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3] 바다의 왕자 >
세계 종말을 재현해놓은 것 같기도 했다.
강력한 중력에 이끌려 운석처럼 떨어지는 잔해들을 피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없었다. 정말 눈먼 화살에 비명횡사할 수 있었다.
이 ‘문팽이 행성’에서 움직일 수 있는 건 괴수뿐이었다. 영향을 안 받고 있다기보다는 괴력으로 버티는 것이다.
여기에 편승해서 반쯤 괴수인 노블레스들이 분투하고 있었다.
하지만 ‘왕의 신하’라고 할 수 있는 9종의 추종자들이 가만 놔두지 않았다.
“으악!”
“컥?!”
끊임없이 몰려드는 괴수들 앞에 무더기로 쓰러졌다.
원래는 전열을 가다듬고 미리 짜둔 계획도 있었을 테지만, 중력에 끌려가면서 전부 허사가 됐다. 그리고 개인행동의 말로는 정해져 있었다.
보통은 그렇다.
이 중력을 계속 받기 위해 아쿠버스를 업고 달리는 카르발트. 그에게는 전혀 해당하지 않는 사항이었다.
라미아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무지갯빛을 띤 2쌍의 지느러미를 양산처럼 활용해서 잡다한 낙석들을 쳐냈다.
물론, 이 순간에도 뇌전이 사방으로 쏘아지는 중이었다.
“제법인데?”
“빠끔. 여태 나를 뭐라고 생각한 건가.”
“에로 캐릭터.”
대꾸하는 대신 귓불을 깨무는 라미아였다.
식겁한 무일이었으나 전투에 임하는 움직임은 거침없었다.
오른손에 쥔 ‘카르세리안 레이소’는 고위괴수를 상대하고, 왼손의 ‘스콜레옹 포르소’는 잔해와 괴수를 통째로 벤다.
어차피 머리는 장식품.
모든 행동은 [예감]과 [예지]로 결정된다.
다가오는 모든 위기와 위협을 [반격]하여 일격필살!
이 초대형 등껍질, 짝퉁 행성에서 처리하는 괴수는 전부 문팽이의 추종자라서 종이 한정되어 있었다.
‘다슬기, 달팽이, 꽃게, 가제, 조개, 갑오징어….’
딱딱한 걸 두른 녀석들의 총집합이었다.
이 녀석들의 학명(學名)을 일일이 떠올리지 않고 쓱쓱 베어 넘기며 전진했다. 공통점이라면 전부 ‘소형’이라는 정도.
크기에 비례해서 무거운 ‘보통’부터는 안 끌려오는 모양이다.
실제로도 그랬다.
진짜 달에서 지구를 올려다보는 것 같은 광경. 그렇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거리가 가까웠지만, 그런 지구에는 커다란 괴수뿐이었다.
문팽이의 추종자와 중국의 수호자가 난투극을 벌이고 있다.
아니다. 난잡한 전투는 아니다.
슈퍼달팽이의 졸개들이 일방적으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이거, 좀 더 서둘러야겠는데.”
야생괴수 주제에 비겁하게 협공하고 있었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독불장군인 중국의 수호자들이랑 달리 녀석들은 이기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노블레스의 사망자 대부분은 수호자의 공격에 휩쓸린 경우였다.
고의로 도시나 인간이 많은 곳으로 유인한 추종자들의 의도를 알면서도 최대전력으로 공격하는 수호자.
그 탓에 아직 문팽이가 지나가지도 않았는데 상하이는 쑥대밭이 됐다.
서울에서 볼트윙이 날뛴 일이나, 레드군과 솔라충의 접전으로 63빌딩이 무너진 정도는 애교 축에도 못 들었다.
지금부터 수습해도 앞날이 캄캄한데 아직 시작도 안 됐다.
“빠끔. 저기를 보라.”
라미아가 말한 직후였다.
강한 충격이 문팽이 행성을 흔들었다.
“오오…. 저게 바로 마왕(魔王)….”
