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137화 (137/287)

< [33화-2] 진보하고 진보한다. >

잘못 들은 거겠지?

귀가 잘못됐거나 통신에 잡음이-.

(다 가져갈 정도로 염치없진 않아. 정원에 울타리 두를 정도면 돼. 포장과 운송은 알아서 해갈게.)

가져간다는 발상 자체가 이미 염치없는 짓이다!

마음속으로 외친 위진 창의 이마로 구슬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절체절명의 위기! 4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많이 훼손되긴 했어도 여전히 중국의 국보인 만리장성이다.

그걸 준다는 건 말도 안 되지만 상대가 ‘상식인’이 아니고, 막을 수도 없다는 게 더욱 큰 문제다.

‘어차피 뺏길 바에 협조…. 말이 되는 소리를!’

머릿속에서 아우성쳤다.

문팽이가 베이징에 온다면?

죽고 싶은 심정을 담아 정보과장을 입술을 뗐다.

(선지혜 회장. 그-.)

(야! 선지혜! 제주도 한라산! 이거 어떻게 된 거야! 아! 말해주는 걸 깜빡. 앞에 있길래 밀었지. 그걸 말이라고 하냐! 화산이 폭발했으면 어쩌려고! 어쩌긴~♬ 용암이 굳으면서 제주도가 더 커질걸.)

(......)

일반가정에서 상상할 수 없는 주제의 부부싸움(?)에 질린 위진 창은 ‘기회!’라는 걸 깨닫자마자 망설이지 않고 통화를 끊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무일과 선지혜의 대화는 계속됐다.

다툼보다는 그냥 일상이 이랬다.

칼로 물 베기…. 절단기로 바다 가르기?

“선배 잘못이야. 본처(本妻)가 자리 비우자마자 바람피웠는걸!”

“한라산 밀어버린 게 내 잘못?!”

“응. 다른 집에도 물어봐. 신랑이 딴 여자를 만나고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어떤 신부라도 앞뒤 안 가리고 달려올걸?”

“큭!”

어느새 한라산은 교통체증 수준으로 격하됐다!

이게 정론으로 넘길 문제일까?

하지만 본능대로 살아가는 카르 4세는 말싸움으로 선지혜의 상대가 못 됐다.

게다가 불리해지면 슬픈 눈을 하고 ‘전부 선배를 위해서였는데….’로 밀어붙이니 무조건 항복할 수밖에 없다.

이번에도 그랬다.

“선배. 미안해. 내가 구석구석 핥아줄 테니 용서해줘.”

“죄송합니다. 하던 일을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어째선지 사과하는 역할마저 역전되고 말았다.

그런 두 사람. 용사와 황녀.

귀가 뜯겨나가는 줄 알았던 판판 소는 눈물을 찔끔, 그리고 멀어져가는 둘을 보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매일은 아니지만, 요즘은 늘 저런 식이다.

카르 4세의 저런 모습에서 ‘용사의 풍모’를 찾기란 어려웠다.

그럼에도 ‘한국의 에쏘드’ 한세리는, 그가 이름만 불러줘도 헤벌쭉 웃으며 ‘네! 용사님!’이라고 앙증맞게 대답하며 졸졸 쫓아다니는 게 또 일상이다.

‘용사란 도대체 뭘까?’

전에는 잘 안다고 자부했는데 요즘은 도통 모르겠다.

강하면 장땡?

그건 앞뒤가 뒤집히니 생각할 필요도 없다. 카르 4세는 강해서 용사가 된 게 아니라, 용사였기에 강해진 것이다.

판판 소는 여태까지 ‘인류를 향한 무한한 희생’이 ‘용사의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 증거로, 본인 스스로 그렇기 위해 금욕적인 생활을 해왔잖은가.

사랑하는 연인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꾹 참았다.

“이러면 영웅이랑 무슨 차이지? 영웅호색(英雄好色)이랑.”

판판 소는 머리가 핑글핑글 도는 기분이었다.

