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2] 협박과 경고가 뭐? >
쫘자작!
실제로 그런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박민혁의 정신세계에 금이 갔다는 것만은 뚜렷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오랜 세월 정신의 심연(深淵)에 갇혀 있던 숙주.
박선영의 조카는 손발이 자기 뜻대로 움직인다는 사실에 감격하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하지만 이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사실 또한 잘 알았다.
죽음에 대한 공포.
그건 뱀페스트하고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부분도 있다.
‘용서할 수 없다!’
아내가 노예로 전락했다. 딸을 울렸다. 친구의 아내와 여자친구를 훔쳤다. 아내의 친구들을 더럽혔다.
그 이상으로, 대한민국을 지탱해온 ‘국모’에게 죄를 범했다.
자신이 한 행동이 아니라고 변명할 순 있지만, 뱀페스트의 행동방침은 ‘숙주의 욕망’도 어느 정도 반영된다.
완전히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아니, 숙주와 상성이 좋았기에 ‘공작’까지 성장한 것이다.
마음을 다잡은 ‘진짜 박민혁’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안다는 결의에 찬 눈빛이었다.
뱀페스트의 능력을 지긋지긋하도록 잘 안다.
이물질처럼 몸속에 심어진 각인은 지울 수 없지만, 모든 명령을 해제할 순 있다.
오랫동안 준비한 컴퓨터 자료를 ‘삭제(Delete)’ 버튼 하나로 순식간에 지워버리듯, 뱀페스트 공작이 심혈을 기울인 노예들이 해방됐다.
거기까지 마친 ‘진짜 박민혁’은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고모님께는 죄송하다고 전해주십시오.”
“음. 알겠습니다.”
“해드리고 싶은 말은 많지만 짧게 하겠습니다.”
비록, ‘민원과 대리’로 있던 건 뱀페스트지만, 숙주인 그도 못났던 건 아니다.
애초에 유능하지 않았다면 박선영이란 인맥이 있더라도 와이츠가 뽑지 않았을 것이다. 지나치게 신뢰해서 이런 사달이 났지만 말이다.
그의 능력은 진짜다.
물 흐르듯 핵심만 빠르게 얘기했다.
한국에 숨어 있던 귀족의 명단을 줄줄이 나열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왕은 없었다. 신하를 믿지 않는 왕이란 뜻이다.
서로 안 믿었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까.
“태어날 때부터 왕의 될 운명이었던 문팽이와 달리 뱀페스트 사회는 하극상이 존재합니다.”
“불변이 아니라?”
“네. 그 증거가 당신에게 심어져 있는 ‘왕의 그릇’입니다. 누구든 왕이 될 수 있지요. 단, 반역의 성공 가능성이 매우 낮을 뿐.”
박민혁을 조종한 뱀페스트 공작도 그중 하나였다. 하지만 왕은 구질구질할지언정 어리석지 않았다.
그래서 극단적인 수단을 취했다.
“그럼…?”
“네. 공작은 이 자리에서 주도권을 잡은 이후에 협상하려고 했습니다. 그분의 영상을 대가로 왕을 처리해달라는 뉘앙스를 남기려고 했지요.”
그분이라고 하면 ‘선유나’일 것이다.
왕에게 보낸 게 아니었나!
쭉 걸렸던 문제가 의외로 쉽게 해결된 덕분인지, 여태까지 긴장감을 놓지 않았던 한무일은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운명공동체란 이래서 문제다.
영원한 비밀이란 없다.
“견제 수준이 아니군요.”
“그렇습니다. 공작은 임명식 이후로 본 적 없는 왕의 정보를 쭉 수집해왔습니다. 그 모든 자료는…. 제 아내가 관리하고 있습니다.”
심장을 쥐어짜듯 괴로운 표정으로 설명하는 박민혁.
요즘 같은 시대에 아내가 참 순종적이란 이웃의 말은 잘못됐다.
여성이 더는 내려갈 수 없는 최악의 밑바닥을 경험한 아내는 정신이 완전히 망가졌다. 스스로 생각하는 마음이 텅텅 비었다.
아내뿐만 아니라 많은 여인이….
박민혁이 괴로운 얼굴은 한 건 그 죄책감 때문만이 아니었다.
슬슬 한계였다.
에쏘드로 생체기를 한 번 더 낸다는 선택지도 있지만, 육체가 못 버틸 것이다.
“편안한 꿈 꾸시길.”
“부디-.”
박민혁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그가 방심한 틈을 타서 카르 4세가 순식간에 가슴을 벤 탓이다. 죽음의 공포가 절정에 이르기 전에 끝낸, 무일이 해줄 수 있는 나름의 배려였고 선처였다.
에쏘드의 능력으로 깔끔한 쇼크사!
늑대인간, 울프남이 얼마만큼 뱀페스트의 천적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스쳐도 죽음에 이를 정도가 아니라면 에쏘드보다 아래다.
‘우선, 일단락됐다고 봐도 되려나.’
대단히 씁쓸한 결말이었다.
이어 ‘과연, 에쏘드!’란 감탄이 뒤따랐다.
