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1] 이름은 너로 정했다! >
[30화] 이름은 너로 정했다!
학명: 세이랑(어떤 바다의 비행소녀)
서식지: 바다, 호수
특징: 눈이 맞으면 뿅 가요!
위험도: 4종 소형
비고: 음란한 인어공주♬
***
세계는 여러 의미로 대격변을 맞이했다.
선진국, 강대국에는 다 있는 괴수대응본부의 총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괴수대응연맹’에서는 이것저것 고치기 바빴다.
가장 사소한 문제로는 ‘아쿠버스’의 등급.
여태 ‘6종’으로 평가했으나 이번 상하이 사건을 계기로 ‘8종’까지 격상시켰다.
『뇌전(雷電)』
늘 약하다는 평가를 받아왔던 능력이 바다에서는 지옥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바다’라는 조건 때문에 8종에는 약간 못 미치는 감이 있었는데, 아쿠버스가 ‘용신’이란 플러스알파가 붙으면서 이 안건이 통과됐다.
등급 가지고 뭘 투표까지 하고 난리인지….
하지만 인간에게 위협적인 괴수를 구분하는 건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게 학자들의 밥그릇이기도 하고 말이다.
“오늘의 마지막 안건은….”
“뜸들이지 말고 빨리 시작하시오!”
“옳소!”
“이것 때문에 연맹까지 왔다!”
고상한 학자와 정치가답게 예의를 지키며 조용조용 진행됐던 회의가 마지막 안건을 놔두고 시장바닥을 방불케 변했다.
인류가 생존을 위협받던 100년 전에는 모두가 열심히, 정말 치열하게 연구했다.
그 결과, 웬만한 정보들은 전부 체계화됐다.
간혹, 새로운 괴수나 생태, 특징 등이 발견되곤 하지만, 학자들이 날밤 새워가면서 일하던 과거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랬는데 최근 들어 정말 흥미로운 것들이 톡톡 튀어나온다.
예를 들자면?
『노블레스』
소모품 취급이던 남성을 구원한 신기술!
이 연구로 학자들은 오늘도 탐구욕을 불태우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연히 ‘프로토타입’을 연구할 수밖에 없다.
최초의 ‘괴수 지배자’ 한무일.
진짜, 해부만 안 했을 뿐이지 그 당사자의 모든 정보가 공개됐다.
유전자와 신체 데이터는 물론이고 능력에 대한 모든 지식과 정보 등을, 약소한 돈을 받고 숨김없이 내놓았다.
이래서는 ‘비밀’을 파헤치는 맛이 없어서 역으로 말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비밀이 없으니 흥미도 사라졌다.
곧 ‘프로토타입’은 구시대 유물이 되리라!
자신들이 내놓은 신상품 ‘노블레스’가 여성을 밀어내고 세계를 석권할 날이 머지않았다고, 학자들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랬는데….
“이번 상하이 참사에 대해 모두 아실 겁니다.”
“본론으로 넘어갑시다!”
“옳소!”
“아는데 왜 말합니까!”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냥꾼을 가진 나라답게, 가장 많은 노블레스를 보유한 중국이 속된 말로 초전박살이 났다.
상대와 상성이 좋지 못했다는 건 변명이다.
대재앙이란 표현답게 ‘9종 괴수’는 정말 터무니없는 결속력과 통솔력을 발휘했다. 그 ‘왕’의 강함이 문제가 아니었다.
근본적인 열세가 있었다.
뱀페스트가 첨단무기를 든다고 해서, 무력의 종점인 ‘8종’이 되는 건 아닌 까닭이다.
그런데 그 대전제가 무너졌다.
첨단무기를 웃도는 만능무기 ‘에쏘드’가 원흉이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프로토타입의 명칭과 등급 등을 획일화하고자 합니다.”
사회자는 진땀 흘리며 말했다.
그 즉시, 사방에서 온갖 의견이 쏟아져나왔다.
여론은 둘로 나뉘었다.
어떻게든 ‘한무일’을 깎아내리려는 자들과 치켜세우려는 자들. 그리고 대세는 ‘치켜세우려는 자들’이었다.
프로토타입은 ‘열혈사나이’였다.
가진 지식과 정보를 아낌없이 내놓은 위인(偉人)이다.
속내야 어떻든 공식적인 자리에서 ‘이런 남자’를 비방한다면 스스로 소인배라고 광고하는 꼴이기에 점잖게 대응하는 것이다.
“학명부터 통일하는 걸로….”
“마이티가이!”
“에쏘발트!”
“노블 1세!”
여기저기서 자신들이 옳다는 악다구니가 토해냈다.
신사적으로 투표도 해봤으나 득표수가 전부 고만고만해서 결정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이래서는 끝이 안 날 것 같았다.
잠자코 듣고 있던 괴수대응연맹 맹주(盟主)가 참관석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학자들의 모임이라기보다는 그냥 자기 잘났다는 병신들의 집단으로 보였던 탓이다.
그걸 나무라겠다는 게 아니다.
세계는 너무나 오랫동안 정체되어 있었다.
