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150화 (150/287)

< [36화-3] 두 남자, 두 괴수 >

세상에는 황진천처럼 ‘재생력 있는 특수체질’을 계승 중인 가문이 꽤 된다.

당연히 이들 대다수가 노블레스로 전직(?)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황진천처럼 강해지진 못했다. 일반적인 뱀페스트가 그런 것처럼.

그래서 과학자들은 생각했다.

대한민국의 ‘황 씨’ 가문은 특별하다고.

우습게도, 이미 ‘엘퍼러’라는 돌연변이 선례가 있는 대한민국이라서 이 의견은 매우 큰 설득력을 얻었다.

하지만 무일이 아는 한,

그런 건 없다.

세상은 우연과 차별로만 굴러가지 않는다.

“...하핫! 그래! 맞아! 그 구질구질한 녀석은 내가 진즉 삼켰지.”

순순히 인정하는 황진천. 하지만 연기를 마치고 무대 위를 내려온 배우처럼 표정이나 말투가 원래대로 돌아온 건 아니었다.

이게 황진천의 본래 모습.

진실은 감추긴 했지만, 연기하진 않았다.

카르 4세가 알던 그 유쾌한 친구는 이미 변해있었다. 왕을 삼켰다고 했지만, 성격이 물드는 것만은 막지 못했으리라.

아니, 어쩌면 눈앞에 모습이 진짜 황진천일지도.

사회에서 보여주던 ‘호쾌한 사나이’란 이미지는 가면, 가식일 확률이 높다.

“진천. 쭉 이상하게 생각했다.”

“뭐가?”

“네가 거머리에게 굴복했다는 사실이. 나는, 흡혈귀 왕으로 많은 친구를 의심했지만, 너만은 의심하지 않았어.”

“호오~. 영광인걸.”

“...그만큼 넌 대단한 녀석이었으니까.”

끼리끼리 논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한무일과 황진천은 죽이 잘 맞았다. 그리고 그러한 성향은 [예감] 같은 정신적인 측면에서도 비슷하게 드러났다.

그래도 차이는 있었다.

한무일은 계약자를 존중했고, 황진천은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런 미세한 의견충돌이 있었지만, 희생적인 각오나 인류를 걱정하고 위하는 마음은 어찌어찌 일치했다.

그 마음이 흡혈귀에게 먹혔다?

일찍 은퇴하면서 잊혔지만, 황진천은 정말 뛰어나다는 말로도 부족한 프로사냥꾼의 귀감이었다.

결혼하고 자녀가 생기면서 해이해졌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인류를 적대하면서 대의명분을 잃고 약해지긴 했어도 실력만은 여전히 ‘진짜’였다.

“이렇게 붙잡혔는데 대단하다니. 비꼬는 건 아닌 모양이지만, 듣기 좀 그러네.”

“상대를 미리 알았다면 양상은 달랐겠지.”

“...내 인생이 궁금한 거냐.”

“굴욕적인 고문을 받으면서 얘기하는 것보다는 나을걸.”

황진천은 오창민하고 달랐다.

녀석은 뱀페스트 후작에게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긴 해도 완벽히 먹혔다. 하지만 황진천은 역으로 집어삼켰다.

약간의 우연과 행운이 있었다.

박선영에게 갈기갈기 찢기며 대부분의 힘을 상실한 ‘뱀페스트 왕’은 천신만고 끝에 미녀의 자궁으로 숨어들 수 있었다.

그 미녀는 잠시 외가를 다녀오고 귀가 중이던 ‘황 씨’ 가주의 첫째 아내.

왕은 그대로 가주의 음경을 타고 심장에 정착했다.

하지만 웬걸?

이 가주란 인간은 정말 쓰레기 중의 쓰레기였다.

온종일 집에 틀어박혀서 아내들의 가슴과 엉덩이를 주무르며 정욕을 싸지르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돼지.

숙주로서는 최하급, 거기다가 특수체질이었다.

“그래서 왕은 내 형을 죽였다. 나라도 그렇게 했겠지.”

“...싸움하고는 동떨어진 분이긴 했다만.”

