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151화 (151/287)

< [36화-4] 두 남자, 두 괴수 >

무일은 이 순간, 수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옳은 길을 가고 있는가?

폭주한 엘로엘을 가차 없이 베고, 곧바로 황진천을 토벌하여 서울과 시민의 피해를 줄였다면 통쾌했을지 자문해봤다.

세계의 강대국과 선진국, 연맹에서 뭐라고 짹짹거리든 무시하고 ‘오직 인류!’라는 마음가짐으로 밀어붙이고 싶었다.

그랬다면….

‘아아, 통쾌했겠지.’

하지만 그 뒤는…?

현실은 RPG 게임이 아니다.

마왕을 무찌르고 세계에 평화를 안겨다 준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진짜 싸움은 그 이후부터다. 복구사업이란 그런 것이다.

전설의 용사? 최강의 영웅?

무너진 집을 짓고 논밭을 일구는 건 누구에게나 쉽지 않다. 하물며 첨단과학이 가미된 도시는 용사와 영웅 혼자서 뚝딱 만들 수 없다.

엘퍼러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엘로엘과 황진천에 의해 도시는 반파됐고, 서울의 힘만으로는 회복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와이츠 ‘미카헬로 싸이어’의 중심은 계약자 선유나다.

약점이 잡힌 용신은 그 뛰어난 지혜와 힘을 갖고도 황진천의 [예감]과 [예지]에 속수무책으로 휘둘렸다.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은,

“진천. 정말 사냥꾼다워. 몇 수를 준비해두다니.”

“뭐…. 인질극은 안 쓰고 싶었는데 상대가 너라서 말이야. 그렇다 보니 나도 그 한심한 왕하고 별 차이 없게 됐네.

“알긴 아는군.”

“그렇다고 이대로 생체실험 표본이 되긴 싫거든. 나도 살아야지.”

적하고 합의나 협상하는 것이다.

연맹과 했던 것처럼.

뱀페스트 후작과 공작도 치사하게 나왔지만, 황진천은 아예 그 규모부터 달랐다. 차이가 있다면 그녀들을 막 다루지 않았다는 인간미?

인간미는 무슨!

당한 박선영을 보고 깨달았다.

녀석에게 서울의 모든 여성은 언제든 농락할 수 있는 장난감이다. 그녀들이 가장 행복해할 순간에 최고의 절망과 굴욕을 안겨주고 기뻐하는 악귀.

더는 인간이 아니다.

그런 놈을 이대로 놔둘 순 없다.

하지만 황진천의 길동무로 수많은 여성을 고통과 굴욕의 구렁텅이에 내던진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뱀페스트의 가장 성가신 능력.

여성 지배.

황진천은 프로사냥꾼답게 자신의 장점을 극대화할 줄 알았다.

진저리쳐질 만큼 확실하게.

“그러니 정중하게 대접해달라?”

“이렇게 붙잡힌 후에야 내 가치를 알 수 있었다. 그래, 연맹은 노블레스를 만들었던 것처럼 내 능력을 탐낸 거였어. 맞지?”

“......”

“나도 피해자다, 한무일. 용신과 악녀의 이기심에 할아버지, 어머니, 형을 비롯한 모든 가족을 잃었다.”

황진천이 줄줄이 이야기한 건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다.

자신은 분명 실패했다.

인질극을 벌인들, 와이츠와 선유나만은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눈앞에 청년은?

아니다.

용신은 물론이고 세계가 ‘아니오.’라고 답한 것도 ‘예!’라고 뒤집을 힘이 있다.

황진천은 침을 꼴깍 삼켰다.

그의 [예감]과 [예지]가 맹렬하게 경고하는 상대는 세계가 아니라 눈앞에 엘퍼러다.

반대로 말해,

엘퍼러만 설득할 수 있으면 두려울 게 없다.

이미 떡밥은 깔았다.

인류의 행복을 원하는 한무일이 무슨 선택을 할지는 친구라서 잘 안다.

