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135화 (135/287)

< [32화-4] 배를 품은 달 >

‘이거 참….’

말로 다 형용할 수 없는 상황에 빠졌다.

만류귀종(萬流歸宗)?

모든 흐름은 하나로 통한다는, 이 말뜻이 여기에 해당할지도 모른다고 무일은 생각했다.

현실이 흥하니 가상현실이 따라왔다.

그렇다고 가상현실에 시간 낭비할 생각은 없지만, 곧바로 접속기기를 주문하는 선지혜와 선물을 준 유키 짱(엑시온)을 생각해서라도 사용해보기로 했다.

...지금은 딱히 할 일도 없으니.

이 또한 인류를 위한 길이라고 자위했다.

사냥꾼 주제에 힘이 생기면서 간신히 생긴 여유. 판타이탄의 조언처럼 문제 될 게 없다면 쉬어주는 것도 한 방법이리라.

접속기기는 특급배송으로 순식간에 준비됐다.

“저쪽 세계에서 봐.”

“음…. 그래.”

유키 짱은 ‘난 다음 기회에, 예요.’라고 양보하며 시작된 둘만의 밀애.

가상세계의 보물창고에서 눈을 뜬 무일은 캐릭터의 상태 같은 건 거들떠보지도 않고 여기가 어디인지부터 추리했다.

하지만 그 시간은 아주 잠깐이었다.

선지혜에게는 이런 장소 개념이 무의미했던 탓이다.

가상세계 신이나 다름없는 와이츠. 그 용신의 계약자였던 그녀의 계정은 ‘관리자’로서, 이미 치외법권(治外法權)인 위치에 있었다.

한무일을 찾아내는 건 순식간이었다.

덤으로 만난다는 행위까지 눈 깜빡할 사이에 끝났다.

“...뭔가 터무니없는 캐릭터네.”

“이거? 전투능력 하나 없는 관전용이야. 대신, 이런 것도 할 수 있지.”

전설적인 프로게이머 임진호조차 뚫지 못했던 난공불락 왕성에서 단숨에 사라진 둘은, 어느 고풍스러운 침실에 있었다.

처음부터 이럴 거면 ‘최강의 캐릭터’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았을까.

하지만 과거하고는 상황이 많이 달랐다.

한무일은 변변찮은 사냥꾼에서 ‘9급 프로사냥꾼’으로 성장했다.

더는 수호자가 아닌 용신 와이츠는 참견하지 않을 것이며, 선지혜의 모친인 선유나는 엘퍼러의 노예이기에 거스를 수 없다.

문팽이?

대다수 수호자가 그러하듯 가상세계까지 계약자의 사생활을 참견하지 않는다.

수호자는 계약자가 돋보이는 미모와 청결만 유지하면 만족한다.

“좀 고쳤네.”

“가슴과 허리가 마음에 안 든다며?”

“흠흠!”

“가상현실게임이 아무리 발전해도 완벽한 구현은 안 되는 모양인걸. 아직 내 심장이 터지지 않은 걸 보면.”

침대에 공손한 자세로 누운 선지혜는 눈을 감고 있었다.

옷을 벗는다는 행위를 타인에게 맡기고, 내가 아닌 남의 손가락이 살결에 닿는 감각을 꼼꼼히 음미했다.

곧, 현실과 다르지 않은 선지혜의 전라(全裸)가 드러났다.

그녀는 투덜댔지만, 무일은 ‘이 이상 아름다워질 수 없는 여신’을 보면서 가상현실게임의 외모보정을 극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마에서부터 발등까지 천천히 입을 맞추었다.

그럴 때마다 허리를 비틀며 파르르 떨던 선지혜가 쥐어짜듯 말했다.

“너, 너무 능숙한걸. 수상해…!”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하잖아.”

준비운동(?)을 마치고, 한껏 달아오른 여신의 두 허벅지가 좌우로 활짝 벌어졌다.

이때만큼은 당돌한 선지혜도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의 내숭이 아닌 순수한 감정을 가만히 감상하던 무일은 ‘금단의 과실’로 손가락을 뻗었다.

하지만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몽롱하게 풀린 눈이랑 달리 예민해진 그녀의 몸이 다음을 재촉한 탓이다.

이젠, 멈출 수 없었다.

서곡(序曲)이 끝나고 폭풍이 몰아쳤다.

『용사는 여자를 알게 됐다.』

현실의 육체는 여전히 동정이지만, 정신적으로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며 성장했다.

이 세상의 ‘정의’는 상대적이다.

누군가를 아끼려는 태도가 역으로 상처를 줄 수 있다. 내 노력과 호의가 항상 최선이 아니고, 때로는 최악의 수일 수도 있다.

그걸 무일은 깨달았다.

여태까지 그가 봐온 선지혜는 진짜가 아니었다.

이렇게 기뻐하는 얼굴로 펑펑 우는 그녀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탓이다.

“...미안해.”

“됐어. 훌쩍. 너무 쉬웠으면 재미없었을걸. 훌쩍.”

오늘처럼 선지혜가 평범한 여자로 보이기는, 처음 만난 특공대에서 선후배가 된 이후로 처음인 것 같았다.

