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2] 두 남자, 두 괴수 >
가지각색의 개성을 뽐내는 미녀들.
저쪽에서는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고 있지만, 정령들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태도로 ‘싱크로율 100% 용사’만 빤히 쳐다봤다.
그야…. 계약자가 저기 있으니 에쏘드 본체도 근처에 대기하는 게 맞긴 하다.
조금 당혹스럽긴 하지만 일본의 에쏘드 ‘사쿠라’의 경우도 있어서 대략 어떤 상황인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무일이 놀란 건 그녀들 때문만이 아니다.
에쏘드 틈에 끼어있는 ‘선유나’를 본 탓이다. 하지만 그 당사자는 절대 아니었다. 좀 더 앳된 소녀풍이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옷차림!
“야! 너! 당장 다른 걸로 바꿔입어!”
“네? 이 시원시원한 옷이요?”
“그래! 당장!”
“마음에 들었는데…. 네~!”
맙소사! 세상에! 이럴 수가!
한세리가 문팽이 뱃속에서 입었던 ‘망상의 옷차림’을, ‘선유나’ 모습을 본뜬 에쏘드가 입고 있었다.
어떤 정신 나간 계약자가 남의 나라 절세미녀를 도용해?
...라고 생각했다가 자신임을 깨달은 한무일.
머릿속이 열나듯 [예측]을 굴린 끝에 ‘행운의 단검’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곧바로 실험해보기 위해 칼날을 쥐어봤다.
그리고 비틀기.
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엘퍼러의 괴력에도 칼날은 부러지긴커녕 휘어지지도 않았다!
“사쿠라냐….”
단검을 쓸 일은 거의 없었다.
그렇지만 이 에쏘드는 자린고비처럼 어딘가에서 슬쩍한 ‘괴수의 피’를 이용해서 신체를 구성한 모양이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라미아에게 업혀서 여기까지 왔다.
무일은 당연히 한세리인 줄 알았는데 요목조목 살펴보니 확실히 달랐다. 모녀가 닮는 정도라고 할까.
“그런 이름을 썼었던 것 같기도 하고요.”
앙증맞게 고개를 갸웃한다.
주위에 있는 에쏘드 자매(?)들이 가증스럽다는 듯이 눈을 흘기며 야유를 보내도 ‘선유나 짝퉁’은 꿋꿋했다!
심지어 헬기에서 내린 한세리는 ‘안녕! 한유나!’라고 평범하게 인사한다.
이름도 벌써 자기들끼리 지은 모양이다.
피해자(?)인 한무일 빼고 모두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근래에 합류한 플로라와 펠-쉐어퐁마저도 새삼스럽게 뭘 그런 걸 재확인하느냐고 묻는 얼굴이다.
‘이 일을 어찌할꼬….’
일본이 아니라 선지혜의 반응이 걱정이다.
이건 사형감 아닐까.
어째서 ‘선유나’가 나왔는지는 뻔하다.
『좋아한다.』
이건 꼭 이성적인 사랑일 필요는 없다.
훌륭한 위인을 존경하는 마음도 ‘좋아한다.’고 할 수 있다. 흔히들 ‘이 위인을 좋아한다.’고 말하잖는가?
국모 선유나.
근래에 그녀의 타산적인 진면모를 보면서 역사기록과 현실의 괴리감에 살짝 실망하긴 했지만, 그래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존경하는 여성임은 부인할 수 없다.
...라고 변명한들 과연 먹힐까.
벌써 목포로 돌아가기 싫어졌다.
그렇다고 안 가면 슈퍼달팽이를 탄 선지혜가 서울을 깔끔히 밀어버리러 올 터라 그럴 수도 없었다.
‘진퇴양난이란 바로 이런 건가!’
용사를 돕는다는 정령이 제대로 외통수를 날렸다!
한세리가 열성적인 천방지축이라면, 한유나는 어리벙벙한 요조숙녀 같은 분위기였다.
