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138화 (138/287)

< [33화-3] 진보하고 진보한다. >

선지혜가 ‘워(war)’를 3번이나 강조하는 이유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안 들어주면 ‘전쟁’하겠다는 심보다.

전쟁 사유가 참….

하지만 선지혜가 ‘무서워.’라고 한 이유는 짐작된다.

천하무적(天下無敵) 같은 9종 계약자를 핍박할 인간이 세상에 있을지 의문이지만, 그녀의 권세(權勢)는 빠르게 축소 중이었다.

『I ♡ Seoul』

가상현실게임으로 세계 경제와 문화를 주도하는 초대형그룹.

그룹 내에 무형의 재산이 많기에 물리적인 힘은 거의 없지만, 그 영향력은 한국과 별개로 무시 못 할 수준이다.

와이츠가 빠지면서 MID 기술력에 틈새가 생겨 급격히 약해진 시기도 있었지만, 마치 오래전부터 예상했다는 듯이 빠르게 과거의 성세를 회복했다.

이젠 그 너머를 내다보고 있다.

“2시간 이상은 못 기다려.”

“완전히 떠나는 것도 아닌데, 출장도 안 돼?”

“...싫어. 지금은 싫은걸!”

그룹은 선지혜의 손을 빠져나갔다. 곧 이사회가 소집되고 ‘회장’ 지위도 원래 있어야 할 자리인 모친 선유나에게 넘어갈 것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엄마 대역.

마음 같아서는 일본이 아니라 서울로 진격하고 싶은 선지혜였다. 그걸 말리긴커녕 은근히 부추기는 수호자 문팽이의 유혹도 강렬했다.

달팽이 왕은 분명 말했었다.

『서울보다 더 대단한 도시를 내놔!』

목포가 빠르게 변하고 있지만, 문팽이 관점에서는 새 도시를 만드는 것보다 서울을 밀어버리는 편이 쉽고 확실하다.

계약자를 슬프게 한 도마뱀(와이츠)도 마음에 안 들고.

“지혜….”

“안 돼. 못 가.”

선지혜는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무너진 땜처럼 당장 쏟아지려는 눈물을 꾹 참는 모습이 애처로웠다.

그녀에게 남은 거라고는 사랑하는 남자와 튼튼한 자가용(문팽이)뿐이다. 파주시와 개성시 땅문서도 있지만, 그건 정말 하찮은 겉치레다.

무일은 발을 뗄 수 없었다.

이게 연기면 [예감]이 고장 난 것이리라.

‘괴수의 이기심이란….’

와이츠가 선지혜와 함께한 시간도 절대 짧지 않다. 그럼에도 이렇게 헌신짝처럼 버린 이유는 선유나를 되찾았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가장 지혜롭다고 해서 타인을 신경 쓰란 법은 없다. 그리고 비루한 흡혈귀에게 한 방 먹은 이후로 용신은 아무도 믿지 않게 됐다.

그건 도움을 준 ‘한무일’도 예외가 아니다.

공명정대한 와이츠 ‘미카헬로 싸이어’에게 그는 뱀페스트 공작 ‘박민혁’ 이상으로 경계해야 하는 존재일 뿐이다.

그룹 내의 선지혜 세력이 순식간에 박멸한 것도 이런 연유다.

그녀는 명백한 ‘엘퍼러 편’이기 때문이다.

“의심 많은 용 같으니.”

편 가르기를 하고 있다.

본인의 장기인 정치 싸움을 준비하는 것이다.

와이츠의 생각이나 감정은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뱀페스트 각인 탓에 절대복종해야만 하는 선유나를 통해서 ‘하렘의 왕’에게도 간접적으로 시시각각 보고되는 까닭이다.

이건 무일이 명령한 게 아니라 조건반사다.

노예가 주인에게 득이나 해가 될 정보를 보고하는 건 당연한 ‘의무’다.

텔레파시라고 할까.

거리가 먼 만큼 그 내용은 불완전하고 희미하지만, 엘퍼러의 뛰어난 [예감]으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넣었다.

명백한 ‘위기’이기에 막힘없다.

“선배. 안 갈 거지?”

“흠….”

그렇다고 와이츠가 적대적인 건 또 아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공명정대한 용신’이란 건 틀림없기 때문이다.

엘퍼러가 선유나를 지배할 마음을 품지 못하도록 안전장치 혹은 대책, 보험을 마련해두려는 것이다.

그 행동이 아무래도 거슬릴 뿐이다.

상대가 비수를 숨겨둔다면 성인군자라도 꺼림칙하리라.

‘와이츠도 들켰다는 정도는 알고 있을 터.’

뱀페스트에 대한 연구는 예전에 끝났기 때문이다.

노예의 각인을 풀거나 숙주에게서 때어내는 방법 등은 여전히 찾지 못했지만, 노블레스를 통해 ‘노예의 정보공유’는 진즉 알려졌으리라.

그럼에도 와이츠는 당당하다.

