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142화 (142/287)

< [34화-3] 새우와 함께 춤을 >

아주 제멋대로고만!

싸움을 말리긴커녕 부추기거나 모른 척하는 패턴이 계약자랑 판박이다. 저런데도 따르는 추종자가 많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투덜거린 무일이었으나 움직임은 신속했다.

욕조에 찬물, 더운물 가리지 않고 콸콸 틀었다. 그 후에 여전히 알몸인 쉬임프를 퐁당 빠트렸다.

얼굴까지 물속에 묻은 그녀는 입까지 벌리고 쑥 들이켰다.

과연, 괴수의 재생력은 놀라웠다. 당장 숨이 넘어갈 것처럼 골골거리던 얼굴에 평온이 돌아왔다.

그걸로 다가 아니었다.

스륵, 스륵, 스륵.

무장해제 했던 껍질들이 새롭게 형성되며 쉬임프를 감쌌다.

붉은색 비닐로 코팅한 것 같다.

처음 만났던 그대로의 모습. 하지만 그녀의 변화는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얼굴과 팔다리의 껍질이 스멀스멀 몸통 쪽으로 위치를 옮기기 시작했다.

얇은 껍질이 겹쳐지며 점점 짙은 붉은색으로 변했다.

“...의외로 범용성이 좋네.”

“......?”

욕조에서 일어난 쉬임프는, 가슴부터 아랫배까지 일체형인 원피스 수영복 차림의 ‘해수욕장 여고생’으로 탈바꿈했다!

다만, 여아용 수영복에 들어가는 프릴처럼 덕지덕지 달린 지느러미가 좀 난센스였다.

귀엽다기보다는 안경이 어울리는 모범생 같은 차분한 미모.

하지만 정열적인 붉은색 머릿결과 수영복이 그 인상을 뒤집었다. 겉보기 18살 언저리 소녀를 단숨에 ‘남자를 아는 여자’까지 끌어올렸다.

전체적인 평을 해보자면?

너무 일찍 조숙해진 것 같아서 안타까운 외견이다.

‘물에서 싸웠으면 진짜 발렸겠는데?’

간신히 이겼는데 그걸 회복하는 속도가 경이롭다. 고대(古代)처럼 수상도시(水上都市)가 있었다면 절대로 지켜내지 못했을 것이다.

유리한 고지에서 힘겹게 따낸 승리.

프로사냥꾼답게 이기면 그만이란 생각은 쭉 하고 있지만,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겉보기에는 ‘1대1’ 결투.

하지만 따져보면 ‘4대1’ 싸움이었다.

무일은 장비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괴수다. 에쏘드, 뱀페스트, 가더발트. 이렇게 셋이 더해진 넷이서 협공한 셈이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여겼다.

“넌…. 정말 강하구나.”

순수하게 인정했다.

강하면 어떻고 약하면 또 어떠하리. 결과만 좋게 끝나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무일은 생각했다.

고개를 갸웃한 쉬임프는 욕조 수면에 발끝을 살짝 담갔다. 그러자 신기한 현상이 벌어졌다.

미세한 파동이 퍼지면서 고운 미성이 은은히 떨리는 노랫말처럼 낮게 공기 중으로 울렸다.

다만,

“어째서 소녀를, 용서하시옵니까? 아저씨.”

“...아저씨? 아!”

이 집에서 엘퍼러를 ‘아저씨’라고 부르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다.

계약자가 아닌 유일한 여성이기도 했다.

쉬임프는 탈수증으로 빌빌거리면서 최은비의 기억을 훑어본 모양이다. 하지만 이 어린 소녀가 마음에 들진 않았던 것 같다.

어떻게 그걸 아느냐?

계약하게 되면 본인이 원치 않더라도 계약자는 깨닫게 된다.

물론, 최은비가 말하지 않고 감췄을 가능성도 있지만, 프로사냥꾼의 [예측]이 그건 아니라고 판단했다.

아저씨에게 도움이 되는 뛰어난 계약자가 되겠다고 노래하는 아이다.

정말로 쉬임프와 계약됐다면 벌써 자랑했을 것이다.

