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136화 (136/287)

< [33화-1] 진보하고 진보한다. >

파르나르 장편소설

괴수처럼 17

[33화] 진보하고 진보한다.

학명: 곰돌프(불을 뿜는 곰)

서식지: 설원, 빙하

특징: 콧구멍에서 불이 활활!

위험도: 3종 대형

비고: 입으로는 뿜지 못해요♬

***

많은 나라에서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기술을 개발하고자 가진 노력을 다한다.

거의 ‘우발의 산물’이나 다름없는 ‘엘퍼러’가 아닌 고정적이고 확정적인 ‘병기(兵器)’를 원하는 것이다.

그 결과물 중 하나가 ‘레이디 가브리엘’이었다.

하지만 이 최초의 여성형 흡혈귀 또한 ‘우발의 산물’로 그쳤다.

『정녕 방법이 없는가?』

과학자들은 무수히 많은 방법을 고민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용신에 도달한 지혜를 가지지 않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응용’이었다.

변덕으로 만들어진 용신의 발명품, MID 제품을 수정하고 보완하는 것이다.

최근에 응용 중인 기술은?

그건 지금의 엘퍼러를 있게 한 ‘혼돈’이라고 불리는 약품이다.

여자의 순결, 성형, 생활태도 등을 쓱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파악할 수 있는 괴수의 지각능력에 ‘혼란’을 주는 성분.

[혼돈]

그 효과는 크게 둘로 나뉜다.

첫째, 인간의 성별을 괴수가 착각하게 한다.

둘째, 기생하는 괴수를 지배하게 해준다.

“하지만 에쏘스트는 실패했다. 에쏘드는 계약자의 지배를 받지 않아. 노블레스 때처럼 뱀페스트를 통제할 수 없다.”

“일본도 드디어 저희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하겠군요, 주석.”

차이가 있다면 역시 ‘숙주’가 아니란 점이다.

독자적인 활동이 가능한 에쏘드는 [혼돈]에서 자유로웠다.

그저, 용사의 페로몬이 진하면 진할수록 본능을 주체하지 못하고 복종하는 정령이다. 그리고 엘퍼러는 극약(劇藥)이었다.

용사 엑기스.

그 도도한 에쏘드를 순종적인 암고양이로 만든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이미 ‘중국 사례’로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그보다 더 문제인 것은 에쏘스트가 일방적으로 깨졌다는 것이다.

누구에게?

가더발트에게!

...만약 이랬다면 그나마 모두가 수긍했을 것이다.

문제는 맨몸으로 처발랐다는 점이다.

순수한 ‘카르 4세’ 상태로.

“한번에 12명을 흡혈했으니 못해도 4종. 거기에 에쏘드 착용. 끝으로, 카르 3세의 본래 기량이 더해지면 못해도 6급 사냥꾼일 터.”

“그럼에도 졌지요. 그것도 일격필살.”

“...이건 장비 성능으로 말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군. 정보과에서는 뭐라고 하던가.”

“초심(初心)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렇군.”

장비가 아무리 뛰어난들, 사용하는 인간이 쓸데없으면 무의미하다는 걸 ‘카르 4세’가 몸소 증명해줬다.

그 제물이 된 ‘일본의 에쏘스트’에게는 모든 나라에서 고맙게 생각 중이다.

강력한 MID 신무기로 무장한 노블레스가 여전히 야생괴수를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하는 이유가 뚜렷해진 까닭이다.

정신무장이 불량하다.

복장이 단정하지 못한 용병이 정규군에게 밀리는 건 당연하다. 그리고 사냥꾼은 이 ‘정신무장’이 실력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예감]

생존본능을 극대화하고 때로는 괴수의 [예지]를 앞서는 능력.

이조차도 뒤집을 수 있는 신기술이나 신무기가 개발되기 전까지는 ‘엘퍼러 흉내’가 계속될 수밖에 없다.

물론, 다른 길을 찾으려는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용신의 협조는 기대할 수 없었다.

“이 이상의 기술은 본인들에게도 위험하다는 판단인가?”

