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3] 두 얼굴, 두 여자 >
그 부탁에 호응하듯 세이랑이 바다를 헤엄쳐나갔다.
상하이 때는 처음이라서 우왕좌왕한 감도 없잖아 있었지만, 이번에는 무질서 속에서도 줄이 꼬이지 않고 쭉쭉 나아갔다.
준비할 시간이 넉넉했다면 물의 저항을 줄여주는 잠수복을 입던가, 수상스키처럼 바다 위를 미끄러져 나아가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비상사태다. 느긋하게 준비할 시간이 없다.
이 순간에도 서울은 폭풍에 시달리고 있으리라.
드드드드!
미리 연락받은 인천에서 수문(水門)을 활짝 열었다.
원래는 해양괴수가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지 못하도록 막는 역할이었다. 하지만 매번 부서지니 예산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물’ 같은 용도로 바뀌었다.
막는 대신 괴수의 침입을 알리는 것이다.
하지만 오랜만에 그 수문이 열리며 괴수의 진입을 허용했다.
아름다운 인어공주들이 떼를 지어서 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그리고 이게 한 남자만을 위해서란 사실을 안다면 까무러치리라.
촤아아!
모든 세이랑이 동시에 멈추면서 한강이 넘실거렸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서울에 당도한 포세이돈. 물리법칙을 무시하는 괴수들이기에 가능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여기에 감탄할 틈이 없었다.
엘로엘의 폭주로 한강에 폭풍이 몰아치는 건 정말 사소한 문제였다.
땅속에 숨어든 거머리를 찾는답시고 건물을 띄운 후에 망치처럼 땅에 내려찍는 정령의 힘은 참으로 비현실적이었다.
‘퐁퐁! 왕은?’
윤소영과 이어진 연결고리는 끊겼다. 하지만 그 대신처럼 홍영희와 박선영이 있었다.
무일은 라미아와 함께 하늘로 솟구쳤다.
아쿠버스의 지느러미가 나비처럼 활짝 펼쳐지며 활공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순백의 날개를 활짝 펼친 천사의 접근 때문이었다.
발키지어는 하늘에서 ‘왕’을 넘겨받았다.
“아아! 전하! 전하의 탄탄한 옥체가 그리웠어!”
서울로 올라온 펠-쉐어퐁은 사방에 널린 도시여인들에게서 긁어모은 지식으로 언어영역을 조정한 것 같았다. 그래도 여전히….
취향도 일반적인 발키지어와 많이 달라졌다.
뒤에서 양팔로 무일의 가슴을 껴안은 채 손바닥으로 비빈다.
발키지어만의 신묘한 손기술이 있는 걸까. 불쾌하다기보다는 가슴과 심장이 녹아내릴 것처럼 나긋나긋한 손길이다.
하지만 무일도 더는 숫총각이 아니었다! 마음만은.
부동심(不動心)을 유지했다.
파괴되는 서울보다 왕의 가슴에 훨씬 관심 많은 7종 추종자에게 물었다.
“놈의 위치는?”
“땅벌레처럼 기어가고 있어. 그 위까지 소녀가 모실게.”
“...아니. 그보다는 저 폭풍이 급선무야.”
폭주 중인 엘로엘과 대치 중이던 와이츠는 엘퍼러를 보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몸을 뺐다.
무일은 느낄 수 있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던 엘로엘이 겁을 집어먹었다.
무차별적인 파괴행위를 중단한 ‘바람의 정령’이 폭풍을 일으켜 그를 집어삼키려 했지만, 부질없었다.
역으로 바람의 비명을 지르며 멀찍이 후퇴했다.
어느새 뽑힌 에쏘드가 ‘폭풍’을 밴 탓이다.
치명적인 피해는 아니지만, 실체가 있는 괴수로 치면 팔다리가 잘렸다고 할 수 있다.
구구구구.
직접적인 공격은 안 통할뿐더러 위험하다고 판단한 엘로엘이 자동차와 돌덩이 등을 던지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에쏘드 계약자에게는 대단히 위협적인 공격일 것이다.
하지만 에쏘드가 없더라도 몸뚱이부터 이미 8종에 근접한 엘퍼러다. 저런 공격은 발악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무일은 에쏘드로 허공을 가리켰다.
아무것도 없지만, 그의 [예감]은 말해주고 있었다.
저기에 ‘바람의 정령’ 본체가 있다고.
“쫓을게.”
“...완전히 도망치지 않는 건 계약이 살아있다는 뜻인가.”
사방에서 날아오는 잡동사니를 베거나 쳐내며 발키지어가 고도를 높였다.