그야말로 만능이라고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용사의 검’이다. 어째서 다른 나라에서는 에쏘드를 못 다루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후속조치는 그가 나서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통신으로 전 과정을 지켜본 대한민국 와이츠 ‘미카헬로 싸이어’가 곧바로 행동에 착수했다.
그렇다고 직접 그 거구를 움직이면 서울이 남아나지 않는다. 그래서 정말로 믿을 수 있는 헌병대장 문장춘과 경비대장 임진철을 투입했다.
계약자들은 수도권 방어에 전원 투입!
대한민국의 모든 사냥꾼이 흡혈귀 사냥에 동원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선배님! 진짜 난장판입니다!)
부친의 ‘영웅 만들기’ 작전 때문이 아니더라도, 나라를 위해 직접 참가한 헌병대장 아들 문세웅은 카르 4세에게 보고했다.
박민혁이 죽고 1시간도 안 지나서 서울은 혼란의 도가니에 빠졌다.
공작이 감춰뒀던 ‘귀족 명단’은 살생부가 됐다.
와이츠는 눈곱만큼의 자비도 베풀지 않고 ‘박멸’을 명했다.
그 결과.
연약한 주부가 식칼을 들고 사냥꾼을 습격하는 일은 다반사였고, 대량살상무기를 사방으로 쏘아대는 흡혈귀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전부 잔챙이뿐이었다.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던 뱀페스트 거물들은 ‘카르 4세’에게 전부 퇴치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백작, 후작, 공작.
이렇게 셋이 연달아 쓰러지고 남은 귀족은 세력도 약하고 인질로 삼은 노예의 숫자도 매우 적었다.
(수고해. 당분간 시골에 붙잡혀 있을 것 같거든.)
과연 ‘당분간’일까?
목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서울은 가끔 출장 형식으로밖에 못 다닐 게 자명했다. 세이랑의 도움을 받으면 될 것 같지만, 이 또한 ‘카르발트’가 될 때뿐이다.
고삐를 쥘 악력과 허리(!)가 받쳐줘야 하기 때문이다.
(네! 선배님도 수고 하십시오!)
서울은 맡겨두기로 했다.
하지만 역시 문제라면 ‘특공대장’ 자리를 비워두는 건 이래저래 문제다. 원거리 통신으로 지시를 하달할 수 있지만, 직접 눈으로 보고 관리하는 것만 못하다.
막말로, 거짓 보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땅한 인물이 안 떠오르네….’
실력은 ‘타로’가 나무랄 곳 없지만, 오랫동안 쉰 경력이 걸렸다.
사회란 능력 이상으로 인맥도 중요하니까.
카르 4세가 경비대에서 활동하던 시절에는 괴수대응본부에 잘 들르지 않았지만, 그 횟수도 10년이나 쌓이면 자연히 알려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쌓인 인망(人望)은 그가 ‘특공대장’이 되겠다고 했을 때, 아무도 불만을 제기하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현재 대한민국에는 그를 대신할 사람이 없었다.
“선배. 고민 있어?”
서울에서 난리가 나든 말든 열심히 운동하고 막 돌아온 선지혜가 물었다.
눈속임 ‘뽕’ 따위는 의존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듯 브래지어조차 착용하지 않은 그녀의 얇은 티셔츠는 흠뻑 젖어서 맨살이 다 비치고 있었다.
이 저택에 사는 남자라고는 무일 뿐이라서 참 과감했다.
아예 보란 듯이 티셔츠를 벗어서 아무렇게나 휙 던져놓는다. 그리고는 출렁거리는 가슴을 드러낸 채 소파에 요염하게 드러눕는다.
...위험하구먼.
문팽이가 관대한 건지, 상대가 ‘미지의 왕’이라서 봐주는지는 불분명했다.
‘그나저나 참 열심히 관리하네.’
선지혜는 살이 가슴으로만 찌는 축복받은 체질이다. 뼈도 가늘고 길어서 늘씬한 몸매가 쉽게 만들어졌다.
그래서 노력을 덜 하던 편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8종 계약자’였던 그녀는 계약자가 되기 위해 노력이란 걸 일절 해본 적이 없었다.
늘 적당히.
한무일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다는 동기가 부여되면서 신경을 쓰게 됐지만, 악착같이 했다고는 말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진지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한무일이 준 ‘선물(!)’이었기 때문이다.
소중한 남자가 준 선물을 소중히 하는 건 여자로서 당연하다. 자신의 부주의로 선물을 잃는다면 면목이 없다.
문팽이를 선물이라고 하기에는 좀….
세상을 격동케 한 슈퍼달팽이가 ‘선물 받은 자가용(불도저)’ 취급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싶어서.”
지킬 것도 없는 여기서는 딱히 할 게 없다.
조만간 서울보다 가까운 ‘부산’으로 출퇴근할 예정이지만, 아무래도 마음의 준비뿐 아니라 사전조사도 필요했다.
그래서 이것저것 부산의 실태를 알아보고 있다. 당연히 직접 하지 않고 정보과에 의뢰해서 철저하게 파헤치는 중이다.
아직 시작 단계라서 별 진전은 없지만.
“애라도 낳아서 키울까?”
