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3] 이름은 너로 정했다! >
“허! 와이츠가 직접 왔네.”
한반도의 남해, 다도해 해역의 수많은 섬을 깡그리 밀어버리며 진격하는 슈퍼달팽이 위에서 무일은 헛웃음을 삼켰다.
자초지종을 듣자마자 날아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만큼 와이츠는 북한산 둥지에서 나오는 법이 없는 까닭이다.
그 얘기는 하나로 귀결된다.
‘다급했네.’
계약을 빨리 되찾고 싶다는 의지와 소망. 한 입 거리도 안 되는 거머리에게 한 방 크게 먹었다는 분노도 적지 않을 것이다.
어느새 인내해온 세월이 자그마치 반백 년.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8종 용신’에게는 상당히 벅찬 시간이었다.
쿵!
착지도 급감속하면서 요란하게 했다.
같은 ‘대형’에 속하는 와이츠조차 초라하게 하는 문팽이의 거구도 따라서 멈췄다.
거리상으로 두 괴수는 맞닿아 있었다.
하지만 무일과 선지혜의 거리는 해발 1,000m라고 해도 좋을 만큼 멀리 떨어져 있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스케일이다.
“내려가야겠군.”
“용사님! 같이 가요!”
판판 소를 안아 들고 문팽이의 머리 위에서 뛰어내리는 무일을 뒤따라서 한세리와 라미아가 각자의 방식으로 땅에 착지했다.
그런 육지와 해안가의 상태는 썩 좋다고 할 수 없었다.
슈퍼달팽이에게 밀려 지형이 싹 바뀐 건 둘째 치더라도, 녀석이 지나간 곳은 허허벌판, 갯벌이 되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대왕(大王)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던 건방진(!) 장애물들은 좌우로 밀려나며 높은 토성(土城)이 됐다.
“...선배가 또 여자를 주워왔는걸.”
공주님 안기 중인 판판 소를 쳐다보는 싱긋 웃는 선지혜.
오직, 여자만 알 수 있는 생명의 위기를 느낀 성형미인은 화들짝 놀라며 자신의 두 발로 땅에 섰다.
그 즉시 압박감이 사라졌다.
무서운 회장님의 관심은 한 남자에게 벌써 고정되어 있었다.
“지혜. 설명은 필요 없지?”
“응. 엄마만 준비되면 언제 해도 괜찮아.”
와이츠의 뒤를 바짝 쫓아온 헬기에서 ‘선 씨 일가(一家)’의 수행원들이 우르르 내렸다.
전원 여성으로 그 미모도 예사롭지 않았다.
그녀들은 헬기에서 내리자마자 선지혜가 아닌 선유나에게 우르르 달려갔다. 그리고는 양팔에 채워진 팔찌에 줄을 연결했다.
죄인을 압송하듯 두 수행원이 좌우에서 하나씩 붙잡았다.
‘...자해(自害)나 저항을 막기 위함인가.’
보폭이 짧은 걸로 보아, 긴 치마 안쪽에도 족쇄가 채워져 있는 것 같았다. 혹시라도 있을 도주를 막기 위해서다.
선유나는 뱀페스트 공작에게 피가 빨린 경력이 있다.
그 탓에 ‘흡혈귀의 노예’란 수모와 저주를 받는 중이다.
죽으라는 명령조차 따를 정도로 절대적인 주종관계는 정신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래서 언제든 선유나를 제압할 수 있도록 해두는 것이다.
“처음 봤지?”
“...나는 아예 처음 뵙는다만.”
저런 굴욕적인 모습뿐만 아니라 아예 처음 만났다.
국모 선유나는 결혼한 이후부터 공개석상에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다가, 선지혜가 태어난 이후로는 아예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이제 겨우(?) 28살인 무일이 태어나기도 전이니 모르는 게 당연했다.
물론, 워낙 유명인이다 보니 사진과 동영상을 우연히 접할 기회쯤은 여러 번 있었기에 ‘누구세요?’ 같은 얼빠진 질문을 하진 않았다.
“재미없어.”
“...별로 유쾌한 상황은 아닌데.”
“반응도 약하고.”
선지혜는 치매로 쭉 알고 있었다고 묻지도 않은 걸 얘기했다.
진실은 흡혈귀의 노예 각인.
여전히 해지할 방법을 찾지 못했지만, 계약이라도 되돌리고자 이렇게 서둘러 모녀(母女)와 용신이 나온 것이다.
밤하늘의 달처럼 빛나는 문팽이의 눈동자가 깜빡인다.
시선은 선지혜에게 고정되어 있다.
물론, 하고 싶은 말은 아직 계약 중인 판판 소를 통해서 했다.
“...미지의 왕이여. 그대에게 묻노라. 이 처녀가 내 계약자인 게 확실한가?”
“그런데?”
“...눈부시도다. 인간의 서식지를 내려다보는 마음이 짐과 같구나.”
