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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수처럼-128화 (128/287)

< [31화-1] 협박과 경고가 뭐? >

파르나르 장편소설

괴수처럼 16

[31화] 협박과 경고가 뭐?

학명: 변강쉘(정력을 부르는 조개)

서식지: 바다

특징: 바다의 변강쇠

위험도: 7종 보통

비고: 남자의 약점은 역시….

***

세상에 등장한 3번째 9종 계약자. 현존하기로 2번째.

그 파장은 어마어마했다.

없을 때도 막강하던 대한민국은 이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초강대국이 됐다. 앞서 9종 수호자 이즈헬을 보유한 이집트도 상대가 안 됐다.

문팽이의 군세는 세계 최강.

이즈헬 하나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이집트와 달리 한국에는 우수한 계약자가 무수히 많다는 게 또 강점이다.

여기에 ‘엘퍼러’가 가세했다.

괴수의 탈을 쓴 인간은 끝끝내 ‘9종’으로 도감에 기록됐다.

『한 나라에 9종이 둘?!』

이게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인지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상하이를 공략하다 말고 후퇴한 덕분에 추종자 다수를 아낄 수 있었던 문팽이만으로도 악몽이다.

여기에 야금야금 ‘여성형 괴수’를 늘려가는 엘퍼러.

자신의 능력도 이미 최강의 반열인데 추종자도 빠르게 늘리는 중이었다.

『이대로 괜찮은가?』

가상현실게임을 석권함으로써 ‘문화침략’을 꾸준히 하고 있던 대한민국이 드디어 무력마저 세상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세계정복의 야욕이 없더라도 불안은 가시지 않는다.

마음이란 언제든 뒤집힐 수 있기 때문이다. 인류가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것과 별개로, 사람의 마음이란 그만큼 간사하지 않던가.

예를 들어, 한국은 역사적으로 중국과 일본에 유감이 무척 많은 나라다. 통일신라 이후로 늘 침략당하는 입장이었다.

그 한풀이를 하겠다고 나서면 정말 약도 없다.

하지만 중국과 일본은 대책 마련 같은 것 없이 침묵했다. 그들이 아는 ‘한국의 용사’는 절대로 그럴 인간이 아니란 걸 알기 때문이다.

스스로 한국인을 넘어선 ‘세계인’다운 행동을 솔선수범해왔다.

세속적인 범인은 감히 따라 할 수 없는 오지랖.

어리석다고 욕하면 역으로 비참해질 만큼….

용사가 여태까지 쌓아올린 무수히 많은 업적과 ‘강함’이 그 증거고 결실이었다.

그가 말했다.

“일단, 문제를 키우지 않은 점에 대해서는 고맙게 생각해.”

“이렇게 다시 만나다니 유감이야, 무일 군.”

“...인간의 양면성을 괴수에게 봐서 나도 유감인걸, 박 공작.”

뱀페스트 공작, 박민혁은 레드군의 무자비한 폭력에 과다출혈을 몇 번이나 경험한 끝에 너덜너덜해져서 압송됐다.

순도 99%를 자랑하던 ‘괴수의 피’는 흐려졌다.

재생과 부활을 반복한 끝에 평범한 붉은색 피가 됐다. 이젠 정말로 민간인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약해져 있었다.

그때까지도 서울은 잠잠했다.

각인이 심어진 여성들이 도시를 휘젓고 다니는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그랬다면 문제가 상당히 심각해졌을 테지만, 박민혁은 잠잠했다.

무슨 생각일까?

지금부터 물어볼 예정이다.

“기만책은 약자(弱者)의 특권이지.”

“흡혈귀가 약자라고?”

웃기지도 않는 농담이다.

인간을 월등히 웃도는 괴력과 생명력은 정말 무시무시하다. 특히나 여성을 지배하는 힘은 다른 괴수에게 없는 정말 치명적인 부류다.

그런데 약하다고?

물론, 정말 강력하기 짝이 없는 고위괴수에 비하면 끽해야 5종인 뱀페스트는 약하다고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다시 말하자면 무려 ‘5종’씩이나 한다.

배가 부른 게 분명하다.

“공작(公爵)씩이나 돼서 이렇게 붙잡혀 있는 게 그 증거지.”

“말장난은 적당히 해. 그렇게 따지면 대한민국 대통령과 본부장은 총알 한 방이야.”

예시로 희생된 두 분께는 죄송.

아무래도 관점이 차이 같다.

인간은 육체적으로 약하다고들 얘기하지만, 토끼보다 약하진 않다. 이처럼 매우 상대적이고 이기적인 문제였다.

똑같은 동물의 카테고리에서 본다면 뱀페스트는 절대로 ‘약자’가 될 수 없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이 본 흡혈귀였다.

본인들은 불만족.

더욱 강해지는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정말로 그렇다면 위험한데.’

노블레스를 위한 무기가 개발단계를 넘어섰다.

인간이 6종 이상의 고위괴수를 진심으로 쓰러트리기 위한 ‘MID 무기’ 생산에 박차를 가한 것이다.

하지만 그걸로 정말 괜찮을까?

