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1] 두 남자, 두 괴수 >
[36화] 두 남자, 두 괴수
학명: 엘퍼러(요정 나라의 황제)
서식지: 도시
특징: 전천후 하렘의 왕
위험도: 9종 소형
비고: 부러우면 패배자!
***
괴수는 몇 가지 부류로 나뉜다.
자연계 동물과 흡사한 ‘자연형’과 전설처럼 따로 노는 ‘독립형’ 그리고 형태가 자유로운 ‘비정형’이다.
여기에 더해, 서식지와 특징 등으로 세분된다.
비행형, 여성형, 남성형, 초대형, 기생형, 물질형, 우주형, 식목형, 성장형….
뭐가 됐든 결국은 ‘그래서 몇 종인데?’가 가장 중요하지만, 그런 압도적인 힘이 없는 인간으로서는 ‘공략’을 해야 한다.
게임처럼 ‘이러니 이렇게 대응한다.’라는 식이다.
그래서 ‘괴수대응본부’와 ‘괴수대응연맹’이란 명칭이 붙은 것이다. 괴수를 알고 거기에 맞는 효과적인 공격을 가하는 필승의 전략!
...늘 변수는 따른다.
괴수가 인간의 지식을 흡수했을 경우다.
특히, 계약이란 형태로 처녀 사냥꾼의 지식을 통해 인간의 전략을 대략적으로나마 파악하면 이때부터 일이 복잡해진다.
하물며 지식을 훔친 것도 아니고 본인이며, 심지어 전문지식이라면?
콰아아앙!
북한산이 폭죽 터지듯 날아갔다!
연맹에서 상대 중인 괴수가 ‘프로사냥꾼’의 [예측]과 [예감]에 더불어 [예지]까지 갖췄다. 여기에 육체적인 능력은 8종이고 ‘비정형’이다.
엘로엘처럼 아예 ‘물리적인 공격면역’인 반칙은 아니지만, 주먹구구식으로 쓰러트릴 수밖에 없는 까다로운 난적.
게다가 정령이랑 달리 물리적인 실체가 있기에 순수한 전투력 측면에서는 더욱 강하다!
백혈구울 황진천.
그 존재는 악몽이라고 해도 좋았다.
만약, 바람의 여왕이 처음부터 하늘에서 방심하지 않고 싸웠다면 최소한 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땅속에 숨은 녀석을 쓰러트릴 방법도 없었겠지만.
설마하니 흡혈귀 따위가 땅을 팔 거라고 그녀로서 상상이나 했겠는가?
이게 그 결과였다.
‘맙소사!’
괴수대응연맹 맹주, 아몬 헤이젤이 호언장담한 연합군은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황진천은 영리하고 교활했다.
우르르 몰려온 수호자와 와이츠를 북한산에서 따돌린 놈은, 서울 상공에 떠 있는 웨일풍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계약자를 직접 노리기 시작했다.
엘로엘이 없는 하늘은 괜찮다는 판단이리라.
깜짝 놀란 수호자들이 서둘러 회군하려 했지만, 하늘 높이 떠 있는 웨일풍에 갈 방법이 없었다. 당연히 그 화풀이를 주변에 풀었다.
서울은 정말 엉뚱한 2차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개자식! 사냥꾼의 정석을 제대로 밟고 있군.”
처음에는 제법 순조로워 보였다.
땅속에 숨은 황진천을 끌어내기 위해 지하형 고위괴수를 투입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황진천은 지상으로 올라왔다.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고위괴수들이 일제히 덮쳤다.
그 결과가 북한산 폭발!
하지만 놈은 계속해서 땅속을 오가며 그 모든 공격을 무력화했다.
그걸 저지해야 하는 지하형 수호자가 죽었다는 건 한참 후에야 밝혀졌다. 놈은 영리하게도 땅속에서 도망쳐 나온 것처럼 연기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생포라는 걸 모르는 괴수에게 무리한 ‘생포’를 요구한 것부터가 문제다. 노블레스와 에쏘스트도 지지부진하긴 마찬가지.
그런 ‘허술한 대응’이 파국을 부른 것이다.
“크아아앙!”
“닥쳐!”
엘퍼러의 에쏘드가 쾌속으로 움직였다.