‘고지식한 박애주의자 녀석.’

선유나에게 무릎 꿇고 사과하도록 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노예들을 괴롭히지 못하도록 감시하면서 하나하나 해방하고 다니겠지.

그 많은 숫자를 어느 세월에?

무르다. 정말 무르다!

한무일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란 건 알지만 정말 답답한 친구다.

자신이라면 일단 저지르고 볼 것이다.

사과하는 선유나를 물고 오래오래 농락해주고 싶지만, 박선영처럼 금방 풀려버릴 테니 순식간에 죽여버리는 걸로.

이후는 모른다.

인질극으로 살아남을 수 없다면 그것도 좋다.

미친 계약자와 폭주한 수호자로 아비규환이 된 서울이 자신의 무덤이라면 이 또한 즐거움이리라.

“피해자라….”

“나도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싶다, 무일.”

“허! 네가 평화를 논해?”

“용신의 사과 같은 기적은 바라지도 않아. 그 악녀가 원흉이지. 내 발을 핥으며 사과하라고 해. 진심도 바라지 않으마.”

“아주 기어오르는구나. 진천.”

“약자의 발버둥이라고 해다오. 나쁜 제안은 아닐 텐데? 연맹에서 원하는 연구도 적극적으로 협조해주지.”

“흠….”

카르 4세는 사냥꾼이지 정치인이 아니다.

머리 아프게 이것저것 생각하는 건 적성에 맞지 않는다.

돌대가리 날치, 볼트윙이 서울에서 볼링공처럼 날뛸 때가 더 간단하고 쉬웠다. 이렇게 고민, 갈등하지 않고 내 한 몸만 내던지면 됐으니까.

그때가 좋았다.

불과 6개월 전의 일인데 먼 옛날에 벌어진 역사처럼 멀게 느껴진다.

상황은 점점 답답하게 흘러갔다.

아니, 그렇게 보일 뿐이다.

‘이봐, 숙주. 난처한 상황에 빠진 모양인데?’

‘조금도 난처하지 않아.’

‘내가 난처해! 어째서 내가….’

‘시끄러워.’

하렘의 왕을 조용히 시켰다.

세상 사람들은 모르지만, 이미 한무일은 어마어마한 희생을 치렀다. 세상 그 무엇하고도 바꿀 수 없는 걸 내놨다.

『시간』

매일 24시간 꽉꽉 채워서 살던 한무일의 일과는 18시간으로 줄었다. 인생으로 치면 수명의 25%가 깎인 셈이다.

게다가 이 6시간 동안 왕이 자신의 몸으로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불안감도 안고 살아야 한다. 앞으로 영원히.

그렇다고 누군가 내 희생을 알아달라는 건 아니다.

이 선택은 한무일이 프로사냥꾼 카르 4세가 된 이래에 ‘처음’으로 [예감]에 의존하지 않고 내린 결정이다.

후회도 없고 감흥도 없다.

숨 쉬듯 자연스럽게 15년 동안 해오던 일이다.

이젠,

그 희생으로 얻은 ‘힘’을 시험해볼 차례다.

“어쩔 거냐, 친구. 인류와 용신. 둘 중에 너는 어딜 택할 거지?”

“카르 5세.”

“...왜?”

바로 6년 전, 가문으로 돌아가며 회수된 자신의 별명인 ‘카르 5세’라고 부르는 카르 4세의 얼굴을 본 황진천은 순간, 소름이 쫙 돋았다.

과거의 환영이 어른거린 까닭이다.

카르 5세는 일찍이 프로사냥꾼이 되어 수많은 벗을 사귀었다. 하지만 그중 진정으로 친구라고 생각했던 녀석은 단 한 명뿐이었다.

한무일, 카르 4세.

악녀의 핏줄을 이은 선지혜만 알짱거리지 않았으면 더없이 훌륭한 친구.

정말 멋진 녀석이라서?