노블레스가 쓸 수 있다면 뱀페스트는 더욱 잘 활용할 수 있다.

도구를 다루는 지능이 인간보다 덜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육체적인 능력으로 따지면 더욱 우월하고 유리했다.

어째서 뱀페스트는 가만히 있었는가.

동족들이 ‘노예’처럼 지배받는 상황을 눈감아준 이유가 있을 터였다.

“인간은 강해지기 위해 도구를 발명했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 하찮은 인간과 공존한다는 건 어불성설. 오직 지배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

“질질 끄는 선문답은 안 좋아하는데.”

박민혁의 말투는 ‘너희에게 고의로 잡혀줬어!’라는 뉘앙스가 강했다.

딱 봐도 허세였지만, 얌전히 있어준다면 못 들어줄 것도 아니었다.

“이전에는 강력한 숙주가 답이라고 생각했었지. 하지만 자존심을 조금 접고 실리를 따르기로 했다. 도구야말로 진정한 해답이라고.”

“겨우, 그 얘기를 하려고 잡혔어?”

“핫! 무일 군, 그대의 강함도 도구에서 오고 있으면서 그럴 소리를 하는 건 좀 아니지.”

“......”

“종합적인 능력은 8종 이상. 하지만 여기에는 가더발트와 에쏘드가 필수불가결하지. 그것들을 빼면 작년처럼 끽해야 3종. 그게 자네의 한계야.”

카르 4세는 구차하게 변명하지 않았다. 인간이 올라갈 수 있는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는 건 사실이니까.

뱀페스트 공작은 말하고 있었다.

세계는 곧 노블레스가 아닌 ‘뱀페스트’의 시대가 올 거라고.

박민혁이 붙잡힌 것은 그걸 얘기하기 위한 선전포고. 더는 ‘약자’가 아니란 뜻도 함축되어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구차하군.

붙잡혀놓고도 큰소리치는 걸 보면 말이다.

“박 공작. 우리가, 인류가 해줄 말은 하나야. 곱게 죽으란 거지.”

서울 시민들이 인질이란 사실이 걸려서 여태 살려둔 것뿐이다.

각인을 지우려면 충분한 ‘시간’이 지나거나 더 강력한 각인으로 덮어씌우는 방법밖에 없다. 하지만 그 방법은 보류했다.

공작의 각인은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지워지지 않고, 무일이 할 수 있는 흡혈에는 한계가 있는 탓이다.

그 대신, 새로운 방법을 고안했다.

각인은 타액으로 감염된다. 그렇다면 엘퍼러의 침을 수집해서 조금씩 여인들에게 주입하면 흡혈귀의 지배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이론이다.

여기서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양심.

노예의 소유권은 박민혁에서 한무일에게로 넘어가는 것뿐이다. 왕의 각인이라서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다.

무일이 그녀들을 복종시키고자 하면 아무도 막을 수 없다. 이미, 선유나를 포함해서.

역으로 권장해버린 셈이다.

‘실패할 것 같지만….’

그렇게 각인을 심는 게 쉬웠다면 세계의 모든 여성이 진즉 흡혈귀의 지배를 받는 노예 겸 가축으로 전락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시도조차 해보지 않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서 만류하진 않았지만, 무일은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

흡혈(吸血).

그건 종비(從婢)로 삼는 의식이다.

침(각인)을 침투시킨다고 다 끝나는 게 아니란 뜻이다.

“그렇다면 본 공작이 일족을 대표해서 답해주지. 곱게 죽어줄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다고. 내가 이렇게 굴욕을 참는 건 원활한 대화를 위해서다.”

“아, 그러셔. 시골까지 오느라 수고가 많았겠어.”

“......”

하루아침에 뚝딱 도시가 완성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으리으리한 저택’쯤은 가능하다.

지저분하다는 이유로 깔끔하게 쓸려버린 목포항에는 수많은 가제와 꽃게에 둘러싸인 집 한 채가 덩그러니 놓여있다.

바닷물을 정수해서 식수와 가정용수로 사용 중이고 전기는 아쿠버스를 발전기 대용으로 사용했다.

그런 귀찮은 짓은 절대로 사양이라고 버티던 라미아였지만, 한무일이 ‘부탁(지시)’하자마자 투덜대면서도 순순히 따랐다.

그리고 뒤에서는, 본부 정비과를 쪼아댔다!

내일이면 뛰어난 기술력으로 무장한 발전기가 목포항까지 운송될 것이다. 누구의 입김이 강하게 적용했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아예 정비과는 조만간 둘로 쪼개질 전망이었다.

서울과 목포.

당연히 역사와 전통이 살아있는 ‘서울 괴수대응본부 정비과’가 본점(?)이어야 하는데, 조만간 가맹점(?) 취급받을 것 같았다.

『계획도시』

목포는 밑바닥부터 아예 새롭게 만들어질 계획이었다.

대한민국 정비과는 ‘라미아 여신님을 위해서!’라는 구호를 달고 있다. 그 주동자는 놀랍게도 정찬호가 아니라 정비과장 ‘홍민우’였다.

