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3] 협박과 경고가 뭐? >
‘쇼핑 중에 중력이 미끄러졌다던가?’
‘그래서 도쿄가 펑! 했다든가?’
위험한 발상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수호자와 계약자!
그걸 모르는 무일은 멀어지는 슈퍼달팽이를 보며 태평하게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황해(黃海)의 시원한 바닷바람을 만끽했다.
“드디어 조용해졌네.”
그의 손에는 어느새 종이로 된 문서가 한 다발 들려있었다.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중국 정보과’에는 한참 못 미치지만, 대한민국 정보과도 썩 나쁘지 않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외국도 아닌 자국의 도시 ‘부산’에 대한 자료가 허술할 리 없다.
그 증거로, 자료의 양이 얼마 안 될 줄 알고 페이 링에게 인쇄를 시켰다가 종이로 탑을 쌓고 말았다.
‘비싼 종이를 낭비하고 말았네.’
순수한 무게로 비교하면 웬만한 검보다 비싸지 않을까.
종이를 만들려면 펄프, 나무가 있어야 하는데 숲을 요란하게 베는 나무꾼을 괴수들이 가만 놔둘 리 없다.
그런 낮은 공급보다도 수요가 적어서 거의 찾아보기 힘든 종이로 왜 이런 짓을 했는지….
영화에서처럼 종이를 휙휙 넘기고 싶었던 게 분명하다.
직접 해보니 비싸고 자리만 차지했다.
스륵~.
하지만 종이 넘기는 소리와 동작이 사람을 차분하게 해주는 것 같다. 이것만은 디지털로 대처할 수 없는 부류일 것이다.
그런 보고서를 보면,
대한민국 부산은 심각한 고비를 넘겼다.
새로운 물결이 불면서 고인 물을 밀어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일시적인 효과란 걸 무일은 잘 안다.
지금은 상황의 추이를 지켜보기 위해 기득권층이 움츠러든 시기라서 무슨 일이든 잘 풀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상황과 분위기를 파악하고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면 차츰 과거로 돌아갈 것이다.
물론, 부산에 파견된 계약자 ‘고은별’도 만만치 않지만 말이다.
...정확히 따지면 수호자가 장난 없다.
【발키지어 / 7종 소형】
계약자의 젖가슴을 열렬히 사랑하는 천사!
이렇게 정의하면 될까.
아쿠버스가 등장하기 전까지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호자’로 불렸지만, 지금의 라미아 같은 인기는 전혀 얻지 못했다.
멍청해서?
계약자를 성희롱하는 낙으로 사는 ‘가슴 바보’인 건 맞다.
하지만 바보라서가 아니라 성격이 문제다.
외모는 고결한 천사인데 하는 행동은 악마보다 더한 악마! 수틀리면 사람과 사물을 가리지 않고 갈기갈기 분쇄한다.
발키지어 덕분에 목숨을 구원받은 사람보다 죽은 사람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그냥 나도는 게 아니다.
강력한 7종 계약자를 서울이 아닌 인천에 처박아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이젠 부산.
신고식으로 피바람이 예상된다.
‘그래도 외국에 비하면….’
한국은 매우 양호한 편이다.
국가가 망하는 아픔을 겪은 후라서 그런지 세대교체가 이루어진 후에도 계약자가 성실하고 착한 추세다.
그리고 그 성향은 수호자까지 물들인다.
서로 닮는다고 할 수 있는데, 발키지어를 보자면 ‘진짜 많이 구제불능’이 계약자를 잘 만나서 ‘그냥 조금 구제불능’으로 얌전해졌다고 할 수 있다.
“용사님! 뭘 보세요?”
“...알면서 뭘 물어.”
등에 업히듯 착 달라붙은 한세리는 싱글벙글 중이었다.
지나치게 엄격한 생활태도를 고수해서 싱크로율 98%였던 용사님이 드디어 99%를 찍었기 때문이다!
용사님 주위에 미녀가 우글우글!
마침내 그런 바람직한(?) 환경이 완성됐다.
물론, 늘 기웃거리는 미녀는 많았다. 하지만 이렇게 동거한 적은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아주 큰 쾌거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바다 건너서 원정도 온다.
“보고 싶었어, 예요! 카레 짱!”
일본 애니메이션 여주인공처럼 다이빙하듯 몸을 날린 미소녀.
피하면 대형사고가 날 것 같아서 붙잡아줬다.
그대로 포용 이상의 진도를 나가려는 ‘유키 짱’을 말리며, 아무래도 급조된 집이라서 레이더와 잠금장치에 허점이 많다는 걸 깨달았다.
갑작스러운 방문.
생명의 위기도 아니라서 전혀 [예감]하지 못했다. 점점 ‘무시해도 될 사소한 위기’의 허용범주가 올라가서 걱정이다.
“어…. 무슨 일이야, 유키 짱.”
“데이트하기로 약속했잖아, 예요!”
어떻게 잊을 수 있느냐고 칭얼대는 유키 짱.
하지만 정말 모르겠다!
내가 그런 ‘생명의 위기’를 느낄 약속을 했다고?
