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4] 새우와 함께 춤을 >
용신의 언어폭력과 인신모독은 무자비했다. 그 옆에서 ‘나도 끼워줘!’라고 참견한 선지혜가 가세하면서 극에 달했다.
처음에는 대꾸도 하며 어떻게든 버텨내던 발키지어의 동공은 풀려있었다.
영혼 빠진 건어물 같다.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젖가슴이 없다는 하나만으로 규탄과 모욕을 다 들은 천사는 재기가 힘들어 보였다.
말로 사람을 죽인다면 이런 걸까.
초등학생 기억을 가져다가 쓴 괴수가 버티기에는 너무 강한 자극이었다.
아예 말귀를 못 알아들었으면 그나마 괜찮았을 텐데.
“...너, 괜찮아?”
“몰라. 빨래판은 감정 같은 거 없어. 나는 빨래판이니까.”
“......”
중증이다.
짧은 시간에 사막처럼 마음이 피폐해졌다. 가만 놔두면 목매달고 자살할 것 같은 칙칙한 분위기다.
괴수가 자살한다니?
지나가던 플라돈이 웃다가 추락할 얘기다.
자기 할 말만 시원하게 토해낸 라미아와 선지혜는 볼일 보러 휭 사라졌다. 정말 무책임한 마이페이스가 아닐 수 없다.
‘그래도 고분고분해졌네.’
이게 다 그녀들의 전략이었다고 믿고 싶다.
발키지어 상태는 그럭저럭 최악.
이래서는 뱀페스트는커녕 몸치인 한세리도 못 이길 것 같다.
인간의 기준으로는 힘 좋은 여자아이일 테지만, 괴수 관점에서는 한 입 거리밖에 안 되는 산송장인 셈이다.
“이름이 뭐야?”
“빨래판.”
“정말로 빨래판이라고 부른다? 빨래판, 빨래판.”
“으으….”
“이름은?”
“...펠-쉐어퐁.”
괴수에게 이름이란, 본연의 특징을 뜻한다. 태어날 때부터 정해지는 건 아니고 부모 없이 자라는 동안 타인에게 불리는 특징이 이름으로 굳는다.
취미, 성향, 장기, 색깔, 덩치, 성격 등등.
여기에 본능으로 깨우치는 언어를 접목한다. 당연하게도 인간은 이름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며, 그건 계약자도 마찬가지다.
한국인이 자기 이름을 읽고 쓸 줄은 알아도 ‘한자’ 뜻은 모르는 것처럼.
전부 그렇다는 얘기는 아니다.
대체로 ‘용언(龍言)’이라고 불리는 가장 복잡한 ‘용의 언어’는 MID 기술을 위해 어찌어찌 해석이 많이 이루어진 편이다.
그렇다고 언어가 한두 개뿐이냐?
인간의 언어와 문자가 다양한 것처럼 괴수도 독자적인 언어체계가 엄청나게 많다. 그건 눈앞에 발키지어도 마찬가지다.
천사의 언어라고 할까.
그걸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가공한 것이다.
인간은 ‘표음(表音)’만 알아들을 뿐이다.
“좋아. 퐁퐁.”
“퐁퐁?!”
“싫으면 관두고.”
“아니! 좋아. 아주 좋아!”
어째선지 표정이 밝아진 발키지어 ‘펠-쉐어퐁’은 말 잘 듣는 꼬맹이가 되어있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다 이유가 있었다.
펠-쉐어퐁.
그 의미는 ‘파괴력은 우수한데…. 부끄러운 가슴’이란 뜻이다. 발키지어 관점에서는 굴욕적인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무일이 ‘퐁퐁’이란 애칭을 붙이면서 이게 180도 달라졌다.
해석하면 ‘가슴 또 가슴!’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를 도와줬으면 하는 일이 있는데. 퐁퐁.”
“...복종하라고?”
“부탁일까.”
“그게 그 말이잖아.”
괴수에게는 전부 아니면 전무, 무시 아니면 절멸. 어중간한 결정이란 용납되지 않는다. 똑 부러지게 흑백을 가른다.
계약자에 대해서는 조금 덜 엄격한 것 같지만, 계약자도 아닌 발키지어 관점에서 엘퍼러는 남남이었다.
현재까지는 말이다.
‘자칭 하렘의 왕. 어떻게든 해보라고.’
‘......’
쉬임프에게 당한 상처를 치유한 이후부터 잠잠해진 찰거머리는 반응이 없었다. 기껏 흡수한 ‘여성의 피’를 소모하면서 힘이 많이 줄어든 모양이다.
그렇다면 키도….
거기까지 생각하고 싶지 않은 무일이었다.
상념을 털어내고 발키지어를 지그시 쳐다봤다.
“세리. 밧줄을 풀어줘.”
“네. 용사님.”
엘퍼러에게 빠져든 에쏘드, 아쿠버스, 세이랑, 쉬임프. 공통점은 ‘여성형’ 괴수라는 점 외에도 태도가 비슷하다.
이성을 향한 열애(熱愛)가 아닌 왕에 대한 ‘경애(敬愛)’.