뱀페스트 왕은 우선 아내들을 노예로 삼은 후에 숙주를 죽였다. 아내들의 똑같은 진술에 따라 복상사로 마무리됐지만, 명백한 살인이었다.

그리고 다시 자궁으로 숨어들었다.

형이란 작자랑 달리 뛰어난 프로사냥꾼인 동생을 고대하며.

특수체질이란 게 마음에 걸렸지만, 박선영과 와이츠의 감시를 피하려면 ‘붉은색 피’로 있는 편이 안전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 의도는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대를 잇기 위해 억지로 가문에 돌아온 황진천은, 형의 아내였던 과부들을 부인으로 받아들였다. 의무는 아니지만, 그녀들이 애원한 탓이다.

당연히 [예감]은 조용했다.

무일이 ‘왕의 그릇’에 감염됐을 때처럼 위기로 보지 않았다.

“동정 깨는 날이 제삿날인 줄 알았지.”

“엄살은.”

“잠깐 빼앗겼던 것도 사실이고.”

“흠. 경험자로서 비웃을 처지는 못 되는군.”

그렇게 해서 뱀페스트 왕은 황진천의 심장까지 무난하게 침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배력을 한껏 펼쳤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한무일이 했던 것처럼 역으로 거머리의 힘만 착취되는 구조가 완성됐다.

그게 가능할까?

평범한 사냥꾼이었다면 무리였을 것이다.

황진천의 정신력이 아무리 강해도 ‘지배의 약, 착각의 약’이라고 불리는 [혼돈]과 에쏘드 없이는 힘들다.

그런데 성공했다!

괴수의 피를 정화하는 ‘특수체질’의 도움이 매우 컸다.

안 그래도 약했던 왕을 더욱 약하게 만든 것이다.

그뿐이랴?

설상가상으로, 왕은 무려 30년 넘게 환상의 콤비라고 불리는 8종 정령과 용신에게 쫓기는 신세였다.

그동안 쌓인 피로와 후유증이 적지 않았다.

즉, 황진천은 운이 좋았다.

하지만 뱀페스트 왕을 굴복시킨 이래로 단 한 번의 협조도 받을 수 없었다.

“선유나. 그 암캐가 왕의 계약자라는 사실만 알 수 있었지.”

“말조심해라.”

“흥이다! 우리 가문을 사지(死地)로 몰아넣은 년이다. 할아버지와 어머니도 그렇게 돌아가셨지. 내게 좋은 말을 기대하지 마. 옛 친구.”

아무도 이 둘의 대화를 방해하지 않았다.

괴물, 황진천의 사정은 관심 없다.

하지만 어떻게 뱀페스트가 됐고, 백혈구울로 변했음에도 지혜를 겸비하고 있는지는 초유의 관심사였다.

“나이를 먹어도 달라진 게 없군.”

“너도.”

“난 좀 많이 컸다.”

“......”

그걸 듣기 위해서라면 잡설쯤은 기다려줄 수 있다.

한무일도 연맹의 기대에 부응해줬다.

“그래서?”

“뭐가 그래서냐. 아내들부터 흡혈했지. 장난감처럼 굴려보니 재미있더라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초대했다. 그리고 또 흡혈했지.”

하지만 들키지 않았다!

그렇게 노예로 끌어들인 여인들의 기억을 통제한 것도 있지만, 아무도 황진천을 의심하지 않았다.

뱀페스트조차 피하는 특수체질이기도 했고, 대한민국을 빛낸 가문 사람이란 휘광(輝光)도 방심시키기에 좋은 수단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프로사냥꾼이었다.

건드려도 괜찮은지 [예감]으로 미리 파악할 수 있었다.

이러니 들킬 리가 없었다.

하지만 한무일이 그랬던 것처럼 황진천도 뱀페스트에 대해서는 기초적인 부분만 알고 있었다. 그게 문제였다.

방심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리고 한계에 도달했군.”

“맞아. 나도 백혈구울은 안 될 거로 생각했지. 암캐가 계약자-, 흥분하지 말라고, 친구. 모두가 내 말에 귀 기울이고 있잖아.”