그리고 마침내 멈췄다.
에쏘드의 칼끝도 앞으로 쭉 뻗은 채 가만히 있었다.
살랑살랑~.
서울을 날려버릴 것 같았던 폭풍이 잠잠해졌다.
눈에 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무일은 눈앞에 오들오들 떠는 소년의 착시를 보았다. 하지만 이건 착시라고 단정하기도 힘들었다.
적의 실체를 [예감]이 구현한 환상이리라.
육안을 포함한 그 어떤 장비로도 볼 수 없는 ‘정령의 세계’에 있는 소년의 목 앞에 칼끝을 덴 남자는 말했다.
우는 아이를 달래듯이.
“도와줄 테니 질질 짜지 마.”
단, 친절하진 않았다.
엘로엘이 저질러놓은 꼴을 보면 정말 답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 피해를 복구할 수나 있을까…?
양심의 가책 같은 걸 느낄 리 없는 바람의 정령은 여의도의 괴수대응본부로 산들바람처럼 날아갔다.
계약자 박선영이 결박된 의무대로.
당장, 백혈구울을 초월한 백혈구울 ‘황진천’의 뒤를 쫓고 싶었지만, 엘로엘을 저대로 놔두기도 불안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때였다.
(도련님.)
(...말을 낮추십시오, 국모님.)
선유나의 통신이었다.
뱀페스트 공작 박민혁에게서 해방된 이후로 대화는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이전보다 친근하게 들리는 건 각인 때문이리라.
(거부하신다면 주인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미카헬은 극구 아니라고 하지만, 당신은 저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유를 주신 은인입니다.)
(하아…. 마음대로 하십시오.)
(감사합니다.)
모녀(母女)가 맞나 싶을 정도로 선유나는 선지혜와 상반됐다.
평소 그녀는 냉정하지 않을까.
대화하는 상대가 자신의 생명은 물론이고 인생마저 거머쥔 절대적인 ‘주인’이란 계산에서 나온 친근한 화법.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여인다운 처세술이다.
그게 못내 섭섭한 무일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친어머니로서 선지혜에게 좀 더 잘해주라고 ‘명령’하고 싶다는 욕심이 슬금슬금 올라왔다.
‘...아니! 안 되지!’
예외를 두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박민혁이 그랬던 것처럼 선유나란 이름의 꼭두각시가 만들어질 것이다.
충동을 가라앉힌 무일이 입술을 뗐다.
(무슨 일로 연락하신 겁니까.)
(제 친구를 구해달라고 애원하기 위해서입니다, 도련님.)
(알겠습니다.)
다른 말은 필요 없었다.
땅굴을 파면서 이동하는 황진천이 지하철 승객들을 흡혈하며 빠르게 강해지는 중이란 [예감]이 들었지만, 애써 외면했다.
그렇다고 완전히 방관할 생각도 없었다.
‘플로라!’
쉬임프의 [예지]라면 발키지어의 도움 없이도 놈을 찾아낼 것이다. 저렇게 요란하게 움직이는 거머리를 놓치기도 쉽지 않다.
세이랑은 한강 곳곳에 배치했다.
황진천이 한강 밑으로 이동하려고 하면 단단한 머리를 들이박아서 땅굴이나 지하철로 한강 물을 밀어 넣는 전략이다.
놈의 목적은 ‘선유나’ 아닐까?
유부녀에게 찝쩍거리던 찰거머리가 인제 와서 포기할 것 같지 않다.
기회가 있다면 박선영이 무력화된 지금이 적기다.
“용사님!”
“세리. 잘 보고 있어.”
“네!”
같은 실수를 안 하기 위해 옆에 ‘용사의 정령’을 대동한 무일은 의무대로 들어갔다.
펠-쉐어퐁은 플로라의 지원으로 보냈다.
최강의 방어력을 자랑하는 쉬임프지만, 지하(地下)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이 짧은 시간에 벌써 3번이나 지하철에 매몰될 뻔했다.
당연히 그녀는 무사했지만, 빈번히 황진천을 놓칠 수밖에 없었다.
“어멋?! 이럴 수가…! 그 귀여운 소년이 이렇게 삭다니!”
“보라 누나! 삭다니요! 진짜 실례입니다!”
이 난리 통에도 의무대 공주님인 프로칸 계약자 ‘강보라’는 쾌활하고 여유로웠다. 그녀 옆에는 개구리 왕자님이 ‘개~굴~.’이라고 늘어지게 울었다.
많이 변하긴 했다.
하지만 장담코 삭았다는 소릴 들을 정도는 아니다.
