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145화 (145/287)

< [35화-2] 두 얼굴, 두 여자 >

왕의 체면을 세울 틈 따위는 없었다.

절벽 밑으로 떨어지기 직전의 표정을 지은 ‘하렘의 왕’은 마음의 심연 밑으로 사라졌다. 늘 자신이 지켜보고 있음을 잊지 말라는 듯이 웃는다.

웃지 마라! 짜증 난다.

돌아온 한무일은 정말 어처구니없다는 얼굴을 했다.

본능에 의존한 탓에 지나치게 방심했다. 내게 해가 안 되면 괜찮다는 [예감]은 남의 문제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먹통이다.

이걸 어쩐다?

팔뚝에 매달리듯 안긴 한세리는 그저 생글생글.

아무래도 좋다는 것 같다.

“키가 많이 커지셨어요, 용사님!”

“...음!”

최은설의 문제를 생각하면 기뻐하면 안 되는데, 천추의 한이 해결되니 저절로 입꼬리가 위에 걸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쓰러진 두 여인을 일단 침실로 옮겼다.

가장 걱정했던 레드군은 잠잠한데 의외로 걸린 썬피스트가 난동 부리며 건설 중인 도시 외곽이 손상됐다.

그리고 토벌.

주위를 건조하게 바꾸는 ‘사막의 펭귄’ 썬피스트는 문팽이 추종자들에게 매우 위협적으로 다가온 탓이다.

어떻게 말릴 틈도 없이 죽였다.

졸지에 수호자까지 잃은 최은설에게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알 수 없게 됐다.

“선배. 6종 같은 건 잊고 여길 봐.”

선지혜가 전혀 위로 같지 않은 말로 무일을 불렀다.

부쩍 성장한 엘퍼러는 이제 누가 봐도 완연한 성인이었다. 겉보기 나이는 대략 25살 전후쯤 될까.

신장은 큰 편이었다.

늘 내려다보던 선지혜가 고개를 번쩍 들고 올려다봐야 할 정도였다.

팔다리도 길었고 손도 컸다.

의도적으로 육체를 검사(劍士)에 최적화했음을 알 수 있었다.

일단 키부터 맞추고 보자는 의도였을까. 전체적으로 마른 감이 없잖아 있지만, 그래도 보기 흉하긴커녕 이건 이것대로 매력 있었다.

이건 변신 수준이었다.

선유나 때하고는 아예 차원이 달랐다.

그때는 터를 다진다는 개념이 강했다면, 이젠 ‘여성의 피’를 흡수하는 족족 몸에 전부 투자하는 것이다.

‘허기…?’

에쏘드와 계약한 이후로 배고픔이란 걸 모르고 살았던 무일이다.

하지만 이것저것 다 땅겼다.

이건 근본적인 영양분부족이란 결론을 내렸다. 무리해서 신장을 키운 탓에 나머지가 부실해진 것이다.

당장 뭐라도 먹어야만 했다.

쉬임프가 탈수증으로 쓰러진 것처럼 근본적인 문제였다.

그리고,

짧아진 옷도 어떻게 해결하지 않으면 온종일 민망할 꼴로 다녀야 한다.

“지혜를 내려다보는 날이 올 줄이야….”

“...난 선배가 작아도 좋고 커도 좋은데, 야윈 것 같은 지금 모습은 좀 그런걸. 왠지 슬퍼진다고 할까.”

“그럼, 뭐라도 먹으면서 얘기를 듣지.”

무일이 이렇게 요란을 떨었던 이유는 전부 ‘뱀페스트 왕’을 잡기 위해서였다.

왕이 ‘노예’ 윤소영을 해코지하기 전에 해방한다는 게 목적이었다. 그리고 멋지게 성공했지만, 살짝 착오가 있었다.

썬피스트 계약자, 최은설.

방금 수호자가 죽었으니 미계약자가 됐다.

하지만 이대로 괜찮을까?

‘괜찮을 리가.’

흡혈귀에게 물린 처녀를 누가 데려가겠는가.

와이츠와 레드군 같은 이성적인 괴수, 용들은 분노하긴 해도 침착하게 대응한다. 하지만 대다수 수호자는 썬피스트처럼 용납하지 않는다.

도와주지 않으면 최은설은 영영 계약이 무리일 것이다.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다.

쉬임프는 무리겠지만, 그녀의 미모면 발키지어는 턱걸이로 어떻게든 가능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만, 펠-쉐어퐁의 가슴 취향이 살짝 걸릴 뿐.

“왕은 서울에 있었는걸.”

“...그리고 내 친구 중에 있었나.”

“맞아. 맞춰볼래?”

“...아니.”

나름 12월 25일을 기념한다고 준비한 요리들을 청소기처럼 흡입하던 무일은 담담하게 거절했다.

재미없다는 듯이 입술을 삐죽 내민 선지혜.

사랑하는 남자의 뺨에 묻은 양념을 혀로 핥으며 식겁시킨 후에 깔깔 웃으며 말했다.