“제 이름은, 플로티날 아브롤라.”

“어…. 플로라?”

“뜻대로, 하시옵소서. 아저씨.”

“그 아저씨는 좀 아니다! 정말 아니야! 다른 걸로 해줘!”

선지혜에게 ‘오빠’라고 불리는 부조리한 악몽만큼이나 정신이 피폐해질 것 같다.

간신히 설득한 결과가 ‘폐하’였다.

아쿠버스는 무일을 부르는 호칭이 날마다 바뀔 만큼 건성인 편이다. 그런데 쉬임프는 딱딱하게 ‘왕’이란 신분을 중요시했다.

문팽이도 그랬지만, 자신을 쓰러트린 자의 신분을 대단히 신경 쓰는 것 같았다.

서열이라고 할까. 싸구려 병사에게 항복할 바에는 죽음을 택하겠다는 자존심하고 다를 게 없었다.

아무튼, 호칭 문제는 그렇게 일단락됐다.

“폐하를 공격한, 이유는 착각이, 있었사옵니다.”

“착각?”

“그렇사옵니다.”

괴수는 사람을 구별할 줄 모른다. 그건 옷을 입어도 마찬가지다.

한세리도 옷차림은 ‘한무일’의 취향을 고려할 뿐, 어떤 옷이든 똑같다는 주의다. 아쿠버스는 아예 옷을 안 입는다.

용신이 야만적이라서?

그게 아니라 옷의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이다.

인간이 느끼는 수치심을 모르고, 더위와 추위에 대해서는 거의 완전 내성이다. 생식기와 유방은 역으로 자랑하려는 경향마저 있다.

“쫓던 누군가와 나를 착각했다고?”

“예.”

한라산이 무너지고 원주민이 튀어나왔다고 한다.

총 셋이었는데, 그중 하나가 ‘에쏘드’를 보유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싸움이 붙었다.

어째서 싸웠느냐는 왕의 물음에 쉬임프는 머리 위로 물음표를 그렸다.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한 일을 묻는 저의를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쉬임프의 압도적인 우세.

하지만 ‘개인전’에 특화된 그녀는 결정적인 한 방을 먹일 수 없었다. 특수능력이 없는 탓에 서로 상호보완하며 도주하는 셋을 쫓기란 매우 난해했다.

그래도 ‘학습’을 통해서 점차 승리를 점쳤을 때!

방해꾼이 나타났다.

“그게 발키지어?”

“폐하께서 보호하신, 멍청한 갈매기를, 뜻한다면 맞사옵니다.”

발키지어는 가슴이 없거나 작은 숙녀를 싫어한다.

그 범주에 ‘여성형 괴수’도 포함됐던 모양이다.

무일은 기억을 되감았다.

싸울 당시의 쉬임프는 풍만한 가슴의 소유자였다. 반투명한 붉은색 갑옷으로 덮여있어서 격한 율동은 없었지만, 절대로 작지 않았다.

그리고 좀 더 필름을 재생했다.

패배를 인정하고 항복한 쉬임프가 무장해제 하던 순간이다.

“...가짜 가슴?”

세상에! 괴수가 눈속임을 쓴다니!

질문을 받은 쉬임프의 눈빛은 담담했다.

하지만 소리를 내기 위해 담근 다리가 살짝 떨렸다. 그건, 당황해서 입술을 떨며 횡설수설하는 모습하고 놀랍도록 겹쳐 보였다.

마침내 쉬임프가 답했다.

“...폐하. 이건, 기만책이옵니다.”

엘퍼러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여기서 더 캐물으면 ‘폭군 콤비’만 좋아할 2차전이 벌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발키지어가 덤빈 이유를 알았으니 됐다.

“그래서 거의 다 죽여놨는데, 발키지어가 최후의 발악처럼 하늘 높이 도망쳤다는 거지?”

“예, 폐하.”

“그래서 추적하던 도중에 ‘에쏘드’를 소지한 내가 가로막았고, 제주도에서 도망친 원주민으로 착각했다. 맞아?”

“맞사옵니다.”

제주도에 용사가 있었을 줄이야!

