하고….

그 밖에도 많은 일이 있었다.

‘올해는 조용하게 해주세요! 태양신 님아!’

한무일은 수평선 너머로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간절히 빌었다.

하지만 이게 얼마나 부질없는 희망인지 잘 알고 있었다.

작년에 싸지른 똥들이 아직 많이 남았던 탓이다.

‘박 여사에게 맡기지 않고 처음부터 내가 상대했다면….’

박선영이 흡혈귀에게 물리는 최악의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서울도 멀쩡했으리라.

방심했고 우유부단했다?

당시 상황은 어쩔 수 없었다.

무려 40년 동안 자신을 물 먹인 흡혈귀 왕에게 직접 복수한다는 대의명분을 들이미는 ‘바람의 여왕’을 무슨 수로 막겠는가.

하물며 그녀는 세계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강자.

목포에 있는 한무일보다도 거리상으로 가까웠다.

‘무일. 또 궁상이냐. 작작 좀 해라.’

‘...유일. 이건 궁상이 아니라 명상이다.’

‘흥! 할 거 없으면 몸을 넘기고 잠이나 자던가. 시간 아깝다.’

쌀쌀맞게 나오는 ‘한유일’이었다.

하렘의 왕.

그렇게 불렸던 때가 바로 며칠 전이였지만, 날마다 6시간을 ‘나는 하렘의 왕이다!’라고 떠들고 다니니 답이 없었다.

그래서 말렸다. 그리고 이름을 지어줬다.

말은 안 했지만, 본인은 꽤 기뻐하는 것처럼 보였다.

‘유일. 아직도 삐쳤어?’

‘너의 만행은 눈 뜨고 못 볼 지경이다.’

한유일은 기분이 대단히 안 좋았다.

황진천을 직접 복속시키고, 녀석의 ‘왕족’ 지위를 해제한 건 물론이고 ‘귀족’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귀족이 아닌 뱀페스트는 노예를 둘 수 없다.

피가 빨린 여성은 ‘또’ 빨리고 싶은 금단현상을 겪긴 해도 지배받지 않는 까닭이다.

이것이 뱀페스트 사회의 귀족과 서민 차이.

귀족이란?

흡혈을 통해 대략 ‘3종’ 이상의 힘을 손에 넣은 뱀페스트를 뜻한다.

이때부터 ‘남작’이란 지위를 자연스럽게 얻고 ‘5종’에 도달하면 ‘백작’까지 승급한다. 하지만 그 위의 계급은 불가능하다.

후작과 공작 임명은 왕의 고유권한.

어디 그뿐이랴?

흡혈을 통해 3종 이상으로 능력이 출중해져도 귀족이 못 되게 차단할 수 있다.

황진천이 한유일에게 당한 게 바로 이것이다.

이름하여,

『숙청』

귀족가문의 문장처럼 흡혈귀 귀족, 왕족이라면 누구나 갖는 ‘각인’을 회수당했다. 그 결과로 황진천의 노예는 전부 한유일 소유로 변경됐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자칭 ‘하렘의 왕’은 비명을 질렀다.

황진천의 노예들은 ‘괴수의 심미안’에 맞춰져 있지 않았다. 한유일 입장에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백성이 부지기수였다.

그래서?

기껏 모은 백성을 왜 해방해주느냐고 말한 지 1시간도 안 돼서 95%에 달하는 각인을 풀고 자유롭게 놓아줬다.

또 흡혈 당하고 싶다는 금단현상은 꽤 장시간 남겠지만, 자유를 되찾았다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자연스럽게 한무일도 이 ‘권능’을 익혔다.

각인을 해제하는 방법을!

‘유일. 억지로 물린 미녀들은 풀어주는 게 도리다.’

‘나에게 인간의 잣대를 논하지 마!’

한유일은 뇌가 울릴 만큼 바락 소리 질렀다.

숙주란 놈이 이 모양이다. 어떻게 그 많은 백성을 몽땅 풀어주느냐는 말이다!

정말 밑도 끝도 없는 구제불능이다.

하렘의 왕이 ‘3대 톱’으로 선정한 선유나, 박선영, 윤소영을 필두로, 엄선해서 남긴 300명에 달하던 미녀군단이 순식간에 해체됐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

『최은설』

수호자 썬피스트를 잃은 6종 계약자는 ‘백성’으로 남길 희망했다.

무일은 어떻게든 ‘6종 수호자’와 다시 이어주겠다고 그녀를 설득해봤지만, 목덜미를 내미는 22살 처녀는 고집불통이었다.

이유는?

더는 계약자로 살기 싫다는 것이었다.

흡혈귀 노예가 되어 온갖 굴욕과 수치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지만, 평범한 여자가 되는 게 소원이라고 했다.

