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134화 (134/287)

< [32화-3] 배를 품은 달 >

무척 기뻐하는 사쿠라와 함께 정원으로 나왔다.

근처에서 서성이는 가재에게서 ‘괴수의 피’를 공수받은 ‘일본의 에쏘드’는 순식간에 검집을 뚝딱 완성했다.

구닥다리 눈높이 한세리보다 현대적인 디자인이 돋보인다!

이 정도면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것 같다.

“정말 멋진걸!”

“가, 감사합니다아….”

다리를 비비 꼬는 사쿠라의 모습은 영락없이, 사랑에 빠진 소녀.

멋진 미소를 쓴웃음으로 바꾼 무일은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도둑놈 취급은 사절이니.’

애초에, 이중계약 같은 게 가능할까?

이미 괴수를 셋이나 달고 있는 한무일이 할 소리는 아니었지만, 명백히 따져보면 틀린 의문도 아니었다.

가더발트와 뱀페스트는 계약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그는 숙주.

제대로 된 계약은 에쏘드뿐이다.

현재, 세계에는 수많은 계약자가 있지만, 수호자가 둘이란 소리는 없었다.

문팽이와 계약한 선지혜가 ‘수호자의 추종자’들을 수족처럼 부리긴 하지만 그게 계약인 건 아니다.

너무 예민하게 생각한 걸까.

고민하는 무일에게 유키 짱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카레 짱! 엑시온이 줄 선물이 있데!”

“...선물?”

“하잇!”

생일도 아닌데 선물이라….

선지혜의 선물을 받고 얼마 안 돼서 ‘선물’ 운운하는 유키 짱의 의도가 선명하게 보였다.

그런데 판타이탄이 준비했다고?

계약자와 수호자는 일심동체(一心同體)라고 봐도 될까. 하지만 괴수가 준비한 선물이 뭔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물론,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곧바로 설명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가상현실게임을 안 한다고 들었다, 소년.”

“뭐….”

가상세계 하느님에게 ‘저는 당신의 신도(信徒)가 아닙니다!’라고 부정하는 기분이라서 확답을 미루는 무일이었다.

게임을 ‘전혀’ 안 하는 이유야 당연하다.

캐릭터를 키울 시간이 없다.

그의 장기인 [예감]을 쓸 수 없다는 것도 큰 문제다. 그러니 취미로 가끔 들어가 봐야 ‘병사1’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누구나 영웅, 용사, 마왕(!)을 희망한다.

여자라면 공주, 미녀, 천사가 되길 꿈꿀 것이다.

하지만 이런 수준까지 오르려면 가상현실게임에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하고 가상세계 이해도와 정보력도 뛰어나야 한다.

현실도 따라가기 벅찬 ‘카르 4세’에게는 무리였다.

“안 하는 이유쯤은 능히 짐작한다. 캐릭터를 키우기 귀찮은 거겠지.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지기 싫은 거겠고.”

“그, 그야…. 네.”

정곡을 찔린 무일은 궁핍한 변명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남자라면 누구나 계속 이기고 싶다.

카르 4세가 ‘현실’에서 진다고 해서 카르 3세처럼 넋을 놓친 않겠지만, 그렇다고 승리욕이 없는 건 아니다.

불의(不義)에 맞서고 정의(正義)를 세우려면 이겨야 한다.

만약, 한무일이 ‘키바 카즈마’에게 패했다면 ‘에쏘스트가 최강! 신념은 둘째!’라는 그의 철학을 깨부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안 되는 가상현실게임은 진즉 손을 놨다. 이 방면은 ‘임진호’ 같은 전설적인 프로게이머가 꽉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정한 규칙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가상세계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인류 평화에 도움이 안 돼!

...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역시나 ‘약자’라는 불변의 위치도 원인이다.

“가상현실게임은 답답한 ‘삶의 돌파구’다, 소년이여.”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엑시온. 당신은 그 세계의 신(神)이라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하하! 나는 신이 아니다, 소년.”

“흠….”

판타이탄이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스스로 아니라고 했지만, 그가 ‘가상현실 하느님’이란 건 사실이다.

판타이탄 ‘엑시리얼 온드미온’이 마음만 먹으면 가상세계 주도권은 한국에서 일본으로 순식간에 넘어갈 것이다.

혹은, 러시아의 판타이탄 ‘첨단기계 살인광’이 가상현실게임에 눈을 뜬다면, 게이머들은 마신(魔神)의 강림을 보게 되리라!

저건 겸손이다.

무일은 그렇게 판단했다.

“나는 그저 신처럼 강할 뿐이다.”

“에…?”

“단신으로 왕까지 쓰러트린 소년이여. 그런 강함이 있음에도 그대가 이런 황무지에 머무는 이유가 무엇이지?”

“...세상을 바꾸는 건, 강함만으로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도시를 침략한 야생괴수를 쓰러트리는 거야 늘 해오던 일이니 간단하다. 하지만 이 세상을 주도하는 힘은 ‘정치’다.