“없다고 단정했을 수도 있습니다. 용신이란 존재들은 시간 낭비를 병적으로 싫어하니까요. 남는 시간에 차라리 낮잠을 잔다고 합니다.”

“...페이 링은?”

“용신의 시녀쯤 되는 모양입니다.”

“그런가.”

기술은 진보하고 있지만, 인간이 쫓아가질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

특수체질에 의존하는 반쪽짜리 흡혈귀가 아니라, 완전무결한 노블레스가 되려면 엘퍼러처럼 견고한 정신력이 필요하다.

이를 바짝 쫓아가는 편법이 어디 없을까?

그 해답을 찾은 나라가 있었다.

바로 중국!

“천하제일비무대회는 순조롭게 준비 중입니다.”

“이름이 많이 거창해졌군. 초기에는 ‘무림컵’이었는데.”

“이 정도는 돼야 스스로 강하다고 믿지 않겠습니까, 주석. 솔직히 말해, 고대의 ‘월드컵’을 흉내 낸 작명은 스포츠로 왜곡될 소지가 다분합니다.”

“그건…. 그렇지.”

“저희는 스포츠선수가 아닌 뛰어난 전사(戰士)를 뽑는 겁니다.”

하지만 이 넓은 세상만큼이나 과학자의 생각들도 다양했다.

중국에서 준비 중인 ‘천하제일비무대회’보다 더 거창한 프로젝트가 독일에서 준비되고 있었다.

가상현실게임.

그 현실감 넘치는 기술을 응용한 정신무장.

유럽의 극악한 테러집단인 ‘그린포스’의 단장 ‘다윙 밀리언’이란 실패작을 교훈 삼아 프로그램을 더욱 보완하고 개선했다.

『가상현실을 현실로 착각시킨다.』

그 출발은 여기에 있다.

프로그램 지원자가 아닌 아무것도 모르는 민간인을 수면제로 잠재운 후에 ‘모종의 가상현실’에 접속시킨다.

게임처럼 편리한 인터페이스도 없고 고통도 실제상황! 정부에 납치된 민간인이 눈앞에 세계를 현실이라고 믿도록 꾸미는 게 핵심이다.

이 가상세계의 시간은 현실의 10배.

당연히 뇌에 무리가 간다. 그걸 온갖 물약으로 완화하며 최대 6개월 코스로 진행된다.

반년(半年)은 짧지만, 당사자에게는 그렇지 않다.

“독일 녀석들. 정말 터무니없는 짓을 했군.”

“참신하지 않습니까. 현대의 민간인이 우연히 다른 차원에 떨어져서 용사가 된 후에 현대로 돌아온다는 대서사시(大敍事詩).”

“들키면 무너질 모래성이지.”

“뇌의 부담과 약물과용으로 수명이 매우 짧다고 합니다. 하지만 노블레스, 에쏘스트가 되면 전부 회복되기에 개의치 않는 것 같습니다.”

“성공률은?”

“...가파르게 올라가고 있습니다.”

독일 정부에서 짠 스케줄과 스토리를 탄탄하게 밟으며 5년이란 체감시간을 가상세계에서 보내게 된다.

물론, 현실로 돌아온 후의 공백을 이상하게 여기는 시험자들도 있었다. 주로 자신의 몸을 보고 그렇게 느꼈다.

그걸 ‘최후의 전투에서 모든 힘을 소진했다.’는 식으로 보완했다.

정의감이 가상현실에서 현대까지 이어진 시험자들이 자연스럽게 프로사냥꾼의 길로 들어서도록 유도하는 것도 하나의 관건.

가장 큰 장점은 ‘훈련비용’이 전기세 수준이란 점이다.

접속해있는 6개월 동안 대소변과 건강을 관리해주는 간호사의 월급과 뇌에 가는 부담을 줄이는 약값을 포함해도 정말 싸다.

그래서 조만간 ‘흑기사’ 시스템도 도입할 예정이다.

“정말 기가 막히는군.”

“가상세계에서 사랑하던 여인을 현대에서 외모만 같은 미녀로 다시 만나게 해준다는 설정입니다. 당연히 그 미녀는 정부 관계자입니다.”