하지만 자신은 공주님처럼 자라서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다는 고백!

그 진실은?

최은설은 사랑에 빠졌다.

‘내가 잠든 사이에 그녀에게 이상한 짓 한 거 아니지?’

‘당연하다. 나를 어떻게 보는 거냐! 나는 왕이다!’

‘흠…. 그래?’

‘은설은 타고난 백성이다. 자연스럽게 양팔로 허리를 감싸 안으며 흡혈을 더욱 재촉할 때부터 알아봤지!’

특수체질처럼 ‘여성의 피’에도 등급이 있다.

그중 으뜸은?

영적인 힘을 타고난 여인.

성녀, 영매, 무당, 무녀, 마녀라고 불리는 부류다.

고대부터 귀신과 도깨비, 망령, 정령 등을 볼 수 있다고 전해지는 그녀들이 ‘흡혈귀’에게 진한 친화력을 보이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

최은설은 그런 혈통을 타고났다.

당연히 흡혈 효율도 일반여성하고 궤를 달리한다.

“내 상식이 점점 붕괴하네….”

한유일이 거짓말한 게 아니란 걸 증명하듯 그의 육체는 나날이 강해지는 중이었다.

그건 최은설도 마찬가지였다. 단시간에 그녀의 외모는 몰라보게 변했다. 사랑을 시작한 여자는 예뻐진다는 말처럼.

여성호르몬 분비가 활발해져서?

하지만 이건 그야말로 환골탈태(換骨奪胎) 수준이었다.

‘무일. 너는 신경 쓸 거 없다. 계약은 네가 아닌 나와 한 거니까.’

최은설은 비공식적인 ‘엘퍼러 계약자’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9종 계약자!

굳이 따지자면 한무일이 아닌 한유일과 계약했다.

‘잘도 신경 끄겠다.’

‘아니면 그 색골처럼 백혈구울이 되고 싶다는 거냐?’

연맹과 강대국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은 황진천을 색골이라고 부르는 한유일이었다.

색골이라고 정의한 이유?

인간의 표현을 빌리자면, 정욕을 주체못하여 원숭이와 그 짓을 하고 성병 ‘에이즈’에 걸린 야만인이다.

...라고 표현했을 만큼 ‘하렘의 왕’은 치를 떨었다.

피에 굶주린 변태라고.

모든 권능과 지위를 상실했어도 여전히 ‘기형 백혈구울’인 색골(!) 황진천은 어느 연구실로 보내졌다는 모양이다.

마지막 정을 생각해서 너무 심하게 대하진 말라고 부탁하긴 했다.

위선적인 행동이었을까?

황진천이 저지른 만행들을 떠올리면 인과응보(因果應報)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네가 피를 안 빤다는 방법도 있다만?’

‘죽어도 싫다! 안 그래도 피가 부족해서 약한데 다이어트라니!’

왕의 체면이 말이 아니다.

한유일로서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요구였다.

흡혈귀에게 피를 빨지 말라니!

‘...다른 여자는 건들지 마라.’

‘헹! 은설처럼 내 매력에 흠뻑 빠져드는 미소녀가 언젠가 또 올 거다. 제발 백성이 되게 해달라고 비는 아이들이나 막지 마라. 동정.’

‘동정 아니라고!’

겉보기에는 태양을 보고 있지만, 마음속으로는 티격태격 중이었다.

이런 나날을 보내며 맞이한 새해.

서울은 강대국과 선진국의 도움에 힘입어 곧바로 복구사업이 추진됐다. 이제 겨우 3일째인 것치고는 매우 빨랐다.

빨리 약속을 이행하고 ‘황진천 해부’에 전념하겠다는 연맹의 의지가 강하게 반영되기도 했지만, 와이츠의 추진력이 가장 큰 힘을 발휘했다.

용신이 일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엘퍼러가 ‘각인’을 해제하면서 계약자 선유나가 완전한 자유를 얻은 까닭이다.

그 뜻에 경의를 표하듯이.

와이츠는 엘퍼러에게 가했던 모든 정치공작과 견제를 풀었다. 그리고 거기에 동원된 인력과 시간을 깡그리 서울복원에 투입했다.

내년이 오기 전에 80% 복구를 목표로.

하지만 이 80%는 미완성이 아니다.

이왕 무너진 고층빌딩은 다시 짓지 않겠다는 계획안을 세우며 생긴 공백이 20%다.

돌대가리 날치는 답이 없으니까.

『무일 오빠. 고마워요.』

손목시계 ‘아메리카 드림워치’에는 문자가 도착해있었다.

발신자는 윤소영.

각인을 제거한 이후로 다소 어설프고 서먹서먹해졌지만, 무일은 섭섭함보다는 원래대로 돌아왔다는 안도가 앞섰다.

