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141화 (141/287)

< [34화-2] 새우와 함께 춤을 >

착.

한 걸음.

그뿐이지만 기세는 완전히 달라졌다.

죽음은 처음부터 용납 안 됐고, 여기에 절대로 질 수 없다는 의지가 얹어진다. 맹렬하게 울리는 [예감]이 모든 걸 꿰뚫어본다.

그뿐? 아니다.

늘 [반격]밖에 할 수 없어서 불필요했던 기술들을 꾸준히 연마했다. 아직 어설프지만, 가더발트를 얻은 이후로 쉬지 않고 익혔다.

그중 하나가 [암시]다.

상대의 움직임을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하는 기술이다.

예전에 시링 팽의 도전을 받아들였을 때, 그리고 평양에서 페이 링하고 싸우던 중에도 사용했다.

당시에는 기술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말장난으로 ‘도발’하는 수준이었다.

『다음 공격은 이거지?』

...라는 식으로 상대의 선택지를 줄였다.

본인들은 자주적인 판단을 내렸다고 생각했겠지만, 의도된 명령어에 반응하여 꼭두각시처럼 움직인 것뿐이다.

아무리 [예측]과 [예감]이 뛰어나도 미래를 보는 건 아닌 까닭이다.

격렬하게 움직이는 여인의 1mm 두께의 속옷을 생채기 하나 없이 벗겨버릴 정도로 농락하려면 미세한 오차조차 없어야 한다.

사소한 변덕으로 미래가 순간적으로 바뀌었다면 ‘카르세리안 레이소’에 베였을 것이다.

그런 변수를 지우는 기술이 [암시]다.

상대가 너무 약해서 초보적인 실력으로도 통했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않다.

‘...[암시]로 유도했음에도 이 정도인가!’

이건 텔레파시나 초능력 같은 게 아니다.

상대의 심리를 읽고, 자신의 언행을 보여주며 ‘내 빈틈이 보이지? 어쩔 거야?’ 같은 식으로 선택지를 줄이는 것이다.

무일은 그렇게 쉬임프의 움직임을 제한시켰다.

그럼에도 숨이 탁 막혔다.

쉬임프의 쌍검에 몸이 토막 나는 미래가 57가지나 됐다.

퍼엉!

대기가 비명을 지르며 갈라진다.

상체를 낮게 숙이고 쌍검의 날을 세워 공기저항을 줄인 쉬임프. 정말 미친 속도로 무일과 거리를 좁혔다.

다리의 갑주를 해제한 건 8종 괴수의 오만이 아니었다.

걸리적거리는 껍질에서 해방된 두 다리는 이전보다 더 빠르고 유연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그만큼 순발력이 급상승했다.

눈으로 인식할 수 없는 속도다.

마법으로 공간이동 했다고 해도 믿을 만큼 어처구니없는 빠르기다. 하기야 ‘소형’의 특기가 회피니 빠른 건 당연할 것이다.

문제는 그게 8종이니 숨 돌릴 틈도 안 줬다.

팡! 팡! 파앙!

검과 검이 충돌하지만, 공기 찢는 소리만 들렸다.

그건 쉬임프의 쌍검이 원래는 갑옷 역할을 하던 껍질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에쏘드의 절삭력에 맞대응하는 게 아니라 딱딱한 고무처럼 흡수한다.

하지만 그래도 에쏘드다.

무엇이든 베는 ‘용사의 검’이다.

완벽하게 막지 못하고 쌍검에 흠집이 생긴다. 문제라면 기껏 박은 흠집이 쉬임프의 재생력에 못 미친다는 점이다.

피해가 먼지처럼 사라진다.

“젠장!”

오랫동안 쓰지 않았던 욕설이 무일의 입에서 절로 튀어나왔다.

세계에서 최강이라고 일컬어지는 프로사냥꾼은 기필코 죽이겠다는 ‘일념’ 빼고는 정말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는 중이다.

그런데도 우위는커녕 조금씩 밀리고 있다.

‘이게 바로 상성이란 건가!’

저 얄미울 정도로 빠른 다리를 베자니 순간적으로 상체가 무방비상태에 놓인다. 그렇다고 다른 부위를 공격하자니 이게 또 만만치 않다.

완벽한 수직으로 베거나 찌르지 않으면 흠집에서 그친다. 그리고 쉬임프의 [예지]는 ‘완벽한 공격’을 못하게 차단한다.

서로 한 방씩 주고받으면?

쉬임프는 생체기로 그치겠지만, 무일은 높은 확률로 치명상 내지는 사망이다.

정말 불공평한 대결이다.

에쏘드가 안 먹힌다는 것만으로도 형세가 대단히 불리하다.

“용사님! 어서!”

“됐어!”

싱크로율 100% 기념으로 한세리에게 추가된 능력인 ‘그것’은 무일의 마지막 자존심이 아니라 ‘정의’ 때문에 쓸 수 없었다.