외모지상주의와 여성우월시대가 획일화된 ‘백 년 체제’가 갑작스럽게 흔들리면서, 이견조율 경험이 오랫동안 없었던 학자들이 우왕좌왕하는 것이다.
“전부 조용! 닥쳐라! 내 손녀가 한마디 하고 싶다고 했다.”
싸늘한 침묵이 회의장을 휩쓸었다.
맹주의 기세 때문이 아니라 ‘손녀’가 무서웠던 탓이다.
“네…?”
참관 중이던 ‘맹주의 손녀’ 겸 ‘영국의 왕녀’인 실바니아 하이로드는 숙녀답지 않게 입을 쩍 벌릴 뻔했다.
수백 명이 넘는 학자들의 시선이 쏠렸다.
신성한 회의장에 ‘계약자(멍청한 처녀)’가 왜 끼어드느냐는, 은근히 노골적인 눈빛과 표정들도 적지 않았다.
휘파람을 불며 딴청부리는 할아버지를 원망하길 찰나.
꼿꼿이 일어선 실바니아 하이로드는 생일파티장에서 보았던 ‘한무일’이란 남자에 대해 떠올렸다.
‘어째서 이 자리의 모두가 그의 강함과 최초란 것만 생각할까요.’
누구보다도 헌신적이고 공주들이 사랑하는 기사.
그 됨됨이와 바람기(?)를 떠올린 왕녀가 야무지게 말했다.
“팔라딘(Paladin). 어떤가요?”
서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샤를마뉴 대제’를 따르던 12명의 용사 중 한 사람으로, 정의로운 전사를 뜻한다.
직역하면 동양의 ‘협객’이랑 이음동의어다.
말해놓고 보니 제법 괜찮다고 자찬하는 실바니아 하이로드.
고명한 학자들은 서로를 돌아보았다.
‘저건 좀 아니지?’
‘응. 아니야.’
‘정말 뜬금없구먼!’
그들이 괴수의 학명을 정할 때는 늘 특징을 대입한다. 그런데 ‘팔라딘’이라고 하면 자연과학에서 고대역사로 가는 기분이다.
정말로 그녀의 뜻대로 된다면 연구할 맛이 안 날 게 분명하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계약자(멍청한 처녀)’가 정한 규칙 따위는 따르고 싶지 않다는 청개구리 심보였다.
상대가 ‘8종 계약자’니 허투루 상대해선 안 된다.
학자들은 일치단결해서 후보를 줄이고 신속하게 재투표에 들어갔다.
“프로토타입의 학명은 ‘엘퍼러’로 정해졌습니다.”
사회자의 투표결과를 듣자마자 하이파이브를 날리는 사내들. 반대로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는 왕녀였다.
카르발트는 ‘카르 4세’와 ‘가더발트’의 합성어였다
사냥꾼의 무장에서 따온 별명을 붙임으로서 그래도 ‘인간’으로 대우해줬었는데, 이건 그야말로 ‘괴수’ 취급이었다.
『엘퍼러(요정을 지배하는 황제)』
한무일은 군주계급인 ‘9종 괴수’에게만 허용되는 ‘지배’ 능력을 쓰고 있었다. 거기서 착안한 이름이었다.
그 능력이 ‘과학의 우연성’이었든 뭐든 더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름이 정해지자마자 나머지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엘퍼러는 단번에 ‘9종 괴수’에 올라갔고, 도감에도 등록됐다!
학자들의 만행을 흐뭇하게 보는 맹주.
실바니아 하이로드는 그런 할아버지를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쳐다봤다.
그 시선에 움찔한 금발 청년이 말했다.
“흠흠! 내가 젊었을 적에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구나.”
남자가 흥하는 얘기는 꿈과 게임에서나 통했다.
괴수대응연맹 맹주도 유년기부터 장년기까지 아내(영국 여왕)만 바라보며 살아야 했다. 그게 싫어서 귀족(대공) 지위를 포기하고 괴수대응본부에 뛰어들었다.
그 결과가 연맹의 수장.
어째서 악착같이 노력했느냐고 누군가 물어도 ‘그냥’이라고밖에 답할 수 없는 그만의 속사정이었다.
왕녀는 슬쩍 말을 돌리는 조부를 흘겨봤다.
“절 곤란에 빠트리고 웃으시는 거예요?”
“오오! 나의 어여쁜 실비! 누구 손녀인지 모르지만, 화내는 모습조차 톡톡 튀는 사랑스러움이 넘치는구나!”
“...됐어요.”
“하하! 마법으로 두꺼비가 되는 줄 알고 조마조마했단다!
실바니아 하이로드는 ‘듀크마 계약자’다. 괴수가 사용하는 모든 마법을 다루는 ‘8종 대마법사’가 그녀의 수호자.
하지만 그 마법이란 게 생각처럼 만능은 아니다.
세이랑처럼 ‘매혹’하는 동술(瞳術)도 있지만, 괴수가 사용하는 마법 대다수가 파괴적인 결과를 부른다.
그래서 듀크마의 마법도 파괴의 성향이 짙다.
물리법칙을 무시하고 사람을 두꺼비로 바꾸는 마법은 아쉽게도(!) 없었다.
