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4] 협박과 경고가 뭐? >
‘야욕은 좀 눌러두는 편이 좋겠지.’
인공위성으로 똑똑히 보라고!
이건 ‘키바 카즈마’뿐만 아니라 세계에 보내는 경고다.
뱀페스트와 에쏘드의 조합이 좋다는 건 부정할 수 없지만, 성능만 믿고 날뛰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 가르쳐줄 생각이다.
프로사냥꾼은 옛날부터 쭉 [예감]과 [예측]으로 살아왔다.
도구가 좋아졌다고 초심을 잃어선 안 된다.
스릉-.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면서 ‘스콜레옹 포르소’가 세상 밖으로 나왔다.
에쏘드 계약자가 됐으니 에쏘드를 애용할 것 같지만, 실제로 무일은 ‘세계에서 2번째로 날카로운 절단기’를 더 자주 쓴다.
고위괴수가 날마다 보이는 게 아니란 이유만이 아니다.
에쏘드는 ‘무엇이든 벨 수 있다.’는 속성도 있지만, 반대로 ‘아무것도 벨 수 없다.’는 요소도 함께 내포하고 있다.
상대의 강약(强弱)에 따라 절삭력이 달라진다는 뜻이다.
‘그러니 저 에쏘드 성능은 딱 스콜레옹 포르소겠지.’
그렇다고 해도 ‘파괴불가’ 속성을 띈 에쏘드와 달리 날이 상할 것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어울려줄 생각 없고, 웬만하면 비싼 칼날에 상처 없이 끝내기로 마음먹은 무일이었다.
키바 카즈마 주변에서 해롱해롱하는 여인이 12명.
이 짧은 시간에 카르 3세가 흡혈한 여성의 숫자였다.
“카즈마 씨. 준비는 끝났습니까?”
“...막 끝났습니다. 그런데 한 상은 너무 여유만만하시군요. 제 무기는 에쏘드입니다. 스치기만 해도 위험할 겁니다.”
둘 다 뱀페스트를 심장에 달고 있다.
에쏘드 계약자이기도 하니 쇼크사는 피하겠지만, 타격이 상당히 클 거다. 그리고 스치는 정도를 넘어서면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
‘키바 카즈마….’
용사보다는 영웅에 어울리는 남자다.
실력도 ‘야망’을 향해 달려간다는 뚜렷한 목표의식과 자긍심으로 쌓은 [예감]이 절대 작지 않았다.
게다가 [예측]도 훌륭한 편.
카르 4세는 비싼 장비로 온몸을 보호하고 있지만, 정말 스치기만 해도 위험하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그 점을 확실히 비집고 노릴 생각이겠지.’
고장 났는지 의심스러웠던 엘퍼러의 [예감]이 잔잔한 멜로디처럼 울리기 시작했다.
자장가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와 반대로,
카르 4세가 검을 뽑은 이후부터 카르 3세의 머릿속은 웅장한 오케스트라와 팡파르의 연속이었다.
원치 않더라도 눈이 확 뜨인다고 할까.
“제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에쏘드는 몰라도 가더발트는 사용할 테니.”
“흡…!”
키바 카즈마는 숨을 들이켰다.
방금 발언은 오만을 넘어 만용이 아닌가!
노블레스를 상대로 ‘평범한 사냥꾼’의 몸을 쓰겠다니! 그것이 얼마나 무리수인지는 노블레스의 힘을 체득한 키바 카즈마가 누구보다 잘 안다.
‘사람들이 띄워주니 보이는 게 없는 건가?’
그렇게밖에 달리 설명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적색경보를 울리는 [예감]이 이질적이다.
“분명 말했습니다, 저는 카르 4세라고.”
체력과 근력의 약세를 뒤집고 [반격]만으로 수많은 야생괴수를 베어 프로사냥꾼까지 오른 남자가 ‘카르 4세’다.
뛰어난 기교도 있지만, 그보다도 압도적인 정의(定義)가 체구와 재능, 장비의 한계를 벗어던지게 강요했다.
무일이 먼저 발을 뗐다.
노블레스가 보기에는 하품도 안 나올 정도로 느린 움직임.
“별명은 별명일 뿐!”
살짝 당황하던 카르 3세는 차갑게 응수하며 에쏘드를 휘둘렀다.
괴수의 힘이 담긴 말도 안 되는 빠르기.
하지만 그전에 이미 도착해있는 카르 4세의 왼손 손등이 칼날을 피해 옆면을 툭 쳐올리며 궤도를 비틀었다.
무일이 먼저 공격하는 모양새였지만, 노블레스의 속도가 모든 걸 뒤집었다.
[반격]의 발동 조건이 성립한 것이다.
조건반사처럼 휘두른 에쏘드를 흘러내고, 검밖에 모르는 애송이가 아니란 걸 증명하듯 기습적으로 차올린 노블레스의 발차기 간격 안으로 더욱 파고든다.