쉬임프가 업무방해를 하긴 했지만, 그래도 문팽이의 추종자로서 든든한 아군이다. 반죽음을 낼지언정 정말로 죽여서는 안 된다.

그걸 쓰면 이렇게 고생 안 하고 진짜 ‘한 방’이다.

『필살기(必殺技)』

용사가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오직, 오직 눈앞에 적을 ‘반드시 죽인다.’는 일념 하나로 펼치는 최후의 기술.

문팽이 같은 ‘대형’이라면 모를까.

쉬임프처럼 체구가 작은 ‘소형’은 살아남을 수 없다.

그렇다고 대충하면?

탈진한 무일이 저 쌍검에 먹기 좋게 썰리고 말 것이다.

‘땅에서 이 정도면 바다에서는 아주 발리겠네!’

게다가 장기전은 좋지 않다.

괴수들은 전투분야만 학습속도가 용신처럼 빠르기 때문이다.

8종 괴수 쉬임프도 슬슬 무일의 움직임을 [예지] 없이 읽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무일은 괴수가 아닌 인간이기에 발전 없이 [예감]에만 의존하고 있다.

이론상으로는 언젠가 추월당해서 진다.

그 전에 결판을 내야 한다.

하지만 무슨 수로?

문팽이가 친절하게 밀어버린 갯벌은 변수를 줄 장애물 하나 없는 허허벌판이다. 방패나 무기로 쓸 수 있는 수단이 하나도 없다.

팟!

쉬임프의 쌍검 중 하나가 허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조금만 더 깊었으면 내장을 훑고 갈비뼈가 결딴나면서 전투불능에 빠졌으리라.

이 정도는 뱀페스트의 회복력으로 금방 치유된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갈수록 늘어날 거란 점이다.

그전에 어떻게든 결말을 봐야 한다.

이대로 악순환만 계속된다면 어쩔 수 없이 ‘필살기’를 쓰는 수밖에….

잠깐!

‘단검이 있었지?’

일반적인 괴수에게는 생채기조차 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여성형인 아쿠버스처럼 쉬임프의 속살도 연약한 편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평범한 단검에 엘퍼러의 힘이 더해지면 저 재빠른 다리에 충분한 피해를 줄 수 있다.

문제라면 [예지]다.

여기서 솔직하게 단검을 뽑아들려고 하면 십중팔구 뽑기도 전에 ‘단검’의 존재를 쉬임프에게 들킬 것이다.

그러니 [암시]로 혼란을 줘야 한다.

“우쭐대지 말라고. 쌍검 아가씨.”

“......”

시작은 먹히지도 않을 가벼운 도발.

언어를 알아들었는지도 솔직히 미지수다.

쉬임프는 [예지] 없이 무일의 습관과 전술을 암기하여 자연스럽게 [예지]보다 한 박자 앞서서 대응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무일이 조금씩 밀리기 시작한 원인.

문제점은 알지만, 인간의 뇌는 괴수처럼 유능하지 않다.

생각이 움직임의 속도를 따라가질 못해서 본능대로 싸워야만 하는 사냥꾼, 무일에게 습관이나 패턴을 손바닥 뒤집듯 바꾸라는 건 무리수다.

하지만 딱 한 번이라면….

약간의 피해를 감수한다면 어찌어찌 되지 않을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약 0.2초 정도만 [예감]을 무시하는 것이다.

‘지금!’

정신 줄을 놓았다고 해도 좋을 만큼 멋대로 움직였다. 당연히 최선의 수가 아니라서 피해가 있었다.

이 정도면 피해라고 할 것도 없다.

손아귀가 찢어지며 에쏘드를 놓칠 뻔한 아주 사소한 위험에서 그쳤다.

하지만 무일은 기회를 잡았다.

쉬임프가 [예지]했지만, 이미 늦었다. 이 타고난 여전사가 본 미래는 예쁜 다리에 단검이 박힌 장면일 테니까.

이건 뻔히 눈 뜨고도 못 피한다.

스스로 [예지]보다 앞서서 행동한 탓에 되돌릴 수 없다.

푸욱!

그저 기동력이나 잠깐 뺏을 요령이었다. 그런데 단검은 쉬임프의 오른쪽 허벅지에 손잡이 앞까지 깊숙이 박혔다.

저 정도 깊이면 인대는 물론이고 뼈까지 절단됐을 것이다.

예상 밖의 놀라운 성과였다.

쉬임프는 성대가 있었다면 ‘엄마야!’라고 비명 질렀을 것 같은 식겁한 얼굴을 한 채 흙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오른쪽 다리는 완전히 몸에서 분리되어 멀찍이 날아갔다.

뼈와 힘줄이 잘리고 덜렁거리는 다리로는 8종 괴수의 빠르기와 무거운 껍질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저건 ‘소형’ 괴수에게 치명상이다.

