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4] 두 얼굴, 두 여자 >
뱀페스트 왕이었던 백혈구울.
왕이란 지위마저 포기할 만큼 매력적인 능력이란 건 부정할 수 없었다. 뱀페스트의 한계를 뛰어넘은 그 강함과 생존력은 정말 무시무시하다.
어디 그뿐이랴?
자유로운 육체변환은 효율적인 전투수행이 가능하다.
【백혈구울 / 6종 특수】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그런 장점들을 활용할 줄 모를 만큼 멍청하다. 뇌가 퇴화했으니 당연하다.
성장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살인과 흡혈을 위해 도시로 무작정 달린다. 본인들의 강점인 ‘무한성장’을 포기한 것이다.
그래서 6종이다.
무한성장으로 7종까지 가기 전에 토벌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생각할 줄 아는 백혈구울이라니? 그야말로 악몽이었다. 위험도로 따지면 망설이지 않고 ‘8종’에 분류될 만큼 교활한 사냥꾼.
‘황진천이니 당연하겠지.’
특수체질 덕분에 생사의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며 실력과 경험을 쌓은 황진천은 카르 4세보다 앞서 프로사냥꾼에 도달한 실력자였다.
하지만 형이 요절하는 바람에 강제은퇴.
만약 은퇴하지 않고 계속 활동했다면 [예감]은 어떨지 몰라도 종합점수는 카르 4세 위에 있었을 것이다.
카르 4세는 노력하는 둔재였다.
열약한 육체적인 약세를 힘겹게 극복한 모범생.
반면, 황진천은 즐기는 천재였다.
특수체질 덕분에 죽음에서 한 발자국 멀어진 그에게 사냥은 조금 위험한 게임이었다. 경험치가 존재한다면 ‘치트’라고 할까.
(세웅! 간략하게 상황 보고.)
이럴 때는 헌병대의 도움이 필요하다.
서울에 대해 이들만큼 잘 아는 부대도 없다.
헌병대장 아들 문세웅은 정규보고 외의 일로 연락 온 특공대장에게 살짝 놀랐다. 하지만 금세 차분함을 되찾으며 간략하게 답했다.
(네? 아, 네! 아비규환입니다.)
(아주 간략한 설명 고맙다!)
상대는 사냥꾼은 물론이고 계약자와 수호자의 심리까지 꿰뚫고 있는 프로사냥꾼의 탈을 쓴 고위괴수.
심지어 먹이라고 할 수 있는 ‘미녀’가 손만 뻗으면 닿는 대도시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하수구와 지하철 노선도 통달한 것 같다.
준비 참 많이 했군.
와이츠와 수호자 다수가 지키고 있는 선유나를 납치하려고 움직이는 것은 압도할 자신이 있다는 걸까.
(선배님! 쿠데타입니다!)
(뭐…?)
(수색대장이요! 도망친 수색대장이 개성에 나타나서 훈련병들을 선동하고 있습니다! 와이츠의 독재를 막아? 오! 신이시여!)
문세웅이 신을 찾을 정도로 엉망인 모양이다.
그렇군.
나름 준비한 수가 있었다.
와이츠의 정책에 반항한 자들을 모아놓은 개성시의 인구는 절대 작지 않다. 무력이란 측면에서는 얼마 안 되지만, 그 숫자가 너무 많다.
무일의 고민은 짧았다.
황진천이 사람을 아주 물로 본 것 같다.
(세웅. 항복하지 않으면 예외 없이 사형이라고 방송해.)
(그런 말을 믿을 리가 없잖아요!)
(진심이다.)
(......)
(흡혈귀에 가담한 시점에 인간 이하다. 너는 방송만 해. 처형은 내가 주도하고 욕도 다 내가 먹을 테니.)
게임에 찌들어서 현실의 무서움을 너무 모른다.
대량학살에는 발키지어가 뛰어나지만, 쉬임프를 선택했다. 절대적인 방어 앞에 서서 무력한 자신들을 깨닫게 되리라.
현실은 장난이 아니다.
선동됐든 어쨌든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
(선배님…?)
(폭동에 대응하는 기본원칙은 알겠지?)
(조기 진압…. 알겠습니다.)
인류를 위하고 절대다수의 행복도 좋다.
하지만 미래는 그 무엇보다도 바꿀 수 없는 최우선순위다.
이미 엘로엘의 폭주로 서울은 풍비박산 났다. 그런데 폭동까지 끼어들면 정말 감당하기 힘들다.
어쩌면 이미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지도 모른다.
세계의 그 어떤 도시도 ‘8종’을 이렇게 장시간 도심에 풀어두고 무사했던 적이 없었다. 심지어 서울은 엘로엘까지 둘이 날뛰었다.
정말 심각하다.