강보라가 자신의 키랑 비교해보더니 감개무량하다는 어투로 말했다.
“내 가슴이나 훔쳐보던 소년이 이렇게 클 줄이야….”
“누나! 정말 오랜만이라서 죄송하지만, 지금은 공무 중입니다! 나중에 사과할게요. 그러니 박 여사가 있는 곳으로 부탁합니다.”
“약속했다?”
“제가 약속 어긴 적 있습니까.”
“여자 문제는 국제사회적으로 허점투성이면서♬”
“죄송합니다….”
“가보자. 지금은 보기 흉하지 않을 거야. 마취제에 찌들었거든.”
강보라의 말대로였다.
프로칸의 타액으로 목욕하다시피 한 박선영은 침대 위에서 꼼짝달싹 못 하고 있었다. 의외로 몸은 멀쩡한 편이었다.
하지만 여왕의 눈은 사람이 아닌 ‘짐승’을 연상케 했다.
놈이 무슨 ‘명령’을 내렸는지 알 것 같았다.
“이 개자식이…!”
“용사님. 조심하세요. 단시간에 흡혈을 너무 많이 하셨어요.”
침대에 고정된 박선영에게 다가가는 한무일에게 한세리가 걱정을 담아 경고했다.
늘 쾌활한 그녀치고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몸에 받아들인 ‘여성의 피’에 내성이 생길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이야 곁에 한세리가 보험처럼 붙어있어서 괜찮지만, 곧바로 싸우러 가야 한다.
셋은 정말 위험하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하렘의 왕’이 이 기회를 놓칠 리 없다.
조금만 빨고 때면 될 것 같지만, 박선영의 몸에 박힌 ‘각인’을 덮어씌우려면 적당히 해서는 턱도 없다.
무일은 눈을 살짝 감았다가 떴다.
이성은 며칠 말미를 두고 천천히 흡혈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하지만 그는 본능으로, 마음이 시키는 대로 살아왔다.
‘이 여자를 이렇게 고통받게 할 수 없어.’
선유나와 함께 지금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장본인이다.
친구를 돕는다는 명분이지만, 결과적으로 그녀가 있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었다.
그런데 이대로 방관하라고?
며칠 동안만 ‘개’처럼 놔두라고?
무일에게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고 물러설 수도 없는 문제였다. 그의 정의에는 ‘희생’은 있을지언정 ‘후퇴’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나설 생각은 없었다.
미래를 내다보지 않은 희생은 자기만족일 뿐이니까.
스르릉.
에쏘드를 뽑았다.
녀석에게 육신의 주도권을 빼앗길 것 같으면 그대로 자해(自害)한다는 계획이었다. 무식하지만 효과적이다.
숙주인 무일도 위험하지만, 기생 중인 ‘하렘의 왕’에게는 진짜 치명상이다.
미친놈!
용사의 마음속에서 왕은 분노를 담아 외쳤다.
성검(聖劍)이 계약자와 운명공동체인 자신을 죽이진 않겠지만, 정말로 ‘딱’ 죽지 않은 정도로만 난도질할 것이다.
이건 허세가 아니다!
숙주의 마음을 읽지 못한다면 뱀페스트 실격이다.
“여왕님. 악몽에서 깨어나십시오.”
무일은 황진천이 낸 이빨 자국 반대편에 송곳니를 박았다.
마취제에 찌든 박선영은 변화가 없었다.
그건 무일도 마찬가지였다.
흡혈하면서 박선영의 피에 섞인 마취성분이 몸에 침투하긴 했지만, 에쏘드의 특수무효화에 가로막히며 흐지부지 사라졌다.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하렘의 왕’이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건 임시방편이야.’
매번 이런 식으로 자존심 강한 왕을 협박할 순 없다.
참고 참다가 폭발할 것이다.
어찌어찌 막겠지만, 피해가 막심할 것이다.
게다가 이미 신체 일부의 상당 부분을 담당 중인 뱀페스트를 도려내고도 멀쩡히 살 수 있을지 의문이다.
육체가 붕괴하지 않을까.
“여기까지 온 김에 홍영희도….”
“용사님!”
“그래. 알았어. 나중으로 미루자.”
화내는 한세리를 처음 보는 무일은 순순히 물러났다.
바람이 살랑살랑 불었다.
꼼짝달싹 못 하는 박선영을 지키듯 엘로엘이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일단은 정령의 폭주도 잠재워진 것 같으니 안심이다.
남은 건,
‘결판을 내자! 최악의 해충.’
< [35화-3] 두 얼굴, 두 여자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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