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화-2] 배를 품은 달 >
제주도에 원주민이 살고 있었나?
선지혜는 몰랑몰랑한 수호자 문팽이가 둥글게 말아준 촉수 한가운데 엉덩이를 끼운 채 편안히 누워있었다.
튜브 위에 앉아서 물장구치는 아이처럼.
자세히 보면, 계약자가 ‘중력’에 끌려가지 않도록 수호자가 세심하게 붙잡고 있다.
문팽이는 별거 아니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응. 맞아. 지금은 원주민이 문제가 아니지.’
선배 모르게 사람 한둘 죽는 것쯤은 아무래도 괜찮다. 그보다는 제주도의 면적을 아주 많이 넓혔다는 게 중요하다.
잘했다고 칭찬해주겠지?
넓어진 제주도에는 훗날 멍청한 날치, 볼트윙이 처박아도 끄떡없는 ‘러브하우스’를 지을 계획이다.
둘만의 신혼여행 별장!
목포부터 제주도까지 태백산맥(!)으로 다리(?)를 놓으면 바퀴 달린 승용차로도 간단히 이동할 수 있을 것이다.
단! 일에는 순서라는 게 있다.
우선은 신혼집이 될 목포부터 꾸미는 걸로….
“주모님!”
“왜? 페이.”
“뒤에서 뭐가 계속 팡팡 터지는데 정말 괜찮을까요?!”
배가 침몰한 뒤에도 물에 젖지 않은 화약들이 끊임없이 폭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페이 링의 심장은 덜컹 내려앉는 심정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위험한 쇼핑이 어디 있어!
집에 ‘전자파 여우’가 숨어들었다는 제보를 받고 급히 회군하는 길이다. 제주도 한라산을 밀어버린 것도 따져보면 우회할 시간이 아까워서였다.
아니었다면 원래 목적대로 등껍질을 꽉꽉 채운 후에 돌아왔을 것이다.
물론, 지금도 이미 상당했다.
한국, 중국, 일본, 대만, 필리핀, 인도네시아, 호주 등등….
그만큼 배 갑판에 새겨진 국기도 다양했다.
마법처럼 물속에서 떠올라 들러붙는 구축함과 항공모함, 해양요새는 그저 신통방통할 따름이다.
콰앙!
계속되는 폭발음만 없으면 편안히 감탄했을 텐데.
깜짝깜짝 놀라면서 말할 기운이라도 있는 페이 링이랑 달리, 판판 소는 완전히 사색이 되어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안전하다는 건 알지만 혹시라도…!
작가의 풍부한 상상력이 본인 자신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저 배들을 해체해야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엄살은.”
“아!”
“모르긴 몰라도 사고로 많이 죽을걸~♪”
그녀들은 안전하게 운반하면 그걸로 끝이다.
하지만 도착하는 즉시, 이 위험천만한 전함(戰艦)들을 분해해서 재활용해야 하는 기술자들은 정말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
아니, 모르는 게 아니라 정말 그렇다.
그런 사람들도 있으니, 겨우 운반하는 걸로 겁을 집어먹어서는 안 된다고 페이 링은 마음을 다잡았다.
“그런데 전파녀가 누구예요?”
“있어. 일본 애니메이션으로 무장한 내숭 덩어리가.”
내숭이라면 주모님도 만만치 않은데요.
오래오래 살면서 주인님 아이도 낳고 싶은 페이 링은 말을 아꼈다.
“육지가 보여요!”
“응. 좀 옆에다가 주차할까.”
문팽이를 정말 자가용으로 아는 선지혜. 그런 계약자의 말에도 군말 없이 목적지 목포에서 살짝 빗겨난 장소에서 딱 멈추는 왕이었다.
한라산을 밀어버릴 때조차도 막힘 없이 전진하던 슈퍼달팽이가 여인의 한마디에 선다는 것부터가 이미 기적의 영역이었다.
문팽이의 촉수 도움을 받아 땅에 착지한 세 여인.
그 후에는, 지형을 훼손하지 않을 만큼 작은 괴수를 타고 저택까지 이동했다.
선지혜의 눈에 불똥이 튀겼다.
“거기! 못생긴 일본산 꼬마!”
“누, 누구…?”
“바로 너! 선배에게서 당장 떨어져! 나쁜 말로 할 때!”
무일의 옷자락을 잡고 있던 귀여운 에쏘드에게 거침없이 못생겼다고 선언하는 ‘9종 계약자’의 패기였다.
분홍색 불량식품처럼 생긴 계집애가 어디서!
넋 놓고 있는 ‘못생긴 청년’을 지나쳐 쭉쭉 달려간 선지혜는 그대로 ‘착해 빠진 왕자님’ 앞에 멈췄다.
마음이 치유되는 기분이다.
쇼핑하는 내내 비명만 지르던 두 하녀(페이 링, 판판 소) 때문에 쌓였던 짜증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그 뒤편으로 폭죽처럼 배들이 터지는 굉음이 울렸다.