들어보니 그 에쏘드 계약자를 도운 나머지 두 사람도 범상치 않은 인물인 것 같다.

8종 괴수 쉬임프를 따돌릴 정도니 평범한 파티일 리 없다.

‘나보다 더 강할지도.’

무일처럼 가더발트와 뱀페스트가 섞인 짬뽕이 아니라 순수한 ‘에쏘드 계약자’일 것이다. 그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다.

제주도 원주민이 MID 기술로 만들어진 [혼돈]을 복용했을 리 없다. 애초에 원주민이 있다는 것부터가 놀랍다.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지?

괴수의 강함을 잘 알고, 특히나 눈앞의 쉬임프는 거의 천적 수준이다. 그런데도 에쏘드 딸랑 한 자루로 버틴 인간에게 경이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당연히 [예감] 같은 MID 시술도 못 받았으리라.

그런데도 괴수와 싸울 수 있는 인간이 존재했다. 그것도 고위괴수의 정점에 있는 8종이랑 싸울 정도다.

전투법이 전혀 상상 가질 않았다.

쉬임프를 상대로는 그냥 튼튼한 철검이나 다름없는 에쏘드로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

“진짜 천재잖아.”

경쟁심보다는 반가움이 앞섰다.

한라산에 틀어박혀서 신선놀음이나 하고 있던 점은 대단히 유감스럽게 생각하지만, 이건 제주도 원주민들의 존재조차 몰랐던 관리원들의 태만이다.

무조건 동료로 끌어들여야 한다.

물심양면으로 도와줬음에도 테러리스트와 사이코패스가 양산하는 강대국들에 질려있던 그에게는 정말 반가운 희소식이었다.

가능하다면 가르침도 청할 생각이다.

이제 인간으로서 더는 올라갈 수 없다고 은연중에 선을 그었던 무일은, 자신의 안이함과 오만함을 반성했다.

역시, 세상을 넓었다!

(지혜!)

(왜?)

(제주도에 에쏘드 계약자가 살고 있었어!)

(그래? 고인에게 명복을.)

선배가 또 여자를 주워오는 바람에 기분이 가라앉아있던 선지혜의 말투는 쌀쌀맞았다.

하지만 어째선지 기뻐하는 ‘내 남자’의 마음에 찬물을 끼얹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이미 포기했던 부분이다.

‘어차피 괴수잖아?’

질투하면 지는 거다.

게다가 미소녀를 지배한다고 선언한 ‘하렘의 왕’ 밑으로 미소녀들이 모이는 건 당연한 현상이다. 어째서 미소녀로 차별을 두는지는 물을 필요도 없다.

무일의 취미를 보면 답이 나온다.

여기까지만 보면 한심하지만, 엘퍼러가 끌어들인 ‘미소녀’들은 큰 전력이 된다. 그야말로 9종이라 불리기에 합당한 능력이다.

그걸 나쁘다고 생각하면 ‘나쁜 여자’다.

...라고 선지혜는 계산기 두드리듯 빠르게 결론을 냈다.

그 와중에도 착해빠진 용사님은 그녀에게 설득 비슷한 말을 하고 있었다.

(지혜. 도와줄 거지?)

(응.)

(제주도의 위성사진들을 전부 봐야겠어.)

(기다려.)

결국은 인류를 위한 공적인 문제로 건 통신이었다. 선지혜는 그게 좀 섭섭했지만, 어차피 귀찮은 공무는 자문단이 대신해줄 것이다.

그녀는 결과만 보고하고 칭찬받으면 그만이다.

부탁을 마친 무일은 쉬임프 ‘플로티날 아브롤라’에게 쉴 방을 마련해줬다. 하지만 본인은 바다가 더 편하다면서 훌쩍 떠나버렸다.

부르는 방법?

바닷가로 오면 폐하를 영접하겠다는 ‘플로라’였다.

아닐 때도 늘 멀리서 지켜보겠다면서.

“...뭔가 멋진 여전사네. 가짜 가슴이 좀 깼지만.”

한 건 해결했다는 개운한 표정으로 플로라를 보낸 무일은 쉬지 않고 곧바로 다음 일로 넘어갔다.