“독일 녀석들. 정말 치밀하군.”

“정보과에서 판단한 독일의 성공객체는 현재까지 셋입니다. 십중팔구 더 있겠지요.”

이렇게 편법을 이용해서 완성한 ‘용사’는 끝이 아니다.

최종적인 관문이 남았다.

특수체질 없이 [혼돈]만 복용한 채 ‘괴수의 피’ 감염을 이겨내야 한다. 이걸 해내지 못하면 짧은 시한부 인생이다.

무엇보다도 민간인 중에서 뽑았고 6개월 동안 식물인간처럼 꼼짝도 안 한 탓에 육체가 매우 허약하다.

그걸 ‘괴수의 힘’으로 덮어씌우지 않으면 ‘사냥개’로 쓸 수 없다.

당연히 이 기술은 공개되지 않았다.

비밀이 탄로 나면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심하면 ‘다윙 밀리언’처럼 복수의 화신이 될 가능성이 농후한 탓이다.

하지만 수많은 나라에서 뒤따르고 있다.

짧은 제작 시간과 저렴한 비용이 그만큼 매력적이란 뜻이다.

“흠….”

“저희도 준비할 수 있습니다. 무협(武俠) 버전으로. 국민들이 무협에 익숙하기에 타국보다 훨씬 유리합니다.”

“흐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주석.”

“...편법으로 인한 실패는 한 번이면 충분하다고 생각되네.”

“보안을 철저히 하겠습니다.”

정보과 과장 ‘위진 창’은 다짐하듯 답했다.

하지만 그 말에, 중국 국가주석 ‘첸지 죠’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내 말뜻은 이 프로젝트를 시행하지 않겠다는 거네.”

“예?”

“이미 우리는 인민(人民)들에게 신뢰를 한 번 잃었지. 한국의 평양에서. 영원한 비밀은 없다는 걸 잊지 말게.”

“주석...”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아네. 들키면 폐기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는가? 그 결과가 ‘페이 링’이네. 우리는 8종 계약자를 한국에 줬어.”

“......”

위진 창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거기에 대해서 따지자면 할 말이 정말 많지만, 결과적으로 ‘용신 계약자’를 경쟁국에 내줬다는 사실이 변하진 않는다.

설사, 엘퍼러 때문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렇다고 해도 버리기 아깝긴 하군.”

“네, 주석.”

“우리는 고대에 세계를 주름잡았던 대국(大國) 중화인민공화국이지. 좀 더 대범하게 가자고. 비밀로 하지 말고 지원자를 모집하게.”

“그럼 효과가….”

“당연히 약하겠지. 게임이란 걸 안 이상. 하지만 게임 NPC의 인권을 주장하는 시민이 왜 생긴다고 생각하나?”

“아! 무슨 말씀인지 이해했습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모든 비주얼이 가짜란 걸 알면서도 ‘정의심’을 자극하는 교육프로그램을 짜면 된다.

쉽지 않겠지만, 그걸 해내야만 하는 게 정보과가 할 일이다.

고대부터 무협(武俠)이 전설처럼 판을 치던 본고장 중원.

가상현실이란 한계를 뛰어넘어 심금을 울리는 무협을 만들 수 있다면, 안전이 보장된 최고의 ‘교육 게임’이 탄생할 것이다.

당연히 시나리오는 필수….

“흠. 판판 소가 아쉽게 됐군. 유명작가라고 했는데.”

“지금도 작품활동은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네. 제가 직접 알아보니, 문팽이의 통역관으로 활동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사생활이 보장…. 유령 취급이라고 하소연했습니다.”

“잘됐군.”

경계하지 않는다면 더욱 수월할 것이다.

현재, 용사의 모범답안이라고 할 수 있는 ‘한무일’을 가장 가까이서 관찰 중인 중국인이 ‘페이 링’과 ‘판판 소’였다.

그리고 천운(天運)인지 판판 소는 ‘작가’였다!