그보다 중복계약이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계약자의 생각을 읽었는지 한세리가 야무지게 답했다.
“우수한 용사의 특권이죠! 보통은 정령 하나도 감당 못 하는데, 용사님은 서넛도 너끈히 수용할 수 있는 그릇이에요!”
하지만 손은 둘뿐이라 이 이상은 비효율적이라고 덧붙였다.
셋이 되면 힘이 달려서 ‘필살기’도 쓸 수 없고.
한유나는 일종의 덤이다.
무일의 싱크로율이 너무 높은 탓에, 한세리가 완전히 소화해내지 못한 ‘용사의 정신’ 부스러기로 활동 중이라고 할까.
그래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주위에 몰려든 ‘용사의 정령’들도 짙은 호감은 표시해도 이전의 사쿠라처럼 계약하자고 조르진 않았다.
둘이서 탈탈 나눠 먹으면서 끼어들 자리가 없는 까닭이다.
계산적이라고 할까?
재산 많은 남자를 찾는 처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여기에 이성(異性)적인 무언가를 첨가하긴 힘들었다. 그건 한세리와 한유나(덤)를 볼 때도 마찬가지.
『인간미가 없다.』
봉급(정신) 더 많이 주는 직장(용사)을 찾자마자 헌신짝처럼 중국과 일본 기업(용사)을 버린 두 여종업원!
기업에서 공주님 모시듯 아무리 잘해줘도 소용없다.
그건, 한무일도 언젠가 말없이 버려질 수 있다는 뜻이다.
어디까지나 가능성.
한무일보다 더 뛰어난 용사가 탄생할 가능성이 소수점 밑바닥 수준이지만, 두 정령의 의도가 불손하다는 건 변함없다.
뭐…. 물론,
더 뛰어난 용사가 등장하더라도, 한세리와 한유나 외의 에쏘드가 많으니 갑자기 통수 맞는 일은 없을 것이다.
콰광! 쾅! 콰직!
한무일이 절세미녀들에게 둘러싸여 경악하든 말든 시간은 흘렀다.
아직 한겨울이라 녹지 않은 새하얀 눈이 수북이 쌓인 설악산을 배경으로 한 난투극은 계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리 길지 않았다.
뱀페스트와 마찬가지로 백혈구울에게도 ‘성검’은 치명타였던 까닭이다.
역시라고 할까.
두 남자의 활약이 눈부셨다.
역할분담마저 확실했다. 에쏘드가 없는 포르 3세가 뚫어준 활로(活路)를 파고든 카이서스 하이로드가 크게 횡으로 백혈구울을 벤다.
그럴 때마다 황진천은 절규하며 후퇴하고.
시간과 환경적인 요인도 있었다. 더는 ‘여성의 피’를 공급받지 못하는 백혈구울은 특수체질 때문에 점점 힘이 빠지는 중이었다.
거기에 에쏘드가 촉매제처럼 그 시간을 대폭 단축하고 있었다.
‘아니. 정말로 빠지긴 하나?’
이상하다.
무일은 눈살을 찌푸리면 [예측]을 조정했다.
뱀페스트 후작, 오창민은 ‘괴수의 피’를 유지하기 위해 자그마치 백여 명에 달하는 여성을 가축으로 삼았다.
그런데 아내가 끽해야 여섯뿐인 황진천이 어떻게 백혈구울이 될 수 있었을까.
허를 찌른 기습이었지만, 박선영을 쓰러트릴 정도면 이미 그 당시에 8종의 힘을 손에 넣은 상태였다는 뜻이다.
아니, 8종도 8종 나름이다.
인류가 정해놓은 ‘최강의 괴수’로 설정해둔 등급이 ‘8종’이 끝일 뿐이다.
그 뒤로는 얼마든지 편차가 있다.
문팽이가 9종 중에서도 ‘아주아주 위험한 왕’이라고 명시된 것처럼.
