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122화 (122/287)

< [29화-4] 바다의 왕자 >

정말로 파고 또 팠다. 파죽지세(破竹之勢)라고 해도 좋으리라.

원래 같으면 안쪽으로 파고들수록 문팽이의 중력을 강하게 받으며 납작해졌어야 정상이지만, 이 둘은 멀쩡했다.

하이블의 재롱을 비웃듯 진격을 멈추지 않던 문팽이가 멈췄다.

지난 시드니의 참패를 반성하며 만반의 준비를 하고 또 방심하지 않겠노라 다짐했던 슈퍼달팽이는 공황에 빠졌다.

작은 기생충이 몸 안에 들어왔다.

그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곧 자신의 중력에 찌부러질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멀쩡히 살아있는 건 둘째치고 빠른 속도로 심장에 도달하고 있었다!

‘내가 죽는다고…?’

온갖 공격을 다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살아남았던 문팽이는 정말 믿기지 않는 미래를 떠올리고 말았다.

껍데기가 단단하다면, 그 알맹이는 무지막지한 신축성과 탄력성에 칼날이나 발톱을 포함한 그 어떤 외부충격도 전혀 힘을 못 쓴다.

게다가 덩치도 크다!

설사, 집중공격을 받고 신체 일부가 훼손돼도 티가 안 날 만큼 문팽이는 거대하다.

하이블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맞고 있지만, 그럼에도 재롱으로 치부할 수 있는 것도 다 이런 이유다.

그런데 위기를 맞이했다.

도시를 부수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꺄아아아!!”

문팽이는 즉시 추종자들에게 지시해서 사냥꾼 중 가장 반반한 처녀를 납치했다. 얼굴부터 몸매까지 정말 마음에 안 들지만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즉시 계약하고 꿀꺽 삼키듯 젤리 같은 몸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처음에는 추종자들로 하여금 내부에서 깔끔하게 처리하게끔 하려고 했지만, 도저히 그럴 놈들이 아니었다.

왕(王)이었다.

미약해서 여태 놓쳤지만, 이젠 뚜렷하게 알 수 있었다.

처음에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저항할 생각이었지만, 상대가 ‘같은 신분’이라면 협상해도 괜찮다는 결론을 내렸다.

스멀스멀

외부를 관찰하던 눈도 쏙 들어갔다. 그리고 추종자들과 함께 바다로 천천히 후퇴했다.

앞으로 조금만 더 가면 됐는데!

그런 아쉬움을 뒤로하고 침입자에게 집중했다.

“...사람?”

슈퍼달팽이가 사람도 먹는다는 얘기는 금시초문인 무일은 어리벙벙했다.

에쏘드로 열심히 삽질하던 중에 처음으로 은색 피와 반투명한 살점 대신 사람을 조우(遭遇)한 것이다.

이걸 우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의 [예측]이 절대 아니라고 즉답했다.

이 안은 공기가 희박하지만, 그래도 아예 없던 것보다는 나았다. 덕분에 간신히 숨통이 트인 ‘인간 여성’은 구출되자마자 철퍼덕 주저앉았다.

복장은 딱 초보사냥꾼.

페이 링과 시링 팽. 그 둘이랑 비슷한 느낌이었다. 단순히 ‘중국산 미녀’라서가 아니라 풍기는 분위기라는 게 그랬다.

그녀들이랑 다른 점이 있다면?

엉성했다.

일어서는 자세부터가 전투랑 인연이 없는 민간인이었다.

덤으로 성형미인이었다.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판판 소’라고 해요.”

“양판소?”

“판판 소! 직업은 작가죠! 혹시, 제 이름을 들어보셨나요?”

첸지 죠에게 졸라서 베이징에서 상하이까지 헬기를 타고 따라온 판판 소는 ‘카르발트’가 등장했다는 보고를 듣자마자 항구로 달려 나왔다.

물론, 무작정 돌격한 건 아니었다.

만류하던 중국 정부에서 마련해준 복장과 무기를 착용하고, 과분하게 호위까지 붙었다.

하지만 위험을 무릅쓴 것치고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바다가 뇌전과 화염에 휩싸이며 한 치 앞조차 내다볼 수 없었던 탓이다.

실망하고 돌아가려 했다.

그런데 제법 안전지대까지 왔다고 안도할 틈도 없이 일직선으로 돌격해온 괴수들에게 납치됐다.

처음에는 이대로 죽는다고 생각했는데 납치였다.

이후, 달팽이에게 먹히고 여기에 와있었다.

“...아니.”

“그럴 수가!”

가장 읽어줬으면 했던 사람의 부정적인 답변에, 판판 소는 현재 상황도 잊고 낙담했다.

한국말이 능숙하군?

앞으로 3분 이내에 도달할 목적지인 심장으로 가는 길에 떡하니 놓인 여성을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까.

이미 답은 나왔지만, 성형미인이란 점이 걸렸다.

얼마나 뜯어고쳤는지 모르나, 저 쌍꺼풀만은 절대 자연산일 수 없었다.

