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124화 (124/287)

< [30화-2] 이름은 너로 정했다! >

(...모시모시. 쯧. 세계공용어로 하지요. 바꿨습니다.)

일본 총리 ‘코죠 카즈마’는 말투와 대사 모두 날카로웠다.

세계공용어라니?

제3외국어로 통하는 ‘한국어’지만, 조금 과한 감이 있었다. 그 한마디에는 총리의 짙은 우려가 엿보였다.

한국이 세계를 집어삼킬 거란 경고였다.

22세기까지 최고의 무기는 원자폭탄과 탄저균이었다. 하지만 23세기에 등장한 괴수의 무시무시한 재생력과 면역력에 무의미해졌다.

그리고 현재에 이르러서는 고위수호자가 최고로 군림했다.

안 그래도 한국은 8종 괴수가 둘이었다.

나라가 4차 세계대전으로 한 번 폭삭 무너졌다가 다시 재기하여 100년 만에 세계 정상도 찍을 만큼 강력한 힘!

여기에 혜성처럼 등장한 ‘사내’가 마침표를 찍었다.

『엘퍼러 / 9종 소형』

연맹의 회의 결과내용은 세계가 주목했다.

직접 참석하진 않았지만, 일본 총리도 생방송으로 보고 있었다. 한 인간이 괴수로 기록되는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대로라면 한국의 국력은 재평가될 수밖에 없다.

‘9종 둘, 8종 셋, 7종 둘…. 허허, 허허허….’

그냥 헛웃음밖에 안 나온다.

첨단무기로 대적할 수 없는 수호자만 이 정도다.

역사의 앙갚음이란 식으로 한국이 곧 합병을 시도할 것이다. 그러면 일본은 풍전등화에 놓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게 총리의 생각이었다.

9종 도깨비 ‘오니오프’가 수호자로 있을 적에 일본이 한국을 합병하려고 했으니까. 그 보복차원에서라도 분쟁은 불가피하다.

마찬가지로 코죠 카즈마의 생각이었다.

(너무 부정적인 견해로군요, 총리.)

(늘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고 대비하는 것이 내가 할 일이오, 맹주.)

(정보의 제공을 원합니다.)

(거절합니다.)

정중하지만, 차갑게 응수하는 일본 총리.

괴수대응연맹 맹주 ‘아몬 헤이젤’의 이마에 주름이 졌다.

(듣지도 않고 거절입니까.)

(맹주가 무엇을 요구할지 알기 때문입니다. 오니오프의 영역. 그게 알려지면 자국의 국방력이 얼마나 위협받을지는 떠올리고 싶지도 않소.)

(카즈마 총리!)

(한국에는 부산이 아니라 만주로 터를 잡으라고 이르시오. 아니면 양국에 최악의 결과만 있을 뿐입니다.)

최악의 결과라면 하나뿐이다.

전쟁.

서로가 고위괴수를 동원해서 수도를 초토화하면 끝이다.

승패와 관계없이 얻는 것 하나 없는 결말.

그래도 굳이 승자를 가르고 재기할 수 있느냐로 따지자면 일본이 압도적으로 불리했다. 막말로 한국은 ‘9종 괴수’ 둘만 멀쩡하면 부활할 수 있다.

시대가 변했다.

인구는 나라의 국력과 역량이 아니다.

그 대표적인 막장 국가가 ‘이집트’ 아닌가.

정치와 경제가 개판이지만, 아프리카의 그 어느 나라보다도 부강하고 동유럽과 서남아시아를 늘 긴장하게 한다.

(최악이라…. 무운을 비오, 총리.)

아몬 헤이젤은 통신을 끊었다.

괴수대응연맹 맹주를 아주 물로 보는군.

이집트가 기고만장한 이유는 무력만이 아니다.

수도 ‘카이로’를 영토로 지정한 9종 수호자 ‘이즈헬’이 철통같이 방어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건 일본의 수도 ‘도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국력 차이가 너무 극심하다.

‘한 인간으로 인해 너무나 달라졌지.’

과거에는 극동 3강이 비등했었다.

가장 강력한 8종 수호자 ‘엘로엘’이 있는 한국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일본과 중국에는 ‘특수’의 천적인 ‘에쏘드’가 있었다.