든든한 아군이 생긴 건 기쁘지만, 그렇다고 축하파티를 여는 것도 우습다. 애초에 문팽이 밑에 있던 추종자 아니던가.

명령체계에서 차이가 있겠지만, 전력 면에서는 달라진 게 없다.

무려 8종 괴수를 직원채용 수준으로 넘겨버리는 엘퍼러.

난폭해도 좋으니 6종 수호자 하나만 있어줬으면 좋겠다고 기도하는 개발도상국 입장에서는 그저 별나라 얘기일 것이다.

강대국이라고 해도 별로 다르지 않다.

노블레스를 반죽해서 어떻게든 ‘맛있는 빵’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바동거리는 그들에게 엘퍼러는 ‘반칙의 제왕’이었다.

고위괴수를 쇼핑하듯 주워담는다!

국력을 비교하는 강대국 지도자가 있다면 밤마다 악몽에 시달릴 것이다.

“이거 풀어라! 아저씨!”

“.....”

최은비의 기억을 훑은 괴수가 여기 또 있었다.

초등학생보다 더 어린 계집아이 모습을 한 발키지어는 머리만 내놓은 번데기처럼 밧줄에 꽁꽁 묶여있었다.

한세리가 만든 밧줄을 7종 괴수의 괴력으로도 끊을 수 없는 모양이다. 아니면 약해져서 그럴 힘이 없던가.

지금은 그냥 ‘건방진 여자애’였다.

부산을 담당 중인 7종 계약자 고은별의 발키지어 ‘벨-쏘세팅’의 비현실적인 신체비율을 기대했던 무일로서는 아주 유감스러웠다.

그건 그거고! 지금은 공무 중이다.

발키지어가 알아서 날아들어 왔으니 정말 행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걸 풀고 죽음으로 사죄해라! 아저씨! 아야!”

“꼬맹이가 말버릇이 없네.”

“가슴도 없는 주제에 머리 때리지 마! 아야! 또?!”

힘을 잃었어도 기세는 살아있었다.

무고한 아녀자(兒女子)에게는 절대로 폭력을 가하지 않는다는 주의지만, 눈앞에 꼬맹이는 절대로 무고하지 않으니 괜찮다.

말을 할 줄 아는 괴수는 매우 드문데….

엘퍼러의 특성 때문인지 놀라울 정도로 자주 꼬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은인에게 말버릇이 그게 뭐냐.”

“내가, 가슴도 없는 여자에게 고맙다고 말할 것 같아? 이렇게 말을 섞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아얏! 그만 때려!”

정상적인 대화가 되려면 좀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얼마나 걸릴지는 미지수지만.

그 와중에, 시끄러운 여자애 소리를 듣고 짜증이 확 치밀은 괴수가 있었다. 이 저택의 누구보다도 우월한 상체의 소유자인 아쿠버스, 산드라미아 레미.

그녀는 발키지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빠끔. 사내아이가 입만 살았구나.”

“너무해! 나도 여자야!”

“빠끔. 네가 여자면 나는 여신이노라.”

창밖에서 ‘여신님! 어디 가셨습니까?’라는 외침이 들린다.

병아리도 아니고...

정비과 천재들의 타이밍은 언제나 기가 막힌 것 같다.

으스대는 얼굴로 ‘여자 맞지?’라고 확인하는 발키지어를 보며, 고운 눈썹을 치켜뜬 라미아가 통신을 연결했다.

(여신님! 지금-.)

(빠끔. 내가 대화 중에 끼어들지 말라고 오늘만 8번 얘기했노라.)

(죄송합니다! 그런데 어디-.)

(빠끔. 하등생물이라서 고질적인 학습장애가 있다는 건 진절머리나게 이해했노라. 하지만 노력하는 척이라도 해야 할 것 아닌가.)

발성기로는 말투까지 구현할 수 없다.

하지만 라미아는 진심으로 유감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조금.

감정의 98%는 짜증이 확실했다!

(저희는 늘 진지합니다!)

(...빠끔. 빈대떡이랑 대화 중이니 조용히 해라.)

< [34화-3] 새우와 함께 춤을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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