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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수처럼-132화 (132/287)

< [32화-1] 배를 품은 달 >

[32화] 배를 품은 달

학명: 하이블(고대의 고대 악마)

서식지: 불명

특징: 천마라고도 일컬어진다.

위험도: 8종 일반

비고: 팔씨름을 논하지 마라!

***

과학자뿐만 아니라 인류가 느끼는 큰 의문은 ‘괴수는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고차원적인 내용이다.

2,222년 2월 22일 22시 22분….

이런 시간 때문에 ‘하느님의 창조물’이 심판을 내리러 왔느니 어쩌니 해도, 기원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가장 큰 호응을 얻었던 학설이 있었다.

음지에서 활동하던 ‘천재 미치광이 과학자’가 동식물의 유전자를 조작해서 괴수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계약자’에 대해서는 시원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로니콘, 세이랑, 와이츠….

전설 속에 등장하는 고대의 괴수를 재현, 그것도 수천 가지 종을 한순간에 전 세계에 뿌린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였다.

그럼 뭐지? 도대체 뭐야?

여기에 대한 해답은 의외로 매우 가까이에서 나왔다.

『용신(龍神)』

인간 알기를 ‘멍청한 원숭이’로 취급하며 무시하는 괴수들이지만, 용들은 의사소통이 원활하게 되는 몇 안 되는 괴수다.

용들은 한결같이 말했다.

차원이동.

공상과학 같은 얘기지만, 물리법칙을 무시하는 괴수이기에 가능하다. 아니, 괴수가 물리법칙을 무시하는 건 ‘다른 차원’의 생명체라서 그렇다.

과거에는 한두 마리가 이탈해서 넘어오는 수준이었지만, 원숭이들의 싸움(3차 세계대전) 후에 급속도로 자연의 균형이 깨진 게 원인이다.

평행이론이란 게 있다.

같은 시간대를 공유 중인 지구가 여러 개 겹쳐있다는 차원이론이다.

“그래서?”

“모두가 아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흥! 싱겁긴.”

용신뿐 아니라 모든 괴수가 하나같이 입을 다물었다.

아리따운 계약자가 아무리 귀엽게 졸라도 ‘내가 말해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라고 선을 긋듯 알려주지 않았다.

하지만 단언할 수 있는 게 있다.

괴수의 등장으로 지구에서 피해를 본 건 ‘인간’뿐이란 것이다.

멸종위기니 어쩌니 했던 동식물은 왕성하게 늘어났고, 오존층 파괴와 해수면 상승 등의 자연문제가 차츰 해결됐다.

동식물이 살 수 없는 원인인 단단한 콘크리트가 매설된 대지와 호수 등은 강력한 괴수들이 뒤집어엎거나 잘게 부숴버렸다.

아예 주식이 ‘방사능’이나 ‘폐기물’인 괴수도 있다.

“저는 인류의 숫자가 더 줄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더? 미친 새끼.”

“남성의 숫자를 지금보다 더 줄이려는 분께 그런 말씀을 들을 줄 몰랐군요.”

이미 세계의 80% 이상이 여성이다.

그렇다고 여성의 사회공헌도가 남성을 압도하는 것도 아니다. 제3의 성별로 취급하는 ‘계약자’를 제외한 여성은 밥만 축내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럼에도,

“남자는 전부 쓰레기니까!”

공주님처럼 곱게 자란 계약자들에게 예쁘다고 칭찬하며 노예처럼 부려 먹는 남자들을 증오한다.

남자들은 ‘노블레스’가 등장하며 본색을 드러냈다.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눈앞에서 헛소리를 지껄이는 ‘노블레스’도 예외가 아니다.

“저는 둘 다 쓰레기라고 봅니다.”

“......”

“......”

낡은 오두막에서 대화하던 남녀 사이에 싸한 침묵이 흘렀다.

협력하기 위해 만났으나 ‘전부’와 ‘절반’을 놓고 의견이 맞지 않은 탓이다.

“당신도 계약자만 남아야 한다는 데에는 이견 없겠지?”

“그렇습니다. 아름답고 순결한 여자들만이 세상도 아름답고 깨끗하게 바꿀 수 있습니다. 이건 너무나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럼, 됐네.”

“뭐가 됐다는 겁니까?”

“목적이 일치했다는 거지.”

계약자를 질투하는 못생긴 여자들.

같은 여자지만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부류다.

자연을 숭배하는 단체 ‘그린포스(Green Forces)’가 무슨 생각 중이던 ‘계약자’를 공격하지 않겠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나중에는 박멸해야겠지만.

그린포스의 주축은 노블레스다. 쓸모가 많다는 건 인정하지만, 여성우월사회를 재건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다.

여성을 노예로 부리는 남성.