그런데 이 긴박한 상황에 해외통신까지?
(엘퍼러. 안녕하십니까. 썩 좋은 상황이 아님을 알지만.)
(...신원을 밝혀주십시오.)
(아! 실례했습니다. 가끔, 저 스스로 유명인이라고 착각하곤 합니다. 하하! 괴수대응연맹 맹주입니다.)
(아몬 헤이젤…?)
(그렇습니다.)
무일의 눈이 가늘어졌다.
새로운 타입의 괴수.
대한민국을 주시하고 있던 강대국들이 짙은 흥미를 보일만도 하다. 더구나 백혈구울은 뱀페스트하고 아예 연관 없지도 않다.
조금만 연구하면 ‘대박!’을 칠 것 같다고 할까.
그런 생각들은 굳이 듣지 않아도 [예측]할 수 있었다.
인간의 광기에 살짝 진절머리난다.
‘이 폭주가 과연 좋은 방향으로 흘러갈 것인가.’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는 현실이 답답하기만 했다.
저들이 요구하는 건 하나다.
이성을 잃지 않고 지능적으로 움직이는 ‘기형 백혈구울’ 확보. 그 전모를 샅샅이 파헤쳐서 전력화를 꿈꾸는 것이다.
무일은 저울추를 굴려봤다.
마음 같아서는 무작정 안 된다고 하고 싶지만, 이 또한 그럴 수 없었다.
선진국에서 개발한 노블레스와 에쏘스트 성능이 좀 많이 실망스럽긴 해도 변변찮다고 할 정도는 아니다.
늘 들러리였던 사냥꾼들의 활약이 눈부셔졌다.
『남자는 하찮은 수렵꾼』
이런 인식이 크게 개선됐다.
노블레스와 에쏘스트란 놀라운 특혜를 받는 건 극소수지만, 그건 여성의 권위를 크게 상승시킨 계약자도 마찬가지다.
같은 남자로서 자긍심이 생긴다.
사냥꾼들의 [예감] 평균이 크게 향상됐다.
그건 생존율 상승은 물론이고 채집의 능률도 크게 올려놨다. 부작용인 테러리스트와 사이코패스쯤은 감수할 수 있을 만큼.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직접적인 기술공개는 아니지만, 백혈구울 황진천을 연맹에 넘겨줌으로써 또 한 번 진보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
확신은 없지만, 실패한다는 보장도 없다.
역시나 [예감]은 도움 안 됐다.
엘퍼러가 무슨 선택을 하든 위협이 안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서울 복구에 적극적인 원조, 유가족과 피해자들에게 보상, 지금부터 1시간 이내에 직접 포획할 것.)
(그게 다입니까?)
아몬 헤이젤은 ‘갑자기 뭔 소리야?’ 같은 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가 줄줄이 설명하지 않아도 이 프로사냥꾼은 연맹에서 연락 오자마자 전부 [예측]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괴수가 된 인간.
괴수대응연맹 맹주는 어째서 강대국들이 ‘엘퍼러, 짱! 용사님, 짱!’ 노래를 부르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요구가 지나치게 적다!
먼저 제안했음에도 따로 꿍꿍이가 있는지 불안할 정도다.
서울 복구는 공동연구를 원하는 국가들에서 조금씩 분담하면 일도 아니다. 유가족과 피해자 보상은 좀 시끄럽겠지만, 역시나 간단하다.
마지막 조건.
이건 시험이라고 판단된다.
저 괴물을 너희가 통제할 수 있는지 보겠다는 뜻이다.
(더는 바라지 않습니다. 잡음 안 나오도록 깔끔한 뒤처리나 부탁합니다.)
(...당신에게 무슨 득이 있습니까?)
아몬 헤이젤, 맹주 스스로 생각해 봐도 너무 멍청하게 들리는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엘퍼러에게 득이 될 게 있을 리 없다.
명성?
떨어질 순 있어도 더는 올라갈 곳이 없는 상태다. 끽해야 대한민국 서울에서 ‘우리를 구해준 영웅이래!’란 식으로 공허한 칭찬이나 날릴 것이다.
해외에서 그의 인기는 종교 수준이다.
고위괴수들을 거느린 인간!
특히, 고위괴수의 위험성을 몸서리칠 정도로 잘 아는 관계자들에게, 엘퍼러는 ‘신(神)’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교단이 들어선다면 장소는 ‘아이언문’이 되리라.
(득이 있지요. 당연한 거 아닙니까?)
(음…!)
예상 밖의 대답이었다.
당연히 없다고 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역시! 노림수가 있었단 말인가!
연맹 맹주는 ‘포획작전을 시작한다고 알려라! 1시간 이내다!’라고 비서에게 말했다. 그리고 엘퍼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 노림수란 뭐지?