중력을 해제하자마자 배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린 충격에 연속적으로 폭발한 것이다.
아주 요란하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달팽이 왕이었다.
거기까지 본 무일이 말했다.
“...수고했어.”
“응.”
위험한 불꽃 쇼가 있었지만, 산맥을 연상케 할 만큼 쌓인 고철의 양이 줄어드는 마법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것들을 전부 재활용하기도 쉽지 않으리라.
무일은, 선지혜가 쇼핑해온 물건들을 보면서 100년 전의 세계대전이 얼마나 일방적이고 암담했는지 알 수 있었다.
...현재는 반대로 일방적인 양상을 띠고 있었다.
사람이 괴수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아우….”
못생겼다는 소리를 들은 사쿠라는 크게 풀이 죽었다.
선지혜와 판박인 한세리가 옆에서 ‘이게 바로 예쁘다는 거야!’라고 잘난 척하며 부채질하고 있었다.
까놓고 말해서, 사쿠라도 예쁘다. 저 정도 수준이면 이젠 보는 남자의 취향에 따라 갈린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 보는 남자.
‘용사의 정령’에게 ‘예쁜 여자’의 기준은 ‘싱크로율 99% 용사님의 심미안’이다. 그래서 못생겼다는 발언에 울상만 짖고 반박 못 하는 사쿠라였다.
“배고프지? 애는 그만 괴롭히고 들어가서 밥이나 먹자.”
“응.”
“네에~.”
에쏘드를 울린 주모자인 ‘선지혜 쌍둥이’가 거의 동시에 대답하며 저택으로 들어갔다.
망연자실해 있는 키바 카즈마를 힐끔 보며 어깨를 으쓱한 무일은 유키 짱에게 어떻게든 해보라는 눈빛을 보냈다.
유키 짱은 상큼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보다 저기, 빈혈로 고생하는 아가씨들부터 챙겨주는 게 어떨까, 카레 짱!”
키바 카즈마에게 피를 제공한 여인들.
말은 안 했지만, 서로를 지탱하며 선 그녀들은 상당히 힘들고 위태로워 보였다.
‘...노블레스. 썩 좋은 무기는 아니네.’
인류를 구하기 위해 인류를 고생시킨다면 그게 무슨 소용일까.
야생괴수에게 살해되는 것보다야 훨씬 낫겠지만, 노블레스는 적극적으로 권장할 방법은 아닌 것 같았다.
다른 강화법이 시급하다.
역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가더발트’.
뱀페스트의 힘하고 합쳐지면서 얼마나 강해졌는지, 그리고 앞으로 더 얼마나 강해질지, 무일 본인도 비교할 대상이 없어서 이젠 어림짐작조차 안 됐다.
“빈방이 많으니 들어와서 편안히 쉬십시오.”
갑자기 손님이 확 늘어나 버렸다.
하지만 ‘정비과’에서 확충될 인원까지 고려해서 준비된 식량은 넉넉한 편이었다. 그 재료를 요리하는 게 문제였지만, 에쏘드가 둘이니 정말 순식간이었다.
물론, 숙련도의 차이는 있었다.
일본에서 공주님처럼 지낸 사쿠라는 칼질부터 서툴렀다. 반대로, 한국에 온 이래로 용사님의 뒷바라지를 꼼꼼히 해온 한세리는 프로였다.
“아우….”
“이래야 용사님의 연인이지!”
잔뜩 움츠러든 사쿠라에게 득의양양하게 자랑하는 한세리.
슬슬 언니가 아니라 계모(繼母)의 조짐마저 보였다.
“후우….”
수호자 사쿠라처럼 의기소침해진 건 계약자도 마찬가지였다.
키바 카즈마는 숨만 쉬는 송장 같았다.
밥을 씹지도 않고 삼키듯 후루룩 넘긴 그는, 이 뒤로 창밖의 바다(괴수가 우글거려서 수산시장 같다.)를 멍하니 볼 뿐이었다.
저대로 괜찮을까?
자신들의 에쏘드가 한국에 가 있다는, 그것도 ‘진짜 용사’ 옆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식겁한 일본 정부는 완전히 난리가 난 모양이다.
일본 총리 ‘코죠 카즈마’가 아들에게 ‘네가 지금 제정신이냐!’라며 역정 내는 통화소리가 듣기 싫어도 방음벽 너머로 들려왔다.
“누가 뺏어갈 것도 아니고, 너무하네.”
청각이 예민한 무일은 쓰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사람을 완전히 ‘유력한 유괴범’ 취급한다.
그걸 부정하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에 가까웠다.
역사와 전통이 지나치게 짧은 ‘스콜레옹 포르소’로 집을 옮기는 데 실패한 사쿠라가 ‘현재 집’을 돌려달라고 계약자에게 애걸한 탓이다.
키바 카즈마는 당연히 ‘안 돼!’라고 답했다.
그리고 계약이 깨져버렸다.
“선배!”
“...지혜. 왜?”
“내가 좋은 선물을 줄게!”
“선물?”
“응.”