“황진천.”

“콜록! 콜록! 진천이라고?!”

“응. 한국이 자랑하던 명문혈통의 맥이 하나 끊긴 셈이지.”

카르 4세와 오랫동안 함께한 친구다.

황진천의 특수체질은 ‘괴수의 피’를 정화하면서 ‘괴수의 재생력’도 사용하는 놀라운 능력이다.

그래서 그는 늘 사냥 직전에 주사로 ‘괴수의 피’를 몸에 주입했다. 덕분에 죽음의 위기를 몇 번이나 넘겼지만, 그 탓에 [업보]도 빠르게 쌓이고 말았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사냥꾼으로 계속 활동했다.

꼭 자살하려는 사람처럼.

아니, 특공대원 대부분이 그렇듯 사냥에 중독된 것이었다.

하지만 친형이 요절하면서 가문으로 돌아갔다. 대를 이을 형이 죽으면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혈통이 붕 떠버린 탓이다.

“...녀석의 아내들은?”

다섯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홍영희를 포함하면 여섯.

어떻게 그 사고뭉치 친구가 아내들이랑 화기애애하게 지냈는지 이제야 요목조목 들어맞기 시작했다.

가장이 되면서 철이 든 게 아니었다.

황진천에게는 ‘아내’가 애초부터 한 명도 없었다. 절대복종하는 ‘노예’들이 치정 싸움 같은 걸 할 리 없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어떻게 됐을까?

특히, 돌잔치 때는 무슨 일이 있어도 뻔뻔하게 참석해서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했던 홍영희는 어떻게 됐을까.

좋은 인연은 아니었다.

가상현실게임에서 만난 중국계 남자를 사랑하면서 인생이 엉망진창이 된 여인. 어떻게 보면 ‘선유나 혈통’에 얽힌 피해자였다.

“이모가 사정 봐줄 리 없잖아.”

“흠….”

“홍영희만 살았어. 완전히 남남이 아니라고 이모가 사정 봐준 거지. 하지만 뱃속에 든 아이는 유산했어.”

그리고 현재는 구속되어 있었다.

선지혜가 손을 까딱이며 저택의 지휘통제실에 명령하자, 허공에 대형스크린이 두둥실 떠올랐다.

거기에는 전라의 여인이 있었다.

건장한 사내 넷에게 팔다리가 붙들린 채 강제로 눕혀진 홍영희. 그녀의 가랑이 사이로 계속해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발광할 때마다 여의사가 깜짝깜짝 놀라면서 자궁을 청소 중이었다.

여전히 계속되는 ‘각인’의 저주.

죽은 자신의 아이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주인님만 외치는 모습이 불쌍해서 더는 눈 뜨고 봐줄 수가 없었다.

‘가혹하다….’

사랑하는 남자에게만 연속으로 두 번 배신당했다.

무일은 눈을 가늘게 뜨고 원흉에 관해 물었다.

“왕은? 내 친구 몸을 빼앗은 그 빌어먹을 왕은 어떻게 됐어?”

“...땅속으로 도망쳤어.”

“땅속…?”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흡혈귀가 땅을 판다는 소리는 듣질 못했다.

“녀석은 뱀페스트가 아니었는걸. 더는 흡혈귀 왕도 아니야. 백혈구울. 그것도 지능이 살아있는 백혈구울이었어.”

“그딴 게 가능할 리가…. 잠깐. 아! 빌어먹을!”

황진철의 특수체질을 잊고 있었다.

괴수의 재생력!

뱀페스트의 생존력에 숙주의 특수능력을 더해서 ‘뇌’를 끊임없이 복구했다면?

이론상으로는 백혈구울의 최대 약점인 ‘무뇌(無腦)’를 막을 수 있다.

‘게다가 특수체질!’

아무도 황진천이 뱀페스트라고 의심하지 않았다. 온종일 집에 틀어박혀 있는 가주가 흡혈귀에게 감염됐으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물론, 와이츠는 공명정대하다.

예외를 두지 않고 혈액검사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괴수의 피’를 끊임없이 정화하는 특수체질을 타고난 황진천에게는 ‘붉은색 피’가 검출됐을 것이다. 그게 당연하다.

뱀페스트 후작 오창민처럼.

아무도 그가 흡혈귀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흡혈귀 백작이 물귀신 작전으로 그를 언급하지 않았다면 카르 4세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때문에 방심했던 이모도 망했어.”

“...뭐?”

“손을 두더지처럼 바꿔서 땅속으로 숨어든 왕이 확! 덮쳤거든.”

“......”

뱀페스트는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하지만, 백혈구울은 가능하다.

신체를 자유자재로 바꾸는 게 장기인 괴수니까.

바람이 아무리 강한들 땅을 비집고 들어갈 순 없다. 이건 ‘뱀페스트 왕’이 오랜 시간 복수의 칼날을 갈며 연구한 쾌거이리라.

백혈구울에게 접근을 허용했다?