한국의 또 다른 8종 수호자인 ‘와이츠’는 일본의 ‘오니오프’를 이길 수 없고, 중국에는 ‘쑨우쿵’과 ‘하이블’이 버티고 있다.

나머지 전력은 한국이 역으로 딸렸다.

아니, 애초에 지리적으로 샌드위치처럼 끼어서 뒤통수 맞기 좋은 한국이 가장 불리했다.

그랬는데 겨우 1년도 안 된 사이에 달라졌다.

(바로 끊는 건 어느 나라의 예법입니까, 맹주.)

코죠 카즈마가 바로 연락해왔다.

홧김에, 혹은 찔러볼 의도로 강하게 나갔으나 현실을 받아들이겠다는 태도였다.

전쟁은 불가능하다.

일본에도 ‘아쿠버스’가 있긴 하지만, 그녀에게 바다로 나가서 싸워달라고 하면 총리고 천왕이고 할 것 없이 뇌전이나 물총으로 죽일 게 분명하다.

더 최악은?

괜히 나갔다가 ‘엘퍼러’의 지배를 받고 적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그건 ‘에쏘드’도 다르지 않았다.

진짜 문제는, 에쏘드가 막히면 전쟁은 ‘바람의 마녀’ 세상이 된다.

정말 최악의 시나리오였지만 현실감 있다는 게 무섭다. 이 상태로 붙으면 서울은커녕 한국 땅도 밟지 못하리란 건 너무나 뻔하다.

거기다 문팽이 군단이 버티고 있는 바다를 건너기란 불가능하다.

하늘도 엘로엘의 영역이다.

이쯤 되면 전쟁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양학(양민학살)이다.

(오니오프의 영토 지도를 주시겠소?)

(그전에 약속이 먼저입니다.)

(최대한 원만하게 풀리도록 최선을 다할 겁니다. 그게 괴수대응연맹의 존재의의고 사명 아니겠습니까.)

(확답이 필요합니다.)

(...총리. 약속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잘 아시는 분이 그런 말씀을 합니까.)

약속은 깨라고 있는 것이다.

괜히 그런 말이 나돌아다니는 게 아니다.

코죠 카즈마의 답변은 없었고 연락도 바로 끊겼지만, 요구했던 정보가 그의 ‘아메리카 드림워치’에 도착했다는 메시지가 떴다.

연맹에서 예측한 영토랑 크게 오차가 없었다.

오니오프의 동족인 ‘도깨비’를 위성으로 탐지해서 돌아다니는 영역을 오랫동안 조사하면 대략적인 영토가 나온다.

일본에서도 비슷한 방식을 썼을 것이다. 도쿄를 보호해주긴 하지만, 도깨비 왕은 일본의 수호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굳이 통화한 이유는 하나다.

일본의 의사타진.

총리보다는 ‘천왕’의 위세가 더 강하긴 하지만, 그와 통화하려면 신경질 날 정도로 절차가 까다로워서 젖혀뒀다.

일본은 됐으니 이제….

(맹주. 지원이 늦은 것에 대한 변명이라면 정말 바쁘니 나중에 듣겠습니다. 그래도 이왕 전화한 김에 재난원조라도 빨리 보내주십시오.)

중국 국가주석 ‘첸지 죠’가 숨 돌릴 틈도 없이 통보했다.

회의결과를 알지만, 거기에 놀랄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은 중국이었다.

절정고수가 됐다고 으스대던 노블레스는 다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계약자 중 다수가 귀한 수호자를 잃었다.

시기가 무척 공교로웠다.

노블레스 전용 ‘신무기’가 보급되기 직전에 쳐들어왔다. 그래서 정말 프로사냥꾼보다 조금 나은 수준밖에 안 됐을 때 된통 당했다.

그렇다고 꽁꽁 감쳐둘 수도 없었다.

항구도시 상하이는 항구를 잃었다. 하지만 ‘한국의 에쏘드’가 지원 올 때까지 시간이라도 끌지 못했다면 도시가 사라졌을 것이다.

무의미한 희생은 아니었다.

타국의 인물에게 의존한다는 것도 우습고 말이다.

