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144화 (144/287)

< [35화-1] 두 얼굴, 두 여자 >

파르나르 장편소설

괴수처럼 18

[35화] 두 얼굴, 두 여자

학명: 쉬임프(새우처럼 늘씬한 요정)

서식지: 해저

특징: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괴수

위험도: 8종 소형

비고: 부서질지언정 휘지 않아!

***

대한민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3급 프로사냥꾼이 있었다.

이름은 한무일. 별명은 카르 4세.

후배의 꾐에 넘어가서 막대한 빚을 지고 열심히 염소 젖을 팔며 연명하던 그는, 살던 집이 파괴되는 불상사를 겪고 만다.

평화롭게 날아가던 초대형 돼지에 의해서.

그리고 한 소녀를 만났다.

대한민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계약자였다.

이름은 윤소영. 위명은 최연소 7종 계약자!

우연으로 치부한 만남은 계속 이어졌고 1년이 지난 현재는 정반대 상황이었다. 소녀보다 약했던 소년(외모는)은 아득히 초월한 위치에 섰다.

판타지소설의 흔한 패턴일까나…?

주인공이 공주님보다 강해지면서 ‘백룡(白龍) 탄 왕자님’이 완성됐다.

이제 고백하고 결혼하면 행복한 에필로그!

“도시를 태워버리고 싶으면 뭔들 못하리.”

“무일 오빠?”

“아니야. 아무것도.”

오늘은 서기 12월 24일이란 날이다.

누구의 생일도 아닌데 요란 떠는 후배를 간신히 말린 무일은, 간신히 소녀와 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서울에서 목포까지 계약자를 데려온 붉은 용왕이 하늘을 배회하고 있었다. 불규칙하게 나는 것처럼 보여도 시선만은 이곳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다.

적대적이진 않지만 호의적이지도 않다.

‘잘 해줘야 할 텐데.’

가슴을 사랑하는 천사, 발키지어는 라미아의 호언장담처럼 뱀페스트의 흔적(각인)으로 본체를 추적할 수 있었다.

펠-쉐어퐁의 설명에 의하면, 완전무결해야만 하는 젖가슴에 스며든 이물질(각인)의 출처를 쫓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젖가슴에 대한 모독!

거머리 왕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하늘을 향해 선전포고한 펠-쉐어퐁. 그리고 출전(出戰)하기 전에 판판 소에게 경고했다.

젖가슴에 넣은 거 빼라고.

아무튼, 목에 통신기를 착용한 천사는 하늘 높이 날아갔다.

이것은 시간 싸움.

윤소영이 모르게 진행해야 한다.

“오빠랑 같이 바다를 보기는 이번이 두 번째네요!”

“동해 다음은 남해인가.”

“내년에는 서해를 같이 봐요. 어…. 그리고 다음은 중국에서 보는 건 어때요? 중국에도 제 팬이 있데요! 무려 1,000만 명이나 된데요!”

시링 팽이 500만 명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어느새 2배로 뛴 모양이다.

이게 한류 열풍이란 건가?

상하이 사건으로 한국에 대한 관심도가 올라가면서, 자연스레 ‘레드군 계약자’에 대한 관심과 사랑도 높아진 걸로 해석된다.

무일이 할 일은 하나다.

여기서 윤소영과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면서 ‘흡혈귀 왕’의 경계를 누그러트리는 것이다. 그리고 신호가 오면 소녀의 목덜미에 송곳니를 박는다.

그러면 끝?

레드군이 어떻게 나올지가 관건이다.

계약자가 있는 ‘아이언문’으로 브레스를 쏘진 않겠지만, 어쩌면 정말 폭주해서 눈이 뒤집힐지도 모른다.

그 부분은 쉬임프와 변강쉘이 맡기로 했다.

문팽이?

세계평화를 위해 제외됐다.

‘아무것도 모르니 답답하군.’

선지혜는 와이츠와 박선영에게만 비밀리에 협조를 부탁했다.

펠-쉐어퐁은 한국 괴수대응본부에 등록되어있지 않은 ‘야생 발키지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투는 천사의 몫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뱀페스트 왕’이 누구인지 확인하는 역할이다.

도심에서 흡혈귀와 싸운다면 발키지어의 특성상 인명피해가 심각할 거란, 인도적인 차원의 우려 때문만이 아니다.

바람의 여왕 ‘박선영’이 강력히 원했다.

그 찰거머리를 분자단위로 수백 번 갈아버리지 않으면 성이 차지 않는다고.

속아서 이리저리 뺑뺑이 친 굴욕이 사무친 모양이다.

“언제까지 둘이서만 대화할 건가요.”

훈계하는 선생님처럼 팔짱 낀 아가씨가 테라스로 나왔다.

차분하고 지적인 미모가 돋보이는 그녀의 이름은 최은설. 인연의 시작으로 따지면 윤소영하고 별 차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무일이 먼저 치근대고도 수호자에게 안 죽었다면 관계가 진전됐을까?

무의미한 가정이다.