발을 동동 구르며 서울을 풍비박산 내려는 수호자는 가차 없이 베었다. 폭주하는 수호자는 더는 수호자가 아닌 까닭이다.
다시 웨일풍에 올라탈 기회를 차분히 기다리는 수호자가 많다는 게 그나마 위안일까.
계약자를 구하러 날아갈 수 있는 수호자는 정말 극소수뿐이었다.
공중요새에 내장된 수천 개의 대공포가 일제히 쏘아졌지만, 백혈구울의 단단한 피부를 뚫지 못했다.
얼마나 흡혈을 많이 했는지 덩치가 ‘보통’ 이상으로 커진 황진천이 거대한 웨일풍의 측면에 몸을 들이박았다.
콰앙!
그 거대한 웨일풍이 기울어진다.
서울 한복판에 추락할 것처럼 위태로웠던 미국의 공중요새는 간신히 균형을 잡고 계속해서 부유했다.
하지만 황진천의 침입만은 막지 못했다.
계약자들을 지키기 위해 웨일풍에 상주하는 미국의 수호자들이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애쓰지만, 뚫리는 건 시간문제 같았다.
이젠 1시간이 문제가 아니었다.
(엘퍼러! 기다려주십시오!)
(이 지경이 되고도 그런 말이 나옵니까!)
(놈의 지능적인 돌발행동에 살짝 당황한 건 사실이지만, 괴수대응연맹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과한 전력투입은 낭비라고 생각해서 빼둔 ‘2차’와 ‘3차’가 있다고 한다.
무일은 이게 무슨 개소리인가 싶었다.
웨일풍에서 운석처럼 떨어진 잔해만으로도 서울은 아비규환이었다.
통제를 벗어나서 날뛰는 수호자는 라미아와 플로라, 퐁퐁의 도움을 받으며 빠르게 처리하고 있지만, 이 또한 손해가 적지 않다.
인류적인 측면에서 보면 우수한 수호자를 다수 잃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 투입하겠다고?
실패하면 어떻게 될지 알고 하는 소리일까.
(서울을 밑바닥부터 재건해야 할 정도로 파괴할 셈입니까!)
(그 보상은 충분히 하겠습니다.)
(허! 사람 목숨을 무슨 수로 보상한다는 겁니까!)
와이츠는 선유나만 챙기기 급급했고 엘로엘도 마찬가지. 강력한 8종 둘이 무력화되면서 서울은 정말 무방비상태에 놓였다.
심지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7종 계약자 둘도 현재로써는 도움이 안 됐다. 윤소영은 여전히 목포에 있고, 고은별도 어째선지 부산에 묶여있었다.
왕의 분노.
통신기 너머로 그 감정을 전해 들은 아몬 헤이젤은 부르르 떨었다. 맹주란 이유로 떠밀리듯 총대를 멨지만 정말 힘들었다.
그래도 그는 괴수대응연맹 맹주.
할 말은 꼭 하는 남자였다.
(이대로 황진천을 제거하면 피해밖에 안 남습니다. 고위수호자 다수와 노블레스, 에쏘스트만 잃은 채 끝나고 맙니다!)
(......)
(만회할 보상이 필요합니다. 연맹에서 해주는 보통의 원조만으로 지금의 서울을 이전 모습으로 되돌리긴 불가능합니다.)
맞는 말이다.
겨우 항구 조금 부서진 상하이였지만, 그 잠깐 사이에 중국이 입은 피해는 막심했다.
노블레스와 수호자 다수를 잃고 사회는 혼란과 공포에 빠졌다.
서울은 어떠한가.
비록 9종에서 8종으로 추락하긴 했지만, 그 대가로 무지막지한 강함을 손에 넣은 ‘흡혈귀 왕이었던 자’는 신출귀몰한 재앙이었다.
그리고 진행형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죽은 수호자와 사냥꾼이 얼마나 많을까?
미래에 뛰어난 계약자가 됐을지도 모를 여인들의 피해까지 생각하면 현기증이 돈다. 백혈구울의 저 덩치는 모두 한국인 ‘여성의 피’로 이루어졌다.
‘...되는 일이 없네.’
한무일은 한탄했다.