필요한 죽음이었다고 ‘첸지 죠’는 생각했다.

그저, 찔러서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는 격언처럼 속이 쓰릴 뿐이다.

(귀국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뭐…. 피해가 크긴 했지만, 얻은 것도 있었습니다. 자국민 중에서 용신 계약자가 나왔으니까요.)

페이 링이 ‘용의 계약자’가 됐다.

국적이 바뀌긴 했지만, 그렇다고 뿌리가 달라지는 건 아니다.

첸지 죠는 상하이 복구작업을 진행하면서 여론도 빠르게 손을 보고 있었다. 국가의 기틀을 다잡을 기회였다.

『중국인 중에도 ‘용의 계약자’가 나올 수 있다!』

엄연히 편법으로 계약한 거지만, 국민들은 그런 세세한 진실까지 알 필요는 없다.

좋은 것만 보고 들으면 된다.

계약자 ‘페이 링’의 수호자 ‘아쿠버스’가 자국의 영토인 상하이를 지켜냈다는 식으로 온종일 뉴스에 보도했다.

실제로 그 활약상을 본 산증인이 적지 않아서 조작할 것도 없었다.

바다를 지옥으로 만든 용신(龍神)!

카르발트가 문팽이의 몸속으로 들어가는 광경은 첩보위성으로만 탐지됐다. 일반인들은 그저 아쿠버스의 위용만 봤을 것이다.

...음란한 자세로 업혀 있는 그녀를 못 봐서 천만다행이다.

(주석은 늘 어둠 속에서 빛을 찾는 것 같습니다.)

(칭찬이란 망부석을 깔고 빙빙 돌리지 마시지요, 맹주. 원군의 그림자도 안 보인 연맹의 원조는 언제 도착하는 겁니까.)

(하, 하하…. 최대한 서두르라고 이르겠습니다.)

괴수대응연맹은 회원국들이 보내주는 ‘보험료’로 운영된다.

그래서 평소에는 밥만 축내다가 국가위기가 발생하면 군대와 식량 등의 ‘보험금’을 토해내는 것이다.

나라가 드는 보험회사라고 보면 된다.

아무튼, 중국은 무조건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한국, 엄밀히 따지면 ‘엘퍼러’와 친하게 지낼 의도가 다분했다.

여론통제가 그 증거다.

‘엄살은….’

근대역사를 싹 뒤져도 ‘상하이’처럼 적은 피해로 ‘9종’을 밀어낸 경우는 없었다.

보통은 도시가 폐허로 변하고 인구가 확 줄어든다.

그런데 중국은 항구가 부서지고 수호자와 노블레스 다수가 죽는 정도로 그쳤다. 정말 ‘왕의 행차’가 있었는지 의문스러울 만큼 경미(輕微)한 피해였다.

하지만 ‘공격’받은 것도 사실.

어떻게든 많은 ‘보험금’을 타보겠다는 첸지 죠의 심보가 느껴졌다.

(고생이 많습니다.)

(그쪽도.)

할 말이 끝나자마자 거두절미하게 끊는 중국 국가주석이었다.

혀를 찬 괴수대응연맹 맹주는, 중국과 이웃하고 있는 ‘러시아’와 ‘인도’에 경거망동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상처 입은 맹수는 사나운 법.

지금의 중국이 그랬다.

여기까지 사전작업을 마무리한 아몬 헤이젤은 오늘의 하이라이트인 한국에 연락했다. 다행히 여긴 일본이랑 달리 실권자와 전화하기가 무척 쉽다.

(맹한 맹주가 무슨 일?)

(...정말 몰라서 하는 질문이 아니라고 믿겠습니다, 문팽이 계약자.)

(아직 아닌데.)

(실패할 것 같지 않으니 사소한 호칭은 넘어갑시다, 회장.)

선지혜의 목소리는 매우 기분 좋아 보였다.

국력이 강해지기 때문일까, 아니면 9종 계약자가 돼서?

아몬 헤이젤의 예상은 이 정도가 한계였다.

태어날 때부터 ‘선유나’와 ‘와이츠’의 뜻대로 운명이 결정지어졌던 선지혜가 느낀 해방감은 한마디로 표현하기가 불가능했다.