거대한 몸체는 깜빡이는 눈을 빼고는 쭉 가만히 있었지만, 판판 소를 통해 전하는 문팽이의 대사에는 감탄과 만족으로 가득했다.
괴수의 미녀의 궁합이란 게 이걸까.
뚜렷한 ‘인연’이 없기에 어디까지나 임시라고 본인이 말한 주제에, 이대로 계약자를 확정 지을 분위기였다.
줏대 없는 왕이라고 따질 수도 없고….
하지만 곧바로 계약하려는 낌새만은 어떻게든 말려야 했다.
“그전에 해줬으면 했던 것부터.”
“...찬탈 말인가. 이 처녀를 낳은 어미란 걸 단번에 알겠구나. 좋다! 이 또한 왕만이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일지니.”
“왕만?”
무일의 눈이 가늘어졌다.
여태까지 공식적으로 9종 수호자는 이즈헬 하나뿐이었고, 그조차도 매우 비협조적이었다. 그래서 정보가 턱없이 부족했다.
그런데 문팽이는 인류에게 중요한 정보가 될 발언을 잘 내뱉었다.
앞으로 종종 대화할 수 있으면 좋겠다.
“...빼앗고 빼앗기는 밀당이야말로 왕의 유희 아니겠는가.”
“참 고상하군.”
무일은 조금도 공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선지혜는 ‘재미있는 달팽이네.’라고 중얼거렸다.
“...왕의 보물이여. 가까이 오라.”
말없이 다가온 선유나를 향해 문팽이는 물컹한 신체 일부를 촉수(觸鬚)처럼 뻗었다. 그리고 정말 꺼려지는 물건 만지듯 ‘톡’ 건드렸다.
어디까지나 [예측]이지만, 왕끼리 계약을 빼앗으려면 물리적인 접촉이 필요하다는 걸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겉보기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러나 카르 4세는 [예감]으로 알 수 있었다.
모든 계약이 다 그런 것처럼 소리와 형태 없이 순식간에 체결됐다.
“아…!”
쭉 말이 없던 선유나의 입에서 신음 비슷한 탄성이 토해졌다.
대조적으로 친딸 선지혜는 들뜬 콧소리를 냈다.
“호응~?”
순식간에 기질이 변했다.
굳이 표현하자면, 공주보다 격이 높은 ‘황녀(皇女)’라고 할까.
그래도 나름 ‘9종 계약자’였던 선유나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고결함이었다.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후광이 깃들며 선지혜를 더욱 값지게 했다.
이것이 진정한 왕의 계약자.
남의 여자에게 침 바르고 튄 찰거머리하고 급이 달랐다.
“계약이 끊겼어요.”
판판 소가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문팽이는 뱀페스트 왕에게서 선유나를 빼앗자마자 선지혜로 신속하게 갈아탄 것이다. 그리고 ‘미계약자’가 된 ‘국모’를 와이츠가 잽싸게 돌려받았다.
거의 반백 년 만에.
하지만 무언가 잘못됐다.
기쁨이 아닌 명백한 분노를 담아 용신이 크게 포효했다.
“크아아아앙!!”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선유나의 수행원들을 으깨버릴 의도로 손을 높게 치들었다.
깜짝 놀란 무일이 에쏘드를 뽑아 저지하려고 했으나 늦었다. 아무래도 ‘내 위기’가 아니다 보니 대처가 늦을 수밖에 없던 탓이다.
하지만 그녀들의 목숨을 구한 건 따로 있었다.
쿠궁!
온몸을 조개껍데기로 두른 기사, 7종 괴수 ‘변강쉘’이 막았다. 하지만 완전히 막진 못했는지 상체가 뭉개져 있었다.
하지만 피해라고 할 건 없었다. 변강쉘의 심장과 뇌는 하체에 있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회복한 기사는 당당히 와이츠 앞을 가로막았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다.
어느새 용신은 수많은 괴수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전부 ‘문팽이의 추종자’였다.
“...이게 무슨 일인지 속 시원하게 말해줄 사람?”
아무리 [예감]이 좋은 무일도 이 사태만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답은 선지혜의 입에서 나왔다.
“엄마가 잘못됐기 때문이야.”
“왜…?”
계약은 와이츠에게 되돌아갔다. 아직 ‘피의 각인’이 남아있긴 했지만, 지금처럼 보호하면 큰 문제가 없을 터였다.
그런데 뭐가 잘못됐기에 이성적인 와이츠가 흥분하는 걸까?
완전히 ‘문팽이 계약자’가 된 선지혜는, 수호자가 자신의 몸으로 만들어준 말랑말랑한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엄마뿐 아니라 수행원들도 노예였거든.”
정말 찰나였지만, 선유나의 기억은 ‘달팽이 왕’에게 전달됐다. 그리고 문팽이와 계약한 선지혜는 정신감응을 통해 이를 깨달았다.
그래서 와이츠의 폭주를 예상할 수 있었고 완벽한 대처도 가능했다.