이 6종 계약자는 자신의 연락처까지 줬는데 무려 1년 동안 전화 한 통화 없었던 카르 4세 때문에 자존심이 많이 상한 것 같았다.

엘퍼러?

그런 건 모른다.

신경 쓸 틈이 없었다는 게 옳을 것이다.

‘정말이지….’

와이츠의 정책은 예외를 두지 않았다.

친인척들이 빼달라고 아우성치는 걸 뿌리치는 것만으로도 흰머리가 나는 줄 알았던 최은설이었다.

너에게 그렇게 잘해줬는데 어쩜 이럴 수 있느냐!

...가장 많이 들은 대사일 것이다.

자신에게 얼마나 잘해줬는지는 의문이지만, 그 이상으로 ‘가족’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친인척들은 그동안 수많은 혜택을 받았다.

그 혜택이란 것도 결코 섭섭한 수준이 아니었다.

【썬피스트 / 6종 보통】

한국에 몇 없는 6종 수호자를 둔 여인의 가족 보호는 최우선사항이다. 그리고 이 ‘보호’의 경계선이 모호해서 국가의 세금이 증발한다.

직장이 힘들다고 징징! 놀고 싶다고 징징! 정치하고 싶다고 징징! 공부하기 싫다고 징징! 징징…. 징징….

정말 끝도 없다.

안 들어주자니 이 가족이란 인간들이 계약자를 귀찮게 한다.

물론, 와이츠의 법에 따라 추방하거나 사형(!)시키면 간단하다. 하지만 계약자가 극구 만류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심할 때는 계약자와 친인척이 한통속이다.

“최은설 양. 작년 때보다…. 흠…. 다이어트를 열심히 하신 모양입니다.”

“야윈 거겠죠.”

최은설이 여기 있는 이유는 거의 도피에 가까웠다.

가족과 친인척 대부분이 개성시로 끌려가면서 집안이 조용해지긴 했지만, 힘들다고 질질 짜는 전화가 잊을만하면 온다.

그래서 스마트폰 전화번호를 바꾸는 극단의 조치까지 했다.

아주 훌륭한 판단이라고 자찬했는데…. 바로 며칠 뒤에 개성시에서 친오빠가 자살소동을 일으켰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 남자의 반만이라도 본받았으면….’

아무것도 모르는 최은설은 푸념 삼아 한 소리겠지만, 엘퍼러의 50%면 전략무기의 범주마저 넘어선다.

지나친 바람이다.

현재, 강대국들의 목표는 엘퍼러 전력의 10%를 양산하는 걸 목표로 하고 있다. 하지만 쉬임프마저 쓰러트리는 걸 보고는 5%로 하향 조정했다.

괴수로 치면 ‘7종’ 턱걸이쯤 될까.

당연히 ‘왕의 지배력’을 제외한 능력치를 수치화한 것이다.

“하, 하, 하…. 일이 많으신 모양입니다.”

“그건…. 뭐라고 단정하기 힘들군요.”

원정대 덕분에 계약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긴 했지만, 여전히 6종은 꽉 막힌 관문이다. 그래서 최은설의 위상은 여전했다.

아니, 더 높아졌다.

노블레스를 취급하지 않는 한국이기 때문이다. 계약자가 늘어나면서 계약자의 발언력도 덩달아 올라갔다.

이쯤 되면 다른 나라처럼 허세와 권력 등에 눈독 들일 법도 하지만, 한국은 강남구 쿠데타 이후로 늘 그렇듯 평화로웠다.

...한국인이 착해서?

그건 아니고, 계약자로 이미 권력의 정점에 오른 두 여성이 딱 버티고 있는 탓이다.

8종 와이츠 계약자, 선유나.

9종 문팽이 계약자, 선지혜.

외모관리에 치중해야 하는 계약자는 정치와 담을 쌓는 게 일반적인 견해다. 하지만 선유나는 수호자가 대신 처리해준다.

선지혜는?

문팽이에게 정치는 무리다.

하지만 슈퍼달팽이는 존재 자체가 정치다.

왕이 머물면 낙원이요, 행차하면 필승일지니, 그 누가 정치와 경제를 논하겠는가!

“최은설 양. 낮에 듣긴 했지만,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괜찮아요. 휴가를 받고 온 거니까요.”

친오빠가 자살소동을 일으켜준 덕분에 휴가가 생겼다.

충격받지 말라는 정부의 배려인 모양인데, 솔직히 말해서 아무렇지도 않다. 그 인간이라면 그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렸을 적에 잘 돌봐준 정을 생각해서 이 말만은 꾹 참고 있지만….

여동생의 이름을 팔아서 여자들을 울리는 개새끼다.

‘계약자가 아니었다면….’

화목했던 가정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배부른 투정이라고 도리질한 최은설은 마음을 비우고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주로 윤소영이 말하고 카르 4세가 들어주는 식이었다.

수업일수가 부족해서 겨울방학 중임에도 학교를 나가야 한다는 얘기, 엘카르(레드군)가 산딸기를 구해왔는데 무척 맛있었다는….

