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5] 이름은 너로 정했다! >
한세리의 지적대로다.
이렇게 성장한 부분은 엄밀히 따지면 한무일의 육체가 아니다.
정말 ‘괴수’가 된 것이다.
막대한 정신력과 에쏘드의 능력에 눌려 통제되고 있지만, 둘 중 하나만 빠지면 언제든 ‘주인’이 뒤집히리라!
흡혈을 해보니 알 수 있었다.
“조심해야겠는걸.”
어차피 더는 ‘여성의 피’를 제공해줄 생각이 없지만 말이다.
이왕 큰 거 더 크고 싶다는 욕심은 있었지만, 과욕이 어떤 결과를 부를지는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돋는다.
육체를 빼앗기는 건 둘째다.
‘하렘의 왕….’
남자로서 당연한 마음가짐이라고 칭찬해줄 수만은 없었다.
지혜의 결정체인 용신답게 와이츠와 아쿠버스의 시선에는 흥미로 가득했다. 특히, 라미아는 호기심 이상의 진득한 무언가가 있었다.
아무튼,
나름대로 위험했고 의미심장한 촌극을 마친 무일은, 선지혜에게 다음 단계로 넘어가라는 눈빛을 보냈다.
“응, 선배.”
호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낸 ‘문팽이 계약자’는 곧바로 연락을 취했다.
뱀페스트 왕과 이어진 유일한 접점.
『민원과 대리 / 박민혁』
하지만 그 실체는 ‘뱀페스트 공작’이다.
어쩌면 왕보다 더 짜증 나고 성가신 존재가 그일 것이다. 왕이란 작자는 남의 여자에게 침 바르고 도주한 것밖에 한 일이 없고, 실질적인 원흉은 박민혁이었다.
더는 거리낄 게 없다.
그동안은 선유나가 인질 아닌 인질로 붙잡혀 있어서 손쓰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풀려났으니 보복할 때가 됐다.
‘그 사진과 동영상들이 걸리지만….’
선지혜도 같은 여성으로서 어머니를 동정한다.
하지만 그 음흉한 흡혈귀에게 끌려다녀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세상에서 가장 현명하다는 와이츠조차 한 방 맞은 저질스러운 짓에 또 당할 것이다.
그러니 먼저 쳐야 한다.
굴욕적인 사진과 동영상이 인터넷에 떠도는 보복을 당할지라도.
애초에, 수많은 정보가 공유되는 현대사회에서 ‘선유나 굴욕 영상’이라고 해봐야 ‘번쩍’하고 끝날 게 뻔하다.
여성의 수치 플레이?
다들 말은 안 하지만, 골목시장에서 판매되는 ‘성인용 가상현실게임’에 널리고 널린 게 그런 것들이다.
심지어 보고 듣기만 하는 게 아니다.
거기에 비하면 ‘그림의 떡’인 선유나는 이슈거리조차 안 될 것이다.
물론, 배포하다가 걸리면 능지처참(陵遲處斬)!
‘문제는 그 수모를 본인이 참을 수 있느냐는 건데.’
이건 선택이 아니다.
국모 선유나는 어떻게든 견뎌내야 한다.
괴수들이 착각하는 게 있는데, 사냥꾼은 ‘인질극’에 대해 고지식할 정도로 한결같은 답을 내놓는다.
무시하고 돌격!
그 인질이 친구나 모친이라면 이렇게까지 모질게 할 수 없겠지만, 프로사냥꾼의 정점인 특공대장이었던 선지혜는 목숨이 아닌 존엄성 훼손쯤은 괜찮다고 봤다.
(우웅…. 언니? 무슨 일이세요?)
미인은 잠꾸러기!
그걸 증명하기라도 하듯 초저녁부터 수면에 들어간 7종 계약자 윤소영은 졸린 목소리로 선지혜의 전화를 받았다.
참 태평했다.
중국 상하이에서 난리 났다는 것도 모른 채 꿈나라를 여행 중이니 말이다.
만약, 사건이 조기에 해결되지 않았다면 윤소영도 지금쯤 레드군과 함께 중국에 있었을 테지만 말이다.