선지혜조차 특별한 날이 아니면 잡지 않는 ‘데이트’를 평화로운 날에 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흡혈귀에게 정신을 빼앗긴 적이 있었나?
그건 아니라고 단언했다.
그렇다면 어딘가에서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는 뜻이다. 무엇이었는지 곰곰이 생각하던 무일은 뒤따라 들어온 인물을 보고 깨달았다.
“아!”
“기억났어, 예요?”
“반말로 말해. 그리고 맞아, 기억났다! 하지만 그건 데이트신청이 아니라 몹쓸 인간에게 한 결투신청이었는데?”
일본을 지키는 7종 계약자를 성희롱한 카르 3세!
총리의 아들이기도 한 ‘키바 카즈마’를 보고 기억해냈다.
“상처 입은 내 마음을 위로해줘! 꽃단장까지 하고 나왔어!”
“...몸은 괜찮아?”
“하잇! 응. 순결은 지장 없어.”
당연히 괜찮을 것이다. 아니면 저 미청년이 살아있을 리 없다.
귀공자 같은 곱상한 얼굴과 달리 몸은 다부졌다. 유일한 흠이라면 눈빛. 표정은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것만은 감추지 못했다.
이건 [예측]할 필요도 없다.
적어도 카르 4세에게는 그랬다.
‘독선적이고, 오만하군.’
세상을 자기중심적으로 본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 자신감이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그에게 세상을 뒤흔들 힘이 있었다면 인류는 상당히 고달팠을 거라고 생각된다.
세상은 나만이 지킬 수 있다!
이런 마인드.
기술과 정보 독점에 대해서는 비난하지 않겠다. 그게 꼭 나쁘다고 단정할 수도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의 잘못된 점은 이거다.
세상은 내가 지키니 권력, 재물, 미녀도 모두 내가 가진다!
이런 공식과 결론.
사람을 가리지 않는 편인 카르 4세의 주관적인 판단으로도, 카르 3세는 그다지 협력하고 싶은 인물이 아니었다.
첫인상일 뿐이니 단정할 순 없지만.
“많이 강해졌군, 소년.”
“아…. 판타이탄.”
바늘이 가는데 실이 안 따라올 리 없다.
유키 짱의 수호자 ‘7종 특수, 판타이탄’은 이번에도 휴머노이드였다.
창밖을 내다보니 온몸이 흉기인 로봇, 판타이탄의 거대한 본체가 어느새 바다 풍경을 완전히 가리고 있었다.
“엑시온. 편하게 불러줬으면 좋겠는데.”
“아, 네. 엑시온.”
“좋군.”
말투 하나하나에서 신사라는 느낌이 물씬 풍겼다. 외모는 물론이고 옷차림은 일본 전통의상인 ‘기모노’로 짙은 회색이었다.
무서울 만큼 인간적인 일본의 판타이탄 ‘엑시리얼 온드미온’은, 딱 손님답게 점잖은 자세로 서 있는 미청년의 어깨를 툭 쳤다.
가만히 있지 말라는 뜻이다.
무일보다 상당히 오랫동안 탐색하고, 지금까지도 세밀하게 예의주시하던 카르 3세는 크게 심호흡하며 입술을 뗐다.
“갑작스러운 방문, 실례하겠습니다. 키바 카즈마입니다.”
정중한 인사는 나무랄 곳 없었다.
하지만 엑시온처럼 신사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편견이 아니라 프로사냥꾼의 직감이 그렇다고 답했다.
“반갑습니다. 저는 한무일. 카르 4세입니다.”
“...짧은 소개군요. 엘퍼러.”
“사람들이 잡다한 별명은 계속 붙이지만, 제가 인정할 수 있는 건 ‘카르 4세’뿐입니다. 조만간 국제적인 규칙을 따를 예정이지만.”
“겸손으로 알겠습니다.”
“그렇게 보셔도 무방합니다, 카르 3세. 일단은 편하게 계시면 됩니다. 그리고 저 뒤에, 일본의 에쏘드는 뭐라고 불러야 합니까?”
“사쿠라. 통역하면 벚꽃입니다.”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는다면 보는 순간 알았다고 할까.
계약자는 당연히 ‘키바 카즈마’였다.
그는, 몸에 뱀페스트가 들어있는 ‘노블레스’이기도 했다.
무일의 기억하고는 약간 차이가 있지만, 분홍색 머리카락을 양 갈래로 묶은 미소녀가 조심스럽게 벽 너머로 고개만 빼꼼 내밀고 있는 게 보였다
딱 봐도 정령이다.
얼굴은 완벽, 몸매는 비현실. 이보다 더 확실한 증거도 없다.
그 미소녀에게 쪼르르 달려간 한세리가 유치하게 ‘어때?’라고 뻐기는 표정을 지었다. 이를 보자마자 울먹이는 일본의 에쏘드!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어제 급조한 집이라서 은근히 불편한 점이 많지만, 편하게 쉬십시오. 결투는…. 원하는 때를 말씀하시면 언제든지 해드리지요.”
