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120화 (120/287)

< [29화-2] 바다의 왕자 >

“늦지 않았길!”

물살을 가르며 나아가던 카르발트가 외쳤다.

그 의지에 호응하듯 인어공주들의 팔다리와 허리가 더욱 빨라졌다.

세상에 다시 없을 가장 아름다운 수상스키 혹은 수상썰매의 줄을 왼손에 모아쥔 프로사냥꾼은 오른손으로 에쏘드를 뽑았다.

홀로 뛰어갔다면 아직 절반도 못 갔을 거리.

하지만 세이랑의 도움을 받으니 순식간에 황해 너머의 육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촤아아악!

호락호락 보내주지 않겠다는 듯이 앞을 가로막는 해양괴수. 물기둥이 치솟고 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녀석은 다짜고짜 공격해왔다.

세이랑의 돌진이 아닌 뒤에 딸려오는 사냥꾼의 [업보]에 줄행랑쳤던 잔챙이들이랑 달리 용감한 고위괴수였다.

그러나 아직 약해.

무일은 입을 다문 채 생각했다.

그가 기준으로 삼는 고위괴수는 [예지]를 주력으로 삼는 ‘소형’이다.

여전히 공격 위주의 능력뿐인 카르발트는 한 방만 맞아도 비명횡사할 만큼 약하다. 가령, 괴수의 손톱이 몸에 꽂히면 그걸로 끝.

물론, 당해줄 생각은 없다.

‘박는다!’

5종 괴수의 거대한 몸통에 33마리의 세이랑이 꽂혔다.

이에 쓰러지지 않고 분노한 괴수는 반격을 시도했으나 그보다 빠르게 [반격]한 에쏘드의 칼날에 목숨을 잃었다.

다시 전진하려는 인어공주들의 목줄을 당겼다.

사전에 훈련받은 것처럼 팔다리를 멈춰선 그녀들이 고개 돌려 다음 지시를 기다렸다.

그야 간단하지.

고마움을 담아 일일이 눈인사를 전한 무일은 고삐를 수호자에게 넘겼다.

“세리! 교대다!”

“네! 용사님!”

위험한 전쟁은 남자들의 몫이다.

계약자들이 들으면 분개할 소지가 다분한 생각이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녀들이 아닌 수호자가 싸우는 것이다.

그걸 비아냥하겠다는 게 아니다.

수호자를 설득해서 전장에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계약자들은 존경받을 만하다. 하지만 직접 목숨 걸고 싸울 필요는 없다.

그 역할은 고대부터 남자들이 해왔다.

육체적인 힘 때문만이 아니다.

생물학적으로, 수컷은 아무리 많은 숫자가 죽어도 ‘씨’가 완전히 마르지만 않으면 종족 번식에 지장이 없다.

그걸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소모품』

공장에서 찍어내는 군수품처럼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여자와 아이들을 지키고 장렬하게 쓰러지면 그걸로 충분한 존재.

그 카테고리 안에는 ‘세이랑’도 들어갔다.

야생괴수라면 모를까, 도움을 준 그녀들은 이미 ‘보호해야 하는 여성’에 해당했다.

그것이 용사.

암컷을 위해 희생하는 수컷의 역할이다.

“상하이에 가서 대기해!”

“생선들도요?”

“소란 안 일으키게 잘 감시해. 무고한 남자들을 습격하지 못하도록.”

“그거라면 가만 놔둬도 안 할걸요.”

할 말이 더 있는 것 같았던 한세리는 ‘지시를 받은 세이랑’들이 고삐를 잡아끄는 바람에 순식간에 멀어졌다.

그리고 남은 건, 카르발트와 아쿠버스.

전방의 바다는 수많은 괴수가 얽히고설킨 진짜 난장판이었다. 중국의 수호자와 ‘문팽이 군단’의 격돌!

이 순간에도 해일과 회오리가 여기저기서 몰아치는 중이다.