“용사님! 정말 멋지셨어요!”

“...이기고도 당혹스럽네.”

하지만 쉬임프의 집념도 대단했다.

다리 한 짝을 잃은 그녀는 쌍검을 해제해서 다시 껍질로 되돌렸다. 그리고 그 껍질들은 뜯겨나간 오른쪽 허벅지 아래로 뭉쳤다.

의족(義足)이었다.

쉬임프는 쩔뚝쩔뚝 매우 느린 걸음으로 떨어진 다리가 있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어째선지 중환자처럼 힘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다리 하나 잃었을 뿐인데?

하지만 그건 무일의 생각일 뿐이다.

겉보기에는 인간 여성이랑 흡사해도 쉬임프는 ‘물고기’다.

과도한 출혈로 몸 안의 수분을 대량 잃은 그녀는, 정오(正午)에 사막 한복판을 걷는 것처럼 심한 갈증과 현기증 등을 느끼고 있었다.

전투를 재기하기란 불가능하다.

척.

무일이 쉬임프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손에는 그녀의 실체 일부였던 다리의 발목이 쥐어져 있었다. 어떻게 이 가녀린 다리로 그런 속도를 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제삼자가 본다면 썩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둘의 눈이 딱 마주쳤다.

“......”

“...어쩔래?”

쉬임프는 대답 대신 행동으로 보여줬다.

무일에게 악몽을 심어줬던 껍질들이 허물 벗듯 후드득 떨어졌다.

애초부터 반투명해서 여성의 치부를 가리는 용도로는 썩 좋지 못했지만, 이젠 아예 모자이크조차 되지 않은 적나라한 알몸이 됐다.

철퍼덕!

의족마저 떼어낸 쉬임프는 갯벌에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무일을 빤히 올려다본다.

승자의 처분을 기다리는 얼굴로.

상황이 이렇게까지 됐음에도 문팽이는 움직일 기미가 안 보였다.

정말 대단한 방임주의다.

‘게으른 왕 밑에 두기에는 아까운 아가씨야.’

절대로 사심은 없다.

그렇게 생각한 무일은 쉬임프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는 찢겨나가고 없는 그녀의 다리 부위에 들고 있던 허벅지를 가까이 댔다.

붙는 건 순식간이었다.

하지만 체력이 다했는지 모로 엎어지듯 쓰러진 쉬임프는 잠든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젠 정말 수분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그 전조는 땅에 떨어진 껍질에서 먼저 벌어졌다.

바짝 마르며 쫙쫙 균열이 가는가 싶더니 먼지처럼 바스러졌다.

“용사님. 어떻게 할까요?”

“흠. 발키지어를 들고 따라와. 나는 쉬임프를 챙길 테니.”

“네.”

단검마저 챙긴 무일은 짧은 외출을 마치고 귀가했다.

어디서 또 여자(?)를 주워오는 엘퍼러를 목격한 선지혜의 눈에서 불꽃이 튀기는 착시현상마저 보였다.

힐끔거리는 최은비와 페이 링의 눈빛도 썩 호의적이지 않았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얼굴로 그를 맞이해준 여성은 아쿠버스가 유일했다.

“빠끔. 말하자마자 구해온 그대의 행동력에 경의를 표하노라.”

“남들이 들으면 오해할 발언은 삼가줘!”

“빠끔. 실례했노라. 그대에게는 이게 일상인 것을.”

“난봉꾼으로 몰지 말아줘….”

대꾸해봐야 무덤만 더 팔 것 같아서 무일은 포기했다.

그럴 시간에, 점점 상태가 안 좋아지는 쉬임프의 건강부터 챙겨주는 편이 훨씬 낫다고 판단했다.

그 해결책은 의외…. 아니, 당연한 곳에서 나왔다.

판판 소를 통역관으로 이용 중인 문팽이였다.

“...짐의 그늘을 벗어난 신하에게 베푸는 마지막 온정이도다.”

“떠났다고?”

“...미지의 왕이여. 그 아이를 잘 부탁한다. 외로움을 잘 타고 수줍음도 많기에 손이 많이 갈 것이다.”

“완전히 손 놓고 있던 네가 할 충고는 아닌 것 같은데.”

계약자도 아닌 판판 소에게 말한들 제대로 전달될 리 없었다.

어쩌면 중간통역을 맡은 변강쉘이 불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생략했던가.

뭐가 됐든 자기 할 말만 마저 하는 문팽이였다.

“...탈수증이다. 물을 주면 괜찮아질 터.”

“그래? 간단하네.”

“...미지의 왕이여, 그대의 전투는 즐겁게 감상했노라. 무른 마음이 아쉬웠으나 탓하진 않겠다. 짐 또한 그렇게 살아있으니.”

< [34화-2] 새우와 함께 춤을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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