“쯧!”

“하지만 그년은 여전히 내게 먹힌 왕의 계약자였다, 나의 계약자가 아니라.”

“그런가.”

순도 100%에 도달한 뱀페스트는 백혈구울로 변한다.

강해지니 좋다?

아니다. 뇌가 없는 짐승으로 변해버리는 걸 경계한 귀족 대다수가 ‘계약’을 통해 백혈구울로 변하는 걸 막았다.

계약자는 일종의 고삐인 셈이다.

황진천도 이 정보를 믿고 [예감]도 조용했기에 선을 넘었다.

몸에 스며든 ‘괴수의 피’가 정화되는 양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여성의 피’를 빨아서 한계치를 벗어난 것이다.

그리고 백혈구울이 됐다.

정말 평범한….

“옛 친구. 너는 기연을 믿어?”

“나를 잘 아는 녀석이 뻔한 걸 묻는군.”

무일은 용사가 되는 게 꿈이었다.

그런 이야기는 무수히 많이 읽었고 ‘기연’도 마찬가지다.

“큭큭! 그래, 괜한 질문이었군. 맞아. 나는 그 기연이란 걸 겪었다! 왕은 이때만을 기다리며 숨죽이고 있었던 거야!”

육체의 소유권을 놓고 2차 접전이 벌어졌다.

선유나라는 보험이 있는 뱀페스트 왕하고 달리, 계약자는커녕 계약하는 방법도 모르는 황진천이 불리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때 ‘특수체질’이 또 도움을 줬다.

뇌가 녹아내리는 걸 ‘재생력’이 억제해준 것이다!

숙주와 뱀페스트가 완벽하게 하나로 합쳐진 결과물이 백혈구울이다.

그런데 황진천의 영혼이 버티면서 뱀페스트 왕이 역으로 삼키고 말았다. 이번에야말로 완벽하게.

왕이 안 주고 버티던 지식과 계약도 그에게 계승됐다.

그러면서 오묘한 상황에 빠져버린다.

『계약자가 있는 백혈구울』

특수체질의 재생력으로 간신히 버티던 뇌의 잠식이 멈춘 것이다!

그렇게 뇌를 살린 황진천은, 육체를 자유자재로 변환하는 백혈구울의 능력으로 체질개선에 들어갔다.

더는 ‘괴수의 피’를 정화하지 않도록.

밑 깨진 항아리처럼 줄줄 세던 ‘괴수의 피’가 멈췄다.

“체질개선….”

“그 뒤로는 조심스럽게 피를 모았다. 그리고 손목 같은 곳에 ‘인간의 피’를 저장해뒀다가 제출하는 식으로 의심을 피했지.”

뱀페스트는 절대로 불가능한 눈속임이다.

신체를 자유롭게 개조할 수 있는 백혈구울만의 능력!

황진천은 그런 식으로 와이츠와 박선영의 눈을 피해서 안전하게 ‘여성의 피’를 수집할 수 있었다.

흡혈할수록 강해지는 백혈구울의 무한성장이 극대화된 것이다.

그가 8종에 도달하기까지는 정말 시간문제였다.

“윤소영은?”

“내가 너에게 붙여둔 감시자 말이지?”

“......”

“땅굴을 파서 서울 밖으로 나간 후에 기다렸다. 와이츠가 없는 첩보위성의 감시를 잠깐 돌려놓는 건 일도 아니지.”

“그럼….”

“당연히 힘으로 제압했다. 레드군은 끽해야 7종인데.”

포로가 된 황진천은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눈을 가늘게 뜬 한무일은 저 미소의 의미를 [예측]했다.

“설마…. 본부가 전부…?”

“나는 말이야. 대한민국에서 활동하는 계약자 중 다수를 노예로 만들었어. 서울 밖에서 수호자를 제압한 후에 느긋하게 빨아줬지.”

“다수? 그런….”

“너는 아직 안 해봐서 모르는 거야.”

뻔뻔함의 대명사인 괴수도 죄책감이란 걸 느낀다.