(강한 영웅이 늘어나면 제가 편해지잖습니까.)
(콜록! 그, 그렇지요.)
이 또한 당연한 얘기겠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가!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이렇게 생각했다면 ‘독점’이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선진국들의 가장 큰 우려는 하나였다.
『한국의 기술독점』
이미 엘퍼러라는 강력한 패가 있는 한국에서 ‘기형 백혈구울’을 포획 내지는 섬멸해서 ‘가능성’을 차단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었다.
가능성이라면?
엘퍼러에 버금가는 ‘개체(個體)’ 개발이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이전처럼 아낌없이 퍼주고 있었다. 자신의 지위를 위협할 가능성이 유력한 ‘표본’을 공짜로 제공한다고.
(얼마나 기다려야 합니까?)
그 엘퍼러가 역으로 질문했다.
역시나 본인이 아닌 서울을 걱정하는 내용이었다.
그야말로 ‘용사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몬 헤이젤은 ‘나는 세계인!’이라고 늘 자부해왔지만, 오늘만큼 자신이 초라하고 편협하게 느껴진 적은 진정 처음이었다.
경의를 담아 답했다.
(바로 지금부터, 정확히는 3초 후부터 포획작전을 시작합니다.)
무일은 발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괴수대응본부 헬기를 타고 뒤쫓아오던 한세리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서울 시민이 고개를 높이 치켜들었다.
거대한 그림자가 하늘을 덮고 있었다.
【웨일풍 / 7종 대형】
하늘을 노니는 초대형 고래가 서울 상공을 뒤덮었다.
하지만 시링 팽의 수호자인 ‘중국의 웨일풍’에 비하면 그 크기는 새끼처럼 초라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물론, 그래도 ‘대형’ 괴수 중에서도 초대형에 분류될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괜히 세계에서 가장 큰 비행체라고 부르는 게 아니다.
‘미국의 웨일풍!’
서식 중인 야생괴수를 싹 박멸하고 공중요새로 탈바꿈한 7종 괴수.
화강암처럼 송송 뚫린 동굴에는 포문(砲門)이 보였다. 그리고 사방을 밝히는 형형색색의 라이트가 태양 대신 서울을 비췄다.
(...빠르군요.)
(엘로엘이 폭주할 때부터 준비하기 시작해서 그렇습니다.)
(그렇습니까.)
(흠흠! 참가국은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스페인, 브라헨티나, 일본, 인도, 러시아. 이렇게 됩니다.)
들어보니 거의 모든 강대국과 선진국이 개입했다. 문팽이의 방문으로 개발도상국으로 전락한 호주, 그리고 최근에 발만 살짝 담갔던 중국만 참가하지 않았다.
아프리카 대륙을 지배 중인 이집트도 빠지긴 했지만, 거긴 논외다.
이번 ‘기형 백혈구울’이 강력한 건 맞다. 하지만 아무리 높게 평가해도 세계를 상대로 싸울 정도는 아니었다.
어떤 계약자가 오느냐에 따라 또 다르겠지만, 서로 조금이라도 우위를 점하기 위해 과한 전력을 투입했을 게 분명했다.
‘호주는 여력이 없다고 쳐도 중국은 왜 빠졌지?’
무일은 약간의 호기심이 들었지만,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안다고 해서 달라질 게 없는 까닭이다.
(...말했습니다. 1시간입니다. 그 이상은 못 기다립니다.)
(신속하게 끝내겠습니다.)
괴수대응연맹 맹주의 통신은 그걸로 끝났다.
이미 한국 대통령과 와이츠하고는 얘기가 끝난 것 같았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끝난 얘기일 텐데도 맹주는 엘퍼러에게 양해를 구한 것이다.
이것이 위상.
초월자(超越者)라고도 불리는 남자의 ‘무형의 힘’이었다.
곧, 미국의 웨일풍에서 고위괴수들이 하나씩 강하하기 시작했다. 각국을 대표하는 수호자이거나 못해도 두 번째가 온 것 같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노블레스와 에쏘스트가 낙하산도 없이 괴수처럼 강하한다. 자살처럼 보이지만, 훌륭한 낙법으로 전원 무사히 서울 한복판에 착지한다.
“...아주 작정하고 왔군.”
짙은 한숨을 내쉰 청년은 오른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 손을 빠르게 낚아채는 섬섬옥수.
엘퍼러는 자신을 등 뒤에서 껴안으며 헤벌쭉 웃는 발키지어, 펠-쉐어퐁의 인도를 받으며 빠르게 날아올랐다.
목적지는 선유나가 있는 북한산.
점수를 매기는 심사위원 마음으로 가고 있다.
‘하지만 어떨지….’
< [35화-4] 두 얼굴, 두 여자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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