보란 듯이 늘 선유나를 동행하며 이것저것 지시한다. 공명정대하다는 칭호에 어울리는 대범함이다.

그냥 신뢰해주지 않는 점은 유감스럽지만.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대처수단과 안전장치를 마련해두는 것 또한 ‘현명한 자’가 취할 태도임은 분명하다.

맹목적인 신뢰는 ‘사랑’과 ‘우정’ 같은 감성이 필요하다.

와이츠와 엘퍼러 사이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다.

“선배는 개성시의 실태를 보고 싶은 거지? 며칠만 기다려. 내가 홈쇼핑에서 ‘모짜리나 바글버글’ 10마리를 주문했어.”

홈쇼핑이라니….

원격조종 감시카메라 벌레는 인터넷 같은 곳에서 팔지 않는다.

원산지 일본에서 직수입했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다.

“그새 또 샀다고?”

“마음 같아서는 1,000마리쯤 사고 싶은데 물량도 없고 관리할 사람도 없는걸. 다행히 나 대신 머리 써줄 애들이 조만간에 올 거야.”

자문단은 와이츠에게 충성하는 천재들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모시는 ‘회장’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오랫동안 칩거한 선유나보다는 선지혜를 지지하는 자들도 꽤 된다. 물론, 와이츠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지만, 상황이 좀 미묘해졌다.

【와이츠 / 8종 대형】

【아쿠버스 / 8종 소형】

똑같이 8종이고 용신이다.

국가공헌도나 현명하기로 따지면 와이츠 ‘미카헬로 싸이어’가 우세하지만, 선지혜는 9종 계약자로서 전망이 밝다.

그래도 어찌 배신할 수 있단 말인가!

폭삭 망해서 합병 날짜만 기다리던 한국이 세계로 다시 비상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모두 와이츠가 있었기 때문이다.

애국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국모(國母) 선유나를 선택하리라.

대체로 나이 지긋한 자문단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런데….

【엘퍼러 / 9종 소형】

이 인간이 또 갈등의 원인이다!

선지혜의 장래가 밝은 수준이라면, 한무일은 수술실 조명처럼 눈을 못 뜰 지경이다. 그녀의 문팽이도 따져보면 그가 도와줬기에 가능했다.

대한민국의 ‘3번째 8종’ 겸 ‘2번째 용신’인 아쿠버스도 엘퍼러 작품.

이쯤 되면 줄을 옮겨 타는 게 맞다. 생각이란 걸 할 줄 아는 인간이라면 고민할 필요가 전혀 없는 선택지다.

문전박대할 염려도 없다.

현재, 목포는 ‘인재’가 많이 아쉬운 상황이기 때문이다.

와이츠가 빠르게 대처하지 않았으면 전부 넘어갔을 것이다.

“...인재 뺏기가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네.”

그래도 와이츠는 신(神)이 아니기에 사람 마음을 완벽히 되돌리는 건 무리였다. 특히나 젊은 여성층이 그랬다.

와이츠가 제시한 ‘권력’보다는 ‘안락한 직장’을 선호했다.

안전한 주거와 최신식 주거.

칼퇴근과 휴식, 휴가 보장!

물론, 남자들처럼 야망이 큰 여자도 더러 있지만, 그럴수록 와이츠보다는 엘퍼러를 선택했다.

왕자님(엘퍼러)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면?

여자라면 누구나 라푼젤, 신데렐라가 된 자신을 무의식적으로 상상한다.

게다가 그런 ‘야무진 꿈’을 꼭 이루지 못하더라도 ‘도마뱀’보다는 ‘미소년’이 상관으로 있는 편이 더 좋은 게 인지상정(人之常情).

마지막으로,

일면식 없는 선유나보다는 선지혜가 아무래도 더 친근하다. 수다로 맺어진 여자들만의 의리라고 할까!

낯가림이라고도 부른다.

“아니면 선배는, 내 이마에 스트레스로 주름이 생겼으면 좋겠어?”

“당연히 아니지!”

“그럼 얘기는 끝난 거지?”

“그게…. 음….”

어째선지 또 설득당하고 말았다.

무일이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은 ‘개성시’에 있는 자신의 ‘빈집’이다. 그리고 현재가 아닌 원래 예정되어 있던 작은 아파트.

뱀페스트 공작, 박민혁이 골라준 집이다.

카르 4세가 평양에서 받은 우승상금을 당시, 특공대장이었던 선지혜와 헌병대장 문장춘이 멋대로 써서 ‘더 좋은 집’으로 바꿔버렸다.

원래 집은 어떻게 됐을까?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수상했다.

‘박민혁이 순수한 의도로 준비하진 않았겠지.’

플라돈이 집을 무너트린 것까지 의도됐다고는 보기 힘들다. 그렇게 따지면 레드군 계약자 윤소영도 의심해야 한다.

...각인이 새겨졌을 가능성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지혜.”

“응.”