특히, 순전히 자신의 힘이 부족해서 계약자가 몹쓸 짓(흡혈)을 당하면 어떻게든 책임지려는 부류가 있다.

무책임한 수호자가 더 많지만.

황진천은 흡혈해도 뒤탈이 없는 계약자를 [예감]으로 분별하며 범행을 저질렀다. 완전범죄라고 해도 좋으리라.

이성적인 판단을 하는 레드군은 전자에 속했다.

흡혈로 생긴 각인은 분명 큰 흠이나 ‘순결’처럼 절대적인 가치는 아니다. 그리고 흡혈만 하고 계약자를 건들지 않으면 분을 삭일 줄도 안다.

계약자뿐만이 아니다.

대한민국 발전의 밑거름이 된 ‘황 씨’ 가문은 정치 쪽 인맥도 매우 깊다.

돌잔치, 결혼식, 연말행사 등으로 접촉할 기회는 늘 많았다.

누구와?

“얼마나 건드린 거냐.”

“흐음. 너무 포괄적인 질문인데? 예를 들자면…. 대책반장 최이슬? 일도 잘하고 몸도 뛰어난 보기 드문 엘리트지.”

“너…. 정말….”

괴수대응본부와 정부에서 일하는 거의 모든 여성이 놈의 노예였다.

황진천은 괴수가 아니다.

그래서 밥투정을 안 한다. 여성의 순결과 성형 여부 등을 일절 따지지 않고, 그냥 눈에 보이는 비주얼만 괜찮으면 목덜미에 송곳니를 박았다.

그럼에도 서울은 조용했다.

녀석은 그녀들에게서 흡혈한 기억만 지우고 대부분 손대지 않았던 까닭이다.

모든 건 과정이었으니까.

황진천의 목적은 선유나와 박선영. 그 두 여인을 밑바닥 시궁창까지 끌어내리는 것이다.

뱀페스트 왕의 영향을 전혀 안 받은 건 아니란 방증.

“한무일.”

“...또 뭐냐.”

“나는 네가 내 일을 방해하지 않았으면 했다. 그래서 너만 좋아하는 귀여운 미소녀도 붙여줬거늘.”

윤소영을 뜻하리라.

무일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기분 최악인데? 너를 마구 난도질해주고 싶다.”

“이크! 하지만 어떻게든 참아봐. 내가 죽으면 정말 큰일 난다?”

윤소영은 원래 남자에게 관심 없었다. 감수성 풍부한 소녀이긴 해도 수호자와 함께하는 걸 더 좋아하는 모범적인 계약자였다.

그걸 황진천이 비틀어놓은 것이다.

순식간에 레드군을 제압하고, 붉은 용왕이 보는 앞에서 소녀의 목덜미에 송곳니를 박았다. 그리고 한 남자를 좋아하라고 명령했다.

친구를 선지혜와 떨어트리기 위해.

그녀랑 계속 함께하면 반드시 휘말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갑자기 ‘가더발트’라는 웃기는 별명을 얻는가 싶더니 ‘어어?’하는 사이에 정말 말도 안 되는 괴물이 되어있었다.

뱀페스트 왕이 원래 노리던 프로사냥꾼답게!

아니, 그 이상으로.

【엘퍼러 / 9종 소형】

늘 자신보다 약하게만 보이던 친구는 단숨에 비상했다!

게다가 에쏘드가 두 자루.

스치기만 해도 치명상인 ‘성검’을 양손에 쥔 카르 4세를 이길 수 있으리라고는 조금도 생각되지 않았다.

녀석의 [반격]은 그만큼 사기!

약점인 저질 체력과 근력도 가더발트와 뱀페스트 덕분에 완전히 극복했고, 역으로 위협적인 수준이었.

황진천은 [예감]이 뛰어나기에 잘 안다.

이 친구놈을 이길 방법 따위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목적이 뭐냐?”

“말했잖아. 선유나라고. 박선영은 뭐…. 왕의 유언이랄까. 내 목적은 어디까지나 선유나. 나의 가문과 가족을 파멸로 몰아넣은 악녀다.”

< [36화-3] 두 남자, 두 괴수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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