모든 동작은 사전에 짠 연극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막아낸다. 그리고 너무나 느려서 절대 닿지 않을 것 같았던 스콜레옹 포르소가 마침내 인간의 살을 공기처럼 베어냈다.
인간하고 다른 은색 피.
그대로 어깻죽지부터 사선으로 베어졌다.
‘조금 미안한걸.’
무일은 쓰게 웃으며 뒤로 훌쩍 물러났다.
순수한 인간의 힘은 아니었다.
자칭 ‘하렘의 왕’이 인간을 웃도는 힘을 보태고 있다.
그게 아니었다면 ‘4종 뱀페스트’ 힘에 ‘에쏘드’까지 사용해서 종합 ‘5종 괴수’가 된 카르 3세를 이길 수 없다.
그러나,
신장이 좀 자라고 근력도 올라간 무일은 능히 ‘맨몸’으로도 ‘5급 프로사냥꾼’이라고 자칭하기에 충분했다.
공방도 주고받았을 만큼 괜찮은 대결이었다.
“미, 믿을 수 없습니다! 순수한 인간에게 ‘에쏘스트’가 패한다니!”
키바 카즈마는 포효했다.
무일이 사정 봐주지 않았다면 스콜레옹 포르소의 칼날이 더 깊숙이 파고들어 심장이 잘렸을 것이다.
잘린 팔과 베어진 가슴은 이미 복구되어 있었다.
“헤에~. 세상이 참 빠르게 변하네. 에쏘스트. 어감이 괜찮은걸.”
참신하진 않지만, 이해하기 쉬웠다.
이 방면의 문외한이 아니라면 ‘에쏘스트’가 ‘에쏘드’와 ‘뱀페스트’의 합성어란 걸 쉽게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그나저나,
카르 3세의 눈이 살짝 뒤집힌 것 같다.
영웅의 사전에 ‘패배’란 없다. 그 대전제가 우위의 상황에서 깨지는 바람에 정신적으로 붕괴의 조짐이 보였다.
‘...생각이 잘 읽히는군.’
가더발트를 썼다고 확신하는 모양이다.
얄팍한 속임수라고 단정한다.
“그럴싸한 말로, 혼자 정의로운 척하지 말란 말입니다!”
황소처럼 돌진해오는 에쏘스트.
눈살을 찌푸린 엘퍼러가 해줄 답은 하나였다.
이번에야말로 ‘가더발트’를 착용하고 순식간에 ‘카르발트’가 되었다. 하지만 이건 잘못된 명칭일 것이다.
뱀페스트로 강화된 육신을 가더발트가 뻥튀기했다!
평범한 인간에게 괴수의 힘을 안겨주는 속옷을, 강력한 힘을 가진 흡혈귀가 입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게 눈앞에 펼쳐진다.
팅!
스치기만 해도 위험한 에쏘드 칼날을 검지와 엄지로 붙잡았다.
눈을 크게 뜬 카르 3세.
방금 공방하고는 아예 차원이 달랐다.
굳이 가르쳐주지 않더라도 이거야말로 ‘카르발트’라는 걸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 대처할 틈은 없었다.
덤프트럭에 치인 것처럼 몸이 붕 떠올랐다.
찰나지만, 정신을 잃었던 카르 3세는 이게 ‘살짝’ 몸을 밀친 결과라는 걸 깨닫고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당할 수는 없다고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하지만 그건 생각으로 그쳤다.
푹!
하늘에서 거의 수직으로 떨어진 ‘스콜레옹 포르소’가 벼락처럼 카르 3세 가르마를 관통하며 손잡이 앞까지 박혔다.
어디서 그가 멈출 것까지 예상한 한 수.
카르 4세가 애용하는 ‘무기 던지기’다.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무기 던지기’를 아무렇지 않게 저지른 프로사냥꾼은, 뇌가 파괴되면서 활동이 정지된 흡혈귀에게 걸어갔다.
그리고는 검을 쑥 뽑았다.
너무나 많은 ‘괴수의 피’를 부활에 소모한 키바 카즈마는 비틀거리며 간신히 몸을 일으키는 게 전부였다.
이미 노블레스 1단계에도 못 미치는 수준으로 떨어져 있었다.
“힘을 얻었지만, 신념을 잃었군요.”
위풍당당에 보이는 무일이었지만, 닿기만 해도 위험한 에쏘드를 맨손으로 잡았던 탓인지 살짝 현기증이 돌았다.
정말 잠깐이었다.
하지만 가더발트는 급격히 힘을 잃었었고, 자칭 ‘하렘의 왕’이 아프다고 징징 짰던 것 같기도 하다.
스스로 살짝 자만했다고 자책한 무일은, 기대했던 것보다 한참 못 미치는 카르 3세의 실력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별명의 ‘3세’란 등수는, 그냥 순서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콜록! 우욱!”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저승에 다녀온 키바 카즈마는 기침과 헛구역질하는 것 빼고는 정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노블레스로 사냥은 제법 했지만, 죽음을 체험해본 적은 없었다.