지금, 그가 서울에 가봐야 분위기만 뒤숭숭해질 뿐이다.

한쪽으로 치우쳐져 있던 대한민국 세력구도가 100년 만에 크게 요동쳤기 때문이다.

『와이츠 vs 엘퍼러』

최근, 시민들이 싫어할 정책을 와이츠가 내세우긴 했지만, 4차 세계대전 직후의 끔찍한 한국을 기억하는 고대인을 주축으로 한 지지층은 절대적이다.

그 정치성향은 자식들에게도 물려주고….

이번의 과격한 정책도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해 잉여인구를 척결한다!’라는 측면에서 큰 지지를 받고 있는 것도 사실.

그게 대한민국 와이츠 ‘미카헬로 싸이어’다.

반면, 한무일은?

개인의 무력이 이미 국가를 넘어 ‘대륙’ 클래스였다.

사냥꾼들에게는 무신(武神)으로 추앙받는 존재고, 강대국들은 ‘나는 너의 영원한 우방(友邦)!’이라는 식으로 끊임없이 속삭이고 있다.

이런 그가 서울로 돌아가면 원치 않더라도 ‘정당(政黨)’이 형성된다.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렇게 갈망하던 ‘선유나’를 되찾았지만, 그녀의 주인(主人)이라고도 할 수 있는 엘퍼러에게 와이츠는 함부로 할 수 없다.

만약, 한무일이 ‘정치’에 뛰어든다면 용신은 경계할 수밖에 없다. 심하면 본인의 목숨까지 걸고 죽이려 할 것이다.

계약자 ‘선유나’의 완벽한 자유를 위해서.

이처럼 세상은 힘만으로 단순하게 굴러가지 않는다.

“맞다. 그래서 나는 신이 아니다, 소년.”

“음….”

“나의 세계에 방문한 인간들을 조종하는 능력이 내게는 없다. 대신, 유도할 순 있지. 사랑, 증오, 질투, 분노, 우정….”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이 인간적인 판타이탄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여동생 다루듯 유키 짱의 머리를 쓰다듬은 신사가 말했다.

“소년. 그대는 단단하다. 유연하지 않으면 부러진다는 격언도, 그대에게만은 통용되지 않을 만큼 단단하다.”

“......”

“하지만 주변은 그렇지 않다.”

“주변?”

“아파도 울고 슬퍼도 운다. 좋아하는 소년처럼 단단해지려고 애쓰지만, 계속은 무리지. 이 소녀들은 평범한 인간이니.”

엑시온이 말한 소녀란 계약자들.

유키 짱은 아무런 말 없이 침묵했다. 무일에게 다가오려던 선지혜는 발걸음을 멈췄고, 피부마사지 중이던 페이 링도 이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한세리와 라미아는 고개를 갸웃?

평범한 여자의 범주에 안 들어가는 그녀들만 분위기를 읽지 못했다.

“하지만 계약자는….”

“순결이 중요하다고?”

“네.”

“융통성을 발휘했으면 한다, 소년이여. 가상현실게임이란 편법을 모르진 않을 터. 가상이 아무리 잘 만들어졌어도 가상일 뿐. 진지해질 필요는 없다.”

“그게….”

가상세계 하느님이 자신의 세계를 부정했다.

무일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아니.

판타이탄은 부정한 게 아니었다.

“가상세계는 현실의 불가능을 이루어주는 꿈의 공간이다. 현실에서 힘들다면 가상에서 마음 놓고 즐겨라.”

“......”

“인류를 위해 앞만 보고 달리는 소년은 휴식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소년의 등만 바라보는 소녀들은 그렇지 않다.”

소녀들의 순결을 지켜주겠다는 마음을 탓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때로는 ‘타락(!)’도 필요한 법이다.

판타이탄은 가상세계와 현실을 넘나들며 인간의 ‘불합리성’과 ‘불완전성’을 수없이 봐왔다. 그리고 ‘성교’의 목적이 ‘번식’만이 아니란 것도 인지하고 있다.

사랑의 증거.

사전에 합의됐다는 전제하에, 처녀막이 찢어지는 고통과 낙인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여성의 심리는 여전히 탐구영역이었다.

그렇다고 ‘결과’를 부정하진 않는다.

자신의 계약자를 포함한 소녀들은 이 소년에게 더럽혀지길 원하고 있었다.

“좀…. 당혹스럽네요.”

“사랑만을 목적으로 가상세계를 이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여기에 ‘인연’을 곁들이고 싶다면 내가 도와줄 수 있다. 이것이 내가 소년에게 주는 선물이다.”

“도통….”

“간단히 말하지. 최강의 캐릭터.”

“에?”

이리저리 돌려서 설득하던 엑시온이 정말 하고 싶었던 말.

지는 게 싫다면 이기면 된다.

그게 말처럼 쉬울 리 없지만, 가상세계 하느님에게는 숨 쉬는 것처럼 간단한 일이다. 사람의 마음을 조종할 순 없지만, 유도는 가능하다.