뱀페스트와 함께 반드시 없애야 하는 족속이다.

중국 북해빙궁 궁주 ‘아이밍 리’는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반대로,

“...당신의 생각쯤은 능히 짐작됩니다만, 지금은 가만히 있겠습니다. 약육강식 또한 자연의 이치. 누가 약자인지는 훗날 결정하지요.”

“호호! 남자 주제에 도전?”

“수컷을 얕보지 마십시오. 충고입니다.”

그린포스 단장 ‘다윙 밀리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공식, 무소속 에쏘스트.

특수체질이 아닌 정신력과 에쏘드로 뱀페스트를 억누르고 지배 중이다. 모든 나라에서 바라는 이상적인 계약자.

오직, 엘퍼러만 이룩했다는 경지!

하지만 그의 ‘신념’은 인류와 국가에 대한 충성이 아니다. 반대로 국가를 붕괴시키려 했기에 아주 오래전에 추방됐다.

아니, 과거는 아무래도 좋다.

진정한 에쏘스트라 할 수 있는 ‘다윙 밀리언’은 눈앞에 ‘7종 계약자’쯤은 간단히 쓰러트릴 수 있는 실력자다.

자연을 아끼는 용사.

그렇기에, 자연의 일부인 괴수와 소통하는 계약자가 막돼먹어도 기분 상하지 않는다.

이 또한 암컷의 도도함, 자연의 섭리일지니.

“이야! 멋진 풍경인데!”

“......”

“......?!”

누군가 이 비공식 회담에 참견했다.

북해빙궁 궁주 ‘아이밍 리’는 서둘러 뒤로 물러났고, 그녀의 앞을 수호자 ‘프린스트’가 막아섰다.

그린포스 단장 ‘다윙 밀리언’은 허리에 찬 에쏘드에 차분히 손을 얹었다. 언제든 눈앞에 침입자를 베기 위해.

그 침입자가 말했다.

“각각 아시아와 유럽에서 알아주는 테러리스트 두목이잖아? 그래서 더 섭섭하네. 이런 재미난 자리에 아메리카의 나를 쏙 빼놓다니!”

말투는 남자 같지만, 엄연한 여자였다.

그녀의 팔다리에 채워진 수갑과 족쇄에 연결된 쇠사슬이 중간에 끊긴 채 질질 끌려오고 있었다.

하체에는 현대적인 디자인으로 미화한 정조대(貞操帶)가 팬티를 대신하고 있었고, 상체는 사과를 반으로 자른 모양새의 젖가슴이 탱탱하게 흔들거렸다.

...노출증 변태녀?

한껏 벗고 다녀도 될 만큼 늘씬한 몸매의 소유자이긴 했다. 하지만 ‘미친년’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은색 날개’가 보였다.

아름다운 얼굴을 마무리한 백금색 은발(銀髮)이 곁들어지면서 그녀로 하여금 천사를 연상케 했다.

사악하게 올라간 입꼬리가 그 분위기를 다 깨기 전까지.

“너로군. 브라헨티나에서 감추려고 애쓰던 폐기물이.”

다윙 밀리언은 적대감을 지우지 않았다.

그녀는 순수한 괴수가 아닌 과학의 실패작. 아니, 지나치게 성공적이라서 문제가 된 신개념 노블레스였다.

뱀페스트가 여자를 숙주로 삼도록 혼란을 준 결과물.

특수체질이지만, 여성이기에 ‘여성의 피’가 모자랄 일은 없다. 그야말로 완벽한 뱀페스트라고 봐도 무방한 노블레스.

그건 불가능하다고 모든 선진국에서 단정했던 상상 속의 생명체를, 브라헨티나에서 기적적으로 ‘한 마리’ 성공했다.

엘퍼러를 재현할 수 없는 것처럼 두 번은 무리인 우발(偶發)의 산물.

“천한….”

아이밍 리가 눈살을 찌푸렸다.

남자(과학자)들에게 장난감처럼 농락당한 ‘여자의 수치’가 어디서 끼어드느냐는 불쾌감을 드러냈다.

레이디 가브리엘.

처음에는 ‘희망’을 담아 천사의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그건 지나친 낙관론이었다.

아시아에서는 문팽이와 엘퍼러로 난리법석이라 정보가 늦지만, 지구 반대편인 아메리카에서는 ‘가브리엘’로 난리였다.

그녀가 연구실에서 탈옥한 지 얼마 안 됐기에 아직 크게 알려지지 않은 것뿐이다. 브라헨티나에서 정보를 차단하기도 했고.

가브리엘은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탁자 위에 걸터앉았다.

정조대의 금속음이 아이밍 리에게는 무척 거슬렸다.