선지혜가 ‘문팽이 계약자’가 됐다는 사실 또한 당연히 모르리라.
【문팽이 / 9종 대형】
무력이 제각각인 ‘9종’ 중에서도 강하기로 악명이 자자한 슈퍼달팽이. 사막이 아니면 빌빌거리는 이집트의 ‘이즈헬’이랑 달리 그 활동영역도 넓다.
촉수 같은 것도 쓸 수 있지만. 주특기는 역시 ‘밀당’.
매우 단조롭게 보이는 그 능력에 인류는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피라미에 속하는 약한 괴수들도 그 중력에 끌려가서 막대한 질량에 짓밟혀 죽는다. 그나마 중상위 괴수부터는 버티고 때로는 아무런 피해도 안 받지만, 그렇다고 역공은 무리.
정말 ‘달’ 같은 괴수다.
그 행성 안에서 무슨 파괴 행각이 벌어져도 관조할 수 있는 견고함과 거대함으로 무장한 왕이다.
게다가 왕만 있는 게 아니다.
단단하기로 둘째라면 서러운 수많은 ‘갑옷형 괴수’가 따른다.
【변강쉘 / 7종 보통】
【쉬임프 / 8종 소형】
그 정점을 찍은 두 괴수. 특히나 후자는 ‘세계에서 가장 단단한 괴수’로 유명하다.
전투 중에 만나지 못했고 그건 현재도 마찬가지.
쉬임프의 유유자적한 성격 탓에 이번에 아예 오지 않은 것이다. 상당히 제멋대로지만, 그건 문팽이의 통솔력이 못 미칠 만큼 강한 탓이다.
각설하고,
그런 괴수들을 앞으로 이끌 황녀님이 말씀하셨다.
서울에 있는 공주님에게.
(소영이가 해줬으면 하는 일이 있어.)
(뭔데요?)
(흡혈귀 하나를 잡아두는 거야. 혹시라도 죽이면 그것도 괜찮아. 그 정도로는 안 죽을 만큼 찰거머리니까.)
이만큼 적임자도 없을 것이다.
뱀페스트 공작 박민혁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7종 소형’을 따돌릴 방도는 없다. 서울을 홀딱 태워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있지만.
설명은 불충분했다.
선유나의 각인이 풀렸다는 걸 박민혁이 느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녀석이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을 터.
이건 시간 싸움이다.
(어, 언니…? 갑자기 흡혈귀니 잡아두라고 하시면….)
윤소영은 당혹스러웠다.
본부 민원과의 친절한 아저씨가 사실은 흡혈귀?
늘 레드군이 곁에서 지켜주는 그녀로서는 상상이 잘 가지 않았다.
그래서 선지혜는 직구를 날렸다.
(선배가 부탁한 일이야.)
(선배라면, 무일 오빠가요?!)
(응.)
(열심히 할게요!)
오빠 주위가 꽃밭이 되면서 다가가기가 영 힘들었던 윤소영은 ‘아자!’라는 기합을 넣으며 외출을 서둘렀다.
본부 민원과의 친절한 아저씨?
윤소영은 ‘참 잘했어요.’라고 칭찬받기 위해서,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어졌다. 어차피 흡혈귀라고 하니 거리낄 것도 없다.
그렇게, 한무일의 이름을 판 선지혜는 통화를 마쳤다.
이름이 팔린 사내가 말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박 여사님이 계시는데.”
엘로엘 계약자, 박선영의 포박은 거머리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선지혜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이미 전에 왕을 놓쳤었어.”
“그게 그렇게 되나….”
“레드군의 [예지]라면 그럴 염려가 전혀 없는걸. 그리고 이모 성격이라면 붙잡아두는 걸로 안 그칠 거야.”
박민혁을 갈기갈기 찢어둔 후에 대화하고자 할 것이다.
그것만은 반드시 피해야 했다.
선유나는 자유를 찾았지만, 뱀페스트 공작의 노예가 된 여성이 서울에 널리고 널렸을 테니 말이다.
솔직히, 선지혜는 몇만 명이 미치든 상관없었다.
