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4] 진보하고 진보한다. >
“빠끔. 거머리가 짜증 나면 밟으면 된다.”
둘의 진중한 대화에 끼어든 건 아쿠버스 ‘산드라미아 레미’였다.
그녀는 매우 규칙적인 생활을 보내고 있다.
특히 식사.
호수의 민물고기를 날로 먹는 법밖에 모르던 그녀는 ‘고추장 회무침’과 ‘매운탕’이란 신세계에 눈을 떴다.
달콤한 과일 종류도 선호하지만, 라미아는 이 자극적인 매운맛을 ‘빠끔. 나의 왕(王) 다음으로 좋아하노라.’라고 고백했다.
그래서 정비과도 덩달아 하루 넷 끼를 ‘매운 요리’로 해결한다.
위가 못 버텨서 쓰러진 패배자(정비과장)도 나왔으나, 여신이 함께 식사해준다는 이유만으로 늘 만석이다.
그 귀하다는 해산물이 목포에서는 발에 치일 만큼 넘쳤다.
“무슨 수로 밟는데?”
“빠끔. 숨어있는 벌레는 천적을 고용하면 간단하노라.”
“...울프남?”
“빠끔. 그 늑대인간들을 찾으려면 러시아까지 가야 하노라. 바로 만난다는 보장도 없고. 그렇다고 실망하긴 이르다. 천적은 또 있노라.”
전설에 따르면 흡혈귀의 천적은 늑대인간이다.
그밖에는, 십자가? 마늘? 태양? 은(銀)?
종교와 미신 등이 뒤범벅된 약점들은 신용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전설’도 믿을 게 못 된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무일의 머리 위로 무수히 많은 괴수 후보가 떠올랐다.
“마늘처럼 생긴 식물형 괴수가 있긴 하네.”
“빠끔. 연맹의 멍청한 하등생물들은 아직 눈치채지 못했지만, 부산의 ‘발키지어’는 분명 뱀페스트의 천적이노라.”
선지혜는 말없이 외도(!)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아낸 후에 자리를 피했다.
그녀도 9종 계약자이기에 시간이 한가한 편이 아닌 까닭이다.
천부적인 몸매의 보유자지만, 사랑하는 남자에게 언제 어느 때라도 극상의 몸을 보여주고 싶다는 욕심이 있다.
그녀는 임시로 만들어둔 수영장으로 향한다. 바다가 바로 코앞이지만, 겨울에 해수욕은 안전하더라도 많이 무리다.
무일은 테라스 난간에 몸을 기댄 채 선지혜를 멀찍이 구경하며 말했다.
“라미아.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
“빠끔. 발키지어가 서울에서 인천으로 쫓겨난 원인은 다수의 인명피해 때문이었노라. 하지만 그 사망자들이 전부 뱀페스트와 관련됐다면 어떤가.”
“설마…!”
“빠끔. 7종 계약자를 위성도시로 뺀다는 결정은 쉽지 않노라. 그런데 순식간에 체결됐다. 매우 이상한 일이노라.”
발키지어가 사람을 많이 죽였다는 악명을 쌓았던 곳은 ‘서울’이다. 그리고 ‘서울’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뱀페스트가 사는 동네다.
미녀가 비정상적으로 풍부한 대도시.
가상현실게임 중인 미녀의 목덜미에 송곳니를 박는 건 무척 손쉽다는 것도 이 도시를 선택한 이유일 것이다.
발키지어는 인천으로 근무지를 옮긴 이후부터는 조용했다.
물론, 초창기에는 좀 죽이긴 했지만, 그 뒤로는 정말 잠잠했다.
“그 죽은 녀석들이 흡혈귀나 노예였단 건가.”
하지만 의문점은 아직 남는다.
어째서 와이츠 ‘미카헬로 싸이어’는 그 사실을 몰랐을까?