소소한 일상에 대해 즐겁게 말하는 소녀.

딱히 즐거운 요소는 없었지만, 눈앞에 청년이 들어준다는 하나만으로도 그냥 기쁜 것처럼 보였다.

최은설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의 침착하고 지적이다는 평가는 천성이 아니다.

사막의 펭귄, 썬피스트의 영향으로 감정이 사막처럼 메마른 영향이다. 그러고도 이 정도로 평범하게 생활하는 건, 그만큼 과거에는 감정이 풍부했다는 방증이다.

“무일 오빠. 계속 여기 계실 거예요?”

“흠. 도시의 형태가 잡힐 때까지는, 아마도.”

“우우…. 만나기 힘드네요.”

대화를 들어보면 단번에 알 수 있다.

저게 사랑이 아닐까?

최은설은 윤소영에게 간혹 카르 4세에 대해 듣는다.

이렇게 무뚝뚝하게 보여도, 예전에는 꼬박꼬박 존댓말 써서 더 거리감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현재는 많이 발전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래도 마음에 안 든다.

허영심 넘치는 친척 동생들보다 예뻐하는 아이라서 그럴 것이다.

그때였다.

‘시계에서 노란불…?’

패션에 제법 관심이 많은 최은설은 낮부터 계속 거슬렸던 ‘카르 4세의 손목시계’에서 노란색 불이 깜빡이는 걸 발견했다.

...알람일까요?

토시처럼 두꺼운 저 묵직한 손목시계의 기능이 정말 그뿐이라면 진심으로 하나 장만해주고 싶은 6종 계약자였다.

미국에서 들었다면 억울했으리라.

엘퍼러가 너무 험하게 다루는 바람에 튼튼하게 업그레이드한 결과다. 원래는 어느 파티장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날렵한 디자인이었다.

“한무일 씨. 그 시계 말인데요. 어…?”

최은설은 말하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카르 4세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윤소영의 허리에 팔을 감고 끌어당겨 키스…. 하는가 싶더니 소녀의 목을 깨물었다.

이, 이게 대체?!

너무 놀란 썬피스트 계약자가 굳어버렸을 때, 하늘을 노닐던 붉은 용왕이 포효했다. 그리고는 숨을 크게 들이고는 천공을 향해 불을 내뿜었다.

분명 밤일 터인데 세상이 환해졌다.

그리고 겨울이란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공기가 뜨거웠다.

화풀이.

레드군은 분을 억누르고 있었다.

용왕에게는 용신에 버금가는 지혜는 없지만, 일반인 정도는 된다.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계속 주시하고 있었기에 돌아가는 상황쯤은 [예지]할 수 있다.

“놀랄 것 없다. 나의 백성이여.”

윤소영의 목덜미에서 얼굴을 땐 한무일이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완전히 달라진 말투와 대사.

그뿐만이 아니다. 느끼한 미소 사이로 언뜻 보이는 치아에는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긴 송곳니가 돋아나 있었다.

굳이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최은설은 알 수 있었다.

“뱀페스트?!”

대처는 교본대로 신속했다.

잽싼 살쾡이처럼 뒤로 물러선 최은설은 수호자 썬피스트를 불렀다.

하지만 사막이랑 완전 상극인 갯벌 위의 도시에 짙은 거부감을 내는 수호자를 배려해서 멀리 있도록 한 게 실수였다.

서울이 아닌 여긴 안전하다고 방심한 걸 후회했다.

“나는 그 표현을 좋아하지 않는다. 엘퍼러. 그렇게 불러줬으면 좋겠다. 나의 세 번째 백성이여.”

“아…!”

언제였을까?

흡혈 당하고 축 늘어진 윤소영을 테라스 의자에 눕힌 ‘하렘의 왕’은 이미 최은설 코앞에 있었다.

공포가 아닌 미지의 마음에 사로잡혀 움직일 수 없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아래도 이상하다.

윤소영 때와 마찬가지로 그의 품에 안긴 최은설은, 목의 통증이 쾌락으로 변할 때까지 아무런 반항도 할 수 없었다.

역으로 둘 곳 없는 자신의 양팔로 외간남자를 껴안았다.

“멈춰! 거기까지야. 더부살이.”

너무나 갑작스러운 전개에 대응이 늦은(서둘러 오다가 계단에서 굴렀다.) 한세리가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화장실 간다던 최은설이 왜 여기에?

그건 아무래도 좋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데 누굴 탓할까.

한무일은 단번에 육체의 주도권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고 [예측]했지만, 흡혈 직후의 뱀페스트 지배력은 [예측]보다 강했다.

재미나게도 [예감]은 이걸 위기로 판단하지 않았다. 불만족스러운 육체가 성장할 기회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렇게 생겨난 유예기간.

쾌재를 부른 ‘하렘의 왕’은 늠름하게 고했다.

“손대지 마라. 내 의지로 들어-.”

< [35화-1] 두 얼굴, 두 여자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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