조국의 미래가 걸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대형 프로젝트에 참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심장이 두근거렸지만, 그녀는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RPG 게임.

간단히 해석하면 대충 이 정도?

이런 고민은 판판 소가 사냥꾼이 아니라서, 한무일이 대선배로서 수많은 후배(사냥꾼)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를 못 들으면 생긴 혼란이다.

영웅과 용사의 결과가 당장은 같더라도 마음가짐에 차이가 있다.

또한, ‘히어로(hero)’란 단어로 싸잡아 묶는 미국 문화처럼, 영웅과 용사를 이음동의어(異音同義語)로 이해하면서 생긴 착각이다.

영웅이라면?

『소유물을 지킨다!』

똑같이 ‘지구를 지키는 전사’라도 순수하지 못하다.

노력에 대한 대가를 기대하고, 누군가 자신의 노고를 알아주길 바란다.

여자, 권력, 재력, 명예, 능력….

세상의 모든 가치를 독점하려는 영웅은 이기적이고 독선적이다. 그들은 매우 사적인 마음으로 ‘내 소유물’인 ‘세계’를 지키는 것뿐이다.

내 집과 처자식을 지키는 건 당연한 일이잖은가.

영웅은 그저 ‘남보다 강한 인간’이다.

반면, 용사는 다르다.

『남을 위해 일한다.』

그래서 누구나 용사가 될 수 있다.

몸이 불편한 노인은 양로원 간호사보다는 사회봉사단에게 고마워할 것이다. 간호사는 돈을 목적으로 움직이지만, 사회봉사단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노인에게 사회봉사단은 ‘용사’다.

굳이 비교하자면 간호사는 ‘영웅’쯤 된다.

노인을 돕는다는 결과가 같더라도 이건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다.

더 쉽게 말하면?

영웅은 자신의 능력을 공개하지 않는다.

특허(特許)나 땅문서처럼 꽉 쥐고 공익보다 사익을 중시하는 그들은 ‘사업가’라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릴 것이다.

용사는 무료봉사자.

돈도 안 되는 저 짓을 왜 하나 싶은 인간이다.

하지만 그런 비웃음은 ‘내가 안 하는 일을 한다.’는 상대적 박탈감에서 오는 자기방어다.

“선배. 이거 어때?”

“...이걸 일본에 보낸다고? 이 문장을?”

“응.”

“완전 깡패잖아!”

선지혜 회장이 또 무슨 일을 저지르려고 했던 모양이다.

판판 소는 주의 깊게 들었다.

무서운 주모님(변강쉘이 호칭을 강요했다.)의 습격을 받긴 했지만, 평소의 그녀는 ‘깍두기(그 뜻을 알고 충격받았다.)’이기에 괜찮다.

지금부터 새롭게 관찰해서 ‘무협’ 시나리오로 써낼 생각이다.

“당연한 권리인걸.”

“권리는 무슨! 딱 봐도 협박이잖아.”

정치와 외교 쪽은 잘 모르는 무일이 읽어봐도 이건 딱 선전포고였다!

선지혜의 의도를 모르는 건 아니다.

부산을 터로 잡았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텐데, 일본의 요구로 부산이 아닌 목포로 본거지를 옮기면서 일이 많고 복잡해졌다.

왜냐?

대한민국의 요충지는 서울이다.

막말로, 인천과 부산 등의 나머지 위성도시는 사라져도 문제없다.

그만큼 서울에는 많은 ‘인재’와 ‘미녀’가 살고, 한국인들이 섭취하는 거의 모든 식량이 서울에서 만들어진다.

그리고 고위괴수의 침공도 그만큼 많다.

부산이 50년 넘게 ‘6종 계약자’ 하나로 버틸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연유다. 억수로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고위괴수는 ‘대도시’만 공격한다.

물론, 근처에 대도시가 없으면 중소도시를 공격하지만, 정말 힘겹게 사는 개발도상국에서나 벌어지는 일이다.

그럼 뭐가 문제냐?

한무일이 빠지면서 서울은 막대한 공백이 생겼다.