아니다! 지나친 오지랖 탓에 답답할 때가 더 많다!

그럼?

결정적인 순간에 강하다.

카르 5세는 늘 승기를 잡았지만, 단 한 번도 카르 4세의 [반격]을 뛰어넘지 못했다.

괴수의 재생력을 갖고도.

수많은 경험과 육체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이건…! 녀석이 [반격] 직전에 보이는 입꼬리…?’

아주 미세한 변화지만, 황진천은 알 수 있다.

카르 4세의 [반격]을 받고 살아남은 괴수와 인간이 없었던 탓에 아무도, 심지어 본인조차 모르는 습관이다.

하지만 훈련을 빙자한 승리를 위해, 수없이 도전하고 수없이 패배하며 수없이 [반격]에 당했던 카르 5세는 안다.

저 얄미운 입꼬리를 볼 때면 늘 완패(完敗)했다.

“한무일. 무슨 생각이냐.”

이젠 끝났다.

이 상황은 뒤집을 수 없다.

황진천이 죽거나 명령 한마디면, 대한민국에서 소위 엘리트라 불리는 도도한 미녀들이 단체로 날뛸 것이다.

고위관료와 고위계약자도 예외가 아니다.

아니, 그런 최상위층 인사들로만 수천 명을 노예로, 인질로 데리고 있다.

“진천. 너의 단점을 말해줄게.”

“또 나를 가르칠 셈이냐? 상대를 얕보지 말라고?”

“아니. 너는 나를 얕보지 않았어. 현역 시절에는 그렇게 말을 안 듣더니 정말 최악의 형태로 실천했네.”

“...그럼 또 뭐냐.”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라.”

“뭐…?”

마음을 알라고?

이건 또 무슨 개소리인가 싶었다.

하지만 황진천은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분명,

똑같은 외형이었지만, 분위기가 달라졌다. 그가 아는 한무일은 저렇지 않다. 만능에 가까운 본능에 의존하며 늘 태평하게 산다.

그건 급박(急迫)한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다.

침착한 언행은 물론이고, 이미 결과를 안다는 초연한 눈빛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건 뭘까.

미지의 세계에 막 튀어나온 신생아 같은 표정이다.

“좋군…! 끌려갈 걱정 없이 느긋하게 세상을 본다는 건…! 통제라!”

“무일…? 아니! 네놈은?!”

“그렇다! 이 몸이야말로 진정한 왕! 하렘의 왕이다!”

“......”

자랑스럽게 외치는 모습은 평소 한무일하고 괴리감이 심했다.

그래서 알 수 있었다.

놈은 한무일을 숙주로 삼고 있던 ‘왕의 그릇’이다.

어째서 놈이 나온 거지?

답답한 현실에 진저리친 카르 4세의 정신력이 밑바닥까지 추락해서 몸을 빼앗겼다는, 정말 현실성 없는 [예측]을 즉시 부정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숙주 스스로 몸을 내줬다는 뜻이다.

어째서?

“이봐, 색골.”

“하…?”

하렘을 추구한다고 당당히 선언하는 남자에게 색골 소리를 들은 황진천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하지만 막 뭐라고 반박할 수 없었다.

그럴 여유가 없었던 탓이다.

한무일에게 느꼈던 짙은 공포감의 실체를 막 깨달았다.

“너는 뱀페스트와 백혈구울의 장점만 챙겼다고 으스댔지?”

“......”

“하지만 실제로는 단점도 골고루 가져왔다. 뭐…. 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단점이나 약점이라고 할 것도 없는 사소한 문제지만.”

“설마…?!”

뱀페스트 왕의 지식과 능력을 전부 흡수한 황진천이다.

덕분에 자칭 ‘하렘의 왕’이 하는 말뜻을 이 자리의 누구보다도 빠르게 이해했다.

여전히 몸은 듀크마의 마법에 꽁꽁 묶여있다.

방금까지는 잡혀있어도 상관없었지만, 이젠 아니다!