“뱀페스트 각인을 기술적으로 탐색하는 게 가능해?”

“아니. MID 기술로도 불가능해. 겉보기에는 평범한 타액이니까. 왜?”

“...윤소영 양.”

“아~!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겠어.”

선지혜는 단번에 무일의 말뜻을 이해했다.

개성시로 시작된 의심은 단숨에 윤소영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그만큼 시기가 공교로웠다.

윤소영의 레드군 공격을 받고 추락한 플라돈이 집을 부쉈다. 그리고 집이 부서지자마자 박민혁이 괜찮은 집을, 그것도 신도시를 소개해줬다.

이건 무엇을 뜻할까?

위화감은 윤소영과 2번째 만났을 때부터 있었다.

“여의도 은행테러사건. 위험하다면 윤소영이 아니라 레드군이 먼저 나섰어야 했어. 붉은 용왕의 등장만으로도 시민들에게 위기를 알리기에는 충분했는데….”

“소녀의 미숙함이라고 생각했지?”

“맞아.”

“선배답지 않게 방심했네.”

“...뱀페스트를 전혀 생각하지 못했으니 나라도 어쩔 도리가 없지. 그리고 윤소영 양은 아직 어린애잖아.”

“호응~.”

환상의 콤비처럼 여겨지는 윤소영과 레드군 사이에 불협화음이 생길 때는 늘 ‘카르 4세’가 끼어있었다.

앞뒤 안 가리고 은행으로 뛰어든 윤소영.

비록 어리다지만, 경험으로 따지면 웬만한 계약자들보다 앞서는 7종 계약자가 어리석은 행동을 보였다.

그게 시민이 아닌 ‘한무일’을 구하기 위해서였다면?

따져보면 첫 만남 당시에도 이 ‘유명한 미소녀’는 ‘비루한 사냥꾼’에게 지나친 호의를 보였었다.

그 뒤에도 쭉.

남의 집에 멋대로 들어와서 자고 있었다.

걱정하며 동해까지 날아왔고, 볼트윙을 쓰러트렸을 때는 병문안도 와줬으며, 레드군을 설득해서 강남구가 아닌 아지트만 불태웠다.

‘첫 단추가 어긋나니 모든 행동이 수상한데?’

은행테러사건이 윤소영과 이어지게 된 직접적인 인연이 됐지만, 그렇게 따지면 당시에 그 자리에는 ‘6종 계약자’ 최은설도 있었다.

그녀도 고맙다는 인사치레를 위해 정비과까지 찾아왔다. 그리고 은혜를 갚겠다며 연락처를 남겼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그게 정상이다.

윤소영의 호의는 좀 지나친 감이 있다.

“맹목적인 호의라….”

바로 눈앞에도 한 명 있다.

갑작스럽진 않았고 선후배 관계가 조금씩 진전된 경우였지만 말이다.

선지혜가 조금 섭섭하다는 말투로 말했다.

“나는 아니야. 찰거머리에게 물린 적 없어. 기억이 지워졌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순 없지만, 나는 왕의 계약자인걸.”

“흠…. 하긴….”

명령으로 기억을 지우더라도 [업보]는 죽을 때까지 남는다.

선지혜에게 ‘노예의 각인’ 같은 하자가 있었다면 문팽이가 선택하지 않았으리라.

그렇다면 레드군은?

늘 윤소영 곁에 용왕이 붙어있는데 비루한 뱀페스트 따위가 접근해서 흡혈한다는 게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

계약 이전에 물렸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랬다면 레드군이 계약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면 왕의 각인은 특별해서 [업보]로도 못 찾는 걸까.

“실험해보면 되잖아.”

“별로 좋은 생각 같지 않은데.”

“노예가 되는 마법이라면, 노예에게 쓰면 문제없지 않을까?”

노예라면 ‘페이 링’을 뜻한다.

하지만 무일은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부정했다.

이건 대단히 민감한 사항이다.

일단 각인이 박히면 그 뒤는 절대복종이다. 명령이 따로 없으면 평범하지만, 주인에 관해서는 반항이나 배신이 조금도 불가능하다.

페이 링을 그런 꼭두각시로 만들고 싶지 않다.

“굳이 실험해볼 필요 없어. 윤소영 양이 수상하다는 건 확실하니.”

“...섭섭해?”

“그보다는 흡혈귀들의 치밀함이 짜증 나네.”

녀석들은 사냥꾼의 [예감] 발동조건을 꿰차고 있다. 이것이 인간사회 틈에 파고든 흡혈귀의 생존방식 아닐까.

또 한 가지, 단언할 수 있는 게 있다.

뱀페스트 왕은 의외로 가까이에 있다는 점이다.

‘그날, 우리 집의 음식쓰레기통이 안 비워져 있다는 사실을 아는 녀석은 많지 않아.’

정말 싫은 일이지만 이젠 어쩔 수 없다.

친구들마저 의심해야 하는 순간이다.

< [33화-3] 진보하고 진보한다.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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