강해질수록 판단력이 흐트러지고 실수가 잦아졌다.
이건 [예감]의 발동조건 탓이다.
위기상황.
하지만 엘퍼러를 궁지로 몰아넣을 상황이 얼마나 되겠는가?
늘 최선의 길만 내비게이션처럼 가르쳐주던 [예감]이 감감무소식! 표지판 안 보고 다니다가 봉변 맞은 운전기사와 다름없다.
한무일 스스로 판단해야 하는 상황이 잦아졌다.
좀 더 시간이 흐른다면 차차 익숙해지면서 괜찮아지겠지만, 그가 급격히 강해진 시기는 불과 3개월이 채 안 된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무일은 머릿속으로 그렇게 변명하는 자신을 채찍질했다.
그렇다고 용서될 리 없잖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서울을 단시간에 회복시켜야 할 겁니다! 아니면 힘으로 연맹을 부수겠습니다! 인류에 해가 된다는 판단하에…!)
괴수대응연맹 해체선언!
그게 얼마나 위험한 파장을 부를지 알면서도 무일은 단호하게 말했다.
인류의 발전을 위해 인체실험이 허용되는 건 아니다.
미래와 진보란 대의명분 아래에 서울에 사는 무고한 수천만 시민이 죽고 다쳐도 괜찮을 리 없잖은가.
희생을 강요하는 세계라면 망해버리는 편이 낫다.
(...약속합니다.)
인류 전체를 적으로 돌려도 이길 수 있는 ‘왕’의 협박에 맹주는 무겁게 답했다.
동맹(?) 중인 문팽이도 필요 없다.
최강의 방어력을 자랑하는 쉬임프만 풀어놔도 막을 수 있는 국가는 거의 없다. 그런데 여기에 왕의 전매특허인 ‘협동’이 첨가되면 어떤 강대국이라도 필패 확정!
나라가 아니라 대륙이 덤벼도 필패일 것이다.
그저 며칠이 걸리느냐는 시간문제일 뿐.
(맹주도 아실 겁니다. 사냥꾼은 거짓말을 못 합니다.)
거짓말쟁이가 ‘믿음’의 결정체인 [예감]을 쓸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선의의 거짓말은 간혹 하지만, 그조차도 중요하지 않은 ‘정말 잘 어울리네.’처럼 예의상 칭찬할 때뿐이다.
엘퍼러는 프로사냥꾼의 정점에 있는 자.
연맹을 없애겠다는 발언이 ‘죽고 싶어?’ 같은 단순한 협박일 리 없다.
정말로 요구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괴수대응연맹을 부술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를 대신하겠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최강의 무력이 최고의 권력마저 가져간다면?
완벽한 독재.
그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일인독재가 완성된다.
수많은 나라가 걱정했던 부분. 하지만 용사의 성향 탓에 모두가 그럴 리 없다고 믿었던 시나리오가 당사자의 입을 통해서 나왔다.
하지만 이건 당연한 분노였다.
자국민이 수없이 죽고 다치는 상황을 보고도 ‘인류를 위해!’라며 웃고 넘어갈 만큼 한무일은 뻔뻔하지 않다.
즉, 정치인이 아니다.
거기에 타당한 보복조치를 하겠다는데 누가 뭐라고 할까.
(각국에 다시 한 번 다짐을 받겠습니다.)
(거절하면 말씀하십시오. 문팽이로 도시의 상하수도까지 몽땅 뽑아간다고.)
(그, 그리 전하지요! 그럼 이만!)
끝내 버티지 못한 미국의 공중요새, 웨일풍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서울을 피해 위태롭게 고도가 떨어지던 고래는 동쪽 멀리 설악산과 충돌하면서 멈췄다.
의도적으로 미국 측에서 전장을 옮긴 것 같았다.
웨일풍에 왕창 쑤셔 넣은 첨단장비들이 반파된 미국의 피해가 가장 크지 않을까. 인명손실만 빼면 한국보다도 극심할 것이다.
무리해서 이동한 이유는 2가지다.
특수체질인 황진천이 ‘여성의 피’를 더는 공급받지 못하도록 차단하고, 서울의 피해를 더 키우지 않겠다는 재정적인 판단이다.