‘도망쳐야 해! 한무일! 그런 뜻이었던 거냐!’

황진천은, 뒷일을 ‘하렘의 왕’에게 떠넘기고 느긋하게 잠든 한무일을 떠올리며 바득바득 이를 갈았다.

뱀페스트도 아니고 백혈구울도 아닌 상태.

그 경계에 선 덕분에 황진천은 터무니없는 힘을 손에 넣었지만, 어정쩡한 종족이 돼버리면서 ‘왕의 권한’도 약해졌다.

그런데 눈앞의 녀석은 ‘왕의 그릇’이다.

순수혈통은 아니지만,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뱀페스트.

그건 [업보]가 대변해주고 있다.

배신이고 반역이야 어떻든 ‘하렘의 왕’은 ‘진정한 왕’이 될 자격이 차고 넘쳤다.

왕이 될 마지막 관문은 기존 왕을 몰아내는 것!

힘으로 죽이거나 끌어내리면 된다.

“미소녀도 아닌 백성은 정말 싫지만….”

“오지 마!!”

어떻게든 벗어나려는 황진천에게 바짝 다가간 하렘의 왕은 입을 쫙 벌렸다.

한무일이 만든 송곳니보다 길고 뾰족했다.

연달아 세 여인의 피를 빨아들인 숙주의 외형은 썩 훌륭했다. 기존의 어린 외모를 탈피하고 완연한 성인이 되면서.

영국 왕실에서 제공한 순백 망토뿐인 반라는 조각상처럼 멋들어졌다.

권능(權能)의 위력은 여전히 불만족스럽지만….

하렘의 왕은 걱정하지 않았다.

날마다 6시간을 알차게 활용하면 금방 채울 수 있을 것이다. 특수체질도 아니니 줄줄 샐 염려도 없다.

자신은 불로불사(不老不死)의 흡혈귀.

시간은 많으니 서두를 필요 없다.

“이봐. 마지막이 되겠지만, 그래도 왕의 풍모를 좀 보이라고. 멋이 안 나잖아.”

“안 돼! 안 돼! 한무일! 당장 나와라! 내가 잘못했다!”

아무리 많은 인질을 데리고 있어도 정작 자신이 지배되면 무의미하다.

내 것은 내 것, 네 것도 내 것!

이런 부조리한 논리가 가능한 존재가 바로 9종이라고 불리는 왕이다.

그 왕은 씩 웃었다.

‘이런 버러지에게 수천 명의 미소녀는 과분하지!’

그러니 놈의 위에 군림하여 그 많은 미소녀를 전부 복속시키리라!

빼앗는 순간은 역시 즐겁다.

공작에게서 선유나, 왕에게서 윤소영, 박선영을 차례차례 빼앗던 순간에 느낀 짜릿함을 여전히 잊을 수 없다.

그리고 이젠.

불로소득(?)의 자리마저 홀라당 가로챌 차례다.

이번에는 또 얼마나 짜릿할까?

꼼짝달싹 못 하는 황진천의 귓가에 속삭였다.

“잘 들어. 이 말을 꼭 하고 싶었거든.”

“무슨 짓이냐!”

“왕위를 계승 중입니다, 삼촌.”

“안 돼!!”

한무일의 송곳니가 황진천의 목덜미에 깊숙이 박혔다. 그리고 왕의 고유권한과 권능을 피와 함께 빨아들였다.

뱀페스트 왕위 찬탈!

반역을 꿈꾼 고(故) 오창민 후작의 소망은 1년도 안 돼서 이루어졌다.

지옥에서 어이없어하지 않을까?

이날,

경악한 괴수대응연맹에서는 ‘하렘의 왕’에게 이름을 붙였다. 물과 기름처럼 다른, 숙주와 구분하기 위한 이름을.

미소녀를 사랑하는 유일한 흡혈귀에게,

『한유일』

< [36화-4] 두 남자, 두 괴수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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