무일은 현실의 것보다 율동이 풍부한 그녀의 젖무덤에 얼굴을 묻고, 조금만 장난쳐도 일일이 반응하는 몸을 보듬어주었다.

시간이 유수처럼 흘러갔다.

낭비라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마약처럼 헤어나올 수 없을 것 같았다.

“슬슬 일어날까?”

“조금만 더.”

“흠.”

“...응. 다음을 위해.”

선지혜는 숨 돌릴 틈을 안 주던 ‘마법의 창’이 몸 안에서 빠져나오는 순간, 짙은 상실감과 허무감이 아랫배에서부터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나랑 똑같은 기분일까?

물어보는 대신 예쁜 눈으로 흘겨보았다.

환희에 몇 번씩 부르르 몸을 떨었던 그녀였지만, 무언가 손해 본 것 같은 이 기분! 아마도 깔끔하게 물러나는 무일의 태도 때문일 것이다.

‘남자는 모두 애라고 했는데.’

아기처럼 자신의 젖꼭지를 빨며 어리광부리는 그를 상상했다.

하지만 그건 지나친 기대였던 모양이다.

24세기는 여성우대시대. 그런데 자신은 이런 ‘서비스정신이 부족한 남자’에게 영혼까지 푹 빠진 ‘사랑의 노예’였다.

운명을 보상해달라고 조를까?

보상이라면 어떤 식으로?

고민하던 선지혜는 ‘어라?’라고 생각했다.

어느새 시작된 ‘2차 침공’이 그녀의 아랫배를 찔러왔기 때문이다.

침대에서 벽으로 장소만 바뀐 것뿐이었다.

본능의 달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냥꾼 중에서도 ‘세계 최강’인 엘퍼러. 동물적인 감각으로 공주님의 애간장을 태우며 농락했다.

결국,

『경고! 정신이 매우 불안정합니다! 강제종료에 들어갑니다!』

선지혜는 시스템에 의해 가상세계에서 쫓겨났다.

현실로 돌아온 그녀는 축 늘어져 있었다.

몸은 멀쩡하지만, 혼이 쏙 빠져나간 것처럼 눈동자에 초점이 없었다. 그렇다가 표정이 단숨에 뾰로통하게 변했다.

눈앞에서 손바닥을 흔들어 보이는 원인제공자 탓이다.

“실성하지 않았어!”

“다행이네. 잘못된 줄 알고 깜짝 놀랐잖아.”

“많이 잘못됐는걸! 내 영혼을 따먹혔어!”

“영혼을…?”

이웃 나라에서는 도둑놈 취급이고, 예쁜 후배는 악마를 논하고 있었다.

미녀의 영혼을 빨아먹는 악질 중의 악질로!

점점 평판이 떨어지는 걸 실감하며, 무일은 가상현실에서 저지른 짓이 잘한 행동인지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론은?

기분 최고다!

드디어 진정한 어른이 된 것 같다.

쫑알쫑알 따지던 선지혜는 선배의 그윽한 시선이 장난이란 걸 알면서도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후다닥 자리를 피했다.

무일은 배꼽이 빠지도록 웃고 말았다.

이렇게 팡팡 웃어본 마지막이 언제였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방으로 도망친 선지혜가 ‘웃지 마! 색골 용사!’라고 맹비난을 날렸지만, 나이를 초월해서 그저 귀여울 따름이었다.

‘이래서 결혼은 남자의 무덤이라고 하는 건가.’

젖무덤에서 헤어나올 수 없을 뻔했다.

베개와 차원이 다른 그 포근함에 얼굴을 맡기고 영영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관을 짜지 않고 나오길 정말 잘한 것 같다.

선지혜는 상실감이라고 표현했지만, 한무일은 자신의 그 감정을 기대심리로 해석했다.

다음 재회를 고대하는 마음.

전래동화 ‘견우와 직녀’처럼 기다리며 사랑을 키우는 것이다.

사랑?

영원하지 않다고 무일은 생각한다.

하지만 연인이 금방 질리지 않도록 권태기를 늦추는 건 가능하다고 믿는다.

뭔 헛소리냐!

자칭 ‘하렘의 왕’이 반발하는 소리를 들은 것 같다.

세상의 모든 ‘미소녀’가 죽는 그 순간까지 자신만 바라보게 될 거라고 호언장담한다.

“...진짜 민폐인 놈인걸.”

미소녀를 독식해서 얼마나 많은 남자와 여자를 불행하게 하려는 걸까.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사랑하는 여자가 둘이면 사랑도 이등분된다. 이런 식으로 나뉘면 사랑하는 여자들 모두가 불행해질 것이다.

그 또한 헛소리다!

왕을 모신다는 사실만으로도 ‘미소녀’들은 행복하다. 왕의 사랑과 은혜는 아무리 나눠도 무한하니 불행이란 있을 수 없다.

...라고 자칭 ‘하렘의 왕’은 단언했다.

하지만 그 잘나신 왕께서는 ‘천적’이 숙주의 품에 폭 안기자마자 ‘뒤집은 모래시계’처럼 수면의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세리야, 잘했어.”