그들의 충성에 대한 보상은 ‘용신의 가르침’.

와이츠라는 기회가 있었을 천재들이 정비과에 다수 있지만, 상대가 인간이 아니기에 거부감을 느끼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도도한(츤데레) 절세미녀가 선생님?

만세! 브라보! 할렐루야!

라미아가 특공대장을 뒤따라 목포에서 생활하게 됐다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정비과는 콩 볶아내듯 세워진 ‘목포 개발사업’에 앞다투어 지원했다.

땅을 다질 필요도 없었다.

다리미로 다린 와이셔츠처럼 평평한 대지는 퍼펙트(perfect)!

그야말로 갯벌이 따로 없었다.

정말, 사막 위에 오아시스처럼 호화로운 저택이 홀로 위풍당당하게 세워졌다.

“뱀페스트가 사냥꾼의 무기를 쓰기 시작한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야. 인제 와서 노블레스의 무기를 사용한다고 협박해도 그다지. 신물이 난다고 할까.”

“얕보는군.”

“맞아. 얕볼 수밖에. 잔꾀를 쓴다는 건 그만큼 궁지에 몰렸다는 뜻이잖아.”

“......”

할 짓이 없어서 여자의 수치심을 이용하니 말 다했다.

이건 그야말로 발악이다.

본인이 말했던 것처럼 ‘약자’가 쓰는 수법이다.

“그리고 계속 협박하듯 말하는데…. 그동안 한국도, 와이츠도 놀고만 있던 게 아니야. 노블레스를 양산하지 않는 대신, 기존의 뱀페스트를 무력화시키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었어.”

“흠!”

“네가 봉인한 숙주의 정신. 단숨에 끌어올릴 수 있단 얘기지. 다만, 그 잠깐 사이에 서울에서 무슨 참극이 벌어질지 몰라서 망설일 뿐.”

박민혁도 허세를 부렸지만, 그건 무일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편리한 기술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완성됐다면 지금처럼 구차한 방식을 선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직접 겪은 편법이라면 존재한다.

『에쏘드』

지금처럼 ‘괴수의 피’가 빠진 뱀페스트라면 ‘용사의 검’에 찔리는 정도로는 ‘쇼크사’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숙주는 일시적으로 해방되리라!

무일이 ‘하렘의 왕’에게 육체를 안 빼앗기고 쭉 주도권을 갖는 것처럼.

제정신을 되찾은 ‘박선영의 조카’에게 부탁할 내용은 하나다.

노예로 붙들린 모든 여성의 해방.

그렇게 ‘내가 죽으면 날뛰어라!’는 명령어를 해제한 후에 뱀페스트 공작을 처리한다는 게 주요 계획이다.

확신은 없지만, 이 방법뿐이 없다.

그냥 휙 죽어버리면 서울은 ‘미친년’들로 아비규환이 될 것이다.

“...왕께서 화가 많이 나셨다.”

“그거야 너희 사정이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군! 우리는 너희를 학대하지 않았다! 무능한 헌병대를 대신해서 도시에 침범한 괴수를 처리해주기도 했단 말이다!”

박민혁으로서는 도저히 수긍이 안 됐다.

이건 ‘가축의 배신’이다!

그렇게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예쁜 계집들이 죽지 않도록 정부와 본부 대신 신경 써서 돌봐줬다. 그런데 돌아온 건 이런 푸대접이라니!

그 분노는 이루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무일은 그런 뱀페스트의 사고방식 자체를 부정했다.

“보답과 대가를 바란 친절은 자랑이 아니야.”

그걸로 계산은 끝난 거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 숨어든 뱀페스트는 그 보답과 대가로 너무나 많은 걸 요구했다. 그리고 너무나 많은 악행을 저질렀다.

이미 공존이란 단어로 허용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섰다.

그보다,

‘왕의 위치를 알 수 없어.’

이렇게 왕의 심복을 만나면 [예감]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박민혁은 그자에게 중요한 신하가 아니란 뜻이다.

본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다. 이 자리에서 서울의 수많은 여성을 해방할 것이다.

죽음을 직감한 박민혁은 눈에 힘을 주며 외쳤다.

“지금의 결정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왜?”

“너희는 아무것도 몰라! 우리가 무엇으로부터 너희 가축들을 지켜줬는지 말이다! 그 양의 탈을 쓴 늑대들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고대의 전설로 전해져왔다.

늑대인간은 흡혈귀의 천적이라고.

하지만 압도적인 머릿수 앞에 늑대인간은 역으로 흡혈귀에게 밀려 음지로 숨어들었다. 그건 24세기의 뱀페스트와 ‘울프남’의 역학관계도 마찬가지다.

박민혁의 생뚱맞은 협박을 들으며 무일은 피식 웃었다.

녀석에게 해줄 말은 하나뿐이다.

“최약(最弱)을 얕보지 마라.”

에쏘드의 궤적이 아름다운 호를 그렸다.

가슴에 그어진 생체기를 본 흡혈귀 공작의 눈이 부릅떠졌다.

< [31화-1] 협박과 경고가 뭐?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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