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126화 (126/287)

< [30화-4] 이름은 너로 정했다! >

“방법이 뭔데?”

“...한국의 모든 도시를 갯벌로 만들면 되도다.”

“기각!”

그걸 방법이라고 말한단 말인가!

카르 4세는 곰곰이 생각했다. 문팽이의 과격한 방식이 아니라, 뱀페스트 왕의 노림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한 여인의 인생을 파멸시킬 사진과 동영상을 제작해놓은 건 일종에 보험이다. 실패했을 때를 대비한 것이다.

그렇다면 ‘요구’도 있으리라.

악당이 다 그러하듯, 내가 이렇게 안 할 테니 이렇게 해달라. 이런 거 말이다.

선지혜와 눈이 마주쳤다.

같은 생각을 했다는 걸 알 수 있는 눈빛이었다.

“하아…. 쌍둥이 동생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려 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은걸.”

자신이랑 미묘하게 다른 에쏘드 ‘한세리’의 외모에 대해서.

다른 여자를 마음속에 두고 있지 않다는 점은 정말 기쁘게 생각하지만….

가슴이 더 크고 허리는 더 잘록하다!

선배의 희망과 불만이 두드러지게 드러났다고 봐도 무방했다.

‘오, 옷차림을 몰라서 다행이다….’

무일은 최악의 상황만은 면했다고 안도했다.

그걸 들켰다면 정말 땅 파고 관에 들어가고 싶었을 것이다.

“...서로 할 수 있는 일을 하도록 하자.”

“좋아, 선배.”

이럴 때는 척척 맞는 두 사람이었다.

대한민국 근대역사는 ‘최강의 무력’ 박선영과 ‘최고의 지혜’ 선유나가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현재는?

본능의 정점에 도달한 프로사냥꾼 카르 4세.

이성의 정점에 있는 와이츠의 전(前) 계약자 선지혜.

빈틈없는 해결사 콤비다!

“혹시 모르니 꽉 잡아.”

“응.”

와이츠를 힐끔 보며 허락을 구한 무일은 선유나에게 다가갔다.

새하얀 목덜미가 어른거린다.

지금부터 그녀의 ‘각인’을 덮어씌울 계획이다. 하지만 여태 ‘흡혈’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무일은 신중했다.

‘특수체질이 아니라서 어떨지….’

미쳐버리거나 뱀페스트의 지배를 받을 수 있다.

그저 [예감]이, 태양신이 배신하지 않기를 빌 뿐이다.

“아…!”

뾰족하지 않은 송곳니를 포함한 이빨들이 목에 박히는 감각에 선유나가 탄성을 터트렸다. 그건 고통스러워하는 목소리가 결코 아니었다.

극락(極樂)!

빈혈로 인한 현기증과 상실감을 상쇄하는 보상이다.

지배력을 가진 귀족이 아닌 흡혈귀가 ‘가축’을 관리하는 방법이다. 한 번 물린 여자들은 이 쾌감을 끊지 못하고 다시 찾게 된다.

꿀꺽.

무일은 비릿한 피를 삼켰다.

그 즉시,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변강쉘이 그의 허리를 한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문팽이 추종자’가 최악의 상황에 대비했다.

엘퍼러.

이 ‘9종 인간’이 날뛰면 정말 돌이킬 수 없다.

약점이라면 역시 나약한 인간이란 점.

낌새가 이상하면 바로 갈비뼈와 척추를 부러트려 사경을 헤매도록 만들 심상이었다.

두근!

선유나의 피가 위장으로 안 흘러가고 곧바로 심장에 스며든 기분이었다.

그런 심장이 세차게 고동쳤다.

정확히는, 심장에 기생 중인 뱀페스트가 탐욕스럽게 빨아들이며 순식간에 성장했다.

마침내! 드디어!

단 한 번도 ‘여성의 피’를 공급받지 못해서 쫄쫄 굶고 있던 ‘왕의 그릇’은 게걸스럽게 먹어치운 영양분으로 한껏 지배력을 방출했다.

‘큭…!?’

눈을 크게 뜬 무일은 입술을 뗐다.

절대로 그의 의지가 아니었다.

“한 번 더, 아직 부족해.”

부자연스럽다고 하기도 힘든 애매한 말투.

이를 들은 선지혜는 눈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여자의 감이다.

그녀가 아는 선배도 저렇게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꺼림칙하다.’는 표정을 다 지우지 못했으리라.

그는 ‘연기’에 서투르니까.

무일의 몸을 꽉 잡고 있는 변강쉘이 천천히 팔을 움직여 ‘한 번 더’ 흡혈할 수 있도록 선유나와 가까이 붙여줬다.