소중한 계약자를 성희롱한 그를 혼쭐을 내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직접 만나서 보니 약간의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는 [예측]이 나왔다. 성희롱을 부정하지도 않았지만, 긍정도 안 했다.
뭔가 말 못할 사연이 있는 것 같지만, 카르 3세의 눈빛을 보자면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것 같다.
도전적이고 욕망에도 충실하다.
즉, 야망이 크다는 뜻이다.
“그럼, 30분 뒤에 부탁합니다. 한 상.”
조금도 주눅이 들지 않은 키바 카즈마가 정중히 말했다.
보아하니 ‘흡혈’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이 자리에 얼굴을 내민 인원과 별개로 밖에 많은 여성이 대기 중이란 걸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어떻게 그걸 알 수 있는지를 묻는다면?
심장에 콩 박혀있는 자칭 ‘하렘의 왕’ 때문일 것이다.
무일은 선유나의 피를 흡수한 이후부터 기생 중인 이 거머리의 존재를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건 무일의 감각이 더 예민해졌기 때문이 아니다.
신체 일부를 담당하게 된 ‘하렘의 왕’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다는 증거다.
“알겠습니다. 30분 뒤에 밖에서 뵙지요.”
도전을 못 받아줄 건 없다.
나름 흡혈귀니 심장만 멀쩡하면 안 죽을 것이다.
전쟁에 임하듯 주먹을 불끈 쥐며 마음을 다잡은 키바 카즈마가 현관을 나섰다. 그리고 그 뒤를 사쿠라가 도망치듯 쫓아갔다.
한세리는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돌아와서는 엉겨붙었다.
그 즉시, 유키 짱의 눈에서 불꽃이 튀기며 자리 사수에 들어갔지만, 힘이 괴수가 아니라 정말 괴수인 한세리를 당해낼 순 없었다.
“유키. 우리는 손님이란 걸 잊으면 곤란해.”
보다 못한 수호자 판타이탄이 중재에 들어갔다.
기저귀를 갈아주며 직접 키운 여동생을 바라보는 오라버니 같다.
“우우…. 하지만 엑시온. 저 음란한 회장 짝퉁이….”
“헷!”
선지혜 짝퉁이라고 불린 한세리는 혀를 내밀며 유키 짱의 화를 돋울 뿐이었다.
이러다 ‘진짜’가 오면 정말 사달 나겠군.
전투능력은 정말 빵점이지만, 가사노동은 수준급인 ‘용사의 정령’은 계약자의 재촉에 입술을 삐죽 내밀며 차를 끓이기 시작했다.
귀한 홍차는 아니고 산에서 대충 공수한 더덕으로 끓인 차다.
하지만 유능한 가정부인 한세리는 능숙하게 맛을 우려내며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다.
‘정말 소중한 보조인 거 인정.’
전투력은 무일 혼자로도 차고 넘쳤다.
그러니 싸움 보조는 불필요.
반면, 한세리가 허드렛일을 대신 해주지 않았다면 시간도 많이 뺏길뿐더러 이 넓은 집은 며칠 만에 쓰레기장으로 변했을 것이다.
가사도우미를 고용한다는 방안도 나왔지만 아직은 시기상조였다.
여긴 복마전(伏魔殿)이었으니까.
가정부도 허투루 뽑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일단은 식객들이 알아서 해결하려고 했는데….
쭉 자취해온 ‘판판 소’는 자기 앞가림만 간신히 하는 수준으로, 작가이면서 졸지에 계약자도 되는 바람에 시간에 쫓기고 있었다.
매일 못생겼다고 구박받는 불쌍한 아가씨니 가만 놔두자.
그나마 중국 아미파에서 생활력을 키운 ‘페이 링’은 노예로서 더욱 실력을 갈고닦아서 좀 하는 편이다.
하지만 무려 8종인 아쿠버스의 계약자에게 가사노동은 안 될 말이다.
...선지혜?
이 넓은 저택을 어지럽히는 주범이다!
집이 완공되고 하루도 안 지나서 계단에 팬티를 흘린 여자다.
어떻게 흘릴 수 있지?
그 팬티를 밟고 미끄러진 한세리(정령은 심각한 몸치다.)는 멀쩡했지만, 계단이 크게 다치고 말았다!
그걸 뚝딱 고쳐낸 정비과도 참으로 용하고.
아무튼, 이런저런 이유로 정말 소중한 정령이 귀엽게 그를 불렀다.
“용사님~!”
“왜?”
“한 방에 혼쭐을 내주세요!”
“...아니. 나름 흡혈귀라서 성검(聖劍)으로 긁으면 쇼크사할걸. 조금 귀찮지만, 한 수 가르쳐주는 마음으로 사정 봐줘야지.”
저쪽은 진지하게 전심전력으로 나올 모양이지만, 이쪽은 그렇지 않다.
에쏘드가 아닌 ‘스콜레옹 포르소’로 상대해줄 생각이다.
깔보느냐고 묻는다면?
맞다.
달걀을 아무리 단단하게 만든들, 울룰루(세계에서 가장 큰 바위)를 깰 순 없다.
< [31화-3] 협박과 경고가 뭐? > 끝
ⓒ 파르나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