그녀에게 중요한 사람은 ‘한무일’뿐이고, 나머지는 어떻게 되든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모친 선유나와 이모 박선영을 포함해서.
그저 ‘인간답게’ 행동하라는 ‘그’의 주문을 따르고 있을 뿐이다.
“직접 가볼까.”
괜히 걱정스러워진 무일이 중얼거렸다.
계약자 윤소영의 부탁은 웬만해선 다 들어주는 ‘신사’ 레드군이지만, 홧김에 여의도(汝矣島)쯤은 태워버리지 않을까, 라는 불안감이 있었다.
이건 [예감]이나 [예측]이 아닌 순수한 기우.
자신에게만 유독 쌀쌀맞은 그 용왕에 대한 편견일 것이다.
“열심히 일했으니 쉬어야지. 내가 상으로 몸을 줄게.”
“하지 마! 계약하자마자 파기하려고!”
문팽이는 ‘마음에 든다.’고 했지만, 그건 선지혜가 처녀이기 때문이다.
선유나와 와이츠처럼 ‘순결을 뛰어넘은 유대관계’가 형성되려면 더욱 오랜 시간이 필요하고, 어쩌면 영원히 처녀이기를 강요받을 수도 있다.
와이츠는 정말 특수한 경우였다.
용신은 선유나가 아이를 낳길 원치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부주의’로 계약을 뺏겼다는 걸 통감하며 어쩔 수 없이 허락한 것이다.
지금의 ‘미카헬로 싸이어’를 움직이는 원동력은 죄책감과 책임감이다.
‘그 마음이 언제까지 유지될지….’
어쩌면 대한민국은 용신을 떠나보낼 준비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
계속될 수도 있지만, 지나친 낙관론은 위험하다.
“선배. 해줄 얘기가 있어. 연맹에서 연락 왔었거든.”
“연맹에서?”
아무리 엉덩이 무거운 괴수대응연맹이라도 ‘9종 계약자’의 탄생까지 잠자코 있을 순 없었던 모양이다.
역시나 그 얘기였다.
하지만 단순히 넘겨짚을 사안은 아니었다.
『왕의 영토』
선지혜는 연맹에서 전해준 ‘오니오프 영토’를 머릿속에 그렸다. 그리고 여기에 이제 막 계약한 문팽이의 ‘예상 영토’를 대입했다.
해안을 끼고 있지만, 활동영역 대부분이 육지인 도깨비.
그래서 문팽이의 영역이랑 안 겹칠 거란 희망을 걸어보지만, 아쉽게도 그렇지 않았다.
섬나라에 해당하는 일본은 해안 빼면 남는 땅이 거의 없다. 일본의 수도 도쿄를 포함해서 거의 모든 도시가 해안을 끼고 있다.
아니, 세계의 모든 도시가 다 그렇다.
오랫동안 고수해온 수도는 강만 끼고 있는 경우가 더러 있지만, 그걸 제외한 나머지 도시는 MID 무기의 공수를 위해서 항구도시로 발전했다.
인천과 부산처럼.
이대로 문팽이가 부산에 터를 잡으면 영토전쟁은 불가피하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뽑는 침략전이다.
‘상상만으로도 흥분되는걸!’
‘나도 그렇게 생각해.’
계약자 선지혜와 수호자 문팽이의 의견이 일치했다!
슈퍼달팽이는 일본 남부의 거대한 두 섬(규슈, 시코쿠)을 영토로 삼길 희망하고 있었다. 태평양으로 나가는 길목인 탓이다.
그래서 일본 열도 전역을 영토로 삼은 오니오프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물론, 성역으로 지정된 영역은 부산뿐이지만, 군주는 성(城)만 지배하는 게 아니다. 그 일대를 아우르길 원한다.
판판 소를 통하면 좀 권위적인 군주의 느낌이다.
하지만 문팽이의 말투는 털털하고 성격은 그 이상으로 화끈한 편이다.
『폭군(暴君)』
치세가 불안정하다기보다는 난세(亂世)를 좋아한다.