저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빠끔. 지금부터 그대의 지느러미와 뿔이 되어주겠노라.”

허락도 구하지 않고 등 뒤에서 무일을 두 팔로 껴안는 라미아. 거기에 한술 더 떠서 다리도 두른다.

두 사람의 몸이 꽉 겹치며 단단히 고정됐다.

강력한 고위괴수 주제에 손가락으로도 꿰뚫을 수 있을 것 같은 ‘방어력 제로 젖가슴’을 소유한 아쿠버스.

가더발트의 애무랑 시너지를 일으키며 그를 힘들게 했다.

문팽이랑 싸워보기도 전에 쓰러질 것 같다!

“야! 여자가 다리를 쫙 벌리면 못써!”

등 뒤라서 무일은 볼 수 없지만, 너무나 음란하고 불건전한 자세다.

괴수에게 뭐라고 하는 거람?

역시나 라미아는 태연자약하게 대꾸했다.

“빠끔. 나에게 수치심을 느끼라고 강요하지 말았으면 하노라.”

“참 죄송합니다!”

설득을 포기한 무일은 정신통일을 읊으며 전방을 주시했다.

예의상 해본 말이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업무의 효율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다. 그녀에게 치부(恥部)를 보여달라고 하지 않았으니 무죄다.

솔직히 말하면?

당장 ‘현자 타임’에 돌입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기분 최고다! 자신과 라미아 사이에 끼어있는 옷들이 원망스러울 정도로.

에쏘드도 그렇지만, 아쿠버스도 반칙이 만발하는 ‘여성형 괴수’였다.

인간 여성이 생물학적으로 가질 수 없는 환상적인 피부감촉을 보유하고 있다. 이건 단백질과 지방 비율뿐 아니라 세포 구조 자체가 아예 다른 것 같다.

그런 라미아가 말했다.

“빠끔. 그대의 암컷들을 진정시킬 변명거리도 줬으니 이제 나도 즐기겠노라. 날름.”

“큭! 똑바로 협조해!”

목을 가볍게 핥는 라미아 때문에 부르르 떠는 무일이었다.

전투의 긴장감이 온몸을 휘감고 있지 않았다면 진즉 사달 났을 터였다.

【아쿠버스 / 6종 소형】

괜히 이런 이름을 가진 게 아니다.

그녀는 ‘백합과 요부의 경계’에 있다고 불리는 용신.

취향과 지혜는 별개였다.

밖에서는 내숭 넘치는 요조숙녀지만, 집에서는 음란한 영상을 매일 시청하는 10대 소녀처럼 극단적이다.

정말로 10대 소녀들이 그런지는 글쎄?

의도적으로 목욕 중에만 영상통화를 하는 시링 팽이나, 선지혜의 ‘엉큼한 여중생’이란 발언을 부정 못 하는 윤소영….

주위의 소녀들이 모두 일반인이 아니라서 모르겠다.

“빠끔. 잔챙이들을 치워주겠노라.”

구명조끼처럼 착 달라붙어 있던 아쿠버스의 이마에 달리 두 뿔에서 막대한 뇌전이 뿜어져 나왔다.

에쏘드의 가호를 받는 무일은 무사했지만, 이 일대에서 활동 중인 대다수 괴수가 감전되며 뽀르르 가라앉았다.

한 번으로 끝났다면 괴수 특유의 회복력으로 버텼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발전소 대용으로 써도 될 것처럼 끊임없이 전기를 방출했다.

끝내는 바닷물(2NaCl + 2H2O)이 전기분해(2NaOH + H2 + Cl2)되며 대량의 수소폭발이 발생했다.

바다가 화염과 스파크에 휩싸였다.

“허….”

“빠끔. 아직이노라.”

유독성 가스에 속하는 염소(Cl2)가 괴수의 호흡을 방해했다. 소량이라면 모르겠으나 바다가 통째로 보글보글 중이었다.

그 위험천만한 염소가스는 사방에서 터지는 수소(H2)랑 다시 합쳐져 염산(HCl)이 됐다.