늘 승리가 보장된 전투만 해온 탓이다. 뱀페스트의 재생은 종종 써봤지만, 지금처럼 부활로 구사일생해보기는 처음이었다.
너무나 압도적인 격차.
이조차도 전력발휘 한 게 아니란 사실에 공포마저 들었다.
【엘퍼러 / 9종 소형】
이건 농담이나 띄워주기가 아니었다.
며칠 전에 연맹에서 8종으로 격상된 아쿠버스가, 그에게 순종하는 태도만 봐도 최소한 ‘8종’이란 결론이 나온다.
애초에 무력은 8종이 정점(頂點).
노블레스가 MID 무기로 온몸을 도배해도 나올 수 없는 전투력이 ‘8종’이다. 잘 쳐줘야 6종이란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걸 극복하려면?
특수체질 아닌 사람이 정신력으로 뱀페스트를 초월해야 한다.
카르 4세처럼.
수시로 흡혈하지 않으면 힘을 못 쓰는 노블레스는, 뱀페스트의 최고점인 5종에 근접하는 일조차 어렵고 유지는 아예 불가능하다.
에쏘드로 저항?
당연히 시도해봤다.
특수체질 아닌 사냥꾼을 ‘에쏘드 계약자’로 만든 후에 뱀페스트에 감염시켜봤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식물인간』
흡혈귀의 지배를 이겨내지 못한 계약자는 심연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육체를 차지한 흡혈귀는 에쏘드가 억눌렀다.
그 결과, 육체가 붕 떠버렸다!
아무도 조종하지 않는 단백질 덩어리가 돼버린 것이다.
이렇게 안 되려면?
에쏘드 계약자가 자력(自力)으로 흡혈귀의 지배를 이겨내야 한다. 이건 에쏘드의 ‘특수 무효화’로 어떻게 해줄 수 없는 부분이었다.
용사의 자질하고도 깊게 연관된 부분이기 때문이다.
에쏘드는 ‘용사를 모시는 정령’이지 ‘용사를 만드는 정령’이 아니다. 그래서 용사가 갖춰야 할 자질 부분은 거의 도와주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실패!
하지만 한무일은 보란 듯이 성공했다.
심지어 기생 중인 뱀페스트는 ‘왕의 그릇’이었다. 얼마나 정신력이 두터우면 이게 가능한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카즈마 씨.”
“...네.”
“사냥꾼이 되십시오. 카르 3세가 되십시오. 지금처럼 힘에 집착한다면 [업보]에 곧 먹히고 말 겁니다.”
이미 그는 위험수위에 도달해 있었다.
도깨비 왕 ‘오니오프’가 버티고 있는 안전지대 ‘도쿄’라서 고위괴수의 기습을 안 받은 것뿐이다. 다른 나라 같았으면 진즉 죽음을 면치 못했으리라.
그만큼 ‘키바 카즈마’는 흡혈을 많이 했다.
힘에 취했다고밖에 할 말이 없다.
“흐윽, 흑! 으아앙!”
“...뭐지?”
뒤를 돌아본 무일은 그저 기가 막혔다.
한세리가 사쿠라의 언니라도 된 것처럼 머리를 토닥이고 있다. 그 무례한 손을 쳐내지 못하고 서럽게 울기만 하는 일본의 에쏘드!
용사가 정의롭다고 ‘용사의 정령’도 정의로우란 법은 없는 모양이다.
“용사님?! 제가 안 울렸어요!”
“그럼 뭔데?”
“부럽다는 얼굴로 손가락만 빨고 있길래, 힘내라고 한마디 해줬을 뿐이에요!”
“너희도 경쟁 같은 거 하냐?”
“물론이죠!”
에쏘드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좋은 스포츠카를 몰면 동료들이 부러워하는 것처럼, 모시는 용사의 자격여건에 따라서 ‘용사의 정령’ 콧대도 달라지는 모양이다.
고개를 끄덕인 무일은, 정원에 주저앉아서 펑펑 울고 있는 정령 앞에 쪼그려 앉았다.
사쿠라의 분홍색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힘들다고 울기만 하면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
“우웅…?”
“멋진 용사님을 내놓으라고 보채기라도 해야지. 한세리가 가출한 것처럼 뭐라도 해보렴.”
“뭐라도…?”
“그래. 뭐라도.”
싱크로율 99% 용사의 조언은 에쏘드에게 신탁(神託)이나 다름없다.
맹신(盲信)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눈물을 그친 사쿠라는 머리를 쓰다듬는 용사의 손길을 즐기며 ‘꼭’ 그렇겠다는 듯이 맹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참 착한 ‘미소녀’인걸.
엘퍼러는 가볍게 생각하고 넘어갔다.
< [31화-4] 협박과 경고가 뭐? > 끝
ⓒ 파르나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