남자가 가질 수 있는 모든 근육을 다 소유한 것 같은 마초의 궁극형태였다. 황소처럼 머리 좌우에 달린 뿔은 그 상징성을 더욱 명확하게 했다.
피부는 연붉은색, 옷이라고 부를 건 하나도 걸치지 않았지만, 중심만은 조잡한 나뭇잎 한 장으로 가려져 있었다.
정정한다.
녹색 거북이 등껍질 같은 걸로 덮여있다.
저건 계약자의 요청으로 붙인 취향이 아니라 원래 저렇게 생겨 먹은 괴수다. 저 나뭇잎도 신체 일부분이란 뜻이다.
【하이블 / 8종 보통】
문팽이와 비교하면 초라하다 싶을 만큼 작은 체구였다. 하지만 그건 이 달팽이가 지나치게 큰 것이지 저 마왕이 작은 게 아니었다.
덩치는 4층 건물 수준.
비단 신장만 그렇다는 게 아니라 하이블의 근육질 육체는 꽉 차게 보였다. 그 어떤 석고상도 이 괴수처럼 남성미를 잘 살리진 못하리라.
움직일 때마다 근육이 살아 숨 쉬는 것처럼 꿈틀거린다.
저 몸을 보면 손톱과 발톱이 길게 자란 손발은 공격수단으로 안 보였다. 인간이 저랬다면 맨손으로 코끼리와 싸워도 이길 것 같다.
“빠끔. 야만적이도다.”
라미아의 평가는 냉랭했다.
페이 링과 강보라(!)의 영향을 짙게 받은 아쿠버스의 취향은 ‘한무일’처럼 적당히 평균적인 근육이었다.
허벅지와 팔뚝이 여자의 허리보다 두꺼울 것 같은 신체는 사양이다.
물론, 한무일은 아니었다.
호리호리한 소년 용사와 영웅이 대세인 ‘일본 애니메이션’ 애청자지만, 그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체형은 미국의 슈퍼맨과 그리스신화의 헤라클레스였다.
“멋지다….”
가지지 못한 자의 질투와 선망이 공존하는 한마디를 중얼거렸다.
방금 문팽이 전체에 전해졌던 충격은 ‘하이블’이 무거운 ‘변강쉘’을 가볍게 들어서 냅다 박은 결과였다.
이어서 두 번째 충돌음이 터졌다.
군주인 슈퍼달팽이의 몸이랑 충돌한 ‘조개 기사’는 몸을 일으킬 새도 없이 돌진해온 마왕의 몸통박치기에 납작하게 뭉개졌다.
그 단단한 조개껍데기와 근육질 조갯살도 무의미했다.
남자는 몸이 무기다!
그렇게 주장하는 것 같은 하이블의 전투방식이었다.
하지만 인간은 결코 따라 해선 안 된다. 도구의 힘을 빌리지 않은 인간이란 정말 나약하기 짝이 없으니까.
쾅! 파직! 퍽! 우당탕!
카르발트가 [반격]으로 베어 넘기는 고위괴수를, 하이블은 맨몸으로 처리하고 있었다.
육탄전의 진수를 보여준다.
때리고 차고 던진다!
단순하지만, 그 위력이 상식을 넘어서니 전부 일격필살이 됐다.
순수한 물리력으로 8종을 찍은 괴수다웠다.
“빠끔. 우리의 목적지는 저 덩치가 있는 곳이노라.”
하이블은 문팽이랑 힘 싸움 중이었다.
도시로 진격하려는 슈퍼달팽이를 마왕은 온몸을 던져 막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스신화에서 지구를 떠받치는 형벌을 받고 있던 티탄 ‘아틀라스’처럼 정말 터무니없는 짓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쭉쭉 밀리는 중이었다.
하이블은 거뜬히 버티며 역으로 밀어내려는 조짐마저 보였지만, 안타깝게도 두 발의 지지기반이 턱없이 약했다.
도시의 지반을 다진 콘크리트와 아스팔트가 찰나조차 버티질 못했다.
“에쏘드는 대형을 상대로 영 힘을 못 쓰네.”
바늘로 콕콕 찌르는 수준밖에 안 됐다.