“네! 더부살이 주제에 참 시끄러운 것 같아요!”

한세리는 배시시 웃더니 용사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어설픈 춤을 췄다. 몸치라서 당장에라도 자빠질 것 같지만, 어떻게든 균형을 잡는 게 신통방통했다.

기분이 무척 좋아 보였다.

그야 당연했다.

마침내 한무일 용사님이 싱크로율 100% 달성!

에쏘드에게는 이보다 더 큰 영광이 없으며, 완전무결한 정령이 된다는 것은 기존의 자신을 탈피하고 초월한다는 뜻이다.

각성(覺醒)!

겉보기에는 달라진 게 없지만, 정령의 방식대로 삼라만상(森羅萬象)의 이치를 깨달았다고 해도 좋으리라.

“...방금, 피로를 느낀 것 같았는데.”

“용사님! 제가 식욕이 늘었어요!”

“하아?”

“정신의 소모량이 커지면서 체력에도 살짝 부담이 가신 거예요. 해제!”

뭐가 뭔지 잘 모르겠지만, 내 에쏘드에 필살기 ‘스위치’ 같은 게 생긴 모양이다.

남아돌던 기력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고 보면 될까.

무일이 [예감]과 [예측]으로 당장 알 수 있는 정도는 거기까지였다. 그 실체가 명확해지려면 써보지 않고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괴수에게 시비 걸 생각은 없다.

기다리면 기회는 필연적으로 오리라.

“카레 짱! 신세 많이 졌어, 예요!”

선지혜와 보낸 시간이 생각보다 길었던 모양이다.

일본으로 귀국할 채비를 마치고,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쭉 기다리고 있던 유키 짱이 발랄하게 말했다.

그녀를 제외한 나머지 손님들은 이미 ‘판타이탄 여객기’에 탄 상태였다.

둥근 모양의 창문으로 이쪽을 빤히 쳐다보는 ‘일본의 에쏘드’ 사쿠라. 싱글벙글한 얼굴을 보니 조금 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떠나고 싶었나?

굳이 따지지 않기로 했다.

“다음에 봐.”

“하잇! 그때는 가상세계에서, 예요.”

조만간 접속하겠다는 확답을 들고나서야 만족스러운 얼굴이 된 유키 짱. 가벼운 발걸음으로 여객기에 탑승했다.

작은 창문을 통해 키바 카즈마도 볼 수 있었다. 그 미청년은 분홍색 미소녀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본국으로 데려갈 수 있어서 다행이란 표정이다.

‘이젠 유괴범이란 혐의도 풀리겠지?’

멀쩡한 사람을 ‘에쏘드 약탈자’로 몰다니!

일본 정부를 상대로 명예훼손을 들먹일 생각은 없지만, 지원요청이 들어오면 뜸을 들이고 싶어질 것 같다.

물론, 사심으로 일본인들의 죽음을 방관할 생각은 없지만 말이다.

기분만은 그만큼 언짢았다.

아무튼, 며칠간 조용한 나날을 보냈다.

가상세계에서 첫날밤을 치른 이후로 선지혜는 무언가 달라졌다. 콕 찍어서 말할 순 없지만, 부끄러움에 허둥대는 황녀님의 자태는 소소한 즐거움이 분명했다.

달라진 건 또 있었다.

이젠 ‘목포’라는 도시가 여기에 있었는지도 알 수 없게 변한 갯벌 위에 두꺼운 철판이 깔리기 시작했다.

그 위로 건물도 올라가는 중이었다.

어떤 용도인지는 아직 확인하지 않았지만, 규모로 봐서는 정말 엄청나게 컸다.

“주인님.”

“왜?”

“일본에서 통신이 들어왔어요.”

“통신? 전화가 아니라 문자 같은 건가.”

“네, 여기.”

페이 링에게 받아든 프린트물을 쭉 읽어내려가는 무일.

내용은 간단했다.

현재 쓰고 있는 ‘스콜레옹 포르소’를, 최근에 일본에서 개발한 신제품으로 ‘교환’해준다는 내용이었다. 무상으로!

무게가 좀 올라가지만, 절삭력도 덩달아 상승하는 모양이다.

“호오…. 이게 일본인들의 장인정신이란 건가. 완전히 사라진 줄 알았는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었다.

심지어, 승낙하는 즉시 ‘1시간’ 내로 직접 찾아와서 교환해준다고 한다.

언짢았던 기분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이건 고민할 필요도 없다.

일본에서 에쏘드를 달라는 것도 아니잖은가.

“페이 링.”

“네, 주인님.”

“교환해달라고 답신 좀 보내줘.”

“네. 바로 보낼게요.”

정말로 일본에서 택배원(!)이 찾아와서 교환해줬다.

통신에는 1시간이라고 명시해놨지만, 1분 만에 방문한 것 같다.

그들은 뭐가 그리 급한지, 카르 4세에게 신상품을 주고 ‘스콜레옹 포르소’를 양도한다는 계약서 사인까지 받아낸 후에 부랴부랴 떠났다.

...도둑놈처럼 왜 저래?

무일의 [예감]으로도 도통 알 수 없었다.

< [32화-4] 배를 품은 달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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