“빠끔. 여기까지 추론하려면 레드군 계약자를 노예로 확정 짓고 생각해야 하노라. 이 나라의 7종 계약자 전부를 무력화…. 이런 식의 접근이노라.”
그때였다.
라미아의 목에 착 달라붙은 발성기에서 소리가 났다.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정비과 사람이다.
(여신님! 참치 김치찌개가 다 됐습니다!)
(빠끔. 대화 중에 끼어들지 말라고 42번이나 말해줬다, 하등생물.)
(크으…!)
(네놈들의 버터 같은 뇌는 학습이란 걸 모르는가.)
(죄송합니다! 너무 멍청해서. 아아! 더 매도해주십시오!)
(빠끔. 벌로 의자처럼 깔고 앉겠노라. 너 같은 아메바는 두 발로 설 자격이 없노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천재들은 남들과 다르다고 듣긴 했지만, 정말 그런 모양이다.
비닐처럼 얇은 지느러미로 옷을 대신 중인 아쿠버스.
그녀의 ‘인간 의자’가 된다면 등허리로 절세미녀의 탱탱한 엉덩이 감촉이 생생하게 전달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의자는 좀….
선지혜와 이러쿵저러쿵 다 했더니 썩 끌리지 않았다.
하지만 정비과는 아닌 모양이다.
수신기 너머로 ‘노렸구나, 개자식!’ 같은 동료들의 폭언과 욕설을 들으면서도 ‘내가 바로 승리자다!’라는 외침이 들린다.
눈살을 찌푸린 라미아는 통신을 끊었다.
“빠끔. 식사는 중요하니 짧게 말하겠노라.”
“...한국인이 다 됐네.”
“빠끔. 나를 신(神)으로 착각하는 종자들하고 똑같이 취급하면 대단히 슬프노라. 신은커녕 왕(王)도 못 알아보는 하등생물은 정말 답이 없노라.”
“하, 하, 하….”
“빠끔. 내 계획은 이렇노라.”
아름다운 용신은 잡다한 설명 없이 정말 짧게 말했다.
부산에 있는 ‘발키지어’는 분명 감시받고 있을 테니 놔두고, 새로이 ‘야생 발키지어’를 찾아서 복종시키란 것이 주요 골자였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울까?
발키지어는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천사(天使)다.
정말로 전지전능한 신의 대리자 같은 건 아니고 높은 산이나 구름 위를 노닐며 고고하게 사는 여성형 괴수다.
여자의 젖가슴을 무척 사랑하고 집착하는….
발키지어가 도시를 습격할 때는 ‘꼭!’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일직선 상에 ‘어딘가 아쉬운 미녀’가 있다.
무슨 말이냐면….
『가슴 없는 미녀를 용납하지 않는다.』
계약자가 아니더라도 그런 숙녀(?)가 눈에 띄면 살심(殺心)이 치솟는다는 모양이다. 그 분노하는 정도란, 앞뒤 안 가리고 돌진하는 수준이다.
진짜, 가슴 바보다.
하지만 이 때문에 날벼락 맞은 미녀가 정말 많다. 그렇다고 계약자를 뽑는 기준이 ‘가슴 크면 장땡’인 것도 아니다.
오묘한 기준이 또 있는 모양이다.
아무튼,
널찍한 세상만큼이나 괴수도 다양하다. 그리고 가지각색인 외형처럼 성향도 다르고 때로는 동족끼리도 취향이 크게 엇갈린다.
어째서 이런 웃기는 괴수가 있는 걸까?
아무도 그런 의문은 품지 않는다.
괜히 괴수(怪獸)겠는가.
“한라산에 발키지어가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미녀의 몸을 떡처럼 주무르는 속옷으로 살아가는 가더발트도 그렇지만, 세상에는 정말 독특하고 기상천외한 괴수가 많다.
아니. 괴수가 ‘인간 처녀’에 집착하는 것부터가 이상하게 보인다.