등껍질 위에서 뭘 하더라도 정말 생체기에도 못 미치는 것 같았다. 거기다 온갖 이물질로 덮인 탓에 본체에는 닿지도 않았다.
...안 닿는다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무일은 발걸음을 멈췄다.
이에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힐끔 올려다보며 라미아가 물었다.
“빠끔. 다른 방도가 떠올랐는가.”
“그래. 가서 세리랑 교대해줘. 그 정령아가씨가 필요해.”
“...빠끔. 알겠노라.”
“내 장비들도 부탁해. 특히, 검은 절대 잃어버리거나 버리지 마! 다른 장비를 다 합친 것보다 비싼 거니까.”
가진 모든 걸 아쿠버스에게 넘겨줬다.
그러자 에쏘드 능력으로 문팽이의 중력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진 무일의 몸은 다시 지구의 중력을 받으며 떨어지려 했다.
떨어지지 않게 잡아주려는 라미아를 만류했다.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자신의 두 다리의 힘으로 높이 뛰어올랐다. 그리고 허공에서 다른 잔해를 밟으며 재차 도약하길 몇 차례 하며 전장에서 벗어났다.
바다를 지옥으로 만들었던 아쿠버스.
하지만 한무일이 없는 이곳에 더는 볼일 없기에 냉큼 빠져버렸다.
착!
바닥에 착지한 무일은 전방의 단단한 벽을 에쏘드로 베고 또 벴다.
문팽이의 몸을 감싸고 있던 잔해들은 에쏘드에 베이자 중력을 잃고 지구로 떨어졌다. 일시적으로 에쏘드의 영향을 받는 것이다.
그리 길지 않았지만, 카르발트에게는 충분했다.
순식간에 터널이 생겼다. 그리고 괴수의 재생력과 중력에 의해 막히기 전에 뚫고 또 뚫으며 전진했다.
그렇다.
문팽이의 몸 안으로 침투할 계획이었다.
그에게는 하이블처럼 강력한 힘은 없지만, 용사의 전매특허인 ‘무엇이든 벨 수 있는 검’이 있었다.
인간은 인간답게 도구를 써야 한다.
에쏘드라는 훌륭한 삽으로 끊임없이 퍼낸다면 이론상으로는 ‘문팽이 행성’을 관통하는 것도 가능하다.
‘부디, 달팽이처럼 몸의 세포구조가 헐렁하길.’
빈틈없이 근육으로 꽉 찼다면 문팽이의 몸속 어딘가에 끼어버리는 수가 있다.
액체나 푸딩처럼 부드럽지 않으면 곤란하다.
다행히 [예감]은 배신하지 않았다.
문팽이의 두꺼운 등껍질을 뚫고 안으로 더욱 파고들자 은색 피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여기서부터가 중요하다.
아쿠버스가 늦지 않았다면 33마리의 세이랑이 이상한 짓 하지 못하도록 감시하던 한세리랑 임무교대 했을 것이다.
정신감응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도움이 필요하다고 할 때부터 기뻐하는 그녀의 마음이 전해진다.
“세리! 나와!”
들어왔던 입구는 차단됐지만, 상관없다.
용사의 정령이 사는 ‘집’이 있고, 물질세계에서 사용할 매개체인 ‘괴수의 피’만 있다면 어디서든 그녀를 부를 수 있다.
9종 괴수 문팽이의 혈액.
군주의 피로 흠뻑 젖은 ‘카르세리안 레이소’의 칼날을 잡는 가녀린 손가락이 있었다.
사방에 넘쳐나는 피가 순식간에 한세리의 형태를 구현했다.
“절 찾으시자마자 냉큼 달려왔어요, 용사님!
“......”
“왜요?”
“진짜 한세리?”
“네! 저예요! 용사님!”
사방에 넘쳐나는 재료로 마침내! 마침내 ‘농염한 성인’이 된 한세리를 본 한무일은 깜짝 놀랐다.
귀여운 소녀풍일 때는 몰랐지만, 그녀의 외모는 누군가를 무척 닮았다.