“문팽이랑 계약한 겁니까?”

“그게…. 네.”

대답하는 판판 소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째서 이 위험천만한 장소에 선지혜 회장이 있는 걸까, 하고.

“어떻게 계약한 겁니까?”

“흑흑!”

갑자기 우는 판판 소!

그냥 물어본 거였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싶어서 한세리를 쳐다봤지만, 그녀도 모르겠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괜히 죄지은 것 같은 기분인 무일이 예의상 물었다.

“왜 우는 겁니까?”

“문팽이…. 저의 소유주(所有主)이신 ‘까루나 막찌몬쓰’ 님이 제 얼굴에 대해 평하신 말씀을 듣고 서러워서….”

“소유주?”

“네. 벌레 이상으로 취급하기에는 제 미모가 지나치게 천박하다고….”

카르 4세는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단번에 이해했다.

문팽이 ‘까루나 막찌몬쓰’가 일종에 번역기로 이 중국인 여성 ‘판판 소’를 쓰려고 임시계약한 것이다.

괴수가 죽기 싫어서 발버둥 치는 걸로 보였다.

보통은 이런 식의 대화는 절대 시도하지 않는 걸로 아는데 ‘왕’이라서 다른 모양이다.

자기 목숨 귀한 줄 안다고 할까.

“일단 들어보도록 하죠. 그 설득이란 걸.”

“네! 그럼,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은 모두 소유주께서 하시는 말씀을 그대로 전달한다고 보시면 돼요.”

무일은 양반다리 한 채 벽에 기대어 앉았다.

안 그래도 정말 한계였다.

전투의 긴장감이 한순간에 풀리면서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빠질 뻔했다. 하지만 다행이게도 늦지 않게 가더발트를 해제할 수 있었다.

각도 상으로 판판 소에게 바짝 긴장한 중심을 보일 염려는 없었다.

물론, 한세리는 빤히 쳐다보고 있지만 말이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달팽이 왕.”

“...우선, 나를 궁지에 몰아넣은 그대에게 경의를 표한다. 미지(未知)의 왕이여.”

문팽이가 본 ‘카르발트’란 인간은 그랬다.

판판 소의 지식을 흡수함으로써 침입자가 ‘털 없는 원숭이’란 사실은 조금 전부터 알았으나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어떻게 이게 가능하지?

하나의 육체에 셋이나 기생하고 있었다.

가더발트, 뱀페스트 그리고….

에쏘드.

아름다운 ‘용사의 정령’은 아닌 것 같지만, 그녀 또한 ‘용사의 정기(精氣)’를 양식 삼아 존재하고 성장하는 영체(靈體)다.

변변찮은 용사라도 곁에 없으면 소멸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너를 죽이고 무사히 육지로 탈출할 것까지 고려하면 시간이 그다지 여유롭진 않거든.”

“...좋다. 요구를 말하라.”

“당장 상하이에서 물러날 것. 그리고 대한민국 부산에 상주(常住)할 것.”

한무일과 한세리는 동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입꼬리를 쓱 올리며 목적을 밝혔다.

반대로 판판 소는 쌍꺼풀이 짙은 두 눈망울을 휘둥그레 떴다.

문팽이의 사념이 느껴졌다.

단호히 거절할 줄 알았던 9종 괴수는 부산이란 도시의 위치와 환경 등을 따져보며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리 길진 않았다.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으면?

“...조건이 있다. 그 도시를 100년 이내에 서울 이상으로 발전시킬 것. 그리고 왕에게 어울리는 계약자를 내놓을 것.”

부산과 서울의 격차를 떠올리면 100년은 절대 관대한 시간이 아니었다.

대한민국 땅에서 자원이란 자원은 싹쓸이해서 지은 도시가 서울이다. 그런데 남은 찌꺼기로 부산을 그 이상 발전시키려면 정말 허리가 휠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려 9종이다.

국가 차원에서 발 벗고 나설 것이다. 필요하다면 서울을 부숴서 재료를 충당할지도 모른다. 그만큼 대단한 존재가 왕이다.

절대적인 안전이 보장된 ‘왕의 영토’다.

그런 이상적인 도시를 발전시키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데,

‘공주님을 내놓으라고?’

이 슈퍼달팽이가 원하는 ‘왕에게 어울리는 계약자’가 뭔지 모르겠다.

괴수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생각하지만, 6종 이상의 고위괴수부터는 영 자신 없는 무일이었다.

마음에 안 든다고 부산을 밀어버리면 진짜 곤란하다.

“달팽이 왕. 첫 번째 조건을 수락하겠는데, 두 번째는 너무 주관적이잖아. 예시라도 들어줘야지.”

“...외모는 네 옆에 들러붙은 하녀 수준이면 된다. 그 뒤에는 인연이 오길 기다리겠다.”

순결한 자연미인이어야 한다는 건 당연해서 언급조차 안 했다.

하지만 무일은 입을 쫙 벌렸다.