설상가상으로 개성 신도시에도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

“괘씸하잖아. 쟤들이 뭔데 이래라저래라 하는데.”

“그게 본심?”

“아니지! 선배는 날 어떻게 보고.”

어떻게 보긴, 대한민국 최고의 ‘트러블메이커(troublemaker)’지.

서남아시아와 동유럽을 공포로 떨게 하는 이집트 파라오와 쌍벽을 이루지 않을까?

굳이 말해서 일을 키우지 않기로 했다.

“선지혜로 보지.”

“읔! 치사해! 팬티가 젖어버렸잖아.”

“......”

“그러니 일본도 책임을 져야 해. 외국을 놀러 다닐 만큼 한가한, 선배가 ‘유키 짱’이라고 정답게 부르는 계약자를 서울에 파견해줘야 수지타산이 맞는걸.”

아무리 봐도 사심이 듬뿍 묻어난 발언이다.

가장 간단한 방책은 ‘엘퍼러’가 서울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와이츠와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구조가 되기에 갈 수 없다.

쉬운 방법이라면 부산의 모든 사냥꾼과 계약자를 서울로 돌리는 것!

그게 말처럼 쉽다면 말이다.

도시를 완전히 비우려면 문팽이 같은 대처수단이 필요하다.

목포의 신축공사를 총지휘 중인 아쿠버스 ‘산드라미아 레미’를 서울로 보내는 것도 비효율적이다.

일단, 근처에 무일이 없으면 아예 일을 안 한다. 그리고 곁을 떠날 생각도 없다.

왕의 추종자처럼.

‘부산의 모든 무력을 서울로 돌린다….’

수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엘퍼러가 흡혈을 통해 ‘하렘의 왕’이 발산하는 지배력을 키우면 부산 전체를 홀로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추종자를 확보할 수 있다.

이론상으로는 그랬다.

하지만 그러면 ‘하렘의 왕’에게 몸을 빼앗길 위험성은 둘째치고 반영구적으로 부산에 묶이고 만다.

대한민국만 편애할 거면 그래도 상관없지만, 무일은 그럴 생각이 없다. 위험한 나라가 있다면 도우러 갈 것이다. 힘이 없는 것도 아니고.

지원 같은 게 필요 없는 날이 오길 고대하지만, 근시일 내로는 무리일 것 같다.

『노블레스』

무일이 기대했던 것보다 성능(?)이 형편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뱀페스트를 지배하는 자의 정신상태가 불량하다. 모든 노블레스가 그럴 거라고 단정할 순 없지만, 대체로 그럴 거로 [예측]한다.

세계는 불안전하다.

엘퍼러의 도움으로 한 걸음 도약하며 진보했지만, 악(惡)도 진보했다.

강남구 쿠데타처럼 철없는 계약자의 생떼 수준이었던 테러리스트는 좀 더 위협적이고 구체적이게 진화했다.

이유?

나라들이 힘에 취해서 ‘사람의 마음’을 소홀히 한 탓이다.

날마다 무일에게 날아오는 초대장이 그런 부류다.

‘처형’해달라는….

『그린포스 단장, 다윙 밀리언』

『여성 노블레스, 레이디 가브리엘』

『워싱턴 사이코패스, 배트보이』

『런던의 망령, 셜록 2세』

과도한 실험과 실패의 부작용 등이 낳은 흉악한 테러리스트.

이뿐이라면 차라리 웃고 넘어갈 수 있다.

노블레스 특징상 여성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다. 자연히, 여성의 권익에 남성이 도전한다는 인식이 생길 수밖에 없다.

...다 변명이고!

남성의 힘이 강해지는 걸 경계한 극소수 여성의 격한 반응이다. 이 세계는 여자가 지배해야 한다는 여성우월주의자들이다.

여태는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단체들.

이미 계약자가 세계를 꽉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블레스의 등장으로 대다수 하위계약자가 불필요해졌다.