그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은 대화하는 태도에서도 드러났다.

(전쟁은 없으니 걱정 뚝.)

(...너무 쉽게 말하면 믿음이 안 가는 법입니다.)

(하지만 정말인걸. 역시, 인간이란 생물은-, 됐어. 지금부터 맹한 맹주를 설득해줄게.)

(......)

(아쿠버스와 문팽이. 아주 강력한 전력이지. 하지만 그 둘은 계약자가 누구든 관계없이 용사님 뜻대로 움직일 거야. 그리고 용사님은 전쟁을 싫어해.)

그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하고, 중국 무협을 동경한다. 하지만 합병해버리면 문화가 죽고 이 즐거움도 사라진다.

선지혜가 아는 한무일은 절대로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굳이 취미 때문이 아니더라도 늘 인류가 발전하는 길을 모색하는 ‘순수한 용사’가 전쟁을 택할 리 없다.

강자는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손해인 사상에 심취해있다.

너무나 착해빠진 용사님….

덤으로, 숨만 쉬어도 ‘이상한 미녀’들이 잘 꼬이는 체질이다.

여태는 계약자만 경계하고 수비하면 됐는데, 여성형 괴수까지 수비범위가 확대되면서 천하의 선지혜도 하루하루 바빠졌다.

이게 전쟁보다 백 배, 천 배 중요하다.

땅따먹기에 심력 소모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

(그 용사님은 뭐하는 중입니까.)

(몰라. 이제 만나러 가는 길이야. 오라고 하면 서울이 달팽이에게 쓸려버려서…. 그것도 멋지겠다고 생각하지만, 어쩔 수 없이 마중 가는 중.)

(...좋은 결실이 있길 기도하겠습니다.)

문팽이와 선지혜.

뭔가 대단히 불길한 조합이다.

순화해서 표현하자면, 상성이 지나치게 좋아 보인다고 해야 할까.

도시를 가만 놔두질 못하는 폭군끼리 만난 환상의 궁합이다. 옛날부터 쭉 생각했지만, 와이츠는 그녀와 맞지 않는 수호자 같았다.

세계에서 가장 똑똑한 여자라니?

뭔가 대단히 안 어울리는 옷을 입은 느낌이다.

하지만 문팽이라면?

매우 안 좋은 방향으로 잘 맞는 조합이란 불안감이 새록새록 솟아났다.

(나중에 자가용 타고 놀러 갈게.)

(절대 오지 마십시오!)

초대형 불도저를 ‘자가용’으로 쓰려는 마음가짐부터가 글렀다!

괴수대응연맹 맹주가 ‘절대로 안 온다고 약속해주십시오!’라고 떠들었지만, 가볍게 무시해줬다.

깨라고 있는 약속을 왜 해?

역시, 맹한 맹주라고 키득거린 선지혜는 일방적으로 통화를 끊고 전방을 향해 활짝 팔을 벌리고 흔들었다.

정말 거대한 달팽이네.

비행 중인 와이츠의 오른손 손아귀에서 밑을 내려다보며 선지혜는 생각했다.

‘한국이 커지면 선배도 기뻐하겠지?’

꼭 전쟁만이 능사가 아니다.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이어진 긴 산줄기인 백두대간(白頭大幹)을 밀어서 바다를 메꾸면 간단하다.

절대로 간단한 토목공사가 아니지만, 저 달팽이라면 금방 해낼 것 같다.

정말 기대되는걸!

상상만으로도 팬티가 축축해졌다.

“크르르릉.”

왕이란 족속 자체가 마음에 안 드는지 와이츠 ‘미카헬로 싸이어’가 콧바람을 불었다.

그런 용신을 달래듯 거대한 왼손을 쓰다듬는 작은 손길이 있었다.

대한의 국모, 선유나.

유부녀보다는 여신이란 찬사가 더 어울릴 것 같은 자태였다.

그녀는 괴수대응연맹 맹주가 수긍할만한 ‘와이츠 계약자’에 어울리는 지적인 미모로 차분히 지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두 눈은 지혜를 머금고 있었지만, 무슨 생각 중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만큼 깊고 어두웠다.

< [30화-2] 이름은 너로 정했다!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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