페이 링에게 부탁하면 ‘주인님은 그냥 멋져요!’ 같은 두루뭉술한 대답이 뻔했지만, 판판 소에게 상황을 설명하면 괜찮은 시나리오까지 써줄 것이다.

그러면 작업 시간도 줄고 검증도 거의 불필요하리라.

“지원자를 모집하면서 그녀에게 연락을 취하겠습니다.”

“그래. 본국의 미래가 달린 중대한 사안임을 잘 설명하고, 섭섭하지 않을 만큼 의뢰비도 넉넉히 챙겨주게. 충성만으로 움직이는 사람은 얼마 없으니.”

“즉시 착수하겠습니다.”

중국 정보과 과장 위진 창은 정말로 곧장 움직였다. 한국에 유학(?) 중인 판판 소에게 연락한 것이다.

그녀는 정말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방음벽마저 뚫는 시끄러운 공사 소리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작품활동을 방해 중이다. 그뿐이라면 차라리 다행이다.

수호자 변강쉘의 폭언은 눈물이 쏙 빠질 정도로 거침없다.

‘코와 가슴에 실리콘 넣은 게 전부인데!’

사실은, 쌍꺼풀 수술도 했다.

풋풋한 이팔청춘(현재: 발정기) 때는 정말 미쳤던 게 분명하다. 정말 좋아했던 오빠(현재: 개새끼)의 말을 귀담아들은 게 화근이다.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심한 모욕을 듣진 않았을 것이다.

그딴 젖통은 잘라버리라던가!

콧구멍에 벌레 키우느냐던가!

그럼에도 판판 소가 버틸 수 있는 이유는 ‘최초의 성형수술 계약자’라는 명성 덕분이었다. 그것도 희귀하다는 바다의 괴수. 심지어 7종이다!

판판 소는 사람들이 부럽다는 인터넷 글을 읽는 낙으로 버티고 있다.

가끔, 질투와 악의가 묻어난 비방 글도 보이지만, 수호자 변강쉘의 폭언으로 단련된 계약자의 심지(心志)는 금강석처럼 단단해졌다.

(어머! 무슨 일이세요, 과장님.)

(자네가 맡아줬으면 하는 프로젝트가 있네.)

판판 소는 위진 창의 설명을 조용히 들었다.

시끄러운 공사 소리 때문에 쉽진 않았지만, 이 가혹한 환경에 적응한 그녀의 청력도 만만치 않았다.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

보수는 판판 소가 평생 만져보지 못한 액수였다. 선수금만으로도 베이징 내의 괴수대응본부에서 가장 가까운 ‘최고로 비싼 땅’의 집을 살 수 있을 정도였다.

중국 정부에서 그만큼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이다.

(...예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자신 없어요.)

(무슨 뜻인가?)

(완벽한 용사를 정의할 수 없게 됐어요. 최근에 카르 4세가 여자를 알게 되면서 무슨 생각 중인지 전혀 모르겠어요.)

(여자를 알아…?)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

위진 창의 의문은 풀릴 수 없었다.

무언가의 습격을 받은 것 같은 판판 소의 비명이 수화기 너머로 들린 탓이다.

문팽이가 버티고 있는 성지(聖地)를 공격할 정도로 대담한 야생괴수?!

그렇다면 바다 건너 이웃인 자신들도 태평하게 있을 때가 아니다.

조금이라도 정보를 모으기 위해 정보과장은 외쳤다.

(판판 소! 자네! 괜찮은가?!)

(응. 걱정하지 마. 깍두기 계집애가 얼레리 꼴레리 하길래, 아주 살짝 맴매해줬어.)

(서, 선지혜 회장님…. 오랜만입니다….)

괴수라면 나름 괴수일지도…!

한국인 중에서 가장 만나기 싫은 존재 0순위.

약간 멍해 보이는 선지혜의 목소리는 ‘왕자님 낚은 신데렐라’ 같은 유부녀(?)의 여유마저 느껴졌다.

(응. 창 씨도 오랜만. 그런데….)

(말씀하십시오.)

(방금 생각난 건데, 만리장성 좀 줘.)

(예…?)

< [33화-1] 진보하고 진보한다.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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