아쿠버스와 세이랑은 짝짓기(!)에도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지만, 인간처럼 복잡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지 않은 순수한 번식이다.
에쏘드와 쉬임프의 경우는 공경이다.
냉정하게 따져서, 에쏘드는 그가 가장 뛰어난 용사라서 따른다. 그리고 쉬임프는 순수한 힘으로 자신을 항복시킨 왕을 모시기로 한 것이다.
발키지어는 어떨까?
공경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다.
‘내 특징 때문이겠지.’
아까도 ‘퐁퐁’은 말했다.
가슴 없는 주제에 어쩌고저쩌고.
무일을 남자가 아닌 여자로 착각 중이란 뜻이다. 남자에게 출렁거리는 젖가슴을 바란다면 정말 심각한 성벽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이 오해만 해결하면 된다.
엘퍼러의 [업보]는 그만큼 독보적이다.
이미 8종 밑으로는 식후 간식거리로 전락한 지 꽤 됐다.
여전히 8종은 쉽지 않고, 쉬임프 같은 난적이 남아있긴 하지만, 애초에 ‘왕’은 전사(戰士)가 아니다.
왕으로 이만한 전적을 가진 ‘9종 괴수’는 단언컨대 없다.
일본의 오니오프가 도쿄 중앙에 처박혀서 잠만 자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싸움은 추종자 선에서 해결된다.
“눈 똑바로 뜨고 봐라. 퐁퐁.”
평양에서 ‘메이’가 가출을 결심한 계기도 여기에 있다.
남자라는 증거를 보여주면 된다.
최은비의 기억을 훑었고, 본인 입으로 ‘아저씨’라고 말해놓고도 믿지 않는 7종 괴수에게 비주얼로 가르쳐주면 그만이다.
“어…? 어라…?!”
“관전시간 끝. 세리는 너무 노골적이다?”
“용사님! 언제 봐도 멋있으세요!”
흑진주 같은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용사의 정령. 그녀는 그냥 ‘용사의 몸’이라서 멋지다는 단순한 심미안의 소유자다.
무일은 한국인 평균…. 아래다.
성장이 멈춘 육체처럼 아직 더 커질 여지가 남았다고 굳게 믿지만, 거기까지 고려하더라도 평균에는 못 미칠 것 같다.
그런 남자만의 사정을 마음속 깊이 묻어두고.
발키지어의 반응을 지켜봤다.
“아아! 왕을 몰라뵌 저를 용서해줘! 하찮은 빨래판이라서 그랬어!”
“그 빨래판 타령은 그만 좀….”
“생명의 은인께 제 가슴을 바칠게. 보잘것없지만 받아줘.”
바짝 엎드려서 비장감 없이 쫑알대는 여자아이.
반말과 존댓말이 이상하게 뒤섞인 대사는 최은비의 영향일까. 오빠와 소꿉놀이 중인 유치원생을 떠올리게 한다.
아니.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당장 필요로 했던 7종 괴수가 제 발로 들어왔다는 게 중요하다.
‘너무 쉬운 거 아니야?’
무일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쉬임프는 ‘에쏘드 계약자’를 오판해서 아군을 공격했다가 패배했고, 왕의 자비로 목숨을 건졌다. 인상 깊은 인연이다.
발키지어도 말할 것 없다. 본인 입으로 ‘생명의 은인’ 운운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보다 더한 인연이 어디 있겠는가.
따져보면 세이랑도 그랬다.
조개 거인, 변강쉘에게 쫓기던 인어공주들을 무일이 의도치 않게 구해줬다.
“퐁퐁. 잘 부탁해.”
“네. 고마워.”
하지만 지금의 발키지어는 정말 골골거리는 수준이라서 정말 도움이 안 된다. 어떻게든 예전 힘을 회복하는 게 급선무였다.
회복하려면?
먹는 게 역시 최고다. 음식물을 섭취해서 육체로 흡수하는 것이다.
발키지어가 좋아하는 음식은 이미 정평이 나 있다. 이게 아니라고 한다면 더 이상했을지도 모른다.
우유(牛乳).
요리 재료 겸 최은비의 성장을 돕기 위해 냉장고에 저장해준 우유가 좀 됐지만, 발키지어가 원하는 양에는 한참 못 미쳤다.
그렇다고 직접 구하라고 할 수도 없었다.
펠-쉐어퐁은 현재 발키지어의 최대 무기인 ‘날개’를 구현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총총걸음으로 초원을 뛰어다니면서 젖소를 찾아야 하는데….
가망이 없다.
그전에 하위괴수에게 잡혀먹히지 않을까. 어쩌면 늑대도 못 이기고 물려 죽을지 모른다.
어쩔 수 없이….
“오랜만인데. 착유기(搾乳機)를 직접 메는 건.”
“저는 처음이에요, 용사님!”
“진짜 편하네….”
무일의 뒤편에는 ‘여성 학대’라고 해도 할 말 없는 거대한 물탱크를 가방처럼 멘 한세리와 퐁퐁이 따라오고 있었다.