마음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가장 처음에 만난 용사가 그리는 이상형을 구현한 에쏘드는,
‘선지혜! 완전 선지혜잖아!’
대한민국 여성의 가슴둘레 평균을 초월한 선지혜보다도 풍만한 비현실적인 가슴, 그리고 그녀가 ‘더는 불가능해’라고 했던 허리둘레가 더욱 얇아졌다.
결정적인 차이는 따로 있었다.
한세리는 선지혜보다 키가 작고 앳된 이목구비를 가졌다.
명백한 연상인 선지혜는 잠자코 있으면 정말로 ‘누나’처럼 보이지만, 한세리는 딱 봐도 연하(한무일 생각)의 여자친구 같은 분위기를 온몸으로 발산하고 있었다.
“주, 죽는다! 진짜 살해될 거야!”
선지혜가 한세리를 본다면 진짜로 그를 죽이려 할 것이다!
평소에 무일이 ‘이랬으면 더 좋았을 텐데….’라며 망상했던 내용을 ‘용사의 정령’은 충실하게 구현했다.
괴수의 몸속에서 이게 뭔 여유?
의아할 수도 있겠으나 정말로 숨 돌릴 여유가 있었다.
한세리가 문팽이의 피를 이용해서 광산 혹은 동굴의 벽과 천장처럼 단단한 무언가고 변형시켰기 때문이다.
“헷! 역시, 가슴은 출렁거려야 제맛이죠.”
계약자가 뭐라고 하든 수호자는 즐거워 보였다.
무게중심이 상체로 쏠린 게 대단히 만족스러워서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반대로 무일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으아아아! 그 낯뜨거운 옷차림이라도 어떻게든 바꿔봐! 그건 정말 사형선고라고! 아니, 그전에 지구에서 추방당할지도…!”
“네? 용사님 선호도 95% 의상인데요.”
“세리야! 인류에게는 꿈으로만 남겨놔야 하는 미덕과 법규가 종종 있어!”
“우우….”
수긍하기 어렵다는 듯이 귀엽게 뺨을 부풀리며 입술을 삐죽 내민 한세리는 순식간에 옷차림을 바꿨다.
평소에 입던 수수한 원피스가 아니었다.
가슴골과 등허리를 강조한 검은색 ‘칵테일 드레스(cocktail dress)’였다.
치맛단은 무릎 위로 짧은 편이었고, 젖가슴 반절부터 엉덩이 바로 위까지 어깨끈조차 없이 훤히 노출했다.
...이렇게 서술하면 뭔가 있어 보이지만 완전히 부엌 앞치마였다.
등과 허리에 메인 끈이 잘못되면 훌러덩 벗겨질 터였다.
“그래도 이 정도면 합격인가.”
너무나 큰 충격을 받은 후라서 그런지 이런 ‘앞치마 드레스’는 건전하게 보였다.
한세리는 야무지게 삽을 들고 있었다.
마음은 고맙지만, 드레스 입고 막노동은 좀 아니라고 생각된다. 더구나 선지혜 얼굴로 저러니 이래저래 기분이 뒤숭숭했다.
“용사님. 그러면 저는 뭐 하고 있을까요?”
“쫄래쫄래 쫓아오면서 가끔 얼굴이라도 닦아주던가. 원래부터 용사는 혼자 다 하고 동료들은 뒤에서 감탄하며 응원하는 거야.”
“어? 왜요?”
“내가 고생하는 건 괜찮아도 누군가 힘들어하는 건 보기 힘들거든. 그게 용사다.”
혼자 나댄다고 비난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만용이 아니라면 능히 그래야 한다.
아니. 혼자가 아니어야 했다.
애초에 가진 모든 기술과 정보를 공개함으로써 ‘희생적인 용사’를 양산하려 했던 무일로써는 ‘나 홀로 용사’인 현재 상황이 그저 안타까웠다.
“그렇구나~.”
“그럼, 잡담은 이쯤하고 계속 파볼까!”
“네. 나의 용사님.”
< [29화-3] 바다의 왕자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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