인간들이 열광하는 아이템, 캐릭터….

판타이탄은 그 모든 걸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

물론, 그러려면 대한민국에서 관리하는 게임 서버를 해킹해야 한다. 공명정대한 와이츠의 방화벽이 용납하지 않겠지만, 용신이 자리를 비운 틈에 만들어둔 ‘보험’이 적지 않다.

아깝긴 하지만….

더 아끼는 ‘유키’가 지쳐있었다.

그리고 이 또한 ‘보험’이었다.

“훗날. 내가 이 아이를 지킬 힘이 부족하다면 그때는 무슨 위험이 닥치더라도 구해다오. 이것은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다, 소년.”

“당연히 그럴 겁니다!”

“좋은 대답이다.”

만족스럽게 웃은 엑시온은 정신 일부를 가상세계로 보냈다.

위치는 자신의 고성(高城).

아름다운 왕비를 너무나 사랑하여 나라를 돌보지 않는 왕이 사는 곳이다. 그리고 그 성의 지하보물창고에는 ‘전설의 아이템’이 쌓여있었다.

전설적인 프로게이머 ‘임진호’조차 왕성하게 활동해온 50년 동안 간신히 2개 입수한 ‘전설의 아이템’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다.

그리고 그 안쪽.

보물창고에는 ‘전설의 아이템’뿐만 아니라 ‘전설의 캐릭터’도 잠들어있다.

외모는 왕비의 바람으로 어떤 소년을 모티브 해왔다.

‘깐깐한 용신도 이 이름이라면 묵인하겠지.’

들켜도 캐릭터가 삭제되는 불상사는 없으리라.

사람들은 ‘현실에서 최강이니 게임도 잘하는 게 당연하지.’라는 식으로 편하게 생각할 것이다.

애초에 본인이 오래 접속할 처지가 아니라서 사건도 없으리라.

***

【신마저 인정한 흑기사】

본명: 한무일

직업: 히어로 슬레이어 (유니크)

레벨: 100

생명: 999,999 / 999,999

물리: 가속 999 / 명중 999 / 치명 999

마법: 증폭 999 / 단축 999 / 범위 999

방어: 회피 999 / 지혈 999 / 회복 999

저항: 원소 999 / 저주 999 / 신성 999

성향: 선(善)

특성: 모든 원주민 호감도 999 고정.

***

저 호칭은 아이러니하게도 ‘사실’이다.

가상현실게임 메인 서버를 관리하는 슈퍼컴퓨터에 언제든 간섭할 수 있는 와이츠가 ‘신’이 아니면 뭐겠는가.

모든 능력치를 한계까지 찍었다. 여기서 더 강해지려면 아이템을 맞추면 되지만, 뭘 착용하더라도 차이를 못 느낄 것이다.

스쳐도 사망 확정!

새끼손가락으로 싸우면 그나마 프로게이머들은 3초쯤 버티지 않을까.

최근에 업데이트된 에피소드의 최종 보스 ‘생명’이 155,000쯤 했던 걸 고려하면 이 ‘전설의 캐릭터’는 숫제 살아있는 대륙이다.

가만히 있는 걸 공격해도 저 방어력과 저항력을 뚫기란 어려우리라!

...괜찮겠지.

판타이탄 ‘엑시리얼 온드미온’은 편하게 생각했다.

그도 일단은 괴수.

사랑스러운 계약자의 행복을 지킬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찌 되든 상관없다.

“소년이여. 옳은 길만이 정답은 아니다.”

“흠….”

“그대는 우리와 비슷하지만 같진 않다. 아름다운 소녀들을 위해 가끔은 휘어지는 것도 좋지 않은가.”

“그야, 뭐. 흐음.”

“늦지 않게 선물을 이용하길 고대하겠다. 솔직히 말해, 소년에게 나쁜 제안도 아니지. 유감스러운 미모들이 아니잖은가.”

외모차별적인 짓궂은 화법조차 정중하게 소화하는 엑시온.

얼굴이 살짝 불그스름해진 유키 짱에게 ‘말괄량이 왕비님. 여성호르몬 분비가 많은….’ 어쩌고 하면서 생물학적인 견해로 충고 아닌 충고를 한다.

이에 머리카락을 수줍게 매만지며 망설이던 일본의 미소녀는,

“용사라면 여자의 용기를 존중해, 예요. 카레 짱.”

“...그렇겠지.”

공주님을 울리는 것도 정의에 어긋날 것이다.

그렇다고 바로 승낙하면 ‘여자 몸을 노리는 변태!’라는 오해를, 진심을 들킬 것 같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 말할지 고민하던 무일이었으나…!

등 뒤에서 껴안아온 선지혜 때문에 자주적인 판단은 중단됐다.

끈적한 목소리가 그에게 속삭인다.

“나는 봉인을 풀 준비가 끝났어.”

어떤 봉인?

묻지 않기로 했다.

< [32화-3] 배를 품은 달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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