강산에 속하는 염산은 괴수의 피부를 녹이며 재생을 방해했다.

이제 끝?

아직 멀었다.

염산은 또 전기분해(H2O + Cl2 + H2)되어 다시 염소가스와 수소가 된다. 쳇바퀴처럼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이다.

전기가 태우고, 수소가 폭발하며, 염소로 중독하고, 염산에 녹인다.

‘6종 수준이 아닌데…?’

아쿠버스는 순수한 뇌전(雷電)만으로 바다를 지옥에 빠트렸다.

편의상 ‘100만 볼트’라고 했지만, 그녀가 쏟아내는 전기량을 산출하는 건 무리였다. 작정하고 토해내는 양이 어마어마했다.

여기에 부수적인 전기분해.

굳이 화학식을 모르더라도 같은 결과가 나왔을 테지만, 용신(龍神)이 의도적으로 저질렀으니 무언가 효율 측면에서 다르긴 할 것이다.

두 쌍의 지느러미로 쭉쭉 헤엄쳐나가는 아쿠버스가 문팽이까지 직선으로 나아가지 않고 이리저리 선회하는 건 그 때문이리라.

이젠 명백하다.

『바다를 통제하고 조율한다.』

이미 6종뿐 아니라 7종이라고 불릴 영역마저 초월한 ‘산드라미아 레미’였다.

여태 아쿠버스가 평가절하된 이유?

전기분해는커녕 전기조차 잘 통하지 않는 호수(담수)에서 사는 탓이다.

소금기가 싫어서!

하지만 바닷물에 몸을 담글 바에 사막에서 지내겠다고 질색하던 아쿠버스도, 무일이 ‘따라와’라는 한마디에 군말 없이 ‘퐁당’ 했다.

일반적인 아쿠버스는 절대 하지 않을 이상행동!

거기에 전기생성에만 집중하고 있다.

이 또한 이외(以外)였다.

“전투에 집중해!”

“빠끔. 하고 있노라. 그대도 보면 알잖는가. 앙♪”

“귀 깨물지 마!”

수컷이 뭐라고 떠들든 라미아는 기분이 좋았다.

같은 ‘소형’인 세이랑처럼 ‘바다의 가호’ 같은 능력도 없는 아쿠버스는 신체를 잃으면 바로 복구할 방법이 없어서 재생력이 매우 취약하다.

인간처럼 왼쪽 가슴에 있는 심장을 잃으면 그대로 즉사! 심지어 그 심장을 감싸고 있는 피부는 푸딩처럼 부드럽다.

안 죽으려면?

오직 회피!

하지만 라미아는 한무일에게 몸을 맡긴 채 마음 놓고 공격 중이었다.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방어보다는 공격이 재미있는 법이다. 그건 괴수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그녀는 보금자리 금강호를 지키기 위해 늘 방어만 했다. 그런데 이런 기회가 살아생전에 왔으니 무척 들뜰 수밖에 없었다.

스트레스 팡팡!

“빠끔. 나는 신경 쓰지 말고 앞을 보는 게 좋겠노라.”

라미아가 활약하는 동안, 카르발트가 몸만 대주고(?) 있던 건 아니었다.

에쏘드로 수많은 괴수를 베고 찔렀다.

그녀가 처리해준다던 잔챙이에 속하지 않는 고위괴수들을 처리하는 것이다.

굳이 찾아갈 것 없이 이번 피해의 원흉인 그 둘을 향해 먼저 와주니 수고를 많이 덜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끝이 보였다.

자기주위에 관심 없다는 태도로 묵묵히 전진하는 거대한 생명체.

그 덩치를 보고 있노라면 슬슬 항구가 먹히기 시작한 해안도시 상하이가 오들오들 떨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정말로 기분만이 아니다.

【문팽이 / 9종 대형】

저 슈퍼달팽이의 이름은 달(Moon)에서 따왔다.