자연스럽게 계약자의 발언권이 떨어졌고, 덩달아 고위계약자들의 사회적인 지위도 흔들렸다.

그들의 불만이 폭발한 것이다.

『북해빙궁 궁주, 아이밍 리』

『처녀동맹 대표, 미스 아르테미스』

『아프리카 성녀, 키메라 일리아』

『반란군 사령관, 그레이트 아마존』

무분별한 피해를 일삼는 테러리스트와 달리 그녀들(대부분)은 ‘노블레스 폐지’를 주장하며 무력시위를 벌이고 있다.

괴수대응연맹 탈퇴는 물론이고, 국가의 지원요청도 무시한 채 계약자들끼리 똘똘 뭉쳐있는 것이다.

최악의 민폐!

계약자끼리 단합하는 거야 뭐라 안 하겠지만, 덩달아 수호자들이 접촉하면서 시비와 싸움이 시도때도없이 발생했다.

도시 한복판에서!

그렇다고 계약자들에게 도시를 떠나달라고 할 수도 없다.

그건 싸우자는 뜻이니까.

계약자는 첨단도시에서 피부와 몸매, 숙면 등을 주치의까지 둬가면서 꼼꼼히 관리한다. 그런데 도시 밖에서 그런 게 제대로 이루어질 리 없는 까닭이다.

테러리스트와 여성우월주의자….

여기에 잔챙이, 자본주의자, 언론인, 극렬분자, 정치인, 기회주의자까지 가세하면?

세계는 엉망이다.

“지혜. 좀 더 건설적인 방법 없어?”

“부산을 목포로 옮기는 정도?”

“흠….”

무일은 일본을 위해서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

문팽이란 강력한 괴수가 국경선 인근에 배치(?)되는 걸 경계하는 일본 정부의 사정을 고려하는 것도 정도가 있다.

역시, 국제관계란 어렵다.

서울은 흡혈귀와 전쟁하느라 바쁘다.

흡혈귀 좀 잡아달라고 하면 서울을 통째로 불태울 줄 알았던 ‘붉은 용왕’ 레드군이 협조적으로 나와줬음에도 소탕이 쉽지 않다.

서울의 영웅, 윤소영.

계약자의 인기도 덩달아 무섭게 치솟는 중이다.

하지만 그거랑 별개로 서울은 너무나 많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와이츠가 좀 나서면 좋으련만.’

용신은 계약자 선유나에게서 한시도 떨어지려 하지 않고 있다.

대신, 엘로엘 계약자 박선영이 파주와 서울을 왕복하며 야생괴수를 치우는 중이다.

그뿐이랴?

최근 원정대를 통해 대폭 인원이 충원된 계약자들도 기본적인 교육을 끝마치자마자 실전에 투입됐다.

그럼에도 서울은 간신히 버티는 수준이다.

부족한 사냥꾼을 계약자 물량으로 밀어붙였다고 해도 틀린 표현이 아니리라.

“서울은 선배에게 너무 의존해왔어. 근래 동안.”

“...그 많은 프로사냥꾼을 저승과 외국으로 보낸 사람이 누구더라?”

“사람이 아니라 용인걸.”

본인은 절대 아니라고 발뺌하는 선지혜.

와이츠가 주도했지만, 정말 혼자서 주도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하지만 추궁해봐야 영양가 없는 얘기가 될 게 뻔하다.

역시, 이렇게 처박혀있어선 한계가 있다.

“개성 좀 다녀와야겠네.”

“...2시간 안에 안 돌아오면 찾아갈 거야.”

찾아오면 한반도 지형이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이미 다도해라고 불렸던 남해 영역과 제주도는 위성사진으로 안 봐도 알 수 있을 만큼 변해있었다.

이 ‘폭군 콤비’가 일직선으로 올라온다면 중간에 낀 서울도 그렇게 되리라.

“인간적으로 2시간은 너무 짧잖아. 왕복하면 끝인데.”

“외로워, 지겨워, 무서워. 끝.”

“......”

< [33화-2] 진보하고 진보한다.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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