『사냥꾼이 상대할 수 있는 건 3종까지.』
『첨단과학으로 감당할 수 있는 건 6종까지.』
『인류가 어찌할 수 없는 괴수는 7종부터.』
여전히 깨지지 않은 불변의 진리다.
노블레스와 에쏘스트도 어떻게 보면 사냥꾼이 아니라 ‘괴수’인 까닭이다. 그러니 저 3종이란 ‘마의 벽’은 여전하다고 봐도 됐다.
각설하고, 그렇다면 7종부터는 어떻게 나뉠까?
일단 9종은 명확하다.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괴수들을 지배하는 왕(王). 강력한 단일 객체보다는 협동으로 사방에서 덤벼드는 괴수가 인류에게는 더 위협적이다.
그렇다면 7종과 8종은 어떻게 구분할까?
하위괴수처럼 ‘전투력’이라고 불리는 인류의 주관적인 판단이 많이 개입되지만, 그래도 결정적인 ‘경계선’이 있다.
『전투력을 측정할 수 있는가.』
할 수 있으면 7종이고 답이 안 보이면 8종이다.
괴수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약한 인간 중심적인 판단이니 제대로 측정이 될 리 없다.
개미에게 5층 아파트나 50층 고층빌딩이나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크다’는 똑같은 결론에 도달하는 것처럼.
즉, 8종부터는 괴수의 능력 편차가 매우 크다.
여기에 변수도 극심하다.
엘로엘이 정령과 바람이란 특수성으로 중국의 8종 수호자 둘을 가지고 논 것처럼, 8종부터는 같은 8종이라도 너무나 다르다.
그 엘로엘은 엘퍼러에게 찍소리도 못하고 패했다.
그렇다고 엘퍼러가 하이블과 쑨우쿵을 농락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상성을 비롯한 복합적인 요인이 간섭한다.
지금도 그렇다.
무려 8종의 신위를 보이며 대한민국과 각국의 고위수호자를 농락한 ‘기형 백혈구울’이 맥없이 밀리고 있었다.
저것이 바로 에쏘드.
적이 강할수록 강해지는 ‘용사의 검’이다.
‘하지만….’
피해도 막심했다.
카이서스 하이로드에게 ‘한 방’의 기회를 주기 위해 희생된 프로사냥꾼과 하위수호자가 적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양패구상.
아니, 서울에서 설악산까지 달려온 고위수호자와 노블레스, 에쏘스트가 합류하면서 황진천에게는 승산은커녕 도망칠 구멍조차 없었다.
평범한 인간 크기로 줄어든 녀석은 분하다는 얼굴로 외쳤다.
“어째서! 어째서 나 하나 잡겠다고 이렇게까지 몰려들었단 말이냐!”
뛰어난 프로사냥꾼의 전문지식을 갖고 있더라도 한계는 명확했다.
사냥이 아닌 방면에는 취약하다.
괴수대응연맹과 강대국들이 ‘기형 백혈구울’에 얼마나 지대한 관심을 둘지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 패배요인이다.
기형이 뭐라고?
괴수가 출현한 이래로 기형종이 없었을까.
많진 않아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그중 어떤 흡혈귀도 황진천처럼 강하진 않았다. 강하긴커녕 평범한 민간인 남성에게 기생한 뱀페스트보다도 약했다.
그래서 정말 다급한 상황이 아니면 뱀페스트도 특수체질인 남성은 건드리지 않는다. 그건 흡혈하는 여성도 마찬가지.
기껏 ‘여성의 피’를 빨았는데 역으로 정화돼버린다!
그게 특수체질이다.
흡혈귀가 쉬쉬하는 혈통을 가진 자들.
“이만 순순히 붙잡히세요.”
“큭…!”
영국 왕녀, 실바니아 하이로드의 마법이 황진천을 포박했다.