“기각!”
몸매 관리와 별개로, 몸을 소중히 할 마음이 없는 모양이다.
사랑하는 남자 앞에서만 그런 거겠지만….
실없는 얘기가 오가길 몇 차례.
사늘한 시신이 된 박민혁을 내버려두고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어서 장례부터 치르기로 했다.
장례식 같은 건 없었다.
인간의 시체를 조종하는 정령, ‘데빙걸’이 장난치지 못하도록 신속하게 화장(火葬)으로 마무리했다.
혹시라도 부활할 가능성마저 원천봉쇄한 것이다.
이미 카르 4세의 [예감]은 확실하게 죽었다고 진단했지만 말이다.
“도시를 짓기에는 역시 자원이 부족한걸.”
앞으로 살 보금자리이기 때문인지 선지혜도 진지했다.
기술자(정비과)와 굴착기(추종자)는 많다.
하지만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할 순 없다. 이미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폐건물과 시설물은 철거되어 서울에 싹 흡수됐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 해답은 아쿠버스가 내놓았다.
수업 내내 ‘하등생물’이란 폭언을 들어도 ‘더! 더! 질타를!’이라고 외치며 열광하는 정비과 우등생(광신도)들을 막 가르치고 온 ‘산드라미아 레미’였다.
상당히 피곤한 얼굴이었다.
“빠끔. 달팽이를 활용하면 간단하노라.”
이 바다는 자원의 보고(寶庫)다.
처절했던 ‘4차 세계대전’ 당시에 침몰한 항공모함, 전투기, 구축함, 해상요새 등이 인양되지 않은 채 그대로 심해에 잠들어있다.
끄집어내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모두 허사였다.
계약자부터 육상생물이다 보니 자연히 수호자도 육상생물이 대부분인 까닭이다.
그래서 바다와 우주는 수호자를 등에 업은 인류에게도 여전히 미개척 영역으로 남아있다.
인양?
MID 기술력으로 잽싸게 회수하려 해도 ‘배’라는 물건은 절대 작지 않다.
물결이 요동치면 그걸로 끝이다.
십중팔구 괴수를 자극하게 되어있고, 인양하는 장비와 배마저 침몰하는 경우가 허다하니 수지타산이 안 맞아서 포기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문팽이라면 어떨까?
바다의 폭군!
심지어 중력으로 인양작업마저 순식간이다.
산책하듯 바다를 순회하기만 해도 거대한 항공모함과 해상요새마저 등껍질에 착! 달라붙을 것이다.
“오오…. 괜히 용신이 아니구나.”
무일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발상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스케일이 이만큼 커지면 이것도 쉽지 않다.
무엇보다도 문팽이의 중력을 ‘파괴’ 외의 용도로 떠올리기란 인간에게 쉽지 않다. 편견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빠끔. 더 칭찬해도 좋노라.”
“일이 잘 풀리면.”
다른 건 다 넘어가더라도 최은비의 교육 문제만은 빠르게 해결해야 했다.
부산의 학교는 보내기가 영 꺼림칙했던 탓이다.
계약자도 아닌 여자아이를 유괴하는 것쯤은 ‘부산 출신 사냥꾼’들에게 정말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부산의 인심(人心)이 나쁘다거나 폄하(貶下)하는 게 아니다.
정말 극소수.
다 잡아내기 힘든 ‘암살자’들이 문제다.
뱀페스트처럼 평소에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성실하게 생활하다가 아무도 안 볼 때는 흉악범으로 돌변하는 것이다.
여기에 걸리면 사람 하나 망가지는 건 순식간이다.
“페이, 판판. 수다는 그만 떨고 따라와!”
인공정원에서 중국말로 웃음꽃을 피워가던 두 여인은 고압적인 선지혜의 부탁 아닌 명령에 꼼짝없이 끌려갔다.
선지혜의 생각은 간단했다.
자리를 비운 틈에 저 여우들이 꼬리 칠지도 모르니까!
괴수들은?
그건 ‘엘퍼러’라는 ‘종족 특성’이라서 깔끔히 포기했다. 괜히 추종자를 떼어내려다가 더 늘어나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주모(主母)님! 저는 내륙 체질이에요!”
“연재가 많이 밀렸어요, 회장님.”
소심하게 항변하는 두 중국산 미녀.
하지만 선지혜가 매섭게 노려보자마자 찍소리도 못하고 문팽이에 뒤따라 탑승했다.
온몸에 내숭을 둘둘 말고 있는 황녀님이지만, 항상 그렇지는 않다.
누군가 꽉 붙잡고 있는 고삐가 아니었다면, 이집트의 파라오는 참 얌전한 ‘9종 계약자’였다는 걸 인류는 깨달았을 것이다.
그녀는 문팽이가 한눈에 반한 ‘폭군(暴君)’이었다.
“너희는 백화점 가는데 흥분되지 않아? 여성스럽지 못한걸♪”
세상에서 가장 큰 백화점이다.
여자라면 당연히 기뻐해야 한다고 선지혜는 ‘판단’했다.
원자폭탄 같은 것도 있겠지?
< [31화-2] 협박과 경고가 뭐?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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