지나치게 평화로웠다.
이 지구 상에 괴수가 없다고 해도 믿을 만큼 초원, 숲, 들판에는 ‘붉은색 피’가 흐르는 동물밖에 없었다.
전부 줄행랑을 친 것이다.
그 카테고리 안에는 고위괴수고 뭐고 없었다. 엘퍼러의 [업보]를 보고는 망설임 없이 ‘도망’을 선택했다.
그냥 강한 거라면 자존심을 앞세워 덤빌 생각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왕’이라면 자존심 세울 필요가 없다. 왕에게 등을 보인 건 수치나 굴욕이 아닌 까닭이다.
괴수의 논리였다.
“음~매~!”
“쪽쪽.”
염소의 뒷발에 얻어맞기까지 한 한심한 발키지어는 젖을 빨았다.
네 발을 꽁꽁 묶인 염소가 애처롭게 울었다.
근처에서 용사와 정령이 다른 염소를 붙잡고 열심히 착유기를 가동 중이었다. 물론, 아주 평화롭진 않았다.
괴수가 조용하니 동물이 까분다.
“깨갱!”
“컹.”
하지만 그건 잠깐이었다.
들개와 늑대의 움직임이 둔해지는가 싶더니 바짝 말라버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끝내 삐쩍 마른 가죽과 뼈만 남았다.
무슨 일일까?
“식사 중에 방해하지 마.”
귀찮다는 듯이 중얼거린 소녀는 입술에 묻은 새하얀 우유를 핥더니 다시 염소 젖을 물고 식사에 열중했다.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짠 발키지어 등에 돋아난 새하얀 날개.
그 힘이었다.
무일의 눈에는 닭털로밖에 안 보이는 그것들이 사방으로 쏘아져 나간 결과였다. 발키지어를 ‘7종’으로 올려놓은 악명 높은 기술.
『수분흡수』
깃털이 주위의 수분을 스펀지처럼 흡수한다.
아직은 날개가 작아서 그 범위도 매우 축소되어 있지만, 이전 힘을 되찾는다면 옹달샘쯤은 순식간에 말라버릴 것이다.
인체의 70%가 물로 되어있는 인간은 말할 것도 없다. 발키지어의 깃털이 근처에만 떨어져도 순식간에 미라로 변해버린다.
하지만 그게 한계다.
몸집이 큰 괴수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문팽이처럼 덩치가 무지막지하면 수분이 좀 빨려도 피해라고 할 게 전혀 없으며, 화강암 덩어리나 다름없는 웨일풍이라면 전혀 피해가 없다.
‘대신, 소형에게는 치명적이지.’
특히나 해양생물인 쉬임프는 물을 구할 수 없는 육지에서 발키지어를 만났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했을 것이다.
이것이 상성과 환경.
무시할 수 없다.
발키지어의 다른 능력 또한 날개의 깃털에서 나온다.
아니, 연계기라고 보는 편이 나을까?
수분을 최고치까지 흡수한 깃털은 고밀도로 압축한 수분을 한꺼번에 해방함으로써 강력한 수압폭탄이 된다.
발키지어가 고산지대에서 사는 이유이기도 하다.
공기 중에 퍼진 안개와 구름 등에서 빠르게 수분을 공급받을 수 있는 까닭이다.
나머지 능력은 뭐….
비행형 괴수에게 흔히 있는 것들이다.
중력과 공기저항을 무시한 비행.
약점이라면 역시 ‘여성형’이기에 갖는 연약한 본체일 것이다.
“좀 큰 것 같네.”
“왕께 도움이 되기에는 많이 모자라.”
저 말투는 어떻게 안 될까.
지금은 소녀라서 괜찮지만, 크면 건방지게 들릴 것 같다.
펠-쉐어퐁은 섭취한 우유를 100% 흡수하는지 빠르게 몸을 키우고 있었다.
소녀가 숙녀로 변하는 과정을 비디오로 담아서 10,000배 빠르기로 재생해도 이보다는 느릴 것 같다.
밋밋했던 몸매에 뚜렷한 굴곡이 생겼다.
앳된 얼굴은 색기가 좔좔 흘렀고 아래는 그 이상이었다. 그리고 하루 내내 먹기만 한 그녀는 이전 모습을 회복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풍요롭네.’
여섯 쌍둥이를 낳아도 굶길 일 없을 것 같다. 유방 크기와 모유 용량은 거의 무관하다고 어디서 들은 것 같지만….
아무튼, 다산(多産)의 여신이 눈앞에 있었다.
그 압도적인 질량을 흐뭇하게 내려다본 발키지어, 펠-쉐어퐁이 선언했다.
“두고 봐! 더는 빨래판 아니야!”
그리고 또 초전박살 났다.
없는 죄목도 그럴싸하게 갖다 붙이는 두 천재에게.
이번에는 ‘휴대용 식용유’란 식으로 온갖 멸시와 야유를 들었다. 빨래판 때보다 더 심했던 것 같다.
애도….
< [34화-4] 새우와 함께 춤을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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