번식과 생존이랑 전혀 무관한 계약자를, ‘자신을 돋보이게 해주는 장신구’쯤으로 여기며 애지중지한다.
심할 경우에는 목숨까지 건다.
인간이 금은보화를 주우러 불구덩이로 뛰어들듯이.
하지만 그 이상하다는 감상은 100살 넘은 고대인들의 관점이고, 현대인들은 상식처럼 생각하고 있다.
괴수는 괴수니까.
“빠끔. 나는 이만 가보겠노라.”
“조언 고마워.”
“...빠끔. 나도 조언 하나만 부탁하노라. 그대도 내 의자나 방석이 된다면 기쁜가.”
“그, 그렇진 않을걸!”
“빠끔. 그런가. 내 상식이 잘못된 줄 알았노라. 역시, 하등생물들의 뇌 구조에 문제가 있다는 내 가설이 맞는 것 같다.”
“......”
떠나가는 라미아의 요염한 뒤태가 사라질 때까지 멍청한 얼굴로 서 있던 무일은 자신의 뺨을 탁 치며 정신을 다잡았다.
이렇게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다.
선지혜와 ‘진짜 꿈인 밤’을 보낸 이후에도 그의 엄격한 생활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역으로 이전보다 더 느슨해지는 걸 경계했다.
에쏘드의 체력보정 덕분에 육체단련과 수면이 불필요해진 카르 4세는, 목포를 하루라도 빨리 활성화될 수 있도록 격려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서두르는 이유 중 하나가,
“은비야. 공부는 잘 돼가니?”
점점 예뻐지던 최은비는 반년 사이에 몰라볼 정도로 토실토실해졌다.
가슴과 엉덩이만.
곧 14살이 되는 소녀의 키로 좀 더 영양분이 갔었으면 했지만, 여성의 2차 성장으로 쏠려서 진전이 없었다.
그게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가만히 바라보기만 해도 흐뭇한 미소가 절로 지어지면서 입꼬리가 좌우로 찢어지게 하는 귀여움을 품고 있다.
그런 최은비가 야무지게 말했다.
“네! 오빠들이 도와준 덕분에요!”
여기서 오빠들이란 정보과 남자들이다.
원래는 그들에게 개인교습을 맡길 생각이었고 본인들도 흔쾌히 수락했다. 하지만 역시,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과 함께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가장 서두르는 건물이 학교.
지금은 가상현실로 구현한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학업과 교우관계를 쌓는다는 점에서는 진짜 학교를 등하교하는 거랑 별 차이 없지만, 체력약화가 문제다.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은 초등학생이 주말 빼고 평균 5시간.
집에서 잠자는 시간 외에도 5시간 이상을 쥐죽은 듯이 누워있다는 뜻이다.
“숙제를 대신해달라고 한 건 아니지?”
“그, 그럴 리가요!”
카르 4세의 [예측]에는 아이의 거짓말이 뻔히 보였다. 딱히 신중히 관찰하지 않더라도 얼굴과 말투에 쓰여있었다.
...애들이니까.
너그럽게 속아 넘어가 줬다.
“운동은 꾸준히 해야 해. 어릴 때 관리를 대충 하면 어른이 된 후에는 체질이 굳어버리면서 평생 고생하거든.”
정말로 평생인 건 아니고 그만큼 고치기 힘들다.
조금만 먹어도 살찌는 체질이 되면 오래오래 스트레스다. 그리고 그런 스트레스는 피부에 또 안 좋다.
즉, 악순환이 반복된다.
아니면 ‘약’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그러면 ‘괴수 계약’은 영영 안녕이다.
“페이 언니랑 매일 정원을 뛰어요.”
“그렇다고 무리하진 말고.”
“뭐에요, 그게.”
“하하! 미안. 어른들은 원래 그래. 시켜놓고 말리지. 흠. 함께 싸우자고 외치면서 가장 먼저 괴수에게 돌격하는 나쁜 버릇이랄까.”