왕의 그 자유분방함 탓에 ‘수하’의 숫자는 적다. 하지만 그 대신처럼 왕의 방임주의에 감복하여 한 발쯤 담그고 있는 ‘식객(食客)’이 터무니없이 많다.
그래서 싸울 때만큼은 다른 왕들보다 압도적인 군세.
그 물량을 상대하려면 ‘도깨비 왕’ 오니오프도 ‘죽은 척’만 하고 있을 수만은 없을 것이다.
이 또한 바라는 양상.
하지만 선지혜는 간신히 그 욕망을 잠재웠다.
‘그렇게 되면 선배가 나를 싫어할걸.’
‘...나도 지는 건 싫어.’
엘퍼러를 보며 계약자와 수호자는 각자 다른 의미로 ‘싫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이미 결론은 났다.
영토를 서쪽으로 조금 옮기는 것이다.
무일은 고향인 부산이 반영구적으로 안전해지길 원하고 있지만, 그러면 영토전쟁을 피할 수 없다.
선지혜는 그 상황을 설명했다.
마음속으로는 그가 ‘내 고향만 안전해질 수 있다면 어쩔 수 없지!’라고 답해주길 원하고 있었다.
그래서 은근슬쩍 설득했다.
“규슈와 시코쿠는 사람 사는 도시가 없어. 휴양지로 잠깐씩 단체관광을 가거나 원정대가 꾸려질 때만 들러. 버려진 섬인 셈이지.”
“...그렇다고 해도 영토침범은 안 될 말이야.”
입을 꾹 다물고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던 무일이 대답했다.
전쟁이라고 해도 괴수끼리 벌이는 것이다.
하지만 무일은 ‘버려진 땅’이라고 해도 영유권은 모든 국가에서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항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 예로 ‘제주도’와 ‘독도’를 들 수 있다.
괴수를 탐색하는 레이더만 설치해놓고 사람은 살지 않는다. 그럼에도 한국은 ‘여긴 내 땅이야!’라고 바득바득 고집하며 타국의 상륙을 차단했다.
한국뿐 아니라 모든 나라가 그렇다.
“그럼, 선배는 어디가 좋겠어?”
“...목포.”
부산이 동남쪽에 치우쳤다면 목포는 남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여기라면 태평양까지 자국(自國)의 영토인 제주도만 거쳐서 직행할 수 있다.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던 즐거움 하나가 떠나버린 게 아쉬웠던 선지혜가 툴툴거리는 말투로 지적했다.
“그 동네는 폐허인데?”
건물만 짓는다는 다 되는 게 아니다.
완전히 망가진 상하수도와 전기배선을 다시 깔거나 복원하려면 정말 억수로 지하자원을 퍼부어야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도시를 늘리면 그만큼 계약자가 지켜야 할 영역이 넓어지고 허술해진다.
물론, 문팽이는 덤이다.
달팽이 왕이 부산을 성역으로 정했다면 인천과 파주, 그리고 신도시 개성의 방비가 더욱 탄탄해졌을 것이다.
그 길을 버리고 목포에 도시를 또 하나 만든다는 건 무리수였다. 차라리 인천을 선택하는 게 좋지 않을까.
선지혜의 ‘이성적인 제안’에 무일은 고개를 저었다.
“언제까지 서울 주변에서만 새장에 갇힌 것처럼 살 수 없어.”
인구의 과도한 밀집 때문만이 아니다. 서울 인근의 지하자원도 진즉 바닥났다.
새로이 거점을 확보하지 못하면 대한민국은 뛰어난 MID 기술력이랑 별개로 정체되고 도태될 것이다.
그 뜻을 헤아린 황녀는 대답했다.
“응. 알았어. 목포에서 선배랑 같이 살게.”
어차피 선지혜 본인은 지고한 ‘9종 계약자’다.
내가 여기서 살겠다고 하면 나라에서 어떻게든 끼워 맞출 것이다.
“나…?”
“싫으면 인천은 갯벌~♪”
이건 선택이 아닌 의무였다!
엘퍼러는 탄식했다.
서울 본부까지 무슨 수로 출퇴근하지?
< [30화-5] 이름은 너로 정했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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