등껍질이 일반적인 달팽이의 소용돌이 형태가 아닌 완벽한 구체로, 은은한 광채를 품고 있다. 정말로 달 표면처럼 생긴 것도 한몫했다.

단순히 생김새만 보고 붙인 이름일까?

그렇지 않다.

문팽이의 등껍질은 강력한 중력(重力)을 갖고 있다.

둥근 지구에서 사람이 우주로 떨어지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 중력이 당기는 힘이다. 그걸 인위적으로 쓸 수 있는 괴수가 바로 저 슈퍼달팽이.

건물이고 사람이고 할 것 없이 ‘달처럼 생긴 등껍질’에 끌려가고 있었다.

밑으로는 깔아뭉개거나 밀어버리고.

“으아아아!”

“지, 지우 밍 아!”

“칭 빵 쭈 워!”

살려달라고, 도와달라고 외치는 사냥꾼들의 비명이 사방에서 들렸다. 중국어를 일본어보다도 모르는 무일도 알 수 있을 만큼 처절한 절규였다.

중국의 수호자 대부분이 도주 혹은 사망.

해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냥꾼들은 그 실력이 얼마나 뛰어나던 몸이 붕 뜨며 끌려가는 현상에는 속수무책이었다.

문팽이의 등껍질은 작은 지구처럼 바다와 대륙이 있었다.

그 작은 지구의 주민(住民)이 된 인간은 원주민(괴수)에게 살해되거나 바다에 빠져 꼬르륵 익사했다.

그러다가 힘을 푼다.

등껍질을 덮고 있던 모든 게 떨어진다. 문팽이 스스로 너무 무거워졌다고 판단되면 잠시 능력을 멈추는 것 같았다.

하지만 무책임하게 멈추면서 떨어지는 잔해가 해일과 낙석 등을 동반하며 무시무시한 피해를 또 불러왔다.

그야말로 9종의 신위(神威).

인간과 첨단과학만으로 어찌할 수 없는 재앙이었다.

“...나도 끌려가는 건가?”

“빠끔. 미안하노라. 아무래도 나 때문인 것 같다.”

에쏘드의 능력은 용사 한정이다.

아쿠버스가 문팽이의 중력 영향을 받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이건 그녀 때문만이 아니다. 무일이 입고 있는 옷과 장비, 스콜레옹 포르소도 마찬가지다.

한세리가 만들지 않은 모든 것들이 ‘용사의 장비’가 아니다. 그래서 에쏘드의 효과를 전혀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 증거가 왼팔의 손목시계.

섬세한 첨단장비가 잔뜩 들어있는 ‘아메리카 드림워치’는 아쿠버스의 막대한 뇌전을 맞고 완전히 맛이 간 상태였다.

그 탓에 전황(戰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문팽이도 너무 커서 어디서부터 손봐야 좋을지….

의지할 수 있는 건 [예감]과 [예측]뿐.

그 둘이 합쳐지면 소형 괴수가 쓰는 [예지]와 비슷하거나 똑같아진다.

카르발트가 말했다.

“미안해할 것 없어. 이렇게 초청해주는데 가줘야지.”

“빠끔. 그대는 역시 수컷이노라.”

“뉘앙스가 이상하다?”

“빠끔. 내 나름의 푸념이니 괘념치 말지어다.”

문팽이의 중력에 빨려들지 않도록 헤엄치던 라미아의 지느러미가 멈췄다.

자연히 둘은 바닷물과 함께 허공으로 솟구쳤다.

목적지는 짝퉁 달.

끌려가는 와중에도 아쿠버스는 행글라이더처럼 활공하여 슈퍼달팽이의 머리가 있는 앞쪽이랑 최대한 가까운 위치에 착지했다.

그래도 상당히 먼 거리였다.

몸으로 전해지는 중력도 상당하고 머리 위로 무언가가 계속 비처럼 쏟아졌다.

“미지의 행성에 불시착한 기분인걸.”

< [29화-2] 바다의 왕자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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