8종 중에서 가장 약하다는 평가를 받는 대마법사 ‘듀크마’지만, 약해질 때로 약해진 백혈구울을 붙잡기에는 충분했다.
일반적인 백혈구울과 황진천은 무엇이 다를까?
그건 ‘괴수의 피’를 정화하는 기본능력 외의 다른 특수능력에서 기인한다.
재생력.
하지만 단순히 그뿐만은 아닌 것 같았다. 모두가 재생력이라고 생각했던 특수능력에 아무도 모르던 효능이 있던 게 아닐까.
세계를 주름잡는 강대국과 선진국들은 그렇게 판단했다.
그게 아니면 얘기가 안 됐으니까.
특수체질이 분명한 황진천은 여전히 ‘은색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무일은 정신을 집중했다.
까놓고 말해서 하나도 모르겠다!
‘이봐, 하렘의 왕.’
‘......’
‘꿍해 있지 말고 도움 좀 줘봐.’
‘...싫다.’
흡혈귀에 대해서는 흡혈귀가 가장 잘 알 것이다.
하지만 숙주에게 심한 협박을 들은 직후라서 그런지 ‘하렘의 왕’의 심사는 크게 뒤틀려 있었다.
이렇게 대화를 시도해본 적이 전에 있었던 것도 아니다. 상황이 아쉬워지면서 갑자기 부른 것이다.
필요할 때만 찾으면 기분 좋을 리 없잖은가?
한무일은 어떻게 해야 이 문제를 올바르게 해결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딱히 고민할 것도 없었다.
왕이 원하는 요구는 머릿속에 쏙쏙 전해지고 있었다.
‘이봐, 왕. 4시간 줄게.’
‘8시간.’
‘...6시간.’
‘좋다! 6시간!’
매일 6시간씩 자유시간을 주기로 합의했다.
잡다한 내용은 생략됐지만, 멋대로 흡혈하지 않고 육체를 빼앗지 않는다는 등의 부수적인 약속이 당연하게 들어갔다.
어기면?
어긴 쪽이 영구적으로 1시간씩 양보하는 걸로 결정됐다. 무일이 약속을 깨면 왕의 자유시간이 매일 7시간으로 늘어나는 식이다. 그 반대도 같은 방식.
왕의 약속은 신성하다.
사냥꾼의 약속은 생명이다.
계약서가 없어도 이 둘은 함부로 약속을 깰 수 없다.
에쏘드 덕분에 수면이 필요 없고, 잘 수도 없는 한무일은 이 시간에 머리를 식힐 요량이었다. 하렘의 왕은 마음 편히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어서 좋고.
이후에는 일사천리였다.
숙주에게 ‘삽질 좀 그만해라.’고 핀잔준 하렘의 왕은 빠르게 지식을 전수했다.
단, 한 가지만은 합의점을 찾을 수 없었다.
흡혈한 여성의 몸에 심은 ‘자신의 각인’을 지우는 기술! 하지만 ‘노예해방’ 같은 불필요한 짓을 하는 뱀페스트는 여태 없었다.
‘해방하는 방법도 가르쳐줘.’
‘싫다! 기껏 모은 백성을 왜 놓아주나!’
‘끙….’
당분간 이 문제로 옥신각신하게 생겼다.
그래도 당장 필요한 정보는 전부 획득할 수 있었다.
듀크마의 마법에 속박당한 백혈구울은 이젠 아예 꼼짝달싹 못 하고 있었다.
분통 터진다는 얼굴을 한 황진천에게 다가간 한무일은 말했다.
“진천아. 왜 그랬냐?”
“뭐냐? 갑자기 웬 친한 척하고 난리냐, 가짜 왕.”
“연기는 그쯤 해라.”
“......”
“너는 흡혈귀 왕이 아니야. 나처럼 왕을 삼킨 숙주 본인이잖아?”
< [36화-2] 두 남자, 두 괴수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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