현재 들러붙은 여자라면 단 한 명뿐인 탓이다.

‘이게 또 이렇게 됩니까…?’

어디에 사는 ‘운명의 여신’이 장난친 게 분명하다.

한세리는 ‘선지혜’랑 판박이다.

일이 엄청나게 복잡하고 성가시게 된 것만은 확실했다. 선지혜는 현재 와이츠 ‘미카헬로 싸히어’의 계약자인 탓이다.

하지만 이건 또 다른 기회이기도 했다.

찰거머리 왕을 때어낼 기회!

무일은 성급하게 대답하지 않고 [예감]을 따르기로 했다.

“왕의 여자를 뺏는 걸 도와준다면 그녀의 딸이랑 이어지게 해주겠다. 네가 말한 하녀, 에쏘드랑 똑같이 생겼지.”

“...찬탈(簒奪)이라! 재미있군. 좋다!”

외모보다는 ‘왕의 여자를 뺏는다.’는 거에 더 큰 관심을 보이는 슈퍼달팽이. 도시를 파괴하려는 태도만큼이나 폭군 기질이 다분했다.

...부산, 이대로 괜찮을까.

구세주가 아니라 재앙을 끌어들인 게 아닌지 조금 불안해졌다.

굳이 문팽이의 감정과 억양까지 표현할 필요 없는데 판판 소는 정말 충실했다. 작가 말고 배우를 해도 괜찮을 것 같다.

저게 감정이입이란 걸까?

이 순간만큼은 그녀가 ‘9종 괴수’로 여군주(女君主)처럼 보였다.

“어떻게 나가면 되지?”

“내게 몸을 맡겨라. 왕의 약속은 천금(千金)과도 같으니.”

한세리가 무일의 얼굴을 보며 의사를 물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줬다.

즉시, 그동안 뚫어놓은 터널이 무너졌다. 그리고 셋은 순식간에 문팽이의 살에 파묻히며 어디론가 급물살을 타듯 떠내려갔다.

잠잠한 [예감]으로 보아선 함정이 아니다.

만약 함정일지라도 위험해지는 건 ‘판판 소’란 여인뿐이다.

퐁!

파고들기까지는 한참 걸렸는데 나오는 건 정말 금방이었다.

물론, 그 짧은 시간 동안 호흡곤란으로 황천까지 한 발자국 남겨둔 민간인도 있었지만, 일단은 셋 다 무사히 밖으로 나왔다.

위치는 문팽이의 머리인 것 같았다. 뒷목이라고 해야 할까.

“헉헉! 당분간 휴재(休載)해야 할 것 같아요! 에취!”

여왕이 아닌 평범한 여성으로 돌아온 판판 소가 젖은 몸을 오들오들 떨면서 외쳤다.

그런 얘기를 왜 우리에게 하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소행성처럼 거대한 문팽이는 동쪽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바다를 헤엄치는 게 아니라 땅을 짚고 기어가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달처럼 둥근 등껍질은 밑동만 조금 바다에 잠겼다.

물에 빠진 풍선?

어림짐작으로 보자면 그 정도쯤 됐다.

‘도대체 얼마나 큰 거냐….’

웨일풍이 하늘에서 가장 크다면, 문팽이는 바다에서 ‘가장’은 아니고 3번째로 큰 괴수로 정평이 났다.

녀석 위로 바다에 두 마리-. 아니, ‘두 종’이나 더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진짜 달팽이는 느리지만, 덩치가 이렇게 상식을 초월하니 엄청나게 빨랐다.

중력장(重力場)이 미약하게 발생하는 등껍질은 바닷물로 얇게 덮여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추종자들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달 표면처럼 울퉁불퉁한 문팽이의 껍질을 집게 등으로 붙잡거나 아예 꼭대기의 평평한 곳에 올라가 있었다.

“군단이군.”

이런 녀석이랑 용케 싸울 생각을 했구나, 나란 녀석은.

에쏘드 없이 가더발트뿐이었다면 협상은커녕 아예 상대가 안 됐을 것이다.

촤아아아!

세이랑 무리와 함께 물살을 가르며 헤엄쳐오는 아쿠버스가 보였다.

계속 거리를 두며 쫓아왔던 모양이다.

돌고래처럼 우아하게 솟구치며 아름다운 몸매를 과시한 인어공주들은 열렬하게 구애의 몸짓을 선보였다.

...많이 난감한데.

처음 만났을 때처럼 활공해서 무일의 곁에 착지한 라미아는 한세리의 급성장한(!) 가슴을 탐탁지 않다는 시선으로 노려봤다.

그때였다.

완전히 잊고 있던 작가, 판판 소가 외쳤다.

“영감이 떠올랐어요!”

“......웬 생뚱맞은 소리야.”

“후속작은 ‘바다의 왕자’로 정했어요!”

자칭 유명작가는 주절주절 신작 ‘바다의 왕자’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절대로 발설하면 안 된다는데...

이미 한 귀로 흘려듣는 중이라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다.

< [29화-4] 바다의 왕자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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