“...조심하세요, 아저씨.”
“그래.”
최은비가 잘 지내는지 확인하는 것도 무일의 일과에 속한다.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후에 밖으로 나왔다.
평소에는, 육중한 기계장비로 옮기려면 한참 걸리는 건축재료나 구조물을 대신 운반해주는 식으로 공사시간 단축에 도움을 줬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일정이 좀 바뀌었다.
‘윤소영 양도 알아봐야 하고….’
그녀에게 각인이 있다면 수호자 레드군의 양해가 반드시 필요하다. 무력으로 누르는 것도 자신 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상상도 못 했던 일.
하지만 그러면 ‘뱀페스트 왕’이 눈치채고 만다.
놈이 어디 있는지 확실시되기 전까지는 조심스럽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그 첫걸음이 ‘천적’을 고용하는 것이다.
【발키지어 / 7종 소형】
분명, 한라산에 살고 있었는데 슈퍼달팽이가 밀어버렸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불분명했다.
백두산에는 없고, 일본 ‘후지 산’에 산다고 들은 기억은 있다. 하지만 괜히 갔다가는 따라온답시고 선지혜가 도쿄까지 밀어버릴 것 같다.
‘역시, 한라산과 함께 실종된 녀석을 찾아야 해.’
못 찾으면 일이 좀 꼬이겠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무일은 새롭게 고친 ‘아메리카 드림워치’로 괴수탐색을 실행했다. 미국에서 ‘100만 볼트에도 끄떡없습니다!’라고 호언장담한 업그레이드판이다.
내구력에 좀 더 신경 썼는지 무거워졌지만, 흡혈 이후로 뱀페스트의 근력 일부 쓸 수 있게 된 엘퍼러에게는 거기서 거기였다.
“용사님! 같이 가요!”
“뭐…. 아직 어떻게 될지 모르니 벌써 기대하진 마.”
첩보위성 탐색에 ‘발키지어’가 걸려야 행동에 착수할 수 있다.
미국의 위성으로는 못 찾았다. 하지만 아직 실망하기에는 이르다. 발키지어가 제주도에 있다면 탐지가 안 되는 게 당연하다.
제주도는 한국의 위성으로만 탐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디 보자….”
일단은 제주도에 없었다. 보금자리가 평평한 갯벌로 변했으니 ‘높은 산’에서만 사는 발키지어가 있기에는 부적합하다.
어쩌면 한라산을 지킨다고 문팽이에게 덤볐다가 장렬하게 납작해진 게 아닐까?
다행히 그건 아닌 모양이다.
한국의 위성은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발키지어를 감시한다. 그리고 한라산이 순식간에 무너지면서 깜짝 놀란 7종 괴수는 허겁지겁 도망쳤다.
그래서 어디로 갔을까?
‘...잠깐. 내 위라고?’
엘퍼러는 위를 올려다봤다.
구름뿐인 맑은 하늘에 이물질이 점처럼 ‘콕!’ 찍혀있었다. 그리고 그 점은 조금씩 북쪽으로, 내륙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용사님!”
“그래, 나도 봤어. 방향이…. 백두산으로 이사 가려는 모양인데? 하지만 이상하군. 갈 거면 진즉 가지 이제야 가는 이유가 뭐람.”
의아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가만 놔둘 생각은 없다.
도시 근처를 지나가다가 ‘평지’라도 본다면 불같이 달려들 것이다.
가슴 없는 게 무슨 죄라고!
아담함도 매력이다. 이쪽 취향인 사람도 있다.
엘퍼러는 정의심을 불태우며 허리에 찬 ‘단검’을 뽑았다. 에쏘드에 적중하면 죽을 수도 있으니 약한 걸로 살살.
투척!
뱀페스트와 가더발트의 힘으로 가속한 ‘단검’이 창공을 갈랐다.
< [33화-4] 진보하고 진보한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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