딱히 [예감]은 아니지만, 그 선물이란 걸 받으면 좀 많이 귀찮은 사건에 휘말릴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늘 그랬듯이.
하지만 그렇다고 안 받을 순 없다.
후배의 호의를 저버릴 만큼 그는 인정머리 없지 않다. 설사, 나중에 후회하게 되더라도 일단은 받고 보는 것이다.
“뭔데? 줘봐.”
“짠!”
“...단검이네. 주워서 가져온 거야?”
“응.
전함과 모함 등을 건져오는 과정에서 달려온 모양이다. 하기야, 그 안에 승무원도 있었을 테니 이런 게 나와도 하등 이상할 것 없다.
단검 상태는 무척 양호했다.
요즘 만들어지는 MID 단검에 비하면 아무래도 절삭력이 떨어질 것 같지만, 무일은 그래서 더 마음에 들었다.
에쏘드와 스콜레옹 포르소는 베는 손맛이 없다.
괴수가 아니면 그냥 공기처럼 쓱쓱 토막 내는 바람에 손끝의 감각이 무뎌지는 것 같아서 걱정이다. 그런데 이거라면 딱 적당할 것 같다.
카르 4세에게 단검이 없느냐?
그건 또 그렇지 않다. 수렵에는 짧은 단검이 정말 쓸모가 많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은 없다.
원정대 도중에 중국을 도와주고 곧바로 목포에 상륙하면서 발이 묶인 탓이다.
그래서 특공대장 집무실에 있는 다양한 종류의 단검 중 단 한 자루도 현재는 소지하고 있지 않다.
한세리에게 부탁?
재료만 있으면 뭐든 만들 수 있는 에쏘드가 못 만드는 게 ‘생명’과 ‘검’이다. 창이나 둔기 같은 무기는 다 돼도 ‘검’이라고 정의된 것만은 할 수 없다.
집을 양산하는 반칙은 할 수 없다고 할까.
당연히 무일로서는 이 선물이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선지혜가 웬일이래?
“검집이 없는 게 아쉽네.”
“원래 있었는데 오다가 떨어트렸어.”
요염한 눈웃음을 지으며 선지혜는 솔직하게 말했다.
단, 검집을 버리다시피 고의로 떨어트렸다는 사족은 달지 않았다. 단검의 이전 주인의 이름과 국적이 검집에 새겨져 있던 탓이다.
역사책에도 언급된 ‘해군 제독’이다.
모두가 진다고 단정했던 3차 세계대전에서 눈부신 활약을 보여준 명장이지만, 상대가 인간이 아니었던 4차 세계대전은 답이 없었다.
얄짤 없이 함대와 수장(水葬)!
이 단검은 파란만장했던 ‘근대역사’와 함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흠. 검집은 세리에게 만들어 달라고 하면 되니.”
재료인 ‘괴수의 피’라면 사방에 널렸다.
이 저택에는 없는 게 없지만, 한세리는 어떤 요리에도 어울리는 ‘마법의 조미료’를 창조해서 쓴다.
썩 바람직하진 않지만, 그 조미료가 들어가느냐에 따라 음식 맛이 확 달라져서 묵인해주고 있다.
이런 것밖에 해드릴 게 없다고 본인은 의기소침해 있지만 말이다.
그러니 오랜만에 멋진 검집을 만들어 달라고 해보자.
그때,
“저기…. 저…. 그러니까….”
일본의 에쏘드, 사쿠라였다.
저택에 손님으로 와있는 일본인들은 한세리가 아닌 그녀가 챙겨주고 있었다.
그래서 일이 힘들다거나 싫어서는 아닌 것 같다.
그냥 뜻대로 안 돼서 우울해 있던 에쏘드 소녀는 설거지 도중에 무일과 선지혜의 대화를 듣고 쪼르르 달려온 것이다.
“왜, 사쿠라.”
“아웅…. 저…. 괜찮으시면 제가 만들어드릴게요.”
“검집을?”
“네. 집안일은 서툴지만, 검이라면 제법 안목이 있어요.”
무일은 사쿠라의 집(장검)이 들어가는 검집을 떠올려보았다.
정말 괜찮았었다.
현재, 그의 허리에 채워진 ‘카르세리안 레이소’의 형태를 한 에쏘드의 검집은 한세리 작품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썩 좋다고 하긴 힘들다.
중국의 에쏘드 ‘메이(梅)’가 애용하던 중국 스타일인지, 고집스럽게 보석을 박고 용을 그려 넣는 게 영 아니었다.
...그렇다면 좀 부탁해볼까?
딴 에쏘드에게 시켰다고 한세리가 칭얼댈 모습이 선했지만, 사쿠라를 자꾸 놀려대니 기를 좀 죽여놓기로 했다.
엘퍼러는 ‘미소녀’에게 단검을 넘겨줬다.
그리고는 싱크로율 99%의 자상한 용사님 미소로 말했다.
“그럼, 부탁할게. 사쿠라.”
“아…! 네! 용사님!”
< [32화-2] 배를 품은 달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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