박선영은 [예감] 같은 걸 익히지 않은 평범한 노처녀(!)일 뿐이다.

“이모를 죽이지 않고 목을 깨물었어.”

순식간에 노예로 전락한 바람의 여왕은 죽음보다 못한 꼴이 됐다.

곧바로 8종 엘로엘이 폭주.

오랫동안 함께해온 계약자를 엉망으로 만든 거머리를 잡기 위해 서울을 무차별적으로 헤집기 시작했다.

박선영은 현재 본부 의무대에 있었다.

굳이 상태를 묻자면 홍영희보다 훨씬 최악이었다. 죽음을 체험한 흡혈귀의 악의(惡意)가 절절히 느껴질 만큼 처참했다.

무일은 창밖을 내다봤다.

과연, 바람이 심상치 않았다.

“...와이츠가 역풍(逆風)으로 억제하고 있는 건가.”

그리 오래 버틸 것 같진 않다.

용신의 최우선 보호대상은 ‘선유나’이기 때문이다. 아직은 계약자의 부탁으로 서울을 지키는 척하지만, 말 그대로 ‘하는 척’이다.

엘퍼러는 이 바람의 흐름만으로도 서울의 상황이 한눈에 들어왔다.

작아져서 거추장스러워진 옷을 벗었다.

남은 옷은, 평양에서 심판을 맡았던 영국 왕녀 ‘실바니아 하이로드’가 우승선물로 준 외투뿐이었다.

쉬임프와 붙으면서 많이 손상되긴 했지만, 그래서 더욱 백전노장을 연상케 했다.

친정(親征).

전장으로 향하는 왕의 모습이 이럴까.

허기를 채운 무일의 몸에는 어느새 근육이 붙어있었다.

“...갈 거야?”

“가야지. 또 막으려고?”

“아니. 그러면 선배가 나를 싫어할 거잖아. 그런 건 싫은걸! 이전처럼 다른 대안이 떠올랐다면 막았겠지만….”

“...우리 집, 잘 지키고 있어.”

“응!”

왼쪽 허리에는 에쏘드. 오른쪽에는 ‘행운의 단검’을 장착했다.

서울까지 최대한 빠르게 갈 방법.

가더발트를 활성화하고 달리는 건 비효율적일 뿐만 아니라 생각보다 느리다. 그리고 그전에 이론으로만 구상해둔 방법이 있었다.

선지혜가 고집스럽게 주장한 ‘2시간’ 외출시간!

절대로 안 보내주겠다는 뜻으로 그녀는 한 말이었지만, 무일은 순수하게 해석했다.

즉, 2시간 안에 오면 괜찮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서울과 개성 등을 쾌속으로 주파할 방도를 고안했다.

엘퍼러는 정신을 집중했다.

‘라미아! 가자!’

망설이지 않고 바다로 뛰어든 그의 뒤를 따라서 아쿠버스가 잠수했다.

등 뒤에서 포근하게 감싸며 여신이 말했다.

발성기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은 천연의 목소리로.

“다음에는 호수에서 함께 헤엄치고 싶노라.”

“흠.”

입에 바닷물이 들어오면 곤란한 무일은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신했다.

이 상태로 인천까지 헤엄쳐가도 빠를 것이다.

하지만 무일은 쓸 수 있는 패들을 그냥 썩혀둘 생각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가면 서울 시민을 한 명이라도 더 구할 수 있다.

‘플로라! 준비는?’

쉬임프가 세이랑 무리를 이끌고 왔다.

그녀의 손에는 한세리가 임시방편으로 만든 목줄이랑 달리 MID 기술력을 접목해서 전문적으로 만든 제품이 들려있었다.

기본 전술은 상하이 때하고 비슷하다.

앞에서 총 서른으로 구성된 인어공주들이 그를 끌어준다. 그리고 추가로 아름다운 용신이 뒤에서 밀어준다는 전략이다.

마지막으로 한세리.

에쏘드의 힘을 끌어내려면 반드시 필요한 존재다.

하지만 몸치에다가 육상생물 인간을 본뜬 ‘용사의 정령’에게 거친 바다를 헤엄치라는 건 지나친 요구다.

그래서 쉬임프가 챙긴다.

이름하여,

『포세이돈』

고대의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바다의 신’ 이름을 땄다.

초현실적인 미녀들에게 둘러싸인 황제의 행차.

강대국들에 전율과 경악을!

남자들에게 질투와 로망을!

그 당사자인 엘퍼러는 호칭 따위야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주의지만, 주위에서 박박 우기면서 갖다 붙였다.

이렇게 된 원인제공자를 거슬러 올라가면 ‘바다의 왕자’라는 작품을 쓴다던 판판 소와 중국 정보과가 나온다.

...딱히 기억해둘 필요는 없다.

숨을 쉬기 위해 고개를 수면 밖으로 치켜든 황제가 호령했다.

“출발! 미약한 내게 힘을 보태줘!”

< [35화-2] 두 얼굴, 두 여자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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