“그런데 무슨 마법을 부린 걸까요?”
“엘퍼러?”
“네.”
“달팽이도 요정…. 하하! 농담이다. 그 의문은 곧 당사자가 풀어주지 않겠느냐. 그걸 알기에 학자들이 궁둥이 붙이고 있는 게지.”
굳이 닦달하지 않아도 자료를 곧 보내올 터였다.
하지만 그 시기가 너무 빨랐다.
신성한 회의에 참견한 8종 계약자를 인식하고부터 합심해서 쭉쭉 진행해가던 학자들이 광분의 도가니에 빠졌다.
벌써 공개된 모양이다.
아쿠버스와 세이랑이 ‘한무일’을 따르는 까닭은 여전히 오리무중. 하지만 문팽이가 중국에서 회군하여 한국에 상륙한 원인은 명확했다.
“협상이라니!”
“신이시여! 3번째 9종 수호자라니!”
“부산이 어디야? 서울 옆은 인천이라고?”
“내가 간다!”
학자들이 ‘9종’이라고 정의한 ‘왕’은 특별하다는 가설이 입증된 순간이었다.
항복하고 대화라니?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 족속이 바로 괴수다. 그런데 ‘왕 vs 왕’은 종전협상 같은 것도 가능한 모양이다.
이게 사실이라면 진짜 혁명이다.
엘퍼러가 돌아다니면서 ‘왕’을 쓰러트린 후에, 살려주는 조건으로 협상하여 인위적으로 ‘9종 계약자’를 양산할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요정을 지배하는 부러운 능력이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 더 엄청난 미래가 코앞에 도달한 걸지도 모른다.
노블레스?
어쩌면 필요 없을 것이다.
세계의 모든 도시를 9종 수호자와 추종자가 지켜준다면 ‘반쪽짜리 흡혈귀’ 따위는 연구해봐야 시간 낭비다.
“또 난장판이 됐군.”
“그렇다고 ‘또’ 손녀 타령하시면 진짜 화낼 거예요.”
“나도 염치란 걸 안단다, 실비.”
“할머니 앞에서 똑같이 말씀하실 수 있으면 인정해드릴게요.”
“미안하다, 실비! 내가 잘못했구나!”
괴수대응연맹 맹주의 체면이고 뭐고 즉시 사과했다.
이 대화 구도만 보면 연맹이 영국 왕실의 사조직처럼 보이지만, 공(公)과 사(私)는 확실히 구분되고 있다.
그는 영국에서 태어났고 영국의 수장을 아내로 뒀었지만, 괴수대응연맹 소속이 되고부터 스스로 ‘세계인’이라고 버릇처럼 말하곤 한다.
그래서 이런 걸까.
세계인으로서 학자들이랑 다른 의미로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인류가 마침내 구원받는가…?’
아몬 헤이젤(이혼하면서 ‘하이로드’ 성은 회수됐다.)은 어린애처럼 기대하고 말았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지만, 이 마음만은 어쩔 수 없었다.
괴수대응연맹 맹주로 있으면서 알고 지낸 수많은 인재와 지인을 먼저 떠나보냈다. 그 고문 같은 반복이 드디어 멈출지도 몰랐다.
아직 회의가 다 끝나지 않았음에도 학자들이 우르르 나갔다.
“요즘은 지루할 틈이 없군.”
“...오라버니는 또 흥분하겠고요.”
“부러우면 지는 건데 말이다. 녀석은 태어날 때부터 왕자로 너무 편하게 자랐어. 왕족의 의무를 모르는 건 아니지만, 자신이 무조건 최고여야 한다는 편견이 있지.”
조금도 귀엽지 않은 손자 ‘카이서스 하이로드’를 떠올렸다.
괴수대응연맹 맹주로서 혈연을 초탈해야 한다고 늘 되새김질하지만, 애꿎은 속이 바짝 마르는 기분만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영국의 왕자’를 잘못했다고 비난할 수 있을까?
모든 나라의 처지가 비슷했다.
‘극동(極東) 3강의 정세가 완전히 굳어버리겠군.’
어쩌면 ‘극동’이 세계를 지배할지도 모른다. 한국이 중국과 일본을 합병한다면 그렇게 되는 것도 시간문제다.
실제로, 아프리카는 이집트를 중심으로 재편됐다.
나라에 ‘9종 수호자’가 있다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국력’이 급부상한 결과다. 계약자는 한 명뿐이지만, 딸려오는 고위괴수가 수십에 달하니 당연하다.
“저희도 이만 가요.”
“에스코트는?”
“정중히 거절하겠습니다.”
쌀쌀맞은 손녀만큼이나 회의장도 썰렁해졌다.
쓰게 웃은 맹주는 조용히 손목시계 ‘아메리카 드림워치’를 만지작거렸다.
(일본 총리와 연결해줘. 그래. 농담 아니야.)
부산과 도쿄.
가깝다고 할 순 없지만, 그건 인간의 시점이다.
왕끼리 이웃하게 생겼네?
화창한 하늘이 영토분쟁 하기 딱 좋은 날씨다.
< [30화-1] 이름은 너로 정했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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