“지구를 반 바퀴나 날아온 내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좀 봐줘. 이 아지트를 찾는 건 더욱 어려웠다고.”

“...너를 보며 인류의 죄를 되새김하겠다.”

“흥! 본녀 눈에 자주 띄지 마라. 입맛 떨어지니.”

대륙의 테러리스트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당연히 이 만남이 쉬울 리 없다.

하지만 첩보위성과 감시카메라, 모짜리나 바글버글 등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장소가 있다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대한민국 제주도.

와이츠 ‘미카헬로 싸이어’가 대한민국 민심을 휘어잡기 위해 중국과 일본을 상대로 싸운 증거물이 바로 ‘제주도’와 ‘독도’다.

어떤 나라도 여기 두 섬과 인근 해안을 침범, 감시할 수 없다.

과한 처사 같지만, 다시는 영토문제로 시간을 허비하지 않겠다는 용신의 귀찮음이 물씬 묻어난 결단이었다.

무시하면?

전쟁선포로 알겠다!

한국인들이 열광할 법한 발언은 다 해준 와이츠였다. 하지만 그게 빈말인지 확인할 만큼 대범한 나라는 여태 없었다.

그래서 생겨난 사각지대.

수시로 한국에서 순찰 나오지만, 담당 공무원이….

드드드드!

마음 편히 놓고 대화하던 셋은 갑작스러운 지진에 눈을 크게 뜨며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믿기지 않는 광경을 보았다.

한라산보다 높은 물체가 바다를 가르며 기어가고 있었다.

그 둥그스름한 표면에는 철로 된 전함과 항공모함, 전투기 등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붙어있었다.

당연히 이리저리 부딪히며 사고가 났다.

쾅! 콰광! 펑!

선내(船內)에 실어져 있던 미사일과 어뢰 등이 폭발한 것이다. 그중에는 도시를 날려버릴 만큼 큰 규모도 있었다.

하지만 그 거대한 물체의 움직임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아니,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놈에게 끌려간다!”

“꺄아?!”

“재밌는데?”

다윙 밀리언과 레이디 가브리엘은 자력으로 탈출했다. 그리고 속수무책으로 빨려가던 아이밍 리는 수호자의 도움으로 간신히 벗어날 수 있었다.

저건 도대체 뭐지?

세 테러리스트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그 거대한 물체는 앞길을 가로막은 제주도 한라산을 쑥 밀고 지나갔다. 높이 1,955m에 달하던 휴화산은 불도저에 밀리는 흙더미처럼 쭉쭉 밀려났다.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렇다고 결과마저 간단하지는 않았다. 제주도의 한가운데 자리한 거대한 산은 좌우로 밀려난 부스러기만 남긴 채 사라지고 없었다.

한라산이 있던 자리에는 갯벌처럼 반듯한 대지만 남았다.

“......”

“......”

“......”

그리고 멀어져간다.

한라산을 바다로 밀어서 빠트린 거대한 물체의 윤곽이 드디어 잡혔다. 등껍질에 수많은 철갑선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달팽이였다.

그 뒷모습.

멀어지는 방향은 북쪽, 대한민국 본토가 있는 곳이었다.

“문팽이….”

“잠깐! 저게 문팽이라면 여긴-!”

아이밍 리의 비명은 묻히고 말았다.

왕의 추종자들이 세 테러리스트를 향해 달려들었던 탓이다.

“캬하하하! 신 난다!”

가브리엘이 손발의 쇠사슬을 사방으로 휘둘렀다.

하지만 곧 어마어마한 수의 꽃게 무리에 질린 그녀는 바람 빠진 웃음을 끝으로 하늘 높이 달아났다.

마음만은 그랬다.

쾅!

무언가에 얻어맞고 평평해진 제주도에 처박혔다.

쉽게 내빼게 해줄 것 같지 않았다.

“이번에는 8종인가.”

에쏘드를 뽑아든 다윙 밀리언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근처에서 서성이는 괴수를 베고 그 피로 ‘용사의 정령’을 소환했다.

상대는 왕의 파수꾼.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괴수라고 일컬어지는 ‘쉬임프’였다. 설렁설렁 상대하려 했다가는 ‘궁극의 에쏘스트’라도 죽는다!

“제주도는 안전하다며!”

아이밍 리가 비명을 내질렀다.

땅에 처박혔던 몸을 일으킨 가브리엘의 표정도 단단히 굳어있었다.

이런 달팽이 같은 경우가…!

세계를 상대로 흉악한 음모를 꾸미던 악당들의 회담은 거기서 중단됐다. 그리고 어떻게든 이 자리를 벗어날 궁리를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 사태의 원흉이 멀리서 중얼거렸다.

“흐응~. 뭐가 있었나 보네.”

< [32화-1] 배를 품은 달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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