사람의 마음은 장난감이 아니다.

마취에서 풀리고 각인도 해제된 박선영은 또 찰거머리에게 농락당했다는 참담함에 얼굴을 들지 못했다.

그녀는 어제부터 서울 복구작업을 묵묵히 돕기 시작했다.

이전의 당당했던 ‘바람의 여왕’을 기억하는 무일로서는 씁쓸할 수밖에 없었다.

『감사합니다. 특공대장님.』

다른 문자도 있었다.

대책반장 최이슬이 보낸 것이다.

이 문자를 보낸 직후, 책임지고 자리에서 물러나겠다는 그녀를 여러 사람이 뜯어말려서 간신히 수습됐다.

바로 몇 달 뒤부터 와이츠의 정책으로 시행된 ‘출산 열풍’이 몰아닥칠 것이다. 그런데 시설이 전부 엉망이라 하루하루가 빠듯한 실정이다.

이런 와중에 유능한 인물의 이탈은 절대로 안 될 말이다.

‘무일. 색골이 저지른 피해가 장난 아니지?’

‘...나도 안다.’

‘너의 좌우명은 후회하지 않는다는 걸로 아는데.’

‘내가 너에게 위로받는 날이 올 줄이야….’

‘헹! 어울리지 않는 짓을 하는 네가 답답해서 한 소리였다. 새벽에 빤 피가 올라올 것 같아서!’

‘오냐.’

위로가 아니라고 극구 부인하는 한유일에게 건성으로 답하며 몸을 돌렸다.

해돋이도 보았으니 본격적으로 움직일 때다.

본능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행동하기로 한 한무일이 가장 먼저 해결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사안이 부산이었다.

서울의 피해를 복구하기 위한 물자 대부분은 항공편으로, 미국의 웨일풍을 이용하지만 계속 그럴 순 없다.

대도시가 많은 미국은 수호자를 한 곳에 상주하지 않고 웨일풍에 태운 채 빠르게 강습하는 기동작전을 쓴다.

이렇게 화물기처럼 오랫동안 본토를 비울 수 없다.

그 대안이 화물선이다.

괴수의 등장으로 항공로가 막히면서 해외와 융통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

부산과 인천에 나눠서 물자를 보내오기로 되어있다.

“쟤들은 기뻐하지만, 여성 학대 같아서 영….”

목포의 명물로 자리한 ‘인어 서식지’에는 세이랑 다수가 평화롭게 헤엄치거나 해변에 요염한 자세로 누워있다.

남자들이 알몸을 빤히 구경해도 무시한다.

수호자가 아닌 야생괴수인데도.

보통의 세이랑이었다면 최면술로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후에 정력고갈로 죽을 때까지 쫙 쥐어짰을 것이다.

물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나갈 때를 제외하고는 온종일 빈둥거리는 인어공주들.

하지만 무일을 발견하자마자 다랑어 떼처럼 몰려들었다.

‘...나는 쟤들의 행동패턴을 이해할 수 없다.’

‘뭐가?’

‘어째서 너를 따르는지 모르겠다. 혹시나 싶어서 내가 가까이 가봤지만, 완전히 무시하더군.’

‘그건 좀 의외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라미아와 플로라도 한유일을 공기처럼 무시했었다.

몸을 공유하더라도 대우는 하늘과 땅 차이!

한유일은 그럼 무얼 할까?

주로 최은설이랑 연인처럼 노닥거린다. 하지만 둘의 관계는 왕과 하녀쯤 될까.

뜨거운 물이 혈액순환에 좋다면서 온천욕을 즐기고, 남는 시간에는 그녀의 무릎베개를 받으며 빈둥빈둥 논다.

태만, 방탕, 권태!

모두 이 ‘하렘의 왕’에게 어울리는 단어였다.

‘다 이유가 있다고. 나를 무능한 왕으로 몰지 마라.’

‘뭔데?’

‘몸보신 중이다. 왕조(王朝)를 바꾸기란 쉬운 게 아니지.’

무일은 세이랑의 고삐를 쥐고 플로라만 대동한 채 부산으로 향했다.

서울로 가는 물자를 중간에 빼돌리는 작자들을 잡기 위해서.

아직은 첫 화물선도 도착하지 않았기에 손해나 문제가 발생하진 않았지만, 사건이 터진 후에 조치하는 대응은 서울의 실수만으로도 충분하다.

의심하는 이유?

한무일은 부산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고향 심리는 꿰차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부산의 기득권층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안다.

“금의환향(錦衣還鄕)이라고 해도 되려나.”

< [37화-1] 새해가 왔습니다. > 끝

ⓒ 파르나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