‘흠. 저게 2차인가.’
눈에 확 띄는 고위괴수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저것이야말로 이집트 파라오의 침략을 억제하는 인류 최고의 전력이다.
노블레스와 에쏘스트가 까불긴 했지만, 겨우 한두 달밖에 안 된 풋내기들에게 날카로운 무기를 쥐여준 꼴이다.
이들이야말로 기존의 강자들.
『용사 파티』
개개인은 약하지만, 피나는 연습과 훈련으로 다져진 유연한 연계는 그 어떤 강력한 괴수도 쓰러트릴 수 있다.
이론적으로는 그렇다.
그리고 그 이론을 기적처럼 구사하는 자들이 역전의 용사 파티.
순수한 ‘에쏘드 계약자’와 보조하는 계약자를 따르는 수호자 조합은 이미 정평이 나 있는 기존의 강자들이다.
새로운 물결에 점차 밀려나고 있지만, 아직은 아니다.
에쏘스트가 등장하기 전에는 신분노출과 비밀엄수를 위해 꽁꽁 감춰뒀던 전력이었지만, 이젠 아니다.
세상이 변했다!
씁쓸하지만, 이들은 죽어도 그만이다.
‘소모품….’
어째선지 무일은 그런 느낌을 받았다.
용사 파티는 필연적으로 통제와 공급이 원활한 하위수호자로 구성되어 있다. 파티의 핵심인 용사 대신 죽어주는 역할이다.
파티는 에쏘드 계약자만 살리면 된다.
정말 구하기 어려운 인재가 ‘용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젠 용사마저 가상현실게임을 응용해서 찍어낼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다!
기존의 ‘허영심 넘치는 용사’는 불필요해졌다.
국가에서 원하는 계약자는 희생정신과 낭만, 충성으로 똘똘 뭉친 상남자다.
그렇다고 대놓고 은퇴를 강요할 순 없다.
에쏘드 계약자로서 오랜 세월 동안 쌓은 인맥과 지지층이 무시 못 할 수준으로 두텁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전장에서 죽여야지.
안 죽으면 죽을 때까지 돌리면 된다.
국가 입장에서는 에쏘드만 회수하면 그만인 것이다. 용사는 많으니까.
“화이팅…!”
“타핫!”
수많은 용사 파티가 추락한 웨일풍으로 뛰어들었다.
그중에는 유명한 사람도 있었다.
백금처럼 눈이 부신 은발을 휘날리며 가장 먼저 뛰어든 미청년.
무일도 이때만큼은 살짝 놀랐다.
‘왕자잖아?’
영국의 왕위계승권자 ‘카이서스 하이로드’였다.
그가 온 걸로 봐서는 무작정 죽이는 패만 모아놓은 건 아닌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또 다른 사내를 본 후에 극에 달했다.
어찌 저 남자를 모르겠는가!
카이서스가 순백의 귀공자라면 이 남자는 까무잡잡한 영웅의 표본이다.
“포르 3세…!”
드래곤 슬레이어, 용살자, 인디오 용사 등으로 불리는 ‘최강의 검사’다.
그는 에쏘드 계약자가 아니지만,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온 프로사냥꾼들과 함께 돌진하는 뒷모습은 멋지다는 한마디로 부족했다.
브라헨티나에서 이번 일을 얼마나 중요시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용사님. 저희는 여기서 뭘 할까요?”
“일단은 믿고 기다려봐야지.”
“네!”
세계에 흩어져있는 에쏘드를 긁어모은 게 아닐까? 정말 대단한 전력…. 음?
무심코 대답한 무일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두둥실 떠올랐다.
‘뭐지? 나는 누구랑 대화한 거지?’
저 멀리서 헬기 창밖으로 팔을 내민 채 흔드는 미소녀가 한세리.
그렇다면 방금 ‘용사님!’이라고 부른 소녀는 어떻게 된 걸까.
고개를 돌린 무일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둘이 아니었다.
“안녕하세요! 룬 엘리자베스라고 해요.”
“용사님 팬이에요! 가슴에 사인받을 수 있을까요?”
“부, 부끄러우니 빤히 쳐다보지 마세요….”
< [36화-1] 두 남자, 두 괴수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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