완전히 황홀경에 빠진 선유나는 피하지 않았다.

스르르.

처음하고 달리 ‘뾰족한 송곳니’가 튀어나왔다.

무일은, 근처에서 숨죽이고 구경하는 여성들이 사르르 얼굴을 붉힐 만큼 야하게, 애무하듯 피를 탐했다.

숙주처럼 담담하게 행동하려 해도 너무 오랫동안 굶주렸다.

결국, 참지 못하고 본성이 튀어나온 것이다.

그전에 이미 ‘한무일 스토커’ 선지혜에게 들통 나긴 했지만 말이다.

“흣….”

쾌락의 절정에 도달하며 온몸의 힘이 쫙 빠진 선유나는 맨바닥에 주저앉았다.

서둘러 수행원들이 그녀를 부축하려 했으나, 그보다 빠르게 와이츠가 계약자를 섬세하게 양손을 움직여 데려갔다.

다시는 빼앗기지 않겠다는 듯이.

물론, 괴수 관점에서 ‘선유나’는 그다지 매력적인 계약자가 아니었다.

처녀도 아니고 험한 꼴을 여러 번 당했다.

하지만 ‘미카헬로 싸이어’에게만큼은 해당하지 않았다.

계약자가 이렇게 된 것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느끼고, 오랫동안 함께한 우정과 애정은 그 이상으로 두터웠다.

그리고 여기에 ‘그리움’이란 감정이 곁들어지며 더욱 깊어졌다.

“거기, 동생. 어떻게든 해봐.”

“네! 황녀님!”

선지혜에게 대뜸 ‘황녀님’이라고 부른 한세리는 ‘용사님’에게 다가갔다.

포박된 ‘그’는 묵묵히 있었다.

괜히 놓으라고 해봐야 의심만 살 거란 걸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눈앞에 ‘천적’을 두고서까지 공포심을 떨쳐낼 순 없었다. 그리고 이미 들켰다는 걸 깨닫고는 쓰게 웃었다.

체념했다고 해도 좋은 표정이었다.

“한 명뿐인 게 아쉽군.”

뱀페스트는 순순히 고백하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간신히 획득한 소량의 피를 지배력으로 단숨에 폭발시켜 ‘한무일’의 정신력을 일시적으로 밀어냈다.

하지만 잠깐뿐이다.

서울에 사는 수천만 시민의 ‘생명의 무게’를 짊어진 남자의 정신력은 진짜 너무하다 싶을 만큼 견고했던 탓이다.

그러나 ‘왕의 그릇’도 만만치 않았다.

만약, 에쏘드의 개입만 없었다면 이대로 다른 여성을 흡혈해서 반영구적으로 자리매김했을 것이다.

“여자가 죽을 때까지 빨지 그랬어.”

매일 ‘나의 용사님!’이라면 애교부리던 한세리가 아니었다.

야자타임처럼 거침없었다.

뱀페스트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랬다면 저 용에게 살해됐겠지. 이렇게 말하니 뭔가 구걸하는 기분이군. 나는 왕이 될 몸이다!”

“그래서?”

“훌륭한 왕은 사사로이 백성을 죽이거나 업신여기지 않는 법이다. 숙주의 신념이랑 미묘하게 갈리는 부분이지.”

“왕은 무슨! 용사님에게 빌붙어 사는 주제에.”

한세리는 가차 없이 깎아내렸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뱀페스트는 선언했다.

“나는, ‘하렘의 왕’이 될 것이다!”

“엉?”

“세상의 모든 미소녀(美少女)가 우러러 모시는 성군(聖君)이 될-, 뭐냐? 그 무례한 표정은. 이상한 거머리 보듯.”

“정말 이상하거든!”

뱀페스트는 ‘뱀페스트 왕’이 될 생각을 해야 하고 그게 정상이다.

그런데 이 녀석은 ‘하렘의 왕’이 되겠다고 외쳤다.

뭐야 그게!

조용히 듣고 있던 선지혜는 재미있는 장난감을 본 아이처럼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그러고 보니….’

이 뱀페스트는 선유나를 ‘가축’이 아닌 ‘백성’이라고 했다.

여인(女人)을 암퇘지처럼 취급하는 일반적인 흡혈귀하고는 사고방식이 완전히 달랐다. 숙주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이상하다.

이게 어떻게 된 걸까?

선지혜는 곰곰이 생각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

『동족(同族)』

겉보기나 생물학적으로 ‘한무일’은 의심할 여지 없는 ‘남성’이다.

하지만 괴수 관점에서는 이게 모호하다.

아니, ‘여성’이다!