문팽이뿐만 아니라 추종자까지 완벽한 통제!
이게 바로 ‘환상의 궁합’이라고, 감탄할 새도 없이 무일은 한탄부터 했다.
“허! 놈의 집착을 얕봤군.”
“아무도 없을 때마다 여성에게 치명적인 사진과 동영상을 수시로 찍었어. 그리고 전부 찰거머리에게 전송됐지.”
진짜 상종하고 싶지 않은 ‘뱀페스트 왕’이었다.
계약이 파기되거나 각인이 사라질 상황까지 상정해서 철저하게 대비책을 세워뒀다.
하지만 치밀한 전략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냥 저질.
무고한 일가족을 살해한 야생괴수를 수없이 본 카르 4세지만, 지금처럼 살심(殺心)을 짙게 느껴본 적은 진정 처음이었다.
‘국모의 치부(恥部)가 인터넷에 떠돈다고?’
프로사냥꾼 한무일이 가장 존경하는 대한민국 여성은 고대의 ‘신사임당’이나 ‘유관순’이 아니라 ‘선유나’다.
절대로 그런 사태는 용납할 수 없었다.
이런 치졸한 전략에 또 한 번 당한 와이츠 ‘미카헬로 싸이어’가 격분하는 것도 너무나 당연했다.
하지만 용신의 분노는 방향이 잘못됐다.
저 수행원들도 피해자다.
어떻게든 자신들의 만행을 고백하고 싶었지만, 흡혈귀 공작이 걸어둔 ‘금제(禁制)’는 절대적이었다. 그건 현재도 마찬가지다.
끔찍한 짓을 당한 선유나가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있는 것도 그래서다.
“선배. 그뿐만이 아니야.”
“또 뭐가 남았어?”
“거머리 왕은 지구 반대편인 브라헨티나에 있지 않았어.”
“한국인가!”
무일은 비명을 질렀다.
선유나에게 자연스럽게 명령해서 거짓된 정보를 말하도록 강제할 수도 있다.
그 사실을 여태 간과한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그녀가 흡혈귀의 노예였던 건 아니었으니 정말로 브라헨티나에 왕이 있었던 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계속 잘못된 정보만 받았다. 그리고 거기에 맞춰 헛발질한 상대가 ‘바람의 여왕’ 박선영이었다.
조카를 너무 믿어서 벌어진 사태를 통감한 8종 계약자.
이후, 웬만해선 친구의 곁을 떠나지 않는 그녀가 잘못된 정보를 받고 멀리 떨어질 때마다 수행원들이 하나씩 노예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그리고 굴욕적인 짓도….
“엄마. 거머리 왕은 어디에 있어?”
“브라헨티나의 어딘가에 있는 것 같구나.”
“한국 같은데.”
“절대로 그럴 리 없단다! 지금, 이 엄마를 못 믿는 거니…!”
“응.”
화를 내는 선유나를 보며 선지혜는 키득키득 웃으며 눈물을 흘렸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금제를 걸어둔 건지 상상이 안 갔다.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던 선유나의 모든 언행은 컴퓨터 소프트웨어처럼 정밀하게 맞춰진 규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통제받고 있었다.
그야말로 똑똑한 마리오네트.
흥분을 가라앉힌 와이츠는 침묵했다. 하지만 그게 더 무서웠다.
“...짐에게 방법이 있도다.”
갑자기 판판 소가 또 ‘문팽이 통역관’ 흉내 내며 참견했다.
이 상황에 장난이라면 정말 화나는데.
무일의 시선을 받은 판판 소는 아니라고 주장하듯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러면서 손끝으로 변강쉘을 가리켰다.
그 동작만으로도 카르 4세는 어떻게 된 일인지 [예측]할 수 있었다.
문팽이는 분명 ‘선지혜’와 계약했다.
하지만 이 계약자는 ‘판판 소’처럼 자신의 말을 전달해줄 만큼 친절하지 않았다. 그게 또 매력이긴 하지만, 불편하고 답답한 것도 사실.
그래서 편법을 고안했다.
추종자인 변강쉘을 그녀와 계약시킨 것이다!
성형미인이라서 많이 모자란 감이 있지만, 그래도 왕을 모셨던 여자란 ‘경력’이 플러스알파였는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반쯤 강제성을 띄고 있었겠지만 말이다.
‘놀랍네.’
그래서 무일의 감상도 이 정도에서 그쳤다.
전력이 상승했다고 할 건 없다.
누구와 계약했든 아니든 변강쉘은 군주 ‘문팽이’의 지시와 ‘선지혜’의 부탁을 따른다. 그러니 ‘판판 소’는 계약자보다는 통역관이란 표현이 적합할 것이다.
그래도,
성형미인이 출세했네!
과정이 어떻든 실패자가 계약자가 됐다는 것부터가 기적이다.
세상 참 관대해졌다.
< [30화-3] 이름은 너로 정했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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