그러면 한무일에게 기생 중인 뱀페스트는 어떤 가치관이 형성될까.

스스로 여성이 아니라고는 생각하지만, 동족을 ‘여성’이라고 판단한 그는 ‘여성의 왕’이 돼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래서 같은 흡혈귀가 아닌 ‘여성’을 백성으로 선택했다.

다만, 숙주의 취미와 취향을 100% 반영해서 ‘미소녀’만 취급하는 모양이다.

“진짜 ‘엘퍼러’잖아….”

요정을 지배하는 황제.

선지혜도 괴수대응연맹의 발표를 들었다.

학자란 작자들이 지나치게 과대포장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정말로 ‘여성’에 대한 절대적인 지배력을 갖고 있다면 인간의 70%는 엘퍼러의 지배 아래에 놓였다는 뜻이다.

그야말로 ‘황제’였다.

순수한 ‘인간 여성’만 해당할까?

아쿠버스와 세이랑의 사례로 보아선 ‘여성형 괴수’도 수상하다. 아니, 인간에 대한 지배력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지만, 이쪽은 확실했다.

“엘퍼러? 그게-.”

자칭 ‘하렘의 왕’의 말이 끊겼다.

한세리가 ‘쪽!’ 소리 날 정도로 볼에 뽀뽀하자마자 뱀페스트는 한무일의 육체 지배권을 상실했다.

굳이 뽀뽀할 필요 없이 물리적인 접촉만으로도 충분했지만, 기분이다.

이렇게라도 안 하면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용사님! 어떠세요?”

매우 포괄적인 물음이었다.

육체를 되찾은 한무일은 눈가를 파르르 떨며 말했다.

“...지금은 업무 중이다. 사적인 질문은 나중에도 받지 않겠다.”

“어?! 나중에도요?!”

가증스럽게, 깜찍하게 울상을 짓는 한세리.

평소의 ‘용사의 정령’으로 돌아왔다.

뱀페스트의 지배를 받는 동안, 그도 가만히 있던 건 아니었다. 육체를 되찾고자 했다면 그 시기가 더욱 앞당겨졌으리라.

하지만 그러는 대신 흡혈귀의 ‘능력’을 익히는데 치중했다.

녀석이 쓰는 걸 몸의 감각으로 익힌 것이다.

송곳니를 길게 하거나….

‘쓸 일은 없을 것 같지만.’

선유나의 몸에는 새로운 각인이 덧씌워졌다.

흡혈귀 공작 ‘박민혁’보다 끗발이 센 ‘왕의 그릇’이 침 발라뒀으니 더는 지배받을 염려가 없을 것이다.

한국 어딘가에 숨어있는 ‘왕’이라면 또 얘기가 다르지만, 흡혈만 안 당하면 이 또한 걱정할 필요 없다.

그때였다.

거구의 변강쉘을 그 가녀린 몸으로 밀어내며 말없이 다가온 선지혜가 무일의 품에 폭 안기며 말했다.

“...선배. 혹시, 싶었는데 확실히 키가 커졌는걸.”

“뭐?!”

무려 13년 동안 변함없던 ‘꼬맹이’ 신세였다.

그런데 확실히 달랐다!

자주는 아니지만, 상당히 익숙한 선지혜의 말랑말랑한 젖가슴이 닿는 감촉 위치가 살짝 내려갔다.

이건 그야말로 혁명! 기적이고 구원이었다!

키를 인식하고 세상을 바라보니 확실히 ‘굽이 높은 구두’를 신은 것처럼 시선이 쫙 올라가 있었다.

감격으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은 걸 꾹 참았다.

서러웠던 세월이여!

“흡수한 피만큼 성장한 것 같은데.”

“아!”

특수체질이 아닌 한무일은 ‘괴수의 피’가 정화되지 않고 그대로 남는다. 그리고 그 ‘괴수의 피’ 농도가 짙어질수록 뱀페스트의 숙주(육체)는 강해진다.

인간에서 괴수에 가까워진다는 뜻이다.

하지만 숙주가 ‘소년’이었다.

뱀페스트는 숙주의 미숙한 육신을 성장시키는 쪽으로 강화를 생각했다. 숙주의 콤플렉스는 그의 콤플렉스란 점도 주효했다.

무일은, 에쏘드로 뱀페스트를 파낸다는 계획을 철회했다.

애송이가 아닐 수만 있다면 무언들 용서 못 하리오!

“용사님. 꼭 좋은 일만은 아니에요!”

“...갑자기 웬 찬물?”

“그 거머리가 육체를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진다는 뜻